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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15회 : 조선은 시계왕국이었다 (2001.5.19.)
방송일: 20010519 조회수 : 5365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 스페셜/VCR 원고]
500년전,
조선은 시계 왕국이었다.
- 방송 일시 : 2001.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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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근정전 15 [디졸브 완전히 빠지면-]
세종 4년 정월 초하루의 일이다.
기상 관측을 담당하는 서운관에서는,
이날 일식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보를 했다.
일식 9 그리고 오후가 되자,
예정대로 일식이 시작됐다
[이하 흘리고-]
기록 20 [디졸브 시작되면 바로-]
실록에 따르면, 왕을 비롯한 모든 관료들이
소복차림으로 궁궐 뜰앞에 모여서 일식을
무사히 치르기 위한 예를 올렸다고 한다.
~9 이천행 곤장형.... 그런데 식이 끝난 후,
예보가 15분 늦었다는 이유로 담당 관리가
곤장형에 처해졌다 [이하 흘리고-]
세종대왕 9 500년전 세종대왕은 어떻게,
일식 예보가 15분 늦었다는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을까?
~ 타이틀 13
500년전, 조선은 시계왕국이었다.
ST 1
[손목 시계 들여다보고는-]
지금 시간이.... 8시가 조금 넘었군요.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시계를 보고서
지금이 몇시 몇분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땠을까요?
[뒤에 시계 그림들 늘어서 있고-]
제 뒤에 보이는 이 신기하게 생긴 물건들을 한번 보시죠.
[돌아서서 보고-카메라 그림들 훝고~]
여기 있는 것들은 전부 조선시대때 사용하던
우리나라 전통의 시계 관련 기구들입니다.
[사이두고-]
시계처럼 보이십니까?
[혼천의 발생-]
이건, 마치 옷장 위에다가 지구본을 하나 턱하니
올려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요, 이 재미나게 생긴 시계는
17세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 과학계에서
주목하는 매우 귀중한 과학 유산이라고 합니다.
지난 ( )년에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과학사 박물관이죠,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요청해오기도 했다는데요,
대체 이것이 어떻게 시계라는 건지,
또 어떻게 움직였던 것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리고 세계 과학 기술계에서는 왜 이 유물을
과학사의 큰 성과로까지 평가하는 것인지,
그 실체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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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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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외경 ( ) [3-4초 흘리고-]
외국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박물관안으로 TR 문제의 시계는,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3-4초 흘리고-]
제 1전시실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이 유물의 정식명칭은 혼천시계-
국보 제230호로 지정돼있다.
시계외관 SK 5 [2초정도 흘리고-]
이 혼천시계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지구본으로 Z.I 14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혼천의 부분과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시계 장치부분이 그것이다.
지구본 부분/시계 FS 8 [2-3초 흘리고-]
이것이 시계임을 증명해주는 단서는
시계 장치부분의 문자판이다
시간표시 팻말 8 현재 팻말에
'자'라는 글자가 올라와있는데, 이것은
밤 12시에서 시간이 멈췄음을 의미한다
추 SK 15 이 거대한 기계장치를 움직였던 동력은,
놋쇠 사슬에 연결돼 있는 두 개의 추-
이것이 자체의 무게에 의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내려가면,
[C/G] 추움직이는 6 그 힘이 톱니바퀴에 전달돼서 기계장치가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혼천의 SK 10 홍문관에 설치돼서,
학자들이 시간과 천체 운행의 원리를
공부하는데 사용됐던 이 혼천시계는
현종 10년, 166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뒷그림에 조금 물려가도 무방-]
증보문헌비고 20 기록에 따르면,
이 혼천시계를 만든 사람은
당시 천문교수였던 송이영이었다.
조선의 전통적 시계 제작기술에,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를 혼합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기계장치 SK 15 이 시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중 하나는,
부품으로 사용된 톱니 바퀴들이다.
[뒷그림 흘리다 스틸걸리면 다음 Ment-]
타이트 SK 10 놋쇠로 만들어진 이 부속품들은,
최근의 것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밀한 가공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작동하는 옛그림 13 실제, 3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조금만 손질해주면 작동할 수 있을만큼,
뛰어난 성능과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문중양 선생 INT 그야말로 굉장히 정밀하다. 요즘 기계제작자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래서 일부에서는 제작연대를
의심할 정도로 그정도로 정밀한 그런 기계라고 볼 수 있다.
니덤 책 표지 11 골동품 취급을 받고 있던
이 천문 시계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것은
외국의 학자들이었다.
책내용 넘기는- 12 영국인 과학자 니덤도 그중 한사람이었는데,
한국의 시계에 관해 저술한 이 책속에서,
그는 송이영의 시계를 분석하는데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톱니바퀴 그림 타이트 10 특히, 이 시계의 정밀 설계도를 작성해서,
그 구조를 공학적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했다
[C/G] 32 니덤의 설계 도면을 기초로 그 작동원리를
재구성해보면,
추가 낙하하는 힘에 의해 톱니바퀴가 돌고,
이에 따라 시간을 표시하는 문자판이
움직이게 된다. [이하 흘리고-]
[표시판 올라갔다가 내려갈때까지 흘리고-]
그리고 매시간, 정해진 때가되면-
타종 장치를 건드려 종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이하 흘리고-]
책속의 진자로 Z.I 16 이 연구과정에서 니덤이 주목한 것은
진자 장치였다.
오늘날에도 시계 추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
진자는, 규칙적인 좌우 운동으로 기계를
제어해주는 장치인데,
진자(책) 7 톱니바퀴들이 늘 일정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핵심부품이다.
[C/G]진자움직이는 7 바로 이 진자 장치가 있음으로써 정확하고
정밀한 시계 제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갈릴레이 사진 9 진자의 원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갈릴레이였다.
