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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30
12월1일 [대림 제1주일(생명수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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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의 옷을 벗고,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또 다시 맞이한 대림 시기, 첫번째 주일 독서들과 복음 말씀을 쭉 읽고 묵상하다가 유난히 눈길이 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품위’라는 단어였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서 13장 12~14절)
품위라는 단어를 접하니 많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분의 제자로서,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에 걸맞는 품위나 품격을 갖추고 살아가고 있나?’ 반문해보니 더욱 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저뿐만 아니라 적지않은 분들이 품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국민의 지도자요 대변자, 봉사자로서 그에 걸맞는 품위는 기본인데, 품위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모 정당 국회의원들은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품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인간 존재로서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나 예의범절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찌 그리 똘똘 뭉쳐 집단적 천박함과 몰상식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지 안타깝습니다. 너무 신기한 것이 백명도 넘는 그 많은 분들 가운데, 품위는 고사하고 평범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분이라고는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꿈꿉니다. 품위있는 삶, 품위있는 언어, 품위있는 행동, 품위있는 노년, 품위있는 죽음... 그러나 백방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품위는 커녕 추악함과 천박함만 덕지덕지 남게 됩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신학 사상을 나름 정리합니다.(사상편: 1장~11잘) 이어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의화되 그리스도인으로서 윤리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계합니다.(훈계편: 12장~16장)
훈계편에서 바오로 사도는 의화된 그리스도인에게 걸맞는 행동거지,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따른 새로운 삶, 다시 말해서 성령에 따른 행동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시대’‘결정적인 시점’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강조합니다. 그때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때이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입니다.
주님 재림은 역사의 밤과 낮은 가리는 결정적인 분기점입니다. 따라서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면 인류 역사의 밤은 종말을 고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립니다. 그때 모든 죄악은 사탄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선과 의가 구현되는 때이므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죄와 저주 상태에서 의화와 구원의 상태로 변화됩니다.
새로운 세상, 결정적인 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상의 옷, 어둠의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대신 빛의 갑옷,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일일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매사 매 순간 그분께서 나와 동행함을 강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과 나는 따로 따로가 아니라 일심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갑옷으로 바꿔입는 과정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낡은 옷, 과거의 남루한 옷, 옛사람의 옷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던지는 일입니다.
낡은 옷을 벗는 행위는 자신의 지난 죄와 허물을 깨닫는 일, 회개하는 일, 새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의 새로운 탄생으로,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 십자가에 의한 새로운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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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순도 높은 기다림>
또 다시 기다림의 때, 대림시기가 다가왔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한 번 묵상해봤습니다. 가장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군대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얼마나 힘겨웠던지, 얼마나 길었던지, 또 얼마나 지루했던지 눈만 뜨면 ‘이제 얼마 남았지?’ 하고 꼬박꼬박 날짜를 지워나가며 제대 날짜를 기다렸습니다.
잠깐 동안 유학생활을 할 때의 기억도 끔찍합니다.
외국어, 그까이꺼, 일단 나가면 적당히 되겠지, 했었는데,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학연수 시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저게 KAL기인가, 저거 타고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던지, 빨리 논문 끝내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꽤 오래전, 갑작스런 발병으로 한밤중에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혼미한 가운데서도 뭔가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제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듯한 새파란 ‘왕초보’ 의사들만 번갈아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점점 증폭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빨리 아침이 와라.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의사 선생님, 제발 빨리 출근 좀 하세요!”
또 다시 도래한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가 지닌 ‘기다림’의 질은 어떻습니까? 강도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대림시기,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보다 열렬히, 보다 순도 높게 주님을 기다릴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겠지요. 기다린다는 것,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중지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삶을 탈피한다는 것, 내 지난 삶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쇄신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이 대림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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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깨어있음은 사랑을 삶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늑대가 양 무리의 어린양을 자신의 저녁식사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무리에 끼어 있으면 그 양을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 인척 흉내 내며 늑대 무리에 잠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 지난 해 내 욕하고 다녔지?”
어린양이 대답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그러자 늑대가 말합니다.
“그러면 네 형이었나 보지.”
“전 형이 없는데요?”
“그러면 네 가족 중에 누구였을 거야.”
“저희 가족은 남의 험담을 하지 않아요.”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어린 양인 자신이 무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늑대는 양에게 이렇게 말하고 잡아먹었습니다.
“어, 상관없어. 이젠 저녁시간 다 됐거든.”
우리 안에 우리를 깨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자꾸 말을 시키면 나는 정신없이 그것과 대화하다가 무리를 이탈하고 맙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체로키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그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싸움이어서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도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인데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분개 자기연민 죄의식 열등감 거짓 허영 잘난 체하고 자신의 거짓자아를 나타낸단다.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이놈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선의 고요함 겸손함 동정심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를 나타낸단다. 이 같은 싸움이 네 안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난단다.”
손자는 잠시 동안 그 말을 생각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우리 안에는 항상 두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는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이고, 한 목소리는 이웃을 죽여 나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한 목소리는 나의 생존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이웃이 나를 이용해 이득을 보게 하라는 목소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한 목소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자기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라는 목소리와 대화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목소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그 목소리를 내는 것에게 영원히 잡아먹힙니다. 그 상태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늘 깨어 있지 못한 것의 결과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첫 날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타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알려주러 오신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고도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400m에 출전한 에릭 리델은 예선에서 최고의 기록으로 수립,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습니다.
그는 예선 때 출발선에서 흑인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습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망의 결승전이 주일에 열리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러자 리델은 주저 없이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과 인간 평등의 정신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원칙으로 삼고 살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엔 예수님께서 오심이 곧 심판이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마치 노아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방주를 만들었는데 다른 이들은 그 목소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를 짓지 못한 이들은 심판 때 모두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아버지, 성모님을 어머니로 하는 가족공동체를 꾸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살아온 사람은 마지막 때에 그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태어납니다. 매 순간이 작은 심판인 것입니다.
