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문을 연 구하우스. 주변과 어우러지는 나즈막한 뮤지엄 건물은 매스스터디스 조민석 소장이, 정원의 조경 디자인은 뜰과숲 권춘희 대표가 맡았다. 컬러풀한 공룡 레진 조각은 중국 작가 수이 젠구오의 ‘메이드 인 차이나’.
입구에서 바로 이어지는 기다란 복도에는 여러 디자이너의 블랙 의자를 모은 컬렉션과 도널드 저드의 알록달록한 작품 10점을 걸었다.
‘예술이 있는 삶’을 콘셉트로 한 컨템퍼러리 아트 & 디자인 뮤지엄 구하우스(KOO HOUSE)가 지난 7월 1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문을 열었다. 구정순 디자인 포커스 대표가 30여 년간 수집한 개인 컬렉션 300여 점을 전시한 방들을 둘러보노라면 서울서 50km 남짓한 거리를 달려온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
“구콜렉션, 구뮤지엄, 구하우스, 이 3개가 뮤지엄 이름의 최종 후보로 올랐어요. 내 집에 온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듯한 공간이 되길 바랐기에 망설임 없이 ‘집’이라는 이름을 택했지요.” 구정순 대표는 1983년 당시 금성사였던 지금의 LG의 골드스타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CI 전문 회사 디자인포커스의 역사를 써 내려간 1세대 여성 디자이너다. KBS, 쌍용, 카스, 뚜레쥬르, 국민은행 등 누구나 아는 국민 브랜드의 얼굴을 도맡아오며 기업인들에게 CI의 중요성을 교육한 디자인 전도사이기도 하다. 장동련 홍익대학교 교수, 손혜원 크로스포인트 대표이자 국회의원 등 내로라하는 역량 있는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포커스를 거쳤을 만큼 한국 디자인계에서 인재 사관학교 역할을 해낸 핵심적인 디자인 전문 회사다. 구정순 대표는 요즘도 세컨드 하우스가 있는 양평과 청담동 사무실을 오가며 회사의 경영과 디자인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디자인계에서 종횡무진 활동해온 게 이미 30여 년, 그사이 인연을 맺은 문화ㆍ예술계 인사도 엄청날 법한데, “뮤지엄을 열고 싶었지, 지인들을 초대해 내 근황을 알리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하고는 그 흔한 개관식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대신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졌고, 관람객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한 사람당 두 번은 흔하고 네다섯 번씩 재방문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작품만큼이나 그것이 놓인 공간 자체에도 공들인 기색이 역력한 만큼 찬찬히 다 둘러보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릴 만도 하다.
산과 물이 있는 주변 자연과 구하우스는 그럴듯하게 어우러진다. 3205㎡ (약 970평) 대지에 올린 2층 건물은 매스스터디스 조민석 소장이 맡았다.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커미셔너와 큐레이터로 황금사자상을 받은 조 소장은 “큰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미술관이되 집이었으면 한다”는 구정순 대표의 이중적인 바람에 부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벽돌이 벽면을 감싸는 픽셀레이션(pixellation) 방식을 활용했다. 여러 각도에 걸쳐 평평함, 거침을 표현하며 빛의 방향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분위기를 내도록 해 하나이면서 여러 가지 색깔을 드러내도록 했다.
구하우스 내부로 들어가면 거실, 침실, 손님방 등 저마다 이름을 붙인 공간이 눈에 띈다. 노출 콘크리트 내벽으로 이루어진 10개의 방에 필립 스탁, 디터 람스, 샤를로트 페리앙, 조지 나카시마, 피에르 폴랑, 에토레 소트사스, 잉고 마우러, 백남준, 서도호까지 디자이너와 아티스트의 가구, 회화, 설치, 사진, 영상 작품 등이 저택의 곳곳에 녹아있다. 2층의 마지막 전시 공간 초상화 방(Portrait Room)을 보고 나면 루프톱으로 통하는 발코니가 나온다. 북한강과 중미산 자락이 보이는 절경을 배경으로 토머스 헤더윅의 스펀 체어를 볼 줄이야. 방과 방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보이지 않는 긴장감으로 집중력을 조절하다 마지막에 탁 트인 시야를 선사하는 구 대표의 노련함이 돋보인다.