[한호흡 쉬고-]
그 역시 이 진자를 이용해, 정밀 시계를
갈릴레이 진자시계 21 만들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이후 서양에서 진자 시계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673년 호이엔스가 <진자시계>에 관한 책을
저술하면서부터였다.
혼천의 7 [2-3초 흘리고-]
송이영이 혼천시계를 만든 것은
1669년, 호이엔스의 책보다 4년 앞선
[C/G]혼천의 13 시점이었다.
이것은, 서양에서 진자시계가 실용화될 무렵,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필적하는 기술을
보유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혼천의의 지구본 12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도 학자들이
이 혼천시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혼천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지구의다.
[C/G]혼천의 작동 11 혼천의는 시계 장치와 연결돼 있는데,
시계의 움직임에 따라 지구가 하루에
한바퀴 자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중양 선생 INT 이 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1669년이다. 이때면 지구가
자전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설이 유학자나 지식인들에
의해 제대로 수용안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지구의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획기적인 장치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갈릴레이 사진 15 당시 서양에서는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 회부된 이후,
<지동설>이 인정되지 않던 시점이었다.
중국에서조차 이같은 <지동설>은 잘못된
이론이라고 치부되고 있었다.
[C/G] 혼천의 시뮬~ 1'10" 바로 이 무렵,
송이영의 혼천시계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의 근대과학에 필적하는 이론과
기술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조선 초기 과학기술의 전통이
이 시기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좀 흘리고-]
바로 이것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혼천
시계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이하 흘리고 ST로-]
ST 2
17세기에 이토록 정밀한 시계를 만들었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부품으로 사용되고 있는 작은 톱니바퀴들은,
요즘 만들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이시기라면, 서양에서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재판을 받았던 바로 그 무렵인데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시계가 만들어졌다니.... 참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혼천시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시계들중 하나일 뿐입니다.
(약간 뜸들이고-)
그 중에서는 이 시계를 능가하는 놀라운 시계들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自擊漏 글자뜨고-]
자격루...한자를 풀어보면 스스로 치는 물시계라는 뜻인데요,
이 이름은 정말 많이들 들어보셨죠...
[자격루의 물시계 부분 나타나고-]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원짜리 지폐에 세종대왕과 함께 그려져있는
바로 그 물시계입니다.
세종때, 장영실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자격루는
실은 전체가 아니고 일부분만이 남은 상태인데요,
아무리 일부만 남은 것이라고 해도, 이 모습만으로는
대체 이게 어떻게 시계로 이용됐던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합니다.
더욱이 혼천 시계와 비교하자면 허술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이것으로 어떻게 시간을 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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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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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부감/건물FS 9 [2-3초 흘리고-]
국보 229호로 지정돼 있는 자격루는,
현재 덕수궁 안에 자리해 있다.
자격루 FS 6 중종때 만들어졌다고 해서
중종 자격루라고 불리기도 하는
측면 SK 20 이 물시계는, 세종때 만들어졌다가 없어진
것을 원형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7 물항아리 TD 현재 남은 것은
청동으로 만든 세 개의 항아리와
파이프 모양의 물통뿐이다.
측면 용그림 물통 표면에 새겨진 용문양이,
왕이나 국가를 위해 제작된 것임을
보여줄 뿐-
수수호 통안으로 13 이 모습만으로는,
어떻게 시간을 측정했던 것인지,
추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수장고 20 [2-3초 흘리고-]
그런데 다행히도,
물시계의 사용 방법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남겨져 있다.
파이프 모양의 물통속에서 발견된
부속품들이 그것이다. [이하 흘리고-]
부표 타이트 5 [흘리고-]
부표 SK 22 [현장음]
자격루 수수호안에 들어있던 부표입니다.
이 속이 완전히 비어있는 것이죠 / 그렇습니다
구리를 이용해 만든 이 부표는,
가벼울 뿐 아니라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설계돼 있다. 물 위에서도 뜰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잣대관련 이야기중 11 [현장음]
어떤 기능을 하나?
속이 비어서 여기에 자를 끼워서 물이
차오르면 떠오르면서 시각을 알려주게 된다.
부표 위의 잣대자리 SK 7 부표 하나만으로는 시간을 측정할 수 없다.
이것과 세트를 이루는 또 하나의 유물이
잣대꺼내고- 17 바로 <나무로 만들어진 자>.
[한호흡 쉬고-]
물에 잘 썩지 않도록 삼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이 자의 한쪽면에는, 일정한 간격의
눈금이 조밀하게 그어져 있다.
잣대 설명중- 20 [현장음]
여기 96개의 눈금이 그어져 있는데 네 개가
한시간을 나타낸다. 작은 눈금 하나는 15분을 의미한다.
/부표에 자를 꽂는데, 물이 차오르면 같이 뜨게 된다.
끼워보는 손 타이트 3 [흘리고-]
부표+잣대 16 잣대와 부표가 세트를 이룰 때,
비로소 시계로서의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호흡 쉬고-]
이 두 가지의 유물을 토대로
자격루의 시간 측정 방법을 추정해 보자
[C/G] 부표뜨는 시뮬~ 14 계속 똑같은 양의 물을 공급하면,
부표 또한 일정한 속도로 상승하게 되는데
그때 눈금의 변화가 바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자격루(실사) 13 [3초정도 흘리고-]
우리나라에서 물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는 이같은 전통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삼국사기 표지 18 삼국 사기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에 물시계를 담당하는
여섯명의 박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호흡 쉬고-]
삼국 시대에 이미, 국가에서 운영하는
물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복원그림 19 이때 만들어진 물시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 나라에서 건너가 일본에 전해진
물시계 등의 모습을 통해 그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하 흘리고-]
복원품 SK 18 외국의 자료와 문헌 등을 토대로 복원한
~5 물통 순서대로 신라 물시계의 모형이다.
