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민학교가 개교 10주년을 맞았다. 2013년 가을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고 퇴직수당 일부로 문을 열었다. 이곳은 배우고 싶었으나 기회를 놓친 분들의 학업을 돕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곳이다. 전·현직 교사, 시민학교 졸업생, 시민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재능기부와 후원으로 운영되는 시민의 학교이다.
어느 날인가, 남편은 명예퇴직을 하고 시민을 위해 봉사하며 지내고 싶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정년의 나이까지 근무하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있던 터였다. 그 시점은 우리 삼 남매가 재수하지 않고 대학에 간다는 전제하에 막내가 졸업하는 때로 잠정적으로 정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늘 뜻대로만 이루어지던가. 아들이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오게 되어 1년이 틀어지고, 막내가 1년간 휴학하겠다고 하니 1년이 더해졌다. 더구나 전문대를 졸업한 큰딸이 영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아이들의 졸업이 기약이 없자 남편은 본인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퇴직을 앞당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처음 계획보다 오히려 1년이 앞당겨졌다. 퇴직하고 두 달간 발품을 팔아 수원시민학교라는 비영리민간단체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나도 주말이면 학교를 꾸미는 데 작은 힘을 보탰다. 책상과 의자는 여러 가게를 다니며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지만 철이 지난 물건이라서 값이 싼 것으로 사들였다. 사실상 새 물건을 준비하여 새롭게 공부할 학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하나하나 손길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혼집 꾸미듯이 사무실과 교실을 꾸미는 즐거움이 컸다.
공부할 학생을 모집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님들을 모시는 데 집중했다. 교직 생활을 하며 쌓은 인연으로 많은 분이 재능기부에 앞장을 섰다. 낮에는 현직으로 근무하며 저녁에 시민학교에서 봉사한 고마운 분들이다. 과목별로 선생님은 확보가 되었는데 학생 모집이 문제였다. 전단을 만들어 남편과 함께 버스 정거장에 붙이러 다녔다. 지인을 통해 시내버스에 공익광고로 학생 모집 광고를 내고 교차로에도 광고를 냈다. 입소문과 광고로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 학교를 시작할 때는 여러 이유로 학교를 떠난 청소년들이 학력을 인정받아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나름의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학생 모집을 하고 보니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어른 학생들이 더 많았다. 고등반을 운영하다가 초등반과 중등반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1년에 두 번 있는 검정고시를 통해 227명의 합격생이 나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분이 개별교육을 받고 합격한 후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친 분도 있다. 여러 번 실패하여 중도에 포기하겠다는 분을 설득하여 합격했을 때 기뻐하던 남편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몇몇 분은 대학교를 졸업하여 전문직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시민 교사로 후배들을 가르치며 봉사하기도 한다.
합격자 발표 날에는 졸업식을 하여 졸업장을 수여한다. 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졸업장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모교가 있다는 자부심을 주기 위한 배려이다. 학창 시절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을 위해 소풍을 가기도 한다. 각각의 절절한 사연을 가슴에 안고 늦게나마 배움의 한을 풀고 새롭게 살아가는 시민학교 동문, 그들의 꿈을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시민학교는 무료로 제공되지만, 사회에 나가 나눔을 실천하기를 강조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잘 보이는 곳에 <작은 나눔>이라고 쓰인 목각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무료로 배우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취지가 담겼다.
아들도 시민학교에서 입대 전에 수학을 가르치는 재능기부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응원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으리. 남편은 수원시민학교의 문을 열고 8년간 열정을 갖고 참여하다가 위암으로 먼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난 시민학교는 남아있는 분들이 꿈꾸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남편의 퇴직을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누구의 뜻이었는지. 경제적으로 집안 살림이 충족되지 못했을지라도 보람 있는 일을 하다 간 그의 소중한 뜻을 존중해 주고 싶다. 덕분에 삼 남매가 부모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성장하여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어 지내고 있다. 재능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생활한 아버지의 삶을 순전하게 받아들여 고맙게 생각한다.
10주년 행사를 준비하며 수원시민학교에서 감사패를 전달해 왔다. 그리고 <‘작은 나눔’꿈꾸는 사람들의 행복한 이야기> 책자를 제작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남편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찍혀있는 소중한 자료이자 시민학교의 교지이다. 그동안 억눌렀던 그리움이 봇물 터지듯 터져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되어 흘렀다. 기억해 주고 사랑해 주신 선생님들과 졸업생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무엇이 살아온 날에 그리고 살아갈 날에 부끄럼이 없는 걸까. 남편이 떠나고 한 번도 시민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이기에 차마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나는 수원시민학교가 오래 지속되길 희망한다. 배움은 끝이 없는 평생교육이다. 공부하고 싶었으나 기회를 놓친 우리 시대의 많은 분이 있다. 얼마 전 블로그에서 77세 아버지의 수원시민학교 졸업을 축하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자녀의 글을 읽었다. 대학 진학을 하고 싶다는 그 어른의 꿈, 많은 사람이 꿈을 꾸도록 애쓰고 계신 우리 선생님들을 칭찬하고 싶다. 매달 후원해 주는 고마운 후원자님들, 도서실에 책장 열 개를 흔쾌히 기증해 주신 분, 많은 책을 시민학교 도서실에 기증하도록 애써 주신 선생님,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보증금 없이 대여해 주어 넓게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신 분. 나눔을 실천한 많은 분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이분들이야말로 칭찬받아야 할 이 시대의 숨은 공로자가 아닐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은 것을 크게 부풀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원시민학교를 위해 애쓰는 분들의 따스한 손길에 큰 박수를 보내며 고개 숙여 감사를 보낸다.
2023년 11월 초순에
첫댓글 가슴에 와 닿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