내가 어느 목소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지옥의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깨어있음이란 원칙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 원칙이란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원칙을 깨고 누군가 미워지는데도 용서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배를 만들지 못해 결국 물속에 잠기고 맙니다.
노아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배를 만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인 사랑을 지켜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될 방주를 만들어야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사는 사람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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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주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모든 ‘오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오심’을 잘 준비하는 ‘깨어있는 자세’이다.
제1독서: 이사 2,1-5: 그들의 칼을 보습으로 만들 것이다
1독서에서는 두 가지 사상을 전하고 있다. 첫째,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법과 말씀을 선포하실’(3절) 주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모든 민족들이 듣게 됨으로써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일치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란 바로 ‘형제애’와 ‘평화’가 정말로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 즉 ‘멧부리 위에 우뚝 서서’(2절) 찬란히 빛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 즉 교회이다. 교회의 기능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와 전 인류의 일치의 표지이며 도구’(교회1항)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기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주님의 도래’, 즉 그리스도의 최초의 도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힘겨운 성장,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오시는 분’(사도 1,4 참조)을 만나러 가는 여정임을 기술하고 있다.
복음: 마태 24,37-44: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과의 ‘만남’을 한 순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 즉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엄습되는 잠이나 피곤함의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오늘 복음은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노아 시대의 일을 회상시키면서(37-39절)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신다. 첫째, 하느님께서 ‘불시에’ 찾아오시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매일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 너무 빠져있으면 안된다는 것과, 둘째, 홍수 때처럼 주님의 ‘오심’에 따르는 위협적이며 위험스런 상황에 관한 점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파괴와 저주의 사건이기도 하였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하였다(창세 7,11-23 참조).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심판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인내롭게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당신께 개방되어있고 당신의 말씀을 온순히 따르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을 거절하여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 온순히 따르고 실천했는지 아닌지가 그 때에 드러날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언제이든 간에 두려움과 ‘깨어있음’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서워함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라”(42절). 이 말씀은 여러 군데서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다. 이는 밤을 지키는 야경꾼들과 같이 잠을 잠으로써 도둑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있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3-44절). 도둑이 오는 때는 언제인지 모른다. 항상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고자 하는 그 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깨어 기다림’은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그 모든 ‘오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해 더 잘 준비하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것을 이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오심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 오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Enarrat. in Psalmos, Ps 95,14).
제2독서: 로마 13,11-14: 잠에서 깨어날 때
바오로 사도는 잠자지 말라는 권고에서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과거생활이 그리스도라는 ‘빛’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밤’에 묻혀있는 ‘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에 들어와 계신 지금은 그 ‘밤’에서 벗어나 ‘대낮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위한 근본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과 더불어 ‘때가 찼기에’(갈라 4,4 참조) 구원의 마지막 국면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11절). 이 말씀은 이미 이 순간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더 실현되어 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는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도래’의 종합이며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얼마나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깨어있고, 주님을 맞아 드릴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밤’의 ‘잠’에서 깨어나 빛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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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시기를 맞이하여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뜨겁게 기다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시대의 종말에 관한 이사야의 환시를 들려줍니다. 세상에는 평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지만 끊임없는 갈등도 많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평화를 멀리하고 많은 슬픔과 불행과 함께 고통을 자아냅니다.
주님께서는 화해를 이루시는 분, 평화의 사자로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하느님의 뜻, 곧 구원과 평화, 정의와 사랑의 길을 알려 주시러 오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전하는 이사야는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하고 초대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도 똑같은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잠이 아니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절박합니다. 육과 육이 주는 쾌락을 따르지 않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밤이 물러가고 새날이 밝아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관심이 없음을 지적하시며 그분의 오심을 깨어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시대의 징표에 관심 없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거나 실천하려는 마음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쾌락에 젖어 살았던 홍수 이전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보인 행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본능과 사악한 경향에 휘둘리지 말고 올바른 방향, 곧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언제 와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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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깨어 있어라.>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7-39)
이 말씀은 ‘예언’이 아니라, 사람들의 무심함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만 신경 쓰면서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심판을 대비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오늘의 일’만 신경 쓰면서, ‘내일의 일’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의 삶’을 위해서 저축도 하고, 보험에 가입도 합니다. 그러나 저축이나 보험은 현세적인 일이고, 그런 것들이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회개를 해야 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은 영혼을 위한 저축이고, 회개는 심판 때를 대비하는 보험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대홍수가 닥칠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대홍수는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심판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를 노아에게 예고하셨고, ‘방주’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창세 6,13-22) 아마도 노아는 방주를 금방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고,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홍수가 닥친다는 것을 혼자서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을 텐데,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가족들이 살아남은 것은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창세 7,1) 이 말은, 만일에 다른 사람들도 회개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못해서 멸망을 당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0-41)
이 말씀은, ‘회개’는 각자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회개를 남이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가족이라고 해도 회개를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들에 있는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이거나 형제일 것입니다. 또 맷돌질을 하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이거나, 시어머니와 며느리이거나, 자매일 것입니다. 가족이라도 구원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으로 이산가족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고, 서로 도와주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노아 덕분에 대홍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아마도 노아의 권고에 따라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를 보면, 롯과 그의 두 딸만 살아남았고, 롯의 아내와 사위들은 죽었습니다. 사위들은 피난을 가야 한다는 롯의 말을 ‘우스갯소리’로만 생각했고(창세 19,14),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 19,26)
롯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는 말씀은, “가족이라고 해도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로 해석이 됩니다. 버림받는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와 노력을 외면하지는 않으시는데, 당사자 자신이 회개를 거부해 버리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2-44)