실제 손님방으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다는 장 프루베 룸. 이곳은 장 프루베가 1932년 프랑스 낭시의 한 대학교 70개 기숙사 방을 위해 고안했다는 헤드보드가 있는 침대와 책상, 의자, 암체어 그리고 선반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러고 보면 디자인 역사책에서나 볼법한 명작 가구라 해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대 학생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일반 가구였을 테다. 마냥 엄숙하고 고독한 작품 감상을 종용하던 지난날의 뮤지엄들이 괜스레 박하게 느껴진다. 삶에 녹아든 아트, 쓰임이 있는 아트가 이런 모습일까? 이 작품은 애초부터 화이트 큐브에 전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을, 거실에 사색하듯 무심히 놓인 프랭크 게리의 위글 사이드 체어(Wiggle Side Chair), 야외 정원을 바라보며 창가에 바투 앉아 있는 론 아라드의 배드 템퍼드 체어(Bad Tempered Chair)를 보면서 문득 해본다.
천장이 높아 탁 트인 라이브러리에는 자비에 베이앙이 르 코르지뷔지에를 오마주한 설치 작품 ‘모바일(Mobile)’이 있다. 전체 높이가 9m에 달하는 대형 작품이다.
실제 손님방으로 쓰는 장 프루베 룸. 1930년대 기숙사 침대가 빈티지한 느낌을 준다.
1층의 마지막 전시 공간 리빙룸. 로버트 인디아나의 ‘러브’ 러그 위에 놓인 한스웨그너의 ‘다이닝 테이블’, 조각처럼 놓인 톰 딕슨의 ‘파일론 체어’가 눈에 띈다.
구정순 대표가 왜 뮤지엄을 열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마흔 살이 됐을 때, 앞으로 꼭 뮤지엄을 하나 열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어요. 준비 과정 중 몇 번이나 부지를 옮기고 설계도 다시 하며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결정을 의심하거나 고민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왜 이걸 하느냐고요? 나도 내게 매일 묻는데, 사실 아직도 답은 모르겠어요.”
뮤지엄의 어원은 ‘뮤즈의 신전’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됐다. 뮤즈란 그리스 시대에 신이 인간에게 주는 예술적 영감의 매개자를 일컫는 말이었고, 이 뮤즈들에게 바친 신전을 ‘무세이온(mouseion)’이라 불렀다. 신과 시인, 또는 모든 인간의 예술적 창작 활동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뮤즈. 디자이너라는 직업 그 자체가 현대판 뮤즈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도심 근교 지인의 집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듯한 구하우스는 한 번보다 두 번, 두 번보다 세 번, 네 번 들러 각각의 작품과 충분한 교감을 나누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를테면 2층의 이동 통로에 걸린 소피 칼(Sophie Calle)의 비디오 스크린 작품 ‘어디 그리고 언제 (Ou` et Quand)’를 20분 동안 뚫어져라 바라본다든지. www.koohouse.org
2층 초상화룸은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사진, 설치 작품 작가 에르빈 올라프의 ‘키홀’로 꽉 채웠다. 그는 사회문제, 가족 내 성추행 문제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하지만 쉬쉬해온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다락방에 놓인 막스 에른스트의 ‘새장 침대와 스크린(Lit-Cage et Son Paravent)’.
분위기를 압도하는 거친 터치가 돋보이는 유화와 남자의 두상을 삽 위에 올린 그로테스크한 설치 작품은 모두 필리핀 작가 레슬리 드 차베즈의 것으로, 그는 마르코스 시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30대 중반의 젊은 작가다. 유화 작품을 정면으로 보는 묵직한 책걸상은 베르나르 브레의 작품.
플라스틱 플레이트를 실처럼 늘어뜨린 파빌리온은 OBBA (이수정, 곽상준)의 작품. 마크 뉴슨의 ‘펠트 체어’와 조화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