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식물. 함석헌
기독교는 보수적인가?
기독교는 보수적인가? 이 제목이 벌써 독자의 머리속에 흥미의 물결을 일으켰을 것이다. 더구나 새 교육을 받는 청년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는 글로 쓰기 전에 이미 맘 안에는 문제가 내걸려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럴 만한 분위기 중에 살고 있다. 역사는 그의 종교적 간조기를 내리닫고 있다. 러시아는 국가적으로 종교 박멸을 힘쓰고 러시아가 아닌 조선에서도 중등학생까지가 종교에 관한 것이라면 묻지도 않고 일소에 부(付)하여버리는 시대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정상상태라고 하는 것도 아니요 이리하여서 가(可)하다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이것이 일종 변태적 이상시대요, 통탄불기(痛嘆不己)할 것임을 말한다. 사람들이 생명의 문제에 관하여 이렇듯 냉담하였던 때가 없었고 그들의 가슴에서 경건의 염이 지금같이 쇠한 때가 없었다. 인생이 그 자신에 의하여 신이 그 자신의 백성에 의하여 일찍이 이렇게 학대받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통탄이 아무리 통탄이라도 사실은 사실로 지금이 “옛 신앙이 동요하는 때”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보수적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는 만치 그만치 “그렇다”하는 대답을 듣고 쾌(快)하여 하려는 경향을 가지었고 또 한걸음을 더 나가서 그 대답을 요구하려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일반청년의 심적 상태다.
이러한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는 과연 시대에 떨어진 보수적 사상인가 하는 생각을 진실하게 거듭 또 거듭하게 한다. 기독교는 정말 과거의 유물인가. 그를 믿는다는 사람은 그렇게 다 꿈을 꾸는 것이나 아닌가. 가식자가 아닌가. 오랜 습관으로서 생긴 종교적 심리의 도취상태에 있는 자나 아닌가. 경건한 신자란 인자 온후한 그러나 시대에는 떨어진 불쌍한 사람이나 아닌가. 기독교란 결국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것같이 과거 시대에 어떤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생기었던 배척할 만한 독물이나 아닌가. 이것을 믿어서 시대착오의 우사(愚事)를 지을 뿐 아니라 인류문화의 방해자나 되는 것이 아닌가. 믿는 자가 옳은가 보수적이라고 비웃는 자가 똑똑한가. 현대 사람의 가슴에 의혹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결과, 또는 기독교 신자의 생활, 기독교 교육자의 교육, 기독교 사업가의 사업, 기독교 전도자의 설교, 기독교 단체의 활동, 기독교 교회의 신앙, 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한 결과, 또는 이 지점인 조선이나 일본이나 뿐 아니라 그 본점인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기독교국의 실제상황, 기독교국, 기독교 가정, 기독교 학교, 사회에서 자라난 그의 사상가, 경세가들의 하는 것, 런던에서 하는 것, 제네바에서 하는 것, 워싱턴에서 하는 것을 들은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문사에 대하여 “그렇다”하는 대답을 하게 한다. 이것이 섭섭한 일이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나 기타 어디서나 현금에 기독교로써 국민정신을 지도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 설교가 이미 정직한 가슴에 감격을 주지 못하고 그 청년회가 이미 젊은 혼의 희생적 활동을 자아내지 못하고 그 가정이 이미 아름다운 소년을 길러내지 못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현상 유지에 급급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시대에 떨어진 유물이 아닌가 하고 질문을 당할 때에 고백은 않는다 하더라도 아마 긴요처를 다친 우는 듯한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할 문제가 깉어썼다. 그렇듯 현재의 기독교계를 보아서 그것이 이미 시대지(時代遲)의 물건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기독교 모든 기관, 국가, 혹은 대다수의 개인이 대표하는 것이 과연 기독교인가 하는 것이다. 즉 소위 기독교가 과연 기독의 가르침 그의 진리 그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현재의 기독교 이대로 곧 기독의 가르침이라면 족히 의논할 것도 없으나 반대로 현재의 기독교에 기독의 생명이 없다 하면 양자는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기독교를 일종 문화형태로 논하는 자는 희거나 검거나 현재의 형태로의 기독교로써 기독교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일종 관습으로 본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아니다. 형태는 어디까지 형태요 진리는 어디까지 진리다. 진리는 살아서 생명을 다스리는 것이요 형태는 진리와 같이 혹 자라는 수도 있고 진리에서 떨어져 혹 사해(死骸)로 깉는 수도 있다. 그리고 기독의 가르친 진리가, 오늘날 세상에 나타나 있는 형태와 천지와 같은 차가 있는 것은 이미 우리가 말하여온 바다. 고로 보수적인가 하는 이 질문이 진리인 기독교에 대하여 발한 것이라면 우리의 대답은 주저없이 강한 부(否)로 나간다.