이 말씀은,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온다는 것이 확실하면, 집주인은 깨어 있으면서 자기 집을 지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 재림,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과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니까 대비를 해야 하는데,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대비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더욱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비’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회개의 기회’로 주신 시간입니다.)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 첫날에 왜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듣는가?”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마음가짐과 종말의 심판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마음가짐은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해마다 정해진 때가 되면 의례적으로 치르는 연례행사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향해서 날마다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져 있는 신앙인이 되어 있어야 하고, 주님께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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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시작하면서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상기시켰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상에 골몰하다가 다가오는 불행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하면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은 초기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빌며 삽니다.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며,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자비롭고 선한 실천을 하는 사람은 그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원천(源泉)과 원동력(原動力)으로 영입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준수 여하에 따라 상도 주고 벌도 주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을 영입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우리가 퇴치해야 하는 고통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고통이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은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그대들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 13)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이사야서]는 하느님은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서,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의 길을 걷는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은 자기 한 사람 먹고 마시는 일상(日常)에 묻혀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아 그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자녀의 삶이 발생합니다. 그 삶에서는 나와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였던 내 이웃이 내가 돌보아주고 사랑해야 하는 형제자매로 보입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새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가꾸고, 내가 획득한 자격증을 과시하면서, 내가 가진 재물에 의존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이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또 “준비하고 있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게 살라 는 말입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기심(利己心)과 허세(虛勢)에서 한 발 물러서면, 하느님의 진리가 보입니다. 그 진리는 나와 내 주변을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으로 보게 해줍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살라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여 은혜로움이 주변으로 흐르게 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깨어서 준비하고 실천해야 진리입니다.
우리의 시야(視野)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시야 안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우리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우리 자신이 유리할 것만 찾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소중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것을 절대시합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우리의 편안함을 위협하는 것을 우리는 단호히 거부하고 배격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만 보고 사는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듯이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주님의 시야 안에서 주변을 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웃 앞에서 우리의 몸짓도 선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는 ‘먹고 마시는’ 일이 보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영입하고, 그분의 시야 안에서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 시야 안에 우리의 생명을 위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시야에서 진리를 배우고 실천한 사람과 자기 한 사람 먹고 마시는 일에 골몰한 사람의 운명이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서” 하느님의 생명이 열어주는 새로움을 찾아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높이, 멀리 계시고, 우리가 정성을 바쳐 섬겨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은혜로움 안에 그 원천으로 살아계십니다. 은혜로움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람이 그분의 진리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 32) 성령은 그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도록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삶이라고 구약성서 [욥기](14, 2)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쉴 때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우리 일상의 세상살이가 그 덧없음을 넘어 하느님의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도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시야(視野) 안에서 은혜로움을 찾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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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심한구 베드로 신부님]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다는 말 속엔 많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그 속에는 묶은 사슬이 끊어지고 새로운 날이 밝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으므로 내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롭게 출발하자는 결심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으니 모두가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와 위로를 받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 분과 함께 모든 존재와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나가자는 약속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 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여러분은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었을 때 그 핵심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 본 적이 있습니까? 대개 핵심적인 이유는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온갖 것들에 이끌려 다니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지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았습니다. 왜 자신들이 이렇게 되었나를 반성한 것이지요. 그들이 찾아낸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 동안 그들이 하느님을 잊고 살아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하느님이 아닌 것에 애착했고,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하느님으로 모시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 이제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하고 외치며 하느님께로 되돌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품안으로 걸어 들어가 확고한 마음으로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야곱의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들도 하느님의 품안으로 들어가 용기와 희망을 갖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쳤던 말을 힘차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오늘 예수님은 복음에서 “늘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빛”이라는 말씀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의 빛’은 다른 말로 풀이하면‘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빛 속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전존재,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이 그분의 정의와 사랑에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예민하게 알 수 있게 되고, 즉시 내가 받고 있는 빛을 그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고통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게 되고 주님의 빛을 그들에게 전해줌으로써 그곳에서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주님의 빛 속을 걸으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어두움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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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때를 준비하자>
하느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과는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신앙인은 진정 하느님의 계산을 늘 염두에 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기쁨과 은혜는 바로 그것을 아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은혜를 모르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자꾸 인간의 계산으로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외롭고 팍팍하며 또 믿는 것만큼 고달픕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또 기다림의 자세로 성탄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고 있고 또 그 준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기다림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느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성서가 전하고 있는 중요한 단어는 시간입니다. 즉 때를 말합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계획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때가 아닙니다.
세상 만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3장)의 말처럼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메뚜기도 철이 있다고 사업이나 장사도 때를 놓치면 큰 손해를 봅니다. 공부도 그렇고 사는 삶의 여러 부문이 그렇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구원의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또 그분이 원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중요한 때를 카이로스(Kairos)라고 합니다. 여기서 카이로스라는 말은 충분히 찬 시간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곡식이 익은 것은 익을 만한 시간과 노력이 충분히 차 있었기에 익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 때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게 카이로스며 또 때가 차면 재림하십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때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요 계획입니다.
이처럼 대림절은 두 가지 형태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그 분을 영접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고 생활을 준비하는 경건한 때입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대림절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때이지만 더 분명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를 뜻 없이 헛되게 지내서는 안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미 망해 있었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 격이었습니다.
