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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대비
https://youtu.be/zDWhFV3wz40
불나방
62기 조아영
1.
나는 노란색도, 파란색도 보지 못한다. 무채색 삶을 산다. 날 때부터 그랬다. 검거나, 희다. 무채색 사이 유일하게 붉었다. 내 두 눈은 하늘과 별을 모두 죽인다. 회색만 남긴다. 회색은 죽음의 색이다. 절명한 색깔이 비참하게 남긴 사체.
하필 파랗고 노란 세계에 태어났다. 우리는 초록 눈을 가졌다. 사람들은 파란 색을 신과 가장 가까운 색이라고 한다. 간혹 아주 희귀하게 파란 머리와 파란 홍채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완벽이라고 칭한다. 신이 내린 최고의 축복이었다.
1.001
내 부모님은 그런 세계의 색을 흠뻑 머금은 화가다. 까마득한 조상대부터 내려오는 저명한 예술가 혈통. 그들의 결혼과 출산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곧 그들의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감각적이라는, 미신인지 연구 결과인지 모를, 청록색 홍채를 지니고 탄생한다. 고작 눈알 따위에게 평생 푸름과 광명을 빼앗긴 채로. 신의 축복을 한 방울 탐한 대가라기엔 가혹했다. 오늘도 거울 속이 회색이었다. 나는 선명한 청록색이라는 내 눈동자 하나도 보지 못한다.
우습게도 그 아이는 화가가 되었다. 그 예술가 핏줄이라는 게 대단하긴 한지. 혹은 정말로 청록색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2.
가수 D와 첫 비즈니스 미팅 날이다. 피사체가 인간인 첫 일러스트 작품을 그린다. 또한 순수미술이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한 첫 도전이다.
D는 부드러운 감성으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다. 그 흔한 TV하나 없는 나조차도 D의 노래는 들어봤을 정도였다. 신드롬이었다. 놀랍게도 그런 가수가 나에게 먼저 합작을 제안했다. 아침부터 목이 바싹바싹 말랐다.
당신은 이번 일에 딱 하나의 조건을 걸었다. 당신에 관해 일절 조사하지 말 것. 괴팍한 조건이다. 처음부터 내가 대중 매체에 까막눈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ㅡ작품이 마음에 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조금 민망했다ㅡ 당신을 바라볼 가장 순수한 눈을 원했다. 무지하게 당신을 훑어본다. 마치 핥듯이. 호기심, 기대, 욕망, 의심을 붓에 눌러 담는다. 더러울 정도로 직설적으로 파헤친다. 당신은 그런 날 것을 앨범 커버로 하고 싶다고 했다. 이건 자칫 내가 쌓아올린 탑을 한방에 무너뜨릴 위험이다. 매혹적인 위협이다. 최고의 기회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3.
첫 만남은 당신의 개인 작업실이다. 과하게 모던했다. 조용했다. 그러면서도 돈 냄새가 났다. 진하게 났다. 어시도 없이 손에 수첩 하나만 달랑 쥐고 들어가는 길이 어색하다. 놀러 온 어린애라도 된 기분이다. 나는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선다.
“B씨입니까?”
저는 D입니다. 앉으시죠. 그렇게 말했는데 뇌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빨간 색. 나는 그와 눈을 맞춘 채로 서있다. 빨간 색이다. 선명한 빨간 색 눈을 보고 멍하니 서있다. 빨간 동공을 보고 빤히. 실례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불가항력이다. 말초 신경부터 굳어버렸다. “당신은 불의 신인건가요?” 멍청한 소리를 했다. 잿빛 세계에서 당신 눈동자만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동백을 꺾으면, 동맥을 짓이기면 나는 피처럼 불탔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보지 못하거나, 그래서 억울했던 세계가 아무 의미 없어진다. 천해진다. 무엇이든 이 새빨간 색보다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확신했다. 파란 색은 신에 가까운 색이며 신의 축복이다. 하지만 감히 신의 영역에 다가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신은 여기에 있었다. 여기에 있다. 처음부터, 저 눈동자에, 화마에 다 타서 재만 남아 내 세상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3.33
처음 바다를 본 애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저절로 아름답다는 감탄이 튀어나왔다. 노골적으로 관찰당한 당신은 기분 나쁜 얼굴이다가 황당해한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놈으로 보이기 딱 좋았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당신이 원했던 의도 그대로 노골적이다. 당신은 미간을 크게 좁혔다가 다시 소파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횡설수설 했다. 화가가 되면서부터 속여 왔던, 오늘도 속일 생각이었던 삶을 털어 놓는다. 멋없는 고백을.
