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생이다 / 양선례
3월에 학교를 옮겼다. 작년보다 학생이 700명이 늘었다. 아파트에 둘러싸인 데다 포스코 배후 도시라서 직장인의 자녀가 많다. 아이들의 학력이 높고, 학부모도 교육에 관심이 많다고 소문난 곳이다.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학교 인근에는 다양한 사교육 학원이 포진해 있다.
지금껏 해 오던 대로 느린 학습자를 선정하여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침에 지도하려고 읽기 능력이 뒤진 아이를 추천해 달라고 담임에게 요청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3월이 다 가도록 대상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기존의 경험으로 보아 없는 학교는 없다. 담임의 관찰력이 부족하거나, 읽기 능력을 단순히 글자를 못 읽는 것으로 한정하는 바람에 미처 찾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읽기 부진아는 글자를 못 읽는 걸 넘어서 제 학년의 교과서를 아주 느리게 읽거나, 글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를 다 포함한다.
1, 2학년 담임에게 개인적으로도 부탁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1학년에 한두 명 있으나 완전한 까막눈은 아니라서 담임 수준에서 가르칠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아직은 선생님이 아이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서 그럴 거야. 느긋하게 기다렸다. 학교를 옮긴 터라 정신없이 바쁘게 3월이 갔다.
담임의 추천으로 드디어 4월 하순에 아이를 만났다. 바로 2학년 산하(가명)이다. 읽기와 관련된 몇 가지 진단 검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자음과 모음의 소릿값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며, 받침이 없는 비단어의 오류율은 50%가 넘었다. 받침이 있는 낱말은 정확도가 20%에 불과했다. 유창성은 더 심각했다. 1분 30초 안에 읽어야 할 100어절의 글을 3분 12초에 걸려 겨우 읽었다. 그나마 정확도가 49%밖에 되지 않았다. 반은 추측하여 읽은 셈이다.
인간의 뇌는 한계가 있어서 읽어 내는 데 에너지의 대부분을 써 버리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쓸 힘이 남지 않는다. 음가에 맞게 정확하게 읽고, 적당한 구절에서 띄어 읽기가 자동화되어야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정확하게 읽는 것이 읽기 교육의 끝이 아니라 유창하고 매끄럽게, 그리고 빠르게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반복하여 연습하는 훈련이 교실에서도 이어져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체계적인 유창성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년에 맞는 기준조차 없다. 게다가 요즘 교과서는 지문이 너무 길다. 교과서의 글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가 책을 통째로 읽는 ‘온작품 읽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출근하여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자마자 아이가 들어선다. 어떤 때는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기도 한다. 느린 학습자 가르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운 지 10년이 되었다. 아이를 1대1로 지도한 지도 그만큼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 난독증 협회>에서 시행하는 기본, 심화 연수를 거쳐, 전문가 과정까지 이수하였다. 1년 간 100회 이상 아이를 지도하고, 그 결과를 <읽기 자신감>을 쓴 정재석과 <찬찬한글>을 만든 김중훈 선생님 앞에서 발표하고, 통과해야 얻을 수 있는 자격증도 땄다.
산하는 부모의 이혼으로 아빠, 5학년인 누나, 조부모와 산다. 60대 초반의 젊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주로 돌본다. 콧날도 날카롭고 눈썹도 길어서 한눈에 보기에도 잘생긴 얼굴이다. 그런데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고, 집중력이 짧다. 걸핏하면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해 댄다. 이중모음을 배울 때는 어려웠는지 더 그랬다. 아이의 수준에 맞추자고 다짐해도 한 번씩 화가 났다. 교실로 가라고 쫓으면 그때는 또 머리를 흔들면서 “싫어요.” 한다.
서로 조금씩 맞춰 온 게 벌써 5개월이 되고 보니 이제는 자세가 제법 잡혔다. 과제를 봐주어야 하기에 할머니와도 소통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때부터는 시간을 어기는 일도 거의 없고, 과제 학습에도 성실하며, 방학 중에도 정해진 날에 학교에 왔다. 주의집중 시간이 짧고, 산만하던 아이였는데 조금씩 달라졌다. 2학기가 시작되자,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던 아이가 자발적으로 과제를 하고, 글자도 잘 쓰게 되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할머니가 전했다. 나 역시 조금씩 나아지는 걸 보는 기쁨이 컸다.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지금은 수업 중입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찾아 문에다 건다. 어제 배운 내용을 두 번 읽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과제로 써 온 것에서 열 문제를 뽑아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 가장 어려운 받침 /ㄷ/가족을 배울 때는 40~50점을 벗어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거의 80점 이상을 맞는다. ‘ㄷ, ㅌ, ㅎ, ㅅ, ㅆ, ㅈ, ㅊ’ 은 발음상으로는 모두 /읃/ 소리가 난다. 어른도 어려워하는 이 소리는 빈구석이 생기지 않도록 공을 많이 들였다. 여러 날에 걸쳐 진도를 조금씩 나가면서 촘촘하게 가르쳤지만 아이는 자꾸 잊어버렸다. 날마다 꾸준히, 반복 연습만이 답이다. 스스로 채점하면서 무엇이 틀렸는지 확인하고, 그걸 다시 세 번 쓰도록 안내한다.
이번에는 음운 인식을 훈련한다. 즉 말소리를 구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연습법이다. 보기의 낱말과 같은 받침소리를 세 개의 보기 중에서 찾는 활동이다. 말소리를 나누고 합성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면 하기 어렵다. 글자 수 세기부터, 음절 수준 음운 인식 훈련을 거쳐 음소 수준인 여기까지 왔다. 글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에게 아주 유용한 훈련이지만 오래 하기는 어렵다. 길어야 10분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
한글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아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음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특히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모어 간섭’으로 엄마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더 그런다. 보통 아이들은 이 단계를 굳이 거치지 않아도 글자를 배우면서 저절로 터득한다. 그러나 지적 장애, 경계선 지능, 가정 환경 결손, 엄마의 모어 간섭 등으로 구멍이 생기면 산하처럼 별도의 훈련을 거쳐야 쉽고, 빠르게 한글을 익힐 수 있다.
이번에는 받침 /ㅁ/을 익힌다. 위아래 입술이 딱 붙고, 소리를 이어서 발음할 수 있으며 목구멍에 손을 대면 울리는 유성음이라는 건 진즉 배웠다. 여기서는 그 소리가 들어간 낱말을 찾아서 읽는다. 나를 따라서 두 번, 아이 스스로 세 번을 읽는다. '지게'나 '씀바귀'처럼 모르는 어휘가 나오면 휴대폰을 검색하여 그림을 보면서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하면 공부가 끝난다. 공부한 낱말을 두 번 써오는 것이 과제이다. 즉 배운 내용 복습하면서 받아쓰기, 음운 인식 훈련, 해독 연습, 과제 제시 순으로 35분 동안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교장은 교육자라기보다는 행정가에 가깝다.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학사나 행정에 관계된 여러 일을 협의하며 하루를 보내기에 직접 아이들과 대면할 기회는 거의 없다. 산하를 가르치는 이 짧은 30여 분이 그나마 내 본업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그러니 귀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느리지만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걸 보면 기쁘기 짝이 없다. ‘그전에는 뭘 쓰려고 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이제는 비록 받침은 틀리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는 담임의 이야기에 힘이 난다.
요즘 이 아이의 관심사는 내 나이다. 몇 번을 물어도 빙빙 돌리고 대답하지 않았더니 어제는 이런다. “선생님, 그럼 작년에는 몇 살이었어요?” 고놈, 참 귀엽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