백성들도 공포와 불안에 떨었으며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이사야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다시 찾아오신다는 기쁨과 희망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새 길이 열립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에서도 깨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바오로 사도가 외치고 있는데, 성 아우구스띠노가 바로 이 성서 구절을 읽고는 완전히 변화되며 새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본래 행복은 쾌락에 있다 하여 온갖 탐욕적인 생활을 다 했지만 그러나 그럴수록 더 허전하고 삶은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번민과 몸부림 끝에 우연히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듣고는 얼른 방으로 달려가 바오로 서간경을 펼쳐 보니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 나왔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때까지 눈물 속에서 몹시 괴로워하던 아우구스띠노는 바로 이 대목에서 너무도 큰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드디어 찾던 것을 찾았고 만나고자 하던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실로 구원의 때를 만났던 것입니다.
대림절은 우리가 지난 1년을 반성하면서 보다 더 성숙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절은 성장의 시기이고 또한 회개의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계산은 우리의 계산하고는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그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불쑥 오십니다. 따라서 늘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깨어 준비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축복의 길이요 또한 아름답고 멋지게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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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용훈 티모테오 신부님]
<기다림>
노벨 문학상을 수락했지만 정작 수상식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Godot)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은 오늘날에도 가끔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다.
이 짧은 희곡의 내용은 이렇다. 두 방랑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자신들을 구해 줄 ‘고도’라고 불리우는 존재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가 누가인지, 언제 어디에 오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그를 기다린다.
지칠대로 지친 그들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지루한 시간을 잡담과 장난 행위로 허비한다. 그들의 이런 막연한 기다림은 언젠가 ‘고도’가 오게 되면 끝날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온 사람은 ‘고도’가 아니라, 그가 곧 그들에게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소년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갑갑한 현실 속에 갇힌 채 막연히 자신들의 구원자 ‘고도’를 기다리며 반복된 일상을 계속 보내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사실 무슨 이런 희곡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허무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저자 사뮤엘 베케트는 ‘고도’가 무엇이고 누군인지를 밝히지도 않는다. 조금은 이상한 내용이지만 작가는 독자 스스로 자신의 ‘고도’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라는 의도가 아닐까?
반복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존재가 언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다림을 지닌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에게 ‘고도’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대림시기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기 위한 기다리는 삶에 대해서 묵상하는 시기이다.
우리는 언제나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소망하는 미래는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보아 우리의 미래는 죽음이라는 것에 의해 모두가 일단락 지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죽음을 넘어서 어떤 의미를 찾고, 또 그리스도에 이르는 영원한 삶을 기다린다는 것을 믿고 소망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냥 수동적인 자세를 뛰어넘는 어떤 능동적인 삶의 자세를 요구한다.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미래를 단지 수동적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내 안의 삶을 변화시키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구상 시인의 고백이 떠오른다.
“성탄을 일흔 번도 넘어 맞이하고도 나 자신 거듭나지 않고선 누릴 수 없는 명절이여!...”
매년 성탄절을 기다리지만 정말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참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으며, 참 만남이 없는 성탄절은 내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기 변화의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로빈 S. 샤르마의 <나를 찾아가는 여행> 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코 미래의 성취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어 두지 말라는 것일세. 현재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필요한 일을 연기하지 말게. 자네가 삶을 충만히 살아야 할 시간은 복권에 당첨되거나 은퇴를 했을 때가 아니라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일세!”
성탄절에 다가 오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길 원한다면 막연히 기다리고 있지만 말고 나 자신부터 변화되어 할 것이다. 바로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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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정홍 요한 사도 신부님]
<무엇에 눈을 뜨고 계시렵니까?>
제가 초등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교직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동료 선생님들과 회식을 하실 때가 많으셨는데, 그럴 때면 종종 양념 치킨을 사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어린 동생은 밤잠을 이기지 못해 잠들어 양념 치킨을 먹지 못 했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기다렸던 저는 양념치킨을 먹고 잠들곤 했었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 선물을 사들고 오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선물을 사들고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의 모습도 모두 정겹습니다. 기다리는 사람과 자신을 향한 기다림을 아는 사람 안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달력으로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시기의 뜻은 ‘오심(Coming)’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시기에 두 가지 ‘오심’을 기다리며 묵상합니다.
첫째, 성탄절 전례 안에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둘째, 세상 종말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오늘 교회가 들려주는 복음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깨어 있어라.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구원이 더욱 가까워 졌다고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삶, 빛을 보며 낮에 사는 삶은 눈을 뜨고 있는 삶입니다. 결국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은 사랑에 눈을 뜨는 삶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에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에 눈을 뜬 우리를 통해 강생하실 겁니다.
오늘 1독서의 이사야는 온갖 사회악 안에서 메시아를 고대하며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고 외쳤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했던 때처럼, 온각 악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시국의 요즈음입니다. 비록 세상이 사랑과 반대되는 것에 더욱 눈을 뜨게 만들지라도, 가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사랑에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이번 대림시기에 우리 교우들께서는 무엇에 눈을 뜨고 계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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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한 가지 지향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올 한해는 한가지 지향을 두고 언제나 끊임없이 감사하며 기도하는 고운님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한 아이가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습니다. 장난감 삽으로 모래를 퍼다 가 양동이에 담고, 그 모래를 가지고 멋진 성을 만듭니다. 성벽도 아름답게 쌓고 성안에 멋진 연못도 만듭니다. 아름답고 거대한 모래성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파도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밀물이 밀려 들어와서 자기가 쌓아놓은 모래성을 뒤덮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도가 가까이 밀려 들어와도 그 소년은 모래성 옆에서 깡충깡충 뛰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년은 파도가 오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년은 자기를 데리러 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년의 마음에는 큰 파도가 오더라도 슬픔도, 두려움도, 후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소년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은 언젠가 나에게 닥쳐올 마지막 파도를 바라보면서 늘 준비하라.라는 것입니다.