“저는 사실 빨간 색밖에 보지 못해요. 어, 그러니까, 당신과 작업을 꼭 하고 싶다는 뜻이예요.”
4.
공식적인 반푼이가 되었던 날을 기억한다. 5살이었다. 그 때쯤 부모님은 어그러진 나에게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꽃을 내밀었다. 어떠니? 나는 똑똑하게 대답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노란 빛이 아름다워요. 어머니는 조금 있다 다시 꽃을 보여주었다. 이건 어떠니? “아까랑 같은 꽃이잖아요.” 나는 그 순간 어머니의 눈에 비친 감정을 보았다. 뚜렷한 공포였다. 두 번째 꽃은 아버지 작품에 쓰기 위해 억지로 파란색으로 개량한 튤립이었다. 그걸 조금 나중에 알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선천적으로 노란색과 파란색을 보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앞으로도 보지 못한다고 선고했다. 사형선고였다. 어머니는 찢어질 듯 한 비명을 지른다. 아버지는 그럴 리가 없다며 소리를 쳤다. 내 아이가 병신일 리가 없다고. 내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4.444
당연히 예술가의 계보를 잇고 화가가 되어야 했던 나는 쓸모없어졌다. 설상가상 부모님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새 도화지’를 만들기 위해 매일 노력했음에도. 그래서 부모님은 나를 파란색 튤립으로 만들었다. 억지로 개량하기로 했다. 학교를 관뒀다. 가정교사는 매일 회색 천을 가져왔다. 이게 노랑이란다! 이게! 교육하다가, 애원하다가, 회유하다가, 윽박지른다. 웃긴 일이다. 회유한다고 없는 팔레트가 채워질 리가 없는데.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시간이 적어졌다. 매일 밤 두 분 앞에서 회색 물건들을 늘어놓고 암기한 색을 줄줄 검사받았다. 나는 그 시간만 기다렸다. 열심히 했다. 부모님이 가치 없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거두어주셨다. 가정교사를 붙여 ‘정상’으로 만들어주셨다. 분명 사랑일 것이다. 나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5.
저건 아마 코발트블루고, 옆은 울트라마린이다. 명도가 다르다. 파랑과 노랑만 알아서는 화가가 될 수 없었다. 실핏줄이 터지도록 색상 표를 봤다. 가정교사님은 어느 날 나를 안고 울었다. 미안하다고 울었다. 나는 그렇게 화가가 됐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반푼이다. 흉내를 내지만 보진 못한다. 빠르게 한계를 보았다.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어시부터 구했다. 부모님이 내주시는 돈으로 산 친절한 어시스트. 어시는 내 옆에 앉아서 피사체의 색깔을 읊어준다. 저기 저건 초록색입니다. 그럼 나는 연필로 적는다. 캔버스에 4b연필 자국이 그득했다.
그렇게 첫 작품으로 하늘과 태양과 나무를 그려갔을 때 아버지는 크게 얼굴을 찌푸렸다. 근본 없고 조화롭지 못한 채색이라고 노여워하셨다. 어머니는 그림을 뒤집었다. 이십여 년의 노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나도 함께 쑥 꺼졌다. 어머니는 덧붙였다. 네가 우리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깊은 수심이 보였다. 직접 들렸다. 내가 부모님을 괴롭게 했다. 더 노력했어야 했다. 뒤집힌 그림을 들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잘게 찢었다. 턱 끝까지 울렁거리는 것이 토기인지, 죄책감인지, 슬픔인지 몰랐다. 다시 색상 표를 펼쳤다.