교회의 해체기
그렇게 말하면 두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현재의 기독교회는 어찌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하나요 어찌하여 보수적이 아닌가 하는 것이 또 하나다. 제2문에 대한 대답은 후에 말하는 바 있을 터이요 위선 교회는 어찌될 것인가 하는 데 대하여 말하려 한다.
교회는 해체될 것이라고 하면 교회는 논자를 향하여 노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한 사람의 중학생이나 혹은 그의 스승 노릇을 하는 23권 내지 수십 권 (또 수백 권, 수천 권이라면 어쩌나. 그것도 과거 수천 년간의 진실 경건한 기천만의 영혼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빈약한 것이 아닌가)의 유물론 혹은 사회주의 연구를 읽은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무신론 혹 기독말살론을 하여도 일언의 대변을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하였다. 또 한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그것이 교회를 구할 것이 아님으로써다.
교회는 조수처럼 도도하게 흘러오는 패퇴의 세력을 방지하려고 있는 힘을 다 써볼 것이다. 고성을 지키어 현상유지를 노력할 것이다. 교인을 모으기에 힘쓰고 부흥회를 하기에 힘쓸 것이다. 하령회(夏令會)를 하고 유년 주일학교를 힘쓸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이 부흥되지는 못할 것이다. 교회의 운영은 결정된 것이다. 교회가 현재의 상태에서 완전히 죽기 전에는 결코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리 말함은 신의 자녀의 순결한 회합체인 기독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를 가리켜 말함은 아니다. 논자도 그 영원한 교회의 존재를 부정함이 아니다. 지금 말함은 현재의 인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가리킴이다. 그 교회는 일찍이 로마 교회에서 생명이 떠났던 것같이 생명이 떠나갔다. 그 교회가 현상을 유지하려 함은 메테르니히가 팽창하는 자유주의에 항거하여 전제주의를 유지하려고 힘썼던 것같이 그같이 무의미한 도로(徒勞)다.
교회는 부흥도 아니요 개량도 아니요 고쳐 나지 않고는 아니 된다. 스스로 땅속에 들어가 썩어버리고 살자는 새 움이어야 한다. 과거에 로마 교회는 죽고 신앙은 살아나왔던 것같이 현재의 교회도 역시 죽고 신앙이 살아나와야 진리는 자랄 것이다. 시대의 변천으로 인하여 유치(遺置)되고만 바, 일종의 문화형태로서의 현대교회는 현대에 있어서 소금의 직책을 하기는 도저히 불능하게 되었다. 고로 분개하기보다도 통탄하기보다도 만회책을 연구하기보다도 벗은 몸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벗어야 한다. 조직의 치리(治利)의 의식의 옷을 벗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성장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회 자신이 아니 하더라도 신은 그 몸소의 경영을 그대로 행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는 현대의 모든 사상과 학문은 애굽 왕의 군사가 되어가지고 성도의 뒤에서 이를 강박하고 있다. 그리하여 낡은 교회가 해체되고 생존한 신의 진리가 이를 삼키고 뛰어넘어 일층 더 높고 일층 더 깊고 넓고 일층 더 오묘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타낼 줄을 우리는 믿는다.
영원히 생존하는 자
교회는 지나갈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것이 다시 더 수명을 연장한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요 그것이 지금 없어진다고 하여서 인심에나 문명에 큰 위기가 새로이 올 것이 아니다. 현세에 무용의 장물(長物)이 있다고 하면 교회를 놓고 밖에 없다. 적어도 조선 안에 있어서 사실이다(이리 생각하고 그 안에 있는 기다(幾多)의 선남선녀를 위하여 서러워함을 마지 못한다).
그러나 거듭하여 말하거니와 교회가 그렇다함은 결코 기독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기독교의 진리는 가장 진보적이다 함이 가하다. 그리 말하면 기독교가 시대의 유행사상에 가장 잘 영합한다함은 물론 아니다. 그런 의미의 진보라면 우리는 기독교를 가져 가장 보수적이라고 말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근시(近時)교회는 이런 의미의 진보적이 되지 못함이 그 부진의 원인인 줄로 생각하고 시대의 유행사상과 후퇴물을 받기에 힘쓴다. 이것이 큰 길거리에 앉은 여자의 모양과 다름이 무엇일꼬. 저에게 모욕과 모멸이 더 돌아갈 뿐이다.)
