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 동씨(廣川董氏)
광천(廣川)은 중국 북부지방의 화북성(華北省) 조강현(棗强縣)에 속한 지명으로 지금의 북경(北京)근처이며, 고대 중국의 중요 산업지대로 유명하다.
동씨(董氏)의 연원(淵源)은 기원전 2,250년경 황제(黃帝)의 6세손 류숙안의 아들 보(父)가 순(舜) 임금으로부터 동씨(董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은것이 시초가 되며, 계보(系譜)는 전한(前漢)의 대학자(大學者) 동중서(董仲舒)로부터 시작된다. [광천동씨대동보(廣川董氏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는 기원전 179년(한 나라 문제 원년) 중국 화북성(華北省)에서 출생하여 고명(高明)한 학덕(學德)으로 유교일존주의(儒敎一尊主義)를 확립, 한 (漢)나라 유교독립의 기반을 중흥시켜 동양사(東洋史)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며, 문묘에 배향되어 동씨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우리나라 동씨(董氏)는 동중서(董仲舒)의 43세손인 동승선(董承宣)이 고려 말에 명(明)나라 접위사(接慰使)로 동래(東來)하여 조선개국(朝鮮開國)과 함께 출사한 후 나라에 공을 세워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군에 봉록되고, 벼슬에서 물러나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의 이곡(泥谷)에 세거(世居)하면서부터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특히 동씨(董氏)는처음에 승선(承宣)의 봉군지였던 영천(榮川)을 관향(貫鄕)으로 쓰게 되었고, 함경북도 명천(明川)지방에 살던 후손들은 원주(原州)로 칭관(稱貫)하는 등 동원(同源)이면서도 관향(貫鄕)을 달리하여 부르다가 조선 단종조(端宗朝)에 이첩(移牒: 관청으로 보내는 통첩)으로 다시 영천이라 하였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明)나라 제독(提督)으로 원병(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 에 건너운 동일원(董一元)의 소장문서를 근거로 하여 시조(始祖) 동중서(董仲舒)의 출생지인 중국의 광천(廣川)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승선의 아우 인선(印宣)은 명(明)나라 홍무년간(洪武年間: 1368-1398)에 아버지 박소(搏 )와 절의지간(節義之間)인 서 달(徐達)의 천거로 태조조(太祖朝)에 지휘사(指揮使)가 되어 전공을 세움으로써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다. 그리하여 광천동씨(廣川董氏)는 강도상(江都相) 동중서(董仲舒)를 시조(始祖)로 삼고, 영천군(榮川君) 승선(承宣)과 이부상서(吏部尙書) 인선(印宣)을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동씨(董氏)의 본관(本貫)은 광천 을 비롯하여 광주(廣州), 영천(榮川), 풍천(豊川)등 25본이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로 추정된다. 동방의 거유(巨孺) 동중서(董仲舒)의 학덕(學德)을 이어받은 광천 동씨(廣川董氏)는 특히 조선조에서 훌륭한 인재(人財)를 많이 배출하여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승선(承宣)의 손자 덕란(德蘭)은 공조시랑(工曹侍郞)을, 현손(玄孫) 보하(寶夏)와 상하(尙夏)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오른 학정(學政: 인선의 현손)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편 일원(一元)의 아들 창순(昌順)은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으며, 대순(大順)의 맏아들 한필(漢弼)은 인조조(仁祖朝)에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있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淸)나라 와의 굴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비분강개하며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한 후 누차에 걸친 조정의 부름에도 불응하며 자손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말도록 유언(遺言)했다고 한다. 희방(希芳)의 아들 응란(應蘭)은 1624년(인조 2) 부원수(副元帥) 이 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향병(鄕兵)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봉 현감(牛峰縣監)을 거쳐 갑산부사(甲山府使)로 나갔다. 그밖의 인물로는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혜진(惠震)과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한 정란(廷蘭)이 유명했으며, 하욱(夏旭)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라 부호군(副護軍) 희경(禧景), 부사(府使) 기연(基衍), 현감(縣監) 진호(鎭鎬)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천동씨(廣川董氏)는 남한에 총 1,095가구, 4,6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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