나는 빚이 있다. 더 노력해야한다. 나는 그 이후로 더 이상 고개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늘과 별을 그리지 않는다. 푸름과 노랗게 빛나는 꿈 따위.
6.
“…그렇게 지금까지 안 들키고 일할 수가 있다고?”
“하하, 네…. 돈이면 다 되더라고요.”
부모와 장애와 나의 이질은, 나를 원초적이고 자유분방한 색을 쓰는 저명한 화가로 만들었다. 사실은 내 부모의 돈이 만들었다.
참나. 당신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휘어지는 눈매로 빨간 눈동자가 사라졌다 보였다. 당신은 소파에 편하게 기댔다. 다리를 꼰다. 일련의 동작들이 느릿하고 여유로웠다.
“뭐, 대중이란 건 원래 그래. 짧은 지식으로 아는 척 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거지.” 그리고는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길고 날카로운 이야기를.
6.01
사람들은 ‘다름’을 싫어한다. 이유 없는 공포를 느끼고 배척한다. 다름은 없고 오답을 만든다. 우리에게 보통은 초록이고 특별함은 파랑이다. 자연스럽게 빨간 색은 틀린 게 되었다. 부정과 불행의 상징으로 여겼다. 정상이라면 유전적으로 빨간 홍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티비는 말도 안 되는 연구 결과를 지껄였다. 그런 곳에서 붉은 눈으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죄인이 되었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인이 된다.
6.6.6.6.6.6
공교롭게도 죄인은 너무나 큰 재능을 가졌다. 당신의 음악, 그 음악에 입힌 생각, 목소리, 심지어 외모까지 매력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애초에 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스스로도 잘 알았다. 무서워서 아이 학교를 못 보내겠다는, 신의 저주라도 받으면 책임질 거냐는 학부모들의 원성에 강제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바로 오디션을 봤다.
작은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은 다행히 보는 눈이 뛰어났다. 빠른 속도로 데뷔 준비를 시작했다. 데뷔가 임박했을 때, 모두 당신이 렌즈를 껴야한다고 했다. 숱한 괴롭힘을 당했던 당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장은 반대했다. 가장 먼저 눈부터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자국 남은 뿔테 안경을 닦으며 사장은 말했다.
“대중이란 게 원래 그래. 개돼지지. 너에게 질투를 느끼면서도 욕망할거다. 절대 무시하지 못할거야.”
그리고 놀랍게도 모두 사장의 말대로 되었다.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대중들은 당신을 끊임없이 손가락질했다. 빨간 눈 돌연변이 주제에 자신보다 우월한 가수에게 질투한다. 그런데 욕망한다. 미친 듯이 소비했다. 패배감을 부정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보고, 찾아 듣고 비난하여 우월감을 얻는다. 완벽한 노이즈마케팅이었다.
7.
“토 나오는 역겨움이지.”
긴 이야기가 끝나고 당신은 말했다. 진짜로 웃고 있었다. 이렇게 끔찍한 과거를 서술하면서 숨소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당신은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를 길게 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고급 잔에 담긴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나는 그 덤덤함이 신기했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걸까? 아니면 체념 한걸까?
커피를 마시는 당신의 등 뒤 깔끔한 작업실로 눈길이 간다.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D의 말처럼 날카로운 기시감. 급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전부 회색이다. 이렇게 드넓은 방에 빨간 색이 하나도 없다. 적색 모두 거세된 무채색 작업실. 진짜 웃는 가짜 당신의 공간.
8.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계약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관찰하고 내면을 꿰뚫는다. 판단한다. 당신이 일하는 곳에 자주 갔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눴다. 일터에서 당신은 굉장히 예민했다. 고약하다 말할 정도였다.