지금 고운님들은 아름다운 모래성을 짓고 있는 자신들의 눈 너머에 파도가 보입니까? 그때 놀라지도 마십시오. 즐겁게 뛰어노십시오. 그리고 큰 파도가 밀려올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집을 향해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제가 어느 성당에 부임해서 가서 병자 봉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집에서는 몇 년 전부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답니다. 그 집에 형제는 폐결핵 3기에서 암으로 번져가는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같이 갔던 사람들을 억지로 뿌리치고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방안에서 엄청난 비린내가 나면서 저도 모르게 방에서 뛰쳐나갈 뻔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비린 냄새가 형제가 각혈하여 피를 토한 냄새였고, 또한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방안에서 대소변을 해결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방안을 환기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는 몇 년 동안 방 밖으로 거의 나오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해주고 나서, 빼빼 마른 형제를 억지로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따뜻한 햇볕과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또 그 형제를 햇빛이 제일 잘 드는 곳에 눕혔습니다. 다만 아무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매일 매일 밥 먹는 시간 빼고 밖에 나와서 누워있던지, 앉아있던지, 걸어 다니던지 그저 햇볕만 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죽음 앞에 놓여있던 그 신자가 6개월 만에 자기 발로 성당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보건소로 데리고 약을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1년 만에 깨끗이 낫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신자와 많은 사람이 저에게 감사하다고 했지만, 저는 그 형제에게 햇볕만 쬐라고만 했을 뿐입니다.
“다만 아무런 생각하지 말고, 혹시나 낫고자 하는 마음도 갖지 말고 햇볕만 쬐라고요.”
사랑하는 고운님들!
주님의 강생(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고운님들 모두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강생”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고통과 죽음을 겪으면서 저희에게 힘을 주시면서,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도는 “주님의 은혜로운 치유의 햇볕 앞에 누워서든 아니면, 서든 앉든 내 영혼과 육신의 환부(아픈 곳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이 된다.”라는 것은 “놀라운 능력을 지니신 주님께서 밤낮으로 나에게 다가오실 수 있게 하는 것”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강생을 기다리면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는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가 어떤 절망이 오더라도 더 큰 희망을 품고 절망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운님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큰 파도가 보이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두레박 사제는 부족하지만, 올 한해도 더욱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로서 한결같은 이 지향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또한, 고운님들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품은 햇살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얻어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사랑은 기적입니다. 큰 파도가 닥쳐와도 피신처가 있으니 행복합니다. 돌아갈 아버지 집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튼튼한 자물쇠를 감사라는 마음의 열쇠로 열어 행복을 선물 받는 기도의 사람으로 불리우는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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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32)
♧♧ 시편 64편 7절…
"불의한 것을 생각해 내고는 말합니다.'우리는 준비가 다 됐다. 계획이 세워졌다.' 사람의 속과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 우리는 준비가 다 됐다. 계획이 세워졌다...
그 준비된 계획은 ‘완전한 계획’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다윗의 대적들이 자신들의 의해 세운 계획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완벽한 것이라고 믿었음을 나타내 주는 적절한 의미입니다.
* 사람의 속과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는 악인이 자신들의 준비가 뛰어남을 스스로 자화자찬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이 압살롬과 그의 무리들의 간교함을 풍자적이고 조롱 섞인 말로써 비꼬며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라는 말은 ‘교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 시편 64편 8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을 화살로 쏘시리니 그들은 순식간에 상처를 입으리라."
다윗은 악인들이 은밀하게 무죄한 이를 쏘려 하지만(5절) 도리어 하느님이 악인들에게 진노의 화살, 징벌의 화살을 되쏘실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들은 순식간에 상처를 입으리라.’라는 말은 압살롬의 무리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냅니다
♧♧ 시편 64편 9절…
"그분께서 그들을 자기네 혀로 망하게 하시리니 그들을 보는 이마다 머리를 흔들리라."
* 그들을 자기네 혀로 망하게 하시리니...
이 구절은...악인이 불의하게 혀를 놀려 의인을 해치려 들지만(4절), 도리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해칠 뿐임을 강조해줍니다. 의인을 잡으려고 놓은 덫과 올무와 웅덩이에 도리어 자기가 빠지는 격이 되고 말 뿐이라는 것입니다.(시편 9장 16-17절. 참조)
* 그들을 보는 이마다 머리를 흔들리라...
‘머리를 흔든다.’라는 것은 상대방을 조롱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예레미야서 48장 27절. 마태오 복음 27장 39절. 참조)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악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결국 자신의 죄과로 인해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게 될 뿐이고, 이를 보는 자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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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게으른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곤하면 꼼짝도 하기 싫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뇌를 쉬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쉬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뇌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움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하면, 뇌면 ‘어쩔 수 없구나, 차라리 동조하자.’라면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를 ‘뇌의 가소성’이라고 말합니다. 신경계의 구조와 기능이 변함에 따라 그에 적응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뇌 구조를 분명히 바꿀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유능하고 강하고 영리하다고 말하면 뇌는 그에 따라 행동하지만, 반대로 자신에게 무능하고 약하며 똑똑하지 않다고 말하면 뇌는 문자 그대로 그에 적합한 수단을 취합니다.
결국, 자신을 향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긍정적인 말을 통해 우리는 건강까지도 얻을 수 있습니다. 킹스 칼리지 런던의 정신의학과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소에서 실시한 연구에서 부정적 생각을 반복하면 알츠하이머에 걸릴 위험이 크다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해서 더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데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의 만족만을 채워줄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언급하신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홍수로 모두 휩쓸어 갈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육신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아와 같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종말 때에도 교회라는 방주에 탄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 날을 안다면 분명 남은 시간 동안 잘 살려고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시간만 열심히 살게 하지 않으시려고 그날과 그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며, 늘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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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하는 관계}
미국에서 14만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결과는 하루에 6~7시간씩 친구나 가족과 교제하는 사람의 행복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월등하게 높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합니다.
