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바라문이여, 그때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름 중의 14일과 15일과 8일 밤은 상서로운 날로 알려져 있다.
그런 날 밤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동산의 탑전이나
숲의 탑전이나 밀림의 탑전 같은 그런 곳에서 내가 머물면 어떨까?'라고
그러면 아마도 두려움과 공포를 볼 수 있으리라.'
바라문이여, 그 후 상서로운 날로 알려져 있는,
보름 중의 14일과 15일과 8일의 그런 날 밤에
나는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동산의 탑전이나
숲의 탑전이나 밀림의 탑전 같은 그런 곳에서 머물렀습니다.
바라문이여, 내가 머무는 동안 짐승이 오거나
공작새가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바람이 낙엽과 쓰레기를 흩날렸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때 내게 '지금 다가오는 이것이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가?'(*1)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때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내가 꼭 두려움을 기대하면서 머물러야 하는가?
내가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2)
어떤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오든, 그 자세를 유지한 채(*3)
그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치리라.'
바라문이여, 그때 내가 포행을 하고 있을 때 그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서지도, 앉지도, 눕지도 않고 오직 포행을 하면서 그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쳤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때 내가 서 있을 때 그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포행도, 앉지도, 눕지도 않고 오직 서서 그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쳤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때 내가 앉아 있을 때 그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눕지도, 서지도, 포행도 하지 않고 오직 앉아서 그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쳤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때 내가 누워있을 때 그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앉지도 서지도 포행도 않고 오직 누워서 그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쳤습니다.”
(*1) ‘지금 다가오는 이것이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가?’로 옮긴 원문은
etaṃ nūna taṃ bhayabbheravaṃ āgacchati(참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온다.)인데,
주석서에서 ‘지금 다가오는 이것이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가?’라고 설명하고 있어서(MA.ⅰ.120) 이렇게 옮겼다.
계속해서 주석서는 “여기서부터는 두려움과 공포가 대상이 된다고 알아야한다.”(MA.ⅰ.120)고 덧붙이고 있다.
(*2) ‘내가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로 옮긴 원문은
yathābhūtassa yathābhūtassa(그렇고 그런)인데, 주석서에서
“네 가지 자세 가운데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MA.ⅰ.120)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풀어서 옮겼다.
(*3) ‘그 자세를 유지한 채’로 옮긴 원문은 tathābhūtaṃ tathābhūto(그렇고 그런)인데,
주석서에서는 “[다른 자세로 바꾸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가 올 때의 바로 그 자세에서’
그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친다는 말이다.”(MA.ⅰ.120)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풀어서 옮겼다.
21. "바라문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밤인데도 '이것은 낮이다.'라고 인식하고,
낮인데도 '이것은 밤이다.'라고 인식합니다.(*4)
바라문이여, 나는 이를 두고 그들 사문·바라문들은
어리석음 속에서 산다고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나 나는 밤이면 '이것은 밤이다.'라고 인식하고
낮이면 '이것은 낮이다.'라고 인식합니다.
바라문이여, 누군가가 말하면서
'어리석음의 본성을 초월한 분이 세상에 출현하셨으니,
그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5)을 위한 것이다.'라고
어떤 사람에 대해 바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두고 그렇게 말할 때 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왜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하는 것일까?
① 출정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② 새소리(sakuṇa-ruta) 때문이다.
① 출정에 능숙하지 못함이란, 여기 어떤 자는 흰색의 까시나를 얻어서
낮에 준비단계의 수행을 하여 낮에 증득에 들었다가 낮에 출정할 것이라고 마음에 잡도리 한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한정하는 데는 능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는 낮을 넘어서 밤에 출정한다.
그는 흰색 까시나가 가득하여 밤에 출정하였는데도 낮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것이다.
반대로 청색 까시나를 가져 밤에 본삼매에 들었다가 시간에 능숙하지 못해서 낮에 출정한 사람은
그 청색 까시나가 가득하여 낮에 출정하였는데도 밤이라고 인식한다.
이처럼 출정에 능숙함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② 새소리 때문이라는 것은 거처의 안에 앉아있는데
낮에 우는 새들인 까마귀 등이 달빛 등을 보고
낮이라 생각하고 밤에 우는 것을 듣고 낮이라고 잘못 생각하거나,
밤에 우는 올빼미 등이 대낮에 어떤 이유 때문에 우는 것을 듣고
낮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것 등을 말한다. (MA.ⅰ.121~122)
(*5) “여기서 ‘이상(attha)’은 구경법(究竟法, paramattha)인 열반을 말한다.