제일 위에서 물을 부으면,
네 개의 물통을 거쳐 마지막 물통에
모이도록 돼 있다.
소장 INT 48 이 마지막 물통에 여기서 떨어지는 수압의 세기와
물의 양이 일정해야 한다. 그래야 부표가 일정하게
떠오른다. 그게 변화가 생기면 시간이 길었다 짧았다가
된다. 이것을 맞추기 위해서 물통이 점점 많아졌는데,
결국 위에서부터 변화를 안정시키기 위한 보조장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에는 하나만 있었다.
수혜 열어보고 8 마지막 물통은,
자격루와 마찬가지로 부표를 이용해,
물이 차면 떠오르도록 돼 있었다.
물시계 복원품 SK 14 여러 개의 물통을 이용해서
시간을 측정하는 이같은 전통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자격루의 물통들(실사) 14 자격루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동 항아리의 아래쪽에는
물이 흘러가는 관을 연결했던 구멍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C/G] 자격루 작동원리 54 이 물시계가 사용될 당시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기록에 근거해서 복원해 보면-
물시계는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
높이 5.3미터의 이층짜리 누각으로
이뤄져 있었다. [흘리고-]
항아리 옷벗겨지면- 청동 항아리는
지금과 달리 일직선으로 놓여있었고-
[2-3초 흘리고는 이어서-]
가장 아래쪽에 놓인 두 개의 긴 물통은
번갈아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5(수수호 Change) [이하 흘리고-]
기록 24 자격루가 처음 사용된 것은
세종 16년 7월 1일의 일이었다.
이전에도 물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물시계가 정밀하지 못하므로
다시 만들도록 했던 것이다.
[이하 흘리고-]
밤[자격루 모형SK] 19 [잠시 보고-]
이같은 물시계는, 사람이 옆에서 지키고
있다가, 떠오르는 잣대의 눈금을 읽어
시간을 알리는 방식이었다.
[사이두고-]
그러나 실수로 제때 시간을 알리지 못해,
처벌받는 예가 많았다고 한다.
기록 26 이에 세종은,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울리는 시계를 만들도록 명했는데,
그 책임을 맡은 이가 장영실이었다.
<나무 인형이 스스로 시간을 알리고,
사람의 힘을 빌지 않는> 자동 시보장치를
만들도록 했던 것이다. [이하 흘리고-]
[C/G]자격장치 작동 34 현재는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자격루라는 이름이
바로 이 자동시보장치에서 비롯된 것이었
다.
~6 건물 발생 가로와 세로가 각각 2미터, 높이가 6미터로
집 한 채의 크기였다고 전해지는
~17 인형들 발생 이 자동 시보장치에는 세 개의 인형이
설치돼 있었다
각각 종과 북과 징을 맡았는데,
정해진 시각이 되면 자동장치에 의해
종을 치고 북과 징을 울렸다고 한다.
인형들 SK 9 [흘리고-]
ST 3
[자격루 수수호에서 큰 항아리쪽으로
TU하면 그 옆에 서있는 MC 고개숙여서 항아리 안을
슬쩍 들여다보고는 고개 들고-]
이 크기도 그렇지만, 성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계단 내려와서 수수호 옆에서 걸어오고-]
(계단 걸어내려오면서-)
그러니까 이 큰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
여기서 작은 항아리를 거쳐서 다시 이 긴 통속으로 물이
옮겨진다는 말이죠.
[수수호 투명해지고-]
(수수호 옆에 서서 아래부터 물 차오르는 것 보는 듯-)
이렇게 물이 조금씩 차오르고
(일어나서 위의 눈금있는 곳 들여다보고-)
이 잣대에 그어진 눈금을 읽으면 그게 시간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이 앞의 기계들에서
소리가 났다는 말인데-
[앞의 자격장치에서 종소리 울리면-]
(깜짝 놀라는 시늉-/재미있어 하는 표정)
[앞쪽으로 걸어가고, 시패 구멍쪽을 들여다보면
인형 나타나서 시패들고 서있다.]
하하, 여기를 보니까 시간을 알려주는 인형도 있군요.
(신기한 듯 이쪽 저쪽 두리번거리고-)
무려 500년도 전에 이같은 자동시계를 만든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대체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이같은 자동 시보장치를 작동했던 것인지,
자격루 작동의 비밀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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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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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 FS/남교수 방 10 [잠시 흘리고-]
자격루의 자동시보 장치는
지난 몇백년간 기록으로만 남겨져있었다.
현장 실험중 17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복원 연구가
시작됐는데, 현재는 모형을 통한
기계 공학적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10 (현장음) [이하 현장음-]
[C/G] 구슬떨어뜨리기 11 자동 시보장치는
지극히 간단한 원리에서부터 출발한다.
부표에 꽂아 놓은 잣대가 위로 떠오르면서
미리 설치해 놓은 작은 구슬을 건드리는
[C/G] 구슬받아 27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인형들 움직이는-
[구슬 그릇에 떨어지면-]
떨어진 구슬은
자동 시보 장치속으로 굴러 들어가고-
내부를 돌아다니며 기계장치를 건드려,
종을 치고 시간을 알리게 되는 것이다.
[이하 흘리고-]
박성래 교수 INT 격발장치를 해가지고 세시면 세시에 쇠알을 하나
굴려서...다른 쇠알 두 개를 굴려 내려가게 할 수 있으니까
쇠알이 세 개가 구를 것이 아닌가? 쇠ㅣ알이 일정한
간격으로 구르면서 일정한 위치에 설정해 놓았던 종을
친다거나, 이런 장치를 했던 것이지.