1. 명확한 메시지 전달.
2. 경청.
3. 피드백 주고받기.
4. 공유하고 싶은 것을 항상 염두에 둘 것.
5. 현재에 충실할 것.
6. 질문할 것.
7. 몸짓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
8. 말투에 주의할 것.
9. 설교하듯 하지 말고, 담소하듯 편하게 말할 것.
10. 긍정적인 피드백을 할 것.
11. 낯선 사람에게도 인사할 것.
풍요로운 삶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웃과 함께 하는 관계의 변화는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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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 별처럼 내 마음 깊은 그곳에
고요히 밝아오는 빛의 향기로 우리 사랑은 영원히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내 마음 깊은 그곳에
마르지 않는 샘물 되어 흐르오, 우리 사랑은 영원히
때로는 외로움에 눈물지어도 그대 나에게 등불이 되어
말 없는 눈빛으로 기도해 영원한 우리 사랑을 위해
나 이제 당신 위해 꽃을 드려요. 눈빛 순결한 사랑에
고요한 두 마음이 두 손을 모아 영원한 사랑을 위해.”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 별처럼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지친 이웃에게 희망의 등불, 사랑의 등불이 되면 좋겠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선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듯이, 우리도 주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것이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거주자 등록증’입니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면담하였습니다. 전산에 문제가 있어서 보통은 1주일이면 나오는데 1달 정도 걸렸습니다. 거주자 등록증이 있으면 미국에서 취업할 수 있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저에게 직원은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이주민 센터에도 신자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운전 면허증’입니다. 비자, 거주자 등록증, 신용카드가 있으면 필기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필기시험을 마치면 2주 정도 지나서 임시 운전 면허증이 발급됩니다. 1달 정도 기다리면 실기시험이 정해집니다. 감독관인 경찰이 신자였습니다. 제게 미소지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긴장은 되었지만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사제복을 입고 가서 좋았습니다. 사제복 뒤에 계신 하느님의 힘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성사 집전 허가증’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속지주의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목하던 사제는 현지 교구의 교구장에게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교구장이 서면으로 요청합니다. 제가 속한 브루클린 교구의 교구장님이 성사 집전 허가증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조건은 다 갖추었습니다. 남은 건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깨어 있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걸까요? 가치의 차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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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地上에서 천국天國을 삽시다>
-배움, 싸움, 깨어 있음-
어제로 11월 위령성월이 끝나고 오늘 12월 첫날은 대림 제1주일이 시작입니다. 새삼 끝은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희망이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물결치게 합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 하나가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출발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사순시기가 어둡고 긴 산문散文같다면 대림시기는 짧고 아름다운 시詩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기다림의 동심童心으로 돌아가게 하며 기쁨으로 설레게 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참으로 교회 전례력이, 전례영성이 고맙습니다. ‘사탄의 시스템’ 같은 험하고 거친, 어두운 세상에서 밝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하늘 나라 시스템’같은 세상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하늘 나라 시스템 같은 전례주기에, 전례영성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참된 내적성장과 성숙도 뒤따릅니다. 참으로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게 하는, 사탄의 시스템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천국을 살게하는 하늘 나라 시스템의 전례주기입니다. 오늘 아침성무일도 후렴들 셋의 가사와 곡은 얼마나 아름답고 흥겹고, 마음을 희망과 기쁨으로 물들였는지요.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1.“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2.“들이여 주님 앞에서 흥겹게 우쭐거리고 숲을 이룬 나무들도 손뼉을 쳐라. 주께서 오시어 영원히 다스리시라. 알렐루야.”-
-3.“보라 위대한 예언자 오시어, 새 예루살렘을 세우시리라. 알렐루야.”-
사순시기와 단연히 구별되는 대림시기의 기쁨이기에, 후렴마다 ‘알렐루야’, ‘주님 찬미’가 뒤따릅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부터 벌써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저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대림시기, 천국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니 지상에서 천국처럼 삽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림의 희망과 기쁨이, 행복이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합니다. 구체적으로 다음 셋처럼 살면 됩니다.
첫째, 배우십시오.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배움중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배워서 사람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무지의 속박에서 해방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공동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어제의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참으로 저를 자유롭게 한 깨달음이었습니다.
-“1.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신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지혜로우시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자. 하느님을 사랑하자. 하느님을 공부하자. 하느님께 순종하자.”-
-“2.공동체에 속해 있음에 감사하자. 공동체가, 이웃 형제들이 나를 구원한다. 공동체를, 형제들을 떠나 내가 어디서 사랑을, 겸손을, 온유를, 순종을, 섬김을, 비움을, 친절을, 환대를 배울 수 있을까.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도반들이요 주님의 평생 배움터가 공동체이다. 눈만 열리면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가 다 보고 배워야 할 스승임을 깨닫는다.”-
그러니 내 몸담고 있는 평생 배움터인 공동체는, 형제들은 하느님의 참 고마운 구원의 선물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도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배워 실천해야할 말씀이요 평화입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마침내 말씀이 실현되어 우리는 주님의 산 ‘불암산’에 있는 하느님의 집 ‘요셉 수도원’에서 주님의 길을 배워 걸을 수 있도록 시온이자 예루살렘인 성전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께 가르침을 받고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항구히 충실히 하느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됩니다.
또 무엇보다 하느님께 배워야 할 공부가 평화입니다. 그대로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평화의 이상과 현실입니다. 흡사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내전內戰상태를 방불케 하는 작금의 시대에, 참으로 평화의 이상과 실현보다 절실, 절박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얼마나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평화의 이상이자 현실인지요, 바로 말씀의 공부와 실천과 더불어 이런 평화의 공부와 실천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멀리서가 아닌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실현되어야 할 평화입니다. 배움이 무르익어갈수록 자유인이자 평화인이 됩니다.
