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판에 남전의 파업이 더 고약한 악화 상태를 가져와야 했으나 그것이 준 파급력은 생각만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전력 문제는 이미 워낙 바닥상태로 극악 수준이었으므로 파업에 의해 더 나빠질 만한 수준이 못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나 파업이라는 사태의 충격은 같은 노동계 곧 노조를 막 조직한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먹을 쥐고 우리도 해내자라는 각오를 하게 해 준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노동 운동보다도 오히려 속절없는 휴식이 주어져서 속만 편했다.
아무 데나 엎어져서 잠들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파업보다는 태업 수준이라고 할 것이었다.
그러다가 임원실에서 계속 그날 다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확실한 정보를 받으면 직원들을 조기 퇴근시켰다.
일제 강점기 군국주의 일본제국 당국과 총독부의 반도에 대한 기본 산업 정책은 남농북공(南農北工)이었다.
즉, 북부 지역은 광공업 기지로 편성되었고, 남쪽은 농업 기지가 되었다.
그것은 반도의 지형과 지하자원의 편중이 가져다 준 자연적인 편성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이는 일본제국이 대륙을 지향한 침략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전략적 산업 편성이기도 했다.
즉, 농산물은 일본으로 실어가야 하므로 남쪽에 있는 것이 좋은 것이고, 공장은 전쟁 무기 산업화를 위해서 북쪽에 있어야 했다. 그런 일제의 입맛에 잘 맞아 떨어져준 것이 한반도의 자연 자원의 편성 상태였다.
그래서 발전 시설 뿐 아니라 흥남질소비료 공장을 비롯하여 중화학 공업은 대부분 북부 지역에 편중되었다. 흥남질소는 비료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화약을 생산했기 때문에 전쟁 산업 기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철도도 일본에서 만주 지역으로 갈 수 있는 단거리가 반도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를 수 있도록 경부선과 경의선을 우선적으로 부설했고 모든 교통망은 이를 기축으로 삼았다.
이남의 주요 공업은 섬유 계통을 꼽을 수 있었는데 이는 목면 산업이 몰려있는 영남 지역의 중심 도시인 대구를 중심으로 집결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남에서, 철도와 전력 통신 관계 노동자를 제외하면 공장 노동자가 가장 많은 곳은 경인지역과 함께 대구 지역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남전의 파업은 단전에 의한 공장 기계가 돌아가지 않은 그 문제보다 대구 일원의 대형 공장마다 노동자들이 조합의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속속 노조 조직 선언이 잇따르게 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시위와 파업으로 이어가게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