실록기록 25 자격루가 완성될 당시의 실록을 보면,
그 작동 원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첫번째 자막 다 써질때까지 흘리고-]
이 기록만으로도 복원이 가능할만큼,
그 구조와 움직이는 순서를 세밀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하 흘리고-]
[C/G] 구슬/지렛대 13 자동 시보장치의 핵심은, 매 시간마다
정해진 구슬이 떨어지도록 하는 것과,
그 구슬이 지렛대를 움직여 원하는 장치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박성래 교수 INT 어느 순간에 가서 딱 바뀌는 거다. 천천히 뭐가
변화하는 게 아니고 어느 순간 격발장치를 해 놓았기
때문에 건드리는 순간 바뀌고....그런 장치가 근대적인
장치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기계공적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측면이 있다.
컴퓨터 화면 20 자격루는 매 시간마다,
그 시각에 맞는 횟수만큼 종과 북을
쳤다고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매 시간,
서로다른 작동 원리가 필요했을 터-
그 내부가 매우 복잡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록 21 실록에 따르면-
하나의 구슬이, 지정된 통로를 지나가면
그 통로는 자동으로 닫히도록 돼 있다.
다음 구슬이 또다른 통로를 이용하게
함으로써 그때마다 필요한 기구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든, 절묘한 장치였던 것이다
[C/G]통로막히고 숟가락 11 지정된 통로를 통과한 작은 구슬은,
아래 쪽에 위치한 숟가락 장치위에
떨어지고- 그 힘으로 문이 열리면
기록 20 더 큰 구슬이 굴러가게 된다.
[2-3초 흘리고-]
자동 시보장치의 시작은,
탄알크기만한 작은 구슬에서 비롯됐지만,
숟가락장치와 지렛대 원리를 이용하면서
계란만한 다른 쇠구슬을 굴리게 된 것이다.
그만큼 동력이 증폭되었다는 뜻이다.
[C/G]구슬받기~ 27 이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먼저 물시계에서 떨어져 내린
작은 구슬 하나가, 자동 제어기능을 갖춘
숟가락과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훨씬 더 큰 운동량을 갖게된다.
[흘리고-]
이같은 기계적 증폭 과정을 거쳐
종을 울리고, 십이지 인형이 시간을
알리도록 통제했던 것이다.
박성래 INT 1430년대 장영실이 만들때는 전례가 없던 일이라서
중국의 기록만을 가지고 만들 때 참고자료 없어...북, 징이
필요한 수만큼 울리게 하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기술자의
숙제다 이걸 장영실이 해결해서 만든 것이다.
[C/G]자격루 47 당시 전세계적으로 이같은 자동시보시계를
~27 건물 발생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이슬람에 불과
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첨단 기술이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공개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 모든 기술적인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장영실은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고,
1434년, 스스로 울리는 자동시보시계-
자격루를 완성했던 것이다.
이날을 기해,
자격루는 조선의 국가 표준시계로
사용된다.
ST 4
기록에 따르면 자격루의 시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시의 높은 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겠죠.
그런데, 당시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시간의 단위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기록 발생-]
"제사는 축시 1각에 치르도록 하라"
또 여기를 보면 "희생을 잡는 시각은 신시후 1각이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시>와 <각>이라는 것이
당시의 시간 단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환산하자면 얼마쯤 되는 것일까요?
[옛 시간 관련 C/G]
[둥근 원이 커다랗게 생기고(MC 키만한)
멘트 내용에 따라 자축인묘...의 글씨들이 새겨진다]
먼저 옛날에는 하루를 열두시간으로 나누었습니다.
(천천히-)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많이들 들어보셨죠? 요즘은 자신이 태어난 시각,
즉 사주를 얘기할 때 바로 이 12(십이)시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저는 ( )시, 즉 ( )시에서 ( )시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 이처럼 과거의 십이시는, 오늘날의 두시간에 해당합니다.
<자시>라고 하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
그 다음 축시는 새벽 1시에서 3시까지...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 한시간은 다시 두 개로 나눠집니다.
[자시 부분 색깔변하고/잠시후에 멘트내용에 따라
두 개로 나눠지고-]
앞을 <초>라고 하고 뒤를 <정>이라고 했는데요,
예를 들어 자시라고 하면 11시에서 12시까지를 자초!
12시에서 1시까지를 자정이라고 했던 것이죠.
결국 하나의 시를 두 개로 나눈 셈이니,
요즘과 마찬가지로 스물 네시간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초나 자정중 한 챕터가 밖으로 빠져나오고-]
[그곳에서 다시 5등분의 눈금이 새겨지고-]
여기를 보시면, 요즘의 한시간을 4등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각>인데요,
한시간을 이렇게 네 개의 각으로 나누었으니,
일각은 15분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최소한 15분 단위 정도의
시간은 정확히 잴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앞으로 돌출됐던 부분 들어가서 완성된 시계의 모습-]
이렇게 살펴보니까,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실제 하루를 나누는 방법 등은 요즘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같은 시간 체계는 대체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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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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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야외전시장 15 [3-4초 흘리고-]
일성정시의 여주에 있는 세종 대왕릉,
이곳에서는 세종대에 만들어진 각종
과학 기기들을 복원해서 전시하고 있다.
규표 8 [잠시 흘리고-]
흔히 조선시대 과학 문화의 대부분은
세종대에 완성됐다고 말하는데,
간의 13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과학기기들의
대부분은 천문, 즉 하늘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하 흘리고-]
앙부일구 4 그리고 이 천문기기들은,
소간의 측정중 12 시간 측정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다. 이것들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현장음 30 [현장음]
이렇게 태양을 잘맞추면 고도와 적도에 따라서...