데뷔 첫 날,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던 당신에게, 눈이 소름 끼친다고 면전에 대고 말했던 놈은 이름도 모를 말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을 뱉었다. 스튜디오 한가운데였다. 모두 모르는 척 지나갔다. 번쩍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고개 떨군 자신의 빨간 눈이 비쳤다. 그 때 당신은 알았다고 한다. 약하면 죽는다. 밟혀 죽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밟아야 한다. 그까짓 눈 색이 뭐라고, 당신은 살아남는 법부터 배웠다.
8.01
성공하고 나서 그 놈 신발에 침 뱉고 잘라버렸어. 결말까지 당신답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딜 가나 논란을 몰고 다니는 탕아라고 한다. 퇴근길이 번화가와 겹치기만 해도 양아치라는 기사가 났다. 대중들은 노력도 없이 운이 좋아서 성공한 놈이라 수군거린다.
녹음 중 디테일을 깐깐하게 디렉팅하는 당신의 등이 보인다. 들숨 날숨마저 컨트롤 하는 뭉친 어깨가 보인다. 어제도 세 시간 남짓 잤겠지. 화가 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낭설이다.
내가 발끈하려던 차에 당신의 동료가 먼저 불같이 화냈다. 내가 이렇게 삼일 째 갈리고 있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발을 구르는데 애정의 소리가 난다. 숨길 수 없는 존경과 애정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언젠가 우리가 조금 더 친해지면, 당신을 아끼는 사람이 꽤 많다고 말해줄 생각이다.
https://youtu.be/4IJI6soiQhI
9.
“아, 담배는 좀.”
“연기 싫어해?”
“아뇨, 냄새 배면 부모님께서 싫어하셔서요.”
“당신 뭐 착한 애 아니면 뒤지는 병있어?”
“그런 비속어도 쓰면 안 된다 하셨는데요….”
아오, 비속어랜다 시발.. 당신은 어중간한 비속어 대신 시원하게 욕을 했다.
당신, 티비 얘기도 어이가 없어. 부모님이 자식이 티비 좀 본다고 수준 떨어진다고 하는 게 말이 돼? 넌 헛소리를 들으면 가운데 손가락부터 올리는 연습 좀 해야 돼. 투덜거리면서도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끄는 당신이다. 담뱃갑과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내게 밀어놓는다. 가지고 있으면 습관처럼 펴. 가지고 있어. 나는 사실 당신이 커피를 타러 간 사이에 그 담뱃갑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았다. 매사 깔끔한 당신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심장 근처에도 대어보았다. 비밀이다. 매캐하다. 알싸하다.
10.
오늘도 당신은 무채색 인간이다.
검은 머리. 검은 머리카락.
새까만 수트를 입었다. 아마도 초록색이나 파란색일 회색 넥타이, 구두, 시계를 걸쳤다. 강박적으로 빨간 색을 제거했다. 가장 아름다운 색을 가졌으면서. 그 색을 인생에서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당신을 이제 나는 안다. 세상은 당신에게 붉은 색을 흠뻑 주었고, 빼앗았다. 고작 이런 식사시간에도 빨간 색 음식을 먹지 못하게 완전히 빼앗았다.
당신은 의외로 어린 아이를 좋아한다. 통통 튀는 생동감을 사랑한다. 아장거리는 아이를 보며 당신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 지으면서도 눈을 가린다. 고개 돌린다. 끔찍한 광경에 아이가 울기라도 할까봐. 이렇게 뚜렷한 사랑의 색이 빨간 색 말고 어디 있단 말인가.
10.04
나는 억울했다. 죄인은 그들이다. 회색 음식을 먹는 당신의 손을 잡아끌었다. 디저트 박스에 딸려온 빨간 리본을 그의 손가락에 묶었다. 잘 어울렸다. 나는 당신이 빼앗긴 사랑, 열정, 당신 자신을 돌려주고 싶었다. 빨간 눈이 잘빠진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애써 버린, 유일한 붉은 색을 본다. 당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조금….
11.