둘째, 싸우십시오.
배움에 이어 싸움입니다. 초년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病魔와, 치매癡呆와 싸운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이것은 수도영성생활의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 현역인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공동체는 배움터가 되고 싸움터가 됩니다.
공동체란 배움터에서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들’인 우리들이요. 공동체란 싸움터에서 평생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밖에 있는 적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가ego, 무절제한 욕망의 내가, 또 태만한 내가, 무자비한 내가,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괴물같은 내가 적입니다.
마성魔性, 악성惡性, 수성獸性, 인성人性이 혼재한 인간입니다. 영적싸움에 항구하여 승리할 때 비로소 영성靈性 깊은 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축소판같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것 같은 마음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심케한 로마서 말씀이 싸움의 진상을 잘 보여줍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시오.”
영적 싸움에 빛의 갑옷은 무엇입니까?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그러니가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신망애信望愛의 전사’로 살 때 모든 욕망을 물리치고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으로 품위있고 기품있고 품격있게 살 수 있습니다. 절대 영적 싸움의 승리 없이는 이런 품위 있는 삶을 불가능합니다. 결코 노고勞苦없이 저절로 오는 값싼 은총은, 영적승리는 결코 없습니다.
또 참 좋은 빛의 갑옷이 회개와 기도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영적 무기도 없습니다. 대림시기,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빛의 갑옷을 입을 때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주님의 전사, 영적 전사가 됩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빛의 갑옷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란 말씀이 새삼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빛의 갑옷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는 시간입니다.
셋째, 깨어 있으십시오.
대림시기 무엇보다 깨어 있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전사로 필수 전제조건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종교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시기가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에 갈수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루중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막연한 진공 상태에서의 깨어 있음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과 기쁨이, 주님을 만나고 싶은 깊은 갈망과 열망의 사랑이 깨어 있게 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요 기쁨입니다. 기다릴 사랑하는 주님이 없다면 희망도 기쁨도 행복도 깨어있음도 아예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설렘의 기쁨으로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아니 특정한 시기만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가 사랑하는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대림시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바도 깨어 있음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가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얼마나 허망한 죽음인지요! 이래서 죽음을 날마나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살라는 옛 사막교부들은 물론 분도 성인의 충고입니다.
오늘 복음의 똑같은 환경중에서도 들에 있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림 받았다는 일화나, 맷돌질을 하단 두 여자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림 받았다는 일화, 바로 깨어 있음이 그 구원 기준임을 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하늘 나라의 시스템을 살지만,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사탄의 시스템속에서 자기를 잊고 살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중에도 내면에 따라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지옥을 사는 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로 우리 모두의 경각심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도둑처럼 오는 사건들이요 죽음들이요 종말이요 주님의 도래입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 다고 사실 깨어 있지 않고 방심放心, 방일放逸, 방종放縱하다가 불시에 닥친 불행이나 사고, 죽음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유비무환, 맑은 의식으로 깨어 있음의 수행이, 수련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영적 잠에서 깨어나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깨달음의 은총들입니다.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오매불망寤寐不忘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림의 희망과 기쁨, 행복이 우리를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게 합니다. 사탄의 시스템같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늘 나라 시스템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1.배우십시오, 2.싸우십시오, 3.깨어 있으십시오. 평생 수행입니다. 평생 여정입니다. 평생 ‘주님의 학인’, 평생 ‘주님의 전사’로, 평생 ‘주님의 각자覺者’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지상에서, 대림의 희망과 기쁨, 행복 가득한 천국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은총의 대림시기, 자, 주님의 빛속에 걸어갑시다!”(이사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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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당신 곁을 떠나간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성탄축일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립니다.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보면,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우리의 구원자로 탄생하셨고 실제로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계시니 그 날을 경축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도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합니다.…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둘째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심판자 주님을 기다립니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 9,27) 마태복음을 보면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4,30) 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미사 안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복된 희망을 품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대림절에 자주 부르는 성가 91번 ‘구세주 빨리 오사’ 가사를 보면 1절.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 하옵소서.
원조들이 범죄한 후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보내 주옵소서.
2절. 우리 죄를 잊으시고 참회하는 자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 모든 유혹 항상 우리 괴롭히니 이 어려움 이기게 도와 주옵소서.