현재 시간을 읽어보면 오시 일각...약 3시20분정도의
시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밤하늘의 일성정시의 15 [3-4초정도 흘리고-]
하늘을 관찰해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방법
이었다.
세종때 만들어진 일성정시의는,
백각환 13 대표적인 천문시계인데, 낮에는 해를
기준으로 밤에는 별을 기준으로 삼아서
시간을 측정한 시계였다.
밤하늘 7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 시간을 알 수 있었을까?
천문대 5 [흘리고-]
망원경 앙감 14 밤하늘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북극성이다.
7~밤하늘 C/G 모든 별들은 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 한바퀴씩 움직이게 된다.
밤하늘 15도 별회전 11 이것을 24등분하면,
별이 한시간동안 움직이는 각도는 약 15도,
이 각도를 측정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간의앞 2사람 8 낮동안의 시간 측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5 간의돌리고 않다. 태양도 1시간에 15도씩,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백각환 돌아간다 7 천문기기에 부착된 백각환은,
이 천문 기기들이 시계 구실을 했음을
일성정시의 백각환 12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2-3초 흘리고-]
하루 24시간을 백등분해 나타낸 것이니,
백각환은 요즘 시계의 숫자판에 해당하는
것이다.
~11 [현장음] ( ) 백으로 나눈 백각의 간격이 조밀하게 나와있는데
이게 조밀할수록 우리에게 정밀한 시간을 알려주는데
2.5분정도의 정밀도를 나타내게 된다.이시계의 시환이
크면 더 정밀해지는데 간의는 10초정도의 정밀도를
가질 수 있다.
간의 C/G 19 [3-4초 흘리고-]
500년전 자격루와 함께,
국가의 표준 시간을 측정했던 간의는
10초 단위의 정밀한 시간까지 잡아낼 수
있었던,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정밀
시계였던 것이다. [흘리고-]
경복궁도 Z.I 17 간의대가 완성된 것은 세종 34년의
~ 12 간의대 일이다. 경복궁 내에 이 간의대가 설치
됨으로써, 조선은 완벽한 종합 천문대를
갖추게 됐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하늘의 움직임과 시간을 장악하게 된다.
기록[천문기구 이름들] 12 세종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천문기구와
시계들 중에는, 다른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발명품들이 많이 있다.
동궐도 FS 5 이 시계들은, 왕이 언제든지 살펴볼 수
있도록 왕의 처소 근처에 설치돼 있었다
해시계 11 [흘리고-]
천문기구... 8 해시계는 물론, 지금은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천문기구까지- 10여개가 넘는
천문,시간 관측 기구들이 궁궐안 이곳저곳에
일성정시의 5 산재돼 있었던 것이다.
Z.I 금루각터(12) 17 조선시대의 왕들이,
시간 측정을 위해 노력했음을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또 있다.
시간을 관리하는 부서들의 규모가
대폭적으로 커진 것이다
물시계방 7 물시계를 담당했던 금루방만 보더라도,
물시계 담당관실 7 40명에 달하는 관리들이 배정돼 있었다.
자격루 하나에 이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됐던 것이다.
조승구 선생 INT 세종시대만 하더라도 금루가 서운관내부에 소속돼
있었는데 .... 세종시대의 서운관 규모는 상당히 컸다고
얘기할 수 있다
세종과 세자의 간의측정 11 [잠시 흘리고-]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하늘을 관찰하고 시간을 측정하는 일에,
이처럼 많은 힘을 쏟았던 것일까?
밤/천문관측기구들SK 6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 사상중에는 관상수시라는 말이 있다
밤/물시계 4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시간을
일성정시의 C/G 20 알려준다는 뜻으로,
천문 기구들을 활용해 백성들에게
제대로 된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야말로
제왕의 책무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여겼다.
이처럼 시간을 관측하는 일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왕조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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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우리가 흔히 들어서 알고있는,
세종때 만들어진, 이많은 과학기구들이 대부분 시간 측정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인데요 이것은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천문학의 발달만으로 설명하기엔 미흡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500년전에, 10초라는 이렇게 작은 시간단위까지도
측정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지금이야 1분 1초를 다퉈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그 옛날 이같이 정확한 시간이 왜 필요했던 것인지는 참으로 의문입니다.
시간을 이토록 자세히 나눠 관찰한 이유는 무엇이고,
대체 이 시간들은 어디에 사용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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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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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들 움직임 19 지금은 평범한 천문현상이라고 생각하는
~11 일식발생 일들도, 과거에는 하늘의 경고라며 두려워
했던 경우가 적지않다.
그중 하나가 일식인데, 이것은 해와 달과
지구가 일직선상에 놓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식 해그림자/근정전 35 달이 해를 가리는 것이다.
[잠시 흘리고-]
그러나 전통 시대에 일식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경고로 여겨졌다.
특히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왕을 상징하는
해가 가리워지는 것이기때문에
, 불길한 징조로 여겨 태양이 다시 나오길
기원하는 구식례를 올렸다.
일식이 시작되는 시간은,
이미 3개월전에 예보돼 있고 왕은 그시간에
맞추어 의식을 준비하게 된다.
문중양 선생 INT 정확한 시간에 왕이 준비하고, 일월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게 시간이 틀린다하면 그건 굉장한
사건이다. 왕으로써 제대로 반성하지 못하는 그런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일식을 맞이하기위해서 정확한 시간을 알고
있어야 돼고 이를 위한 정확한 계산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근정전 계단 18 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세종 4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났다.
[잠시 흘리고-]
이미 사전에 예보됐던 일이었기에,
세종과 대신들은 미리 소복을 입고
기다렸지만 실제 일식은 예보시각보다
15분 뒤에 있었다고 기록돼있다.