그 계약 캔슬하렴.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린다. 어설프게 다정함을 흉내 냈다. “예술가라면 가수 나부랭이 그림이나 그려주는 격 떨어지는 행동은 하지 말거라.”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놀랍게도 몇 년 만에 예술가로 불렸다. 반푼이도 붙지 않은 채.
뭐가
그렇게
마음이 급하신 가요 아버지.
아버지는 내 행보가 이미 불명예스러웠지만 한번 쯤은 일탈로 봐주려 했다 한다.
“그 딴따라가 빨간 눈 돌연변이라는 걸 몰랐을 때 말이다!”
당신을 언급하자마자 차분하게 훈계하던 목소리가 격앙된다. 얇은 가면이 부셔진다. 분노를 쏟아내신다. 제 정신이냐는 말은 아무렇지 않다. 내가 부끄럽다는 말은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자식에게 쏟아지는 원초적 비난에 고개를 끄덕이는 어머니도. 불 꺼진 거실, 부모님께 비난당하고 부모님께 외면당했다는 사실도. 초록 물감 묻은 스니커즈 밑창으로 전해지는 찬기도.
단지 당신을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게 싫었다. 당신을 끌어내리는 경박함이 싫다. 몇 번이나 당신 얘기가 나왔지만 정작 당신의 이름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당신이, 오늘도 앨범커버에 대해 진지한 의견을 내놓던 최고의 가수가, 불이든 피든 뜨거운 것이 너무 잘 어울려서, 신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당신이. 돌연변이로 끌어 내려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내가 슬프다. 결국 나에게서 모자람을 태워 없애는 것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니라 당신이었다. 그게 애잔하다. 우스운 미학이었다.
11.2
일방적인 비난뿐인 대화가 마무리된다. 어머니는 선심 쓰 듯 계약 파기 위약금은 내주겠다 하신다. 몇 번이나 돌연변이, 병신같은 단어가 쏟아졌다. 천박했다. 처음으로 진창에서 벗어나 보는 부모님이다. D, 당신은 이 세계를 싫어한다. 이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경솔하게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음악에 고요한 분노를 싣는다. 고작 눈동자와 핏줄로 우월감을 느끼는 이 사람들과 당신 중에서 진짜 예술가가 대체 누구인가?
“아버지, 그 사람 이름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D예요. 아마 아시겠지만.”
몸이 덜덜 떨렸다. 몇 십년 간의 학습으로 여전히 고개를 들기 어렵다. 당장이라도 다시 잘하겠다고 외치고 싶다. 그런데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울분이. 그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쉬웠다. 내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눈 한가득 차오른 눈물은 용케도 떨어지지 않았고 나는 잘 서있다. 화가로써.
11.3
수년간 상상할 수 없었던 내 말대꾸에 부모님이 당황한다. 그러다 씨근거리신다. 무언가가 날아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두 분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어쨌든 내일 당장 캔슬 해라. 이미 그 쪽 에이전시에 연락해두었다.” 그리고 불이 꺼진 현관에 혼자 남겨진다. 그제 서야 신발도 벗지 못했다는 걸 되새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를 처음으로 맞이하러 나온 부모님. 버선발로 마중 나와 하신 말씀이라기엔 많이 냉정하네. 희극의 대본 같았다.
12.
나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거기에 있을 자신이 없다. 당신에게 전화가 온다. 지금쯤이면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차 통보했다는 소식이 당신에게 전달됐을 타이밍이다. 나는 당신을 배신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당신을 배신한 게 되어 있다. 억울하다. 죄 지은 적 없이 죄인이 된 당신은 훨씬 더 억울했을까? 나는 전화를 받았다. 무작정 내질렀다.
“이런 씨발!”
-뭐야. 미쳤어? 이제 막 나가기로 한거야?
“캔슬 안해요! 저 꼭 끝까지 할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오냐. 그래.
“씨발… 진짜… ”
-그래 알아. 초록색 파란색 물감은 없어도 돼. 버려.