‘이익(hita)’은 그것을 성취하는 도(magga)를 말한다. 열반을 성취하는 도보다 더 큰 이익을 없다.
‘행복(sukha)’은 과(phala)의 증득인 행복을 말한다. 그보다 더 수승한 행복은 없기 때문이다.”(MA.ⅰ.123)
도는 예류도부터 아라한도까지의 네 가지 도를 뜻하고
과는 예류과부터 아라한과까지의 네 가지 과를 말한다.
22. "바라문이여,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으며,
몸이 경안하여 교란하지 않았고,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이 되었습니다."(*6)
23. "바라문이여, 그런 나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何]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습니다."(*7)
24.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何]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물렀습니다.”
25.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렀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물렀습니다."
26.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8)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물렀습니다."(*9)
(*6)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이 되었다.’는 samāhitaṃ cittaṃ ekaggaṃ를 직역하여 옮긴 것이다.
중국에서는 心一境性 혹은 心一境으로 직역되어 정착되었다.
(*7) “어떤 명상주제를 닦아서 세존께서는 이런 禪들을 구족했는가?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공부라는 명상주제(ānāpānassati-kammaṭṭhāna)를 통해서였다.(MA.ⅰ.124)
(*8)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은 upekkhā-sati-pārisuddhi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사념청정(捨念淸淨)으로 직역되었다.
『청정도론』의 설명을 인용한다.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 평온에서 생긴 마음챙김의 청정함.
이 [제4]禪에서 마음챙김은 지극히 청정하다.
이 마음챙김의 청정함은 평온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고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이라고 했다.
『위방가』에서도 설하셨다.
“이 마음챙김은 평온 때문에 맑고 청정하고 깨끗해졌기 때문에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하다.’고 한다.”(Vbh.261)
여기서 마음챙김을 청정하게 하는 그 평온은 뜻으로는
중립(tatra-majjhattatā)의 [마음부수]라고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오직 마음챙김만 청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법들을 청정하게 한다.
그러나 마음챙김을 상수(上首)로 하여 가르침을 설했다.”( 『청정도론』 Ⅳ.194)
(*9) “이러한 네 가지 선[四種禪, cattāri jhānāni]은
①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cittekaggatā)이 되고,
②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빳사나의 기초(vipassanā-pādaka)가 되고,
③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통지의 기초(abhiññā-pādaka)가 되고,
④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멸(nirodha-pādaka)의 기초가 되고,
⑤ 어떤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승격(bha-vok-kamana)을 위한 것이다.
① ‘증득(samāpatti)에 들어 일념으로 행복하게 하루를 머물리라.’라고 생각하면서
까시나의 준비를 지어 여덟 가지 증득[八等至, aṭṭha samāpatti]을 일으킨다.
② ‘증득에서 나와 잘 집중된 마음으로 위빳사나를 하리라.’라고 증득을 일으키는 유학과 범부들에게
이것은 위빳사나의 기초가 된다.
③ 그러나 여덟 가지 증득을 일으켜 신통지의 기초가 되는 禪(abhiññā-pādaka-jjhāna)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하나인 채 여럿이 되리라.’라고 설한 방법대로 신통을 나투는 사람들에게
이 禪은 신통지의 기초가 된다.
④ ‘여덟 가지 증득을 일으켜서 멸진정(상수멸, nirodha-samāpatti)에 들어 7일 동안 마음 없이
지금 · 여기에서 소멸인 열반을 얻어 행복하게 머물리라.’라고 일으키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소멸의 기초가 된다.
⑤ 그러나 ‘여덟 가지 증득을 일으켜서 禪을 벗어나지 않고(aparihīna-jjhāna)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리라.’라고 일으키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존재의 승격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이 제4禪(catuttha-jjhāna)을 보리수 아래서 일으키셨다.
그것은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고, 신통지의 기초가 되었고,
모든 역할을 성취하게 하는 것(sabba-kicca-sādhaka)이었고,
모든 세간·출세간의 공덕을 주는 것(sabba-lokiya-lokuttara-guṇa-dāyaka)이었다.”(MA.ⅰ.12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