책SK 6 이와같이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식일지라도,
천문 연구원/안연구원 9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하면
정말 일식이 일어났었는지의 여부는
물론이고, 정확한 시간과 해가 어느 정도
가려졌던 것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개기일식 분석표 13 실험 결과, 세종 4년에 일어난 일식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관찰할 수 있었으며,
달그림자가 해를 완전히 가리는
개기 일식이었다고 한다.
식의 진행상황 타이트 7 일식이 시작된 시각은 12시 3분,
2시간 40분동안 진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안영숙 선생 INT 12시 3분에 일식이 시작되어서.....
~굉장히 정확하게 계산을 했구나 하는걸
행성 운행 22 정확한 예보를 위해서는,
행성의 위치나 운동 법칙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역법체계와 표준 시각의 정비가 필수적인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역법은 세종대에 이르면,
오차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정밀했다고 한다.
이은희 선생 INT 해와 달이 어느정도 가리게 되는지, 100% 혹은
부분적으로 가리는 부분일식인지.... 계산의 정확도는 몇각
몇분 몇초까지-
궁궐 건물 SK 13 [빨리 읽어야 함-]
세종이전, 조선에서는 매년 중국으로부터
역서를 받아와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월식의 예보가 조금씩 틀리는 일이
계속됐다.
칠정산 내외편 8 이에 세종은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서를 만들라고 명령한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것이 칠정산 내외편이었다
책 내용 SK 14 이것은 수많은 천문기구를 만들어
직접 하늘을 관측하고, 북극고도와 위도를
서울에 맞춰 하늘의 운행을 재정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성래 교수 INT 이것은 그야말로 세계에서는 가장 앞선것이었다.....
~몇월몇일몇시까지 갈것인가 하는 것이 계산되는 것이다.
칠정산 내외편 내용 5 칠정산 내외편의 완성으로,
초단위까지 기록된 내용 15 조선에서는 행성의 움직임을 초단위까지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된다.
이 시기이후, 일월식의 예보가 틀렸다는
기록은 당분간 보이지 않는다.
일년의 길이 8 뿐만 아니라 1년의 길이를 365. 2425일로
계산해낼 정도로, 오늘날에 버금가는 역법의
정밀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용삼 교수 INT 역을 만드는 것은 천자의 나라인 중국의 황제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그당시엔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대외교로 중국에서 역법을 받아서 사용했기 때문에....
~비밀 프로젝트로 우리의 자주적인 역법인 칠정산
내외편을 만들게 됐다.
박성래 교수 INT 1440년대 현재 서울기준으로 모든 천문계산을 해서 물론
중국으로부터 배운 것이지만 우리에 맞는 천체....
~전세계에서 일식을 자기 기준에 맞춰 예보할 수 있는
데는 중국, 아라비아 우리뿐이다.
천문 기구들 31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글을 만들었듯이-
우리의 시간과 중국의 시간은
~13 자격루 모형도 C/G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우리만의 시간을 갖고자 했던 것이다.
~20 세종 사진 재위초부터 시간관측 사업을
줄기차게 추진해온 세종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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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시간은,
우리가 중심이 된 새로운 기준을 통해서
직접 만들어 쓰겠다는 것이었으니,
세종의 자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에, 우리만의 역서인 칠정산을 만들었고,
스스로 하늘을 관찰하고,
시간을 측정하는 대 사업을 벌였던 것이겠지요.
이같은 시간 측정사업을 통해 왕조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농사에 필요한 절기와 계절의 변화까지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됐으니,
농본국가인 조선으로서는 백성들을 위해 실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반전-]
그런데 시계라는 것이, 조선시대 일반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을 가졌던
것일까요?
오늘날에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생활 필수품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과거에는 어땠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으십니까?
국가에서 알려주는 것외에는 달리 시간을 확인하고 알아볼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요?
[부채 꺼내서 보여주고-]
이것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노리개 같기도 하고, 나침반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물건은 휴대용 시계입니다.
민간에서도 시계를 사용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과연,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시계를 사용했고,
또 어떻게 시간을 측정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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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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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해시계들 16 조선시대, 민간에서 주로 사용하던
시계는 해시계였다. 규모는 작지만,
그 종류와 디자인면에서는 매우 다양한
시계들이 남아있다. [이하 흘리고-]
[휴대용 시계들 나오면-]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휴대용 시계들이다.
앙부일구/손에 올리고 14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이 시계는
크기가 성냥갑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듯 당시 선비들은
이런 시계를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선추시계 손에 들고- 5 [흘리고-]
정원용 해시계 13 [3-4초 흘리고-]
시계를 만드는데 이용된 재료 또한,
무척 다양하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이나 나무는 물론이고, 상아나 대리석등을
대리석제 해시계 5 이용한 고급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목제시계 4 [흘리고-]
자시계 6 [흘리고-]
평면 해시계 5 해시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간에서 가장 널리 쓰인 시계였다.
서양식 자명종 10 그러나 기계식 시계가 발명된 이후,
다른 나라에서는 해시계의 전통이
급격히 사라진다.
앙부일구 20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조선말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세종때 만들어진
앙부일구때문이었다.
~9 앙부일구의 글씨들
[잠시 흘리고-]
솥단지를 엎어놓은 듯한, 이 독특한
모양의 해시계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창작품이었다.
세종실록 기록 21 이 앙부일구는,
민간에까지 시간을 전파하려는
세종의 노력으로 탄생한 시계였다.