대화는 간결했다. 당신은 태연했다. 당신은 다 예상했어? 우리는 어떤 동지애를 느꼈다. 동족애를 느낀다. 어쨌든 나는 당신을 그린다. 그 사실 하나만 명확했다. 시큰거리는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무턱대고 빨간 색 물감을 종류별로 더 주문했다.
여차하면 캔버스를 모두 당신의 눈동자로 채울 수 있도록.
13.
나는 어시스트를 돌려보냈다. 이례적인 일에 어시스트가 허둥지둥했다. 색 브리핑은, 부모님은, 이러면 가수분께서는, 걱정도 참 많았다. 그러다 내 얼굴 보더니 안심한 표정을 했다. “앞으로도 내가 올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 나를 도닥이는 손길이 애틋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담배를 사러 갔다. 이유 없었다. 대책도 없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언젠가 보았던 당신의 담배를 샀다. 이름을 몰라서 직원과 머리를 맞대고 스무고개 했는데도 즐거웠다. 역시나 당신의 향이 나는 착각이 든다.
14.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온 당신은 개구지게 웃었다. 모자를 벗는다.
빨 간 색.
또 다시 빨간 색이다.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인 당신이 여기에 있다. 콸콸 흐르는 피에 머리를 흠뻑 감은 것처럼. 눈이 부셨다. 당신의 머리칼과 눈동자만 빼고 모두 새하얗다. 확실히 알 수 있다. 명도를 높인 다른 색이 아니라, 불순물이 없는, 완전한 흰색. 진짜 불의 신이라도 되려고 그러나 봐. 눈이 부시고 서글퍼서 목소리가 떨렸다. 막상 당신도 어색한지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긴다. 눈이 마주친다.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나는 담배를 꺼냈다. 불붙인다. 참을 수 없었다. 깊게 빨았다.
15.
나는 당신에게 조잡한 피어싱과 바늘 하나를 건넸다. 길거리 가판대에서 17900원에 산 회색 피어싱. 당신이 뚫어줘요. 그는 망설임 없이 내 귓불을 꿰뚫는다. 뜨거운 손가락. 뜨거운 귓불. 머리칼에 사각사각 스치는 단정한 손톱.
열중한 미간과 간혹 스치는 빨간 머리카락. 귀에서 피가 흐른다. 소독은 필요없다. 나는 눈 감고 흐르는 걸 느꼈다. 그 빨강을 깊게 느꼈다.
16.
“어때.”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당신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손끝에서 불이 빨갛게 점멸한다. 사라진다. 담뱃불이 타 들어간다. 마치 정말로 당신에게 먹힌 것처럼. 좁은 작업실이 연기로 자욱했다. 온 몸에 담배 냄새 덕지덕지 붙는다. 작열하는 세계의 냄새가. 나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당신은 작업실 구석에 치워둔 초록 물감을 가져왔다. 쓰레기통에 주욱 짰다. 재미없는 회색이 줄줄 흐른다. 당신의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홀쭉해지는 몸통에 울트라마린, 코발트블루라고 적혀있다. 지루한 무채색들을 쓰레기로 만든다. 전지전능한 붉은 눈과 붉은 머리 당신이. 담배를 하나 더 꺼냈다. 당신에게도 건넨다. 라이터 하나로 함께 불을 붙였다. 생각보다 존나 별 거 아니었다. 피와 불로 관자놀이 근처가 뜨겁다.
2020년도에 썼던 글을 수정하였습니다.
첫댓글 오늘도 좋은 글에 좋은 음악이네요
노래는 꼭 추천하고 싶어요☺
@62기 조아영 저도 좋아하는 음반입미닷..
슬슬 얼추 문체와 구성이 읽혀 독자로선 읽기도 구조 분석도 파악도 전보단 용이해서 좋네요. 전작 햄릿과 비스무리하게 장르의 요소가 얼핏 보이면서도 깊고 진중합니다. 알맹이를 찾은 것 같으면서도 때로 돌아 들어가며 읽을 수도 있고 전개가 빠르지만 전개에만 치중해 읽을 수 없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