우리가 진보적이라 함은 그 진리가 영원불변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변동 없는 생명력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론 성장 새론 발달을 할 수 있다. 밤나무의 생장력은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연년(年年)이 새 가지, 새 잎, 새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누가 밤나무 잎이나 가지나 껍질을 가지고 밤나무의 생명보다 새롭다 할 자가 있을까. 생명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오랜 생명의 진리는 가장 새로운 발달의 진리다. 모든 국가가 지나가고 모든 시대의 산물이 지나가도 최후에 깉고 남는 자 그것이 곧 가장 진보적인 자다. 그것만이 생명의 밑에 있어서 온갖 발달의 원동력이 되고 온갖 시대의 통제자ㆍ지도자가 되고 온갖 생명의 귀의처가 됨으로써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기독교의 진리에서 본다는 말이다.
이러한 일은 역사의 증명에 의하여 명료하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계시가 되었고 갈릴리 바다의 미천한 어부군의 입으로 증거되고 전파된 이 진리가 마침내는 유대교의 구각에서 벗어나고 이방민족과 그 종교와 문화를 삼켜버리고 희랍의 철학을 삼키고 로마 제국을 짚고 넘어서고 스콜라 철학을 비복(婢僕)으로 썼으며, 중세의 암흑시대도 15, 6세기의 자유운동도 그 이후의 계몽사상, 새로운 발견, 발명, 그리고 19세기의 과학의 문명도 혹은 용허(容許)하고 혹은 견제하고 삼키우는 듯하면서 삼켜버리고 타협하는 듯하면서 초극하여버리고 놓을 것은 놓고 다릴 것은 다리어서 오늘까지 왔다. 그 산 활동이 약여(躍如)하게 안전(眼前)에 있다. 고로 우리는 이 진리가 과거에 살았던 것같이 또 미래에도 살아 영원히 생존하는 자가 될 줄을 믿는다.
큰 식물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문화를 소화하고 초극하여왔다. 또 미래에 있어서도 이는 왕자가 아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리 생각할 때에 우리는 오늘날 성도들의 앞에 큰 식물의 보자(褓子)가 펼쳐 놓였음을 깨닫는다. 이는 기독교가 일찍이 삼키었던 어떤 식물보다도 훨씬 크고 강한 것이다. 저는 이를 삼키기에 큰 곤란과 노력을 요할 것이다. 그러나 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삼키는 날은 지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광의 발달을 볼 것이다.
일찍이 베드로 앞에 놓였을 때에 명령하였던 것같이 오늘날도 이 모든 식물을 죽여 먹고 소화하기를 명한다. 내어버릴 것도 대적하여 방축할 것도 아니다. 날마다 나가는 과학의 발달도, 만연해가는 유물사상도 공산사상도 모두 다 삼키어야 할 식물이다. 진화론을 선봉으로 하였던 19세기의 과학 만능의 시대를 삼켜먹고 살아나왔던 것같이 사적 유물론을 그 최후의 무기로 삼는 현대의 사상적 거수(巨獸)도 삼켜먹고 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현금의 세계상은 점점 더 우리가 비상시에 처하였음을 고하여준다. 기독교가 만일에 과거 시대의 감정적 침전물에 불과한 것만이 아니라면 혹은 인위적인 방편물에 불과한 것만이 아니라면 이때에 그 자신이 이 시대를 초극하고 살아나감에 의하여 생명의 진리인 것을 실증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상 종래의 역사도 모두 무에 귀함을 불면(不免)한다.
그러면 현재의 기독교에 그만한 생명력 그만한 소화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여기 확언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가 (현재의 모양으로) 이를 감당치 못할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면 누가 이 큰 책임을 하는가. 누가 이 큰일에 기계로 싸우는가. 우리는 말한다. 현대에 있어서도 2천 년 전에와 같이 갈릴리의 어부들이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부를 가졌던 것도 아니요 지식을 가졌던 것도 아니요 권세를 가졌던 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되, 오직 정직한 심정과 예수를 그리스도요 생존한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만은 가지었던 저희 갈릴리의 어부들이 마침내는 저들을 위험시하고 핍박하던 자를 이기었고 저들이 먹기를 꺼리었던 보자의 온갖 식물을 다 먹고 자라날 수가 있었다.
역사는 변천하였으나 이 갈릴리 어부의 종자는 오늘도 있다. 조선에도 있다. 의식도 없고 방식도 없고 재능도 없고 사업도 없으나 자유로 신을 믿고 자유로 생명 속에 살고 어부와 같이 소박한 자유 독립의 신앙인이 있다. 신은 저들을 세워 진리의 용사로 삼기 위하여 큰 식물을 저희 앞에 주었다.
성서조선 1930. 3월, 15호
저작집30; 18-129
전집20; 19-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