~8 내용발생 [잠시 보고-]
창제 동기를 통해
세종은, 이것이 대중을 위해 만든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정연식 교수 INT 시간에 대한 관념이 가장 왕성했던때는,
~다른 시대와 다른 점은 일상 생활에 쓰는
시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광화문쪽에 있는 혜정교와
종묘입구에 해시계를 만들어서 일반인들에게 시간을
알게 했으니까요.
옛혜정교 자리 14 세종때 처음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와 종묘 앞쪽에
하나씩 설치됐다.
오가는 이들이 시간을 볼 수 있도록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
앙부일구(물레돌기) 8 [잠시 보고-]
이 오목 해시계의 가장 큰 장점은
부피가 작고 간편하단 것이다.
[한호흡 쉬고-]
영침그림자 움직이고 7 다른 도구없이 태양의 그림자만으로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설계돼 있다.
이용삼 교수 INT 하늘에서 운행하고 있는 태양의 운행모습을....
그림자를 보면 현재의 시간과 현재의 절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C/G 절기와 고도 20 태양의 그림자는 고도에 따라 그 길이가
달라진다. 태양의 고도가 높은 하지에는
가장 짧은 그림자가, 동지 때는 가장 긴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이같은 원리를 이용해, 앙부일구는
시간뿐 아니라 절기까지 확인할 수 있는,
달력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차에서 물건 내리고 6 그렇다면 앙부일구로 측정한 시간은
얼마나 정확할까?
설치중 3 한국과학사물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실험해 보기로 했다.
나침반 3 [흘리고-]
앙부일구 4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앙부일구의 침이 정북을 향하도록
물붓기 5 놓은 후, 수평을 맞춰야 한다.
앙부일구 FS 4 [흘리고-]
시간 표시 C/G 3시37분 20 [급하게 읽어야 함]
침이 가리킨 시각은
~12 시계 +30분=4시7분 3시 37분 전후, 우리가 사용하는 시계와는
30분 가량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시간이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이보다 더 서편에 위치한 서울을 기준으로
본다면 앙부일구의 시간이 오히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앙부일구 7 [한호흡 쉬고-]
조선 사람들의 생활리듬에 맞춰
정남일구 13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그 실용성 때문에,
조선의 대표적인 민간 시계로 명맥을
이어가게 됐고 이후 제작된 해시계들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복원된 간의 40 [잠시 흘리고-]
시계, 이것은 500년전, 조선만의 시간을
갖고자 노력했던 세종의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2 C/G 이같은 노력은 조선의 천문학과
시간 측정 사업의 기초를 닦게 만들었고,
나아가 세종대를 조선의 과학 르네상스
시대로 만들게 된다.
거대한 천문관측 기구는 물론이고,
백성들이 쓰던 소박한 해시계 하나까지도
바로 이시기, 세종대 과학 기술의 성과가
만들어낸 창작품인 것이다.
~33 밤하늘의 일성정시의 [이하 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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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뒤쪽의 시계들 돌아보면서-]
500년전, 세종이 이처럼 다양한 시계들을 만들었던 것은
개국직후 왕조의 권위를 세우고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시간 관측사업은 이같은 명분 세우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표준시계라고 할 수 있는 자격루를 비롯해, 간의 등
대규모 정밀 시계를 제작한 것은 물론이고-
앙부일구와 각종 해시계 등을 만들어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서도
널리 사용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500년전 조선사회는
백성들까지도 시계를 가질 수 있었던,
전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시계 왕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확한 시간을 향한 이같은 노력은,
당시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고,
지금은 그 용도조차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이 과학 유산들이,
찬란했던 시계왕국, 조선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16회 : 중국속에 또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왕국
방송일: 20010526 조회수 : 6234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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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중국속에 또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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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조선역사(5초) 육당 최남선의 국민조선역사에는
글자-이정기(5초) 우리의 다른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이름 하나가 있다.
-글자 뜨고
책 줌인-기록뜨고(12초) 이정기.
-잠시 기록 보고
최남선은 그를 중국내 광대한 지역을 총괄했던
고구려 유민이라고 일러준다.
차 달리고(14초)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후손.
이정기는 어떻게 중국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수 있었을까?
천이백년전 중국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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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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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 (오프닝)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표시된 고지도 배경으로
이정기란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도 아주 낯선 이름일 것입니다.
이정기는 732년 중국에서 출생해 781년 사망한,
그러니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같은 우리의 역사기록보다 중국의 기록속에
그의 이름은 훨씬 더 많이 등장합니다.
#지도상 중국 대륙 가운데로 손 넣고 뽑아든다.
#책 하나 뽑아들면 제목 읽고/빠르게 다섯 권 정도 뽑아든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책부원귀, 문헌통고
모두가 8세기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당나라때의 기록들입니다.
이 기록들은 모두 이정기라는 인물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럼 이중에서 구당서 열전편에 실린 한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구당서> 열전 이정기전 중에서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다./평로 치청 절도사로 15개주를 다스렸다.
#<자치통감>중에서
세금을 징수했다.
이 기록을 보면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인데, 당나라에서 절도사라는 지방관리를
지냈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절도사라면 지금의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같은
지방자체단체장인 당나라 관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방관리가 세금을 걷어 중앙정부에 내지 않았다?!! (*의아스러운듯)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지방관리가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그건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독립된 국가라고 볼수도 있지요.
#분위기 바꿔주고
그렇다면 고구려 사람 이정기는 중국 대륙속에 나라를 세웠던 것일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은 중국 현지 취재를 통해 이 이정기의 나라가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 지
추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이정기 나라의 첫 번째 수도로 알려진 중국 청주로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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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차 달리고-지도(7초) 중국 베이징으로부터 8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청주시.
차 계속 달리고-거리(17초) 8세기 치청군의 거점도시였던 청주는 당나라의
번성했던 도시중 하나다.
