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
원래 목조건물의 지붕에는 이엉이나 볏짚, 그리고 나무껍질 같은 식물성부재를 사용하였는데 내구력이
약하여 자주 교체해야 되기 때문에 방수효과가 좋고 강도가 높은 반영구적인 점토소성품(粘土燒成品)인
기와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목조건물이나 담장 위 기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이는 풍습은 고대 동양건축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이지만,
그 기원은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귀면의 기원이 동이족이 건설했다고 알려지는 중국의 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는데 이 귀면을
당시의 지붕 장식으로 사용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옛 문헌들은 모두 소실되고 없고 중국의 문헌인 ≪고사고 古史考≫에 “하나라 때 곤오 씨가
기와를 만들었다(夏時昆吾氏作瓦).”라는 옛기록이 있고, 약 3천년 전 주나라 때 사용된 기와가 현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러 기와가 매우 성행했던 점을 통하여 기와의
기원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알려진 기와 자료는 위만조선시대의 우거왕 3년에 중국 한나라의 무제와 인연을 맺은 후
낙랑군치로 알려진 평안남도 평양시토성리에서 1921년에 후한시대로부터 서진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에
유행하였던 기와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밝혀졌습니다만 낙낭의 위치 비정에도 여러 설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의 종류는 지붕 끝에 장식하는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암키와 수키와 등이 밝혀졌으
며 막새기와는 두 종류의 자료로 밝혀져 있는데 한 종류는 문자막새와 다른 종류는 무늬막새로 구분되
어 있습니다.
흔히 동양 고대 하,상,주,나라는 중국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으나 고대 동이의 나라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은나라의 본래 국명은 상나라이지만 은나라로 인식하는 이유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사람들이
은나라의 마지막 수도인 은허를 따서 낮추어 부르며 생긴 말입니다.
하지만 1890년대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 유적지에서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은나라의 정식 국명이 상나라
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상나라는 신권정치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였는데 제정일치사회로 보면 되며 그 이유로 그들이 중요 사항
에 대해서 복점을 치는 관습과 더불어 갑골문에서도 제사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은 것을 볼 때 상나라
지배층들이 제사를 통해서 왕권을 신격화함과 동시에 결속력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고 순장문화가 있었
으며 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상나라의 정치형태 중 가장 특이한 것은 왕권의 상속방법인데 초기에는 부자상속이지만 후기에는 형제
상속으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고대국가들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볼 때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상나라 초기의 부자상속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부자(父子)가 아닌 부족(附族)의 개념으
로 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신라 초기의 박, 석, 김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이은 것과 비슷합니다.
오히려 상나라 후기에 형제상속으로 바뀌면서 혈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통치가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또 상나라는 비읍, 도, 국의 구조로 국가가 이루어졌습니다.
국에는 왕과 왕족들이 거주한 도읍의 개념이고 도는 읍을 기반으로 몇 개의 읍이 모인 도시이며 읍은 상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마을 단위였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상왕조의 영역이 이분법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왕의 직할지인 왕기 즉 내복과 직할지 밖의 외복으로 구성됨으로써 읍제국가의 성격을 보이는데 군사조직
또한 왕이 이끄는 친위군과 귀족들의 파견으로 이루어진 군사들로 지방군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고구려 초기의 국가구조와 비슷한데 왕족의 직할지인 도읍 졸본 및 주변 지역과 고구려 중심가문인
5가들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나뉘어졌다는 것, 군사조직도 이왕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볼 때 상나라의 국가
구조체제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구조는 서주시대까지 이어지며 중국 특유의 봉건제로 확립되는 기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체제는 왕권이 비교적 강할 때는 큰 문제가 없지만 반대의 상황이 되면 국가의 멸망
으로 직결되었습니다.
그 문제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상나라가 단행한 수많은 천도인데 이는 동북아시아의 왕조들을 살펴보아도
유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 원인으로 일원화되지 않은 지배체제와 군사체제를 의심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잦은 천도는 민심의
혼란과 이반의 원인이 되며 결국 상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상나라의 존재는 1890년대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과 후로 확실하게 구분 될 수 있습니다.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에는 단지 상나라는 하나라와 더불어 전설의 나라로 인식한 것이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