3절. 고통 중에 만민들은 메시아를 고대하여 애타게 기다리오니 오소서 메시아여. 이 인류를 돌보소서. 구세주 언제 오나. 언제 오시나.” 입니다.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를, 그리고 시련과 어려움, 온갖 유혹에서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림 기간에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세주 빨리오사! 어두움을 없이하실 분으로 빨리 오시면 좋으련만 지금 당장 심판자로서 오셔도 당당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2-13)
여기서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빛의 승리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1장 3절에 보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 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빛이신 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진리의 말씀 안에 머물러 오시는 주님을 영접해 드려야겠습니다. 말씀에 따라 그대로 행하면 좋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셋째 의미는 우리의 일상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희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뜨거운 감동을 주셨던 그 기쁨을 기다립니다. 요한 복음 14장 23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키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묵시록 3장20절에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을 여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실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가 봉헌 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고 영혼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저런 핑계로 그분을 모시지 못할 뿐입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은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시편을 보면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 “겸손한 자의 기도는 하늘의 구름을 꿰뚫는다.”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청하여도 얻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기에 앞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허물이 있으면, 죄와 잘못이 있으면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를 받고 청해야 효과 있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고해 성사를 통해 영혼을 맑게 하시기 바랍니다. 집에 손님이 오면 청소를 하고 꽃꽃이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무엇 보다도 영혼의 청소를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예비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당을 찾게 된 동기가 이웃에 사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부부의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성당에 가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 자녀에게 일직 신앙에 눈뜨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전교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 때문에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장가든 남자들이 제일 싫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웃집 남자랍니다. 어느 여성잡지에서 “우리나라 남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1위는 바로 ‘이웃집남자’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유는 뭘까? 이 설문에 참여한 한 남성이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구헌날 우리집 마누라는 이렇게 소리쳐요~
“이웃집 남자는 돈도 잘 벌어온다더라, 인간성도 좋고, 날이면 날마다 부인에게 비싼 옷도 덥석 사주는데 당신은 뭐꼬? 집안일도 척척 잘하재, 게다가 아이들 공부도 도와주재, 처갓집 일도 꼼꼼히 챙겨주는 걸 잊지 않는다더라. 도대체 당신은 잘 하는 게 뭐꼬?”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아무리 이사를 다녀도 옆집엔 꼭 그런 남자만 산다!! 항상 비교를 해서 우리의 행복지수가 하위라고 하네요! 절대 비교금지!!!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대로 빛을 발하는 것이 주님을 잘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빛을 가리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꾸 비교하면 비참해 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지금 이대로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 보다 먼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조배 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당신 앞에서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지 않게 해 드리기 바랍니다. 우리에 앞서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끝 날이 언제 오든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시는 그분이 계신데….그날을 대비하여 지금 깨어 있으면 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 49,18)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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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묵은 어둠을 밀어내고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버겁고 힘겨운 현실을 벗어버리지 않고, 한걸음도 건너뜀 없이 타박타박 오늘 여기까지 걸어오신 여러분을 축복하며 새 날 새 빛의 기쁨을 전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첫날 복음은 우리에게 종말을 상기시킵니다. 깨어 있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다는 건 잠들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잠시의 휴식이랄 수 있는 육신의 잠은 정지와 멈춤, 죽음의 상태로 보이지만, 그 안에 휴식과 생성, 회복 등 긍정적 움직임도 함께 지니고 있지요.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아가의 신부가 고백하는 신비로운 이 상태가 곧 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깨어 있음을 가리키지 않을까 싶습니다. 몸은 휴식하고 있어도 영혼은 오시는 님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 기척, 향기의 미세한 변화도 포착할만큼 민감히 열린 상태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무지로 인해 영혼이 더 섬세하고 영롱하게 벼리어집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분을 언제라도 맞이하려면 그래야 합니다.
제1독서는 모든 이가 평화를 누리는 구원의 날을 노래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이사 2,1)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강대국 사이에서, 내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정과 정의가 훼손된 상태에서 위협과 대립, 갈등 상황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민중의 마음에 싹튼 평화에 대한 열망은 주님께서 오시어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이사 2,4)는 그날을 향합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아직 신산하고 어두운 현실을 걷는 이들을 독려하는 목소리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오실 빛! 나를 둘러싼 어둠에서 한 발 밖으로 내디딜 때 이미 빛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여전히 복잡하고 버거운 현실에 묶여 있다고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화답송)
기쁨은 반드시 기쁠 이유가 있어야 생기는 감정적 반응을 넘어서, 주님을 향해 깨어 있는 영혼에게서 흘러나오는 생기입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된 평화, 구원, 하나 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율하는 영혼의 설레임이 곧 기쁨입니다.
"기뻐하여라."(루카 1,28)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들은 첫마디입니다. 하느님께서 벌이시는 일이 자신에게 인간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기뻐하라는 과제를 받습니다. 그 말씀이 전달되는 순간 기쁨이 이미 그녀 안에서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정결하고 신심 깊은 유다 처녀로서 메시아를 깨어 기다려온 마리아는 이미 오시는 주님을 향해 깨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촉구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로마 13,11)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로마 13,12) 입는 것입니다. 어둠을 헤치고 번지는 빛은 포말처럼 퍼져 나가는 기쁨과 같습니다. 기쁨을 소유한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로마 13,14)은 사람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으로 열린 상태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 안의 기쁨이 '오시는 기쁨'을 알아보고 맞이할 것입니다. 이 기쁨이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가 되면 더 큰 기쁨이 이웃과 온 누리를 향해 번져나갈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말씀께서 기쁨을 선사해 주십니다. 깨어 있는 이는 기쁨을 잉태할 "태"가 준비된 영혼입니다. 그 "태" 역시 기쁨입니다. 그러니 기쁠 일 없이, 힘겹고 고통스럽고 신산한 가운데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와버렸다고 황망해하기보다, 내 존재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는 기쁨, 길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기쁨을 찾읍시다. 그 기쁨의 "태"는 오시는 주님을 껴안을 희망으로 설레며 일렁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러할 것입니다.
새해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영혼을 온통 차지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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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마음의 이불>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예수님 기다림의 시작!
교회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깨어산다는 의미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모든 게 제자리에 있게 하는것이라. ~ ᆢ
지저분한 곳을 정리하고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며
흥청대던 몸짓을 그만두고
시샘하고 속시끄러운 마음 버리기.
마음과 몸의 힘을 빼고 편안하게 ~
부드러운 말씨와 몸짓이
예수님 모실 구유가 되고
마음의 이불을 잘 준비하여 덮어드립시다.
"대낮처럼 품위있게 깨어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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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니 깨어 있어라."(마태 24, 42)
기다림으로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깨어 있음과
준비라는
기다림은
가장 좋으신
주님과 만남입니다.
기다림의
여정에서는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
순서는 없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기다림 뒤에
찾아오는
주님의 탄생입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의
만남이 됩니다.
기다림이라는
만남 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길은
우리가 돌아갈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기다림의 여정을
필요로 합니다.
기다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사랑임을
깨닫는 시간 되십시오.
기다림 안에
주님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다림이라는
대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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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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