-잠시 포즈
그렇다면 지금 이곳 청주에서 이정기의 행적을
찾을수 있을까.
박물관(6초)
간판(4초) 청주의 역사를 한 눈에 볼수 있는 청주박물관.
걸어들어가고-현판(7초) 중국내에서 유물이 많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내부(6초) 당나라대의 유물을 전시해둔 곳에서
손으로 가리키고(5초) 어렵지 않게 이정기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이정기 줌인(7초) -3초보고
이곳에 기록된 이정기는 이런 사람이었다.
이정기 자막-설명(8초) 고구려 사람으로 산동성 일대를 다스렸으며
그의 통치로 백성들은 편안하고 나라는 번성했다.
-잠시포즈
자막 빠지고(6초) 바로 당나라때 청주의 대표인물은 이정기였던
것이다.
인터뷰/샤망차이 청주박물관 부관장
수 당나라이래 평화시기. 이정기시대에 큰 경제발전있었다.
이정기가 통치하는 동안 청주는 전성기였다.
성 줌인(7초) 그렇다면 당시 이정기의 행적을 알려줄 유적은
없는 것일까.
성벽 pan (11초) 현재 청주시 박물관이 있는 자리가 예전 청주성
자리다.지금도 박물관 주변엔 옛 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명나라 성벽-벽돌성 틸다운(8초) 성벽의 바깥쪽은 벽돌로 쌓아올렸다.
이건 명나라때 만든 것으로 알려져있다.
성벽(6초) 그런데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벽돌만으로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성(8초) 성벽안쪽으로 토성의 흔적을 발견했다
현장오디오/샤밍 차이
이 성벽은 옛 칭저우 성벽이다. 밖에서 보이는 벽돌은 명나라때, 안에 있는 성벽은
당나라때 것. 이정기가 통치할 때 보수한 성이다.(14초)
성벽 틸 업(6초) 후대 사람들이 성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벽돌을
사용했지만 당나라때는 토성이었다.
줌인 토성으로(7초)
해자 pan 성(11초) 이 성의 주변엔 적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해자가 아직도 남아있다.
-잠시 포즈
강물(4초) 이 성은 이정기의 성일까.
성벽 오르고(5초)
성벽 전경-청주시외곽토성(14초) 성의 흔적은 청주시 박물관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외곽지역에도 남아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박물관에서 여기까지는 성벽이
이어졌다고 볼수 있다.
성벽위 pan (8초) 성벽의 맨 윗부분은 말을 달릴수 있을 정도로
넓다.
해자터(9초) 외곽 성터 주변 밭이 있는 자리는 예전에 강이
흘렀다고 한다.
해자가 여기까지 이어져있었던 것이다.
그래픽/청주성 (9초) 현재 남은 유적을 토대로 정리해보면 옛 청주성은
성의 둘레 자막(6초) 주변에 해자가 있는 토성으로 그 길이가
최소한 13킬로미터나 됐다.
그래픽/성 단면도에 나타난 크기(12초) 성의 높이는 대략 20미터.가장 윗부분의 넓이는 6미터.
웬만한 공격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거대한 성이었다.
성벽위 걷고(6초)
기와 줍고(4초) 지금도 성벽 주변에선 많은 기와파편들이 발견된다.
기와들(8초) 여러대에 걸쳐 청주성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기와들이다.
대화나누고(4초) 취재팀은 여기서 당나라때의 기와편을 발견했다.
우상무늬파편(8초) 새의 깃털 모양이 새겨진 이 기와편은
청주성이 당나라때 세워졌음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인터뷰/샤밍차이
황제문양은 용, 일반적인 것은 새의 깃털.이것은 당나라 이정기 시대의 것이다.(12초)
건물 들어서고(5초)
책 꺼내오고-보고(13초) 당나라때 세워진 이 고성을 이정기 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잠시포즈
청주시 박물관 부관장인 샤밍차이씨는 역사상
청주시가 가장 번성했던 때가 바로 이정기 시대라고
샤밍차이 얼굴(3초) 말한다. 따라서 성의 주인은 이정기라는 것이다.
그래픽/기록..청주시지(18초)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청주시지의 기록이다.
청주시지는 이정기의 군사는 10만명에 달했고, 주위
번진들이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인터뷰/왕샤이즈 산동성 사회과학원
이정기는 중국내 번진 가운데 가장 큰 번진. 군사력 막강. 힘이 셀때는 15개주 점령.
군인 수 10만명. 작전 능력 뛰어났다. 번진 북부 지역 청어, 웨이버와 전쟁에서
모두 이겼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당나라 최대의 번진이라 했다. (23초)
그래픽/치청 신라 면적비교(16초) 당시 청주를 거점으로 한 이정기의 치청군 면적은
산동성과 안휘성 강소성 일대까지 포함하고 있어,
통일신라보다도 넓었다.
그래픽/치청 신라 인구비교(11초) 인구수 또한 540만명에 달해 통일신라보다 많았다.
당시 중국내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것이다.
거리(5초) 그때 이정기의 공식 지위는 평로치청 절도사.
거리-자막(20초) 그러나 기록은 그가 관직과 군대, 세금과 형벌을
독자적으로 운영했다고 전한다.
-잠시 포즈
당 조정에서조차 그를 막을 수 없어, 벼슬만
높여주었다는 것이다.
인터뷰/샤밍차이
이정기 독립적인 나라, 그는 정치적 수단 동원해 당나라에 압력, 그가 살던 시기는 혼란된
시기. 자체적인 법률 있었다는 점이 왕국이라 생각게 한다.(23초)
자치통감(6초) 이정기 왕국은 자치통감에도 언급돼있다.
그래픽/기록 (16초) 비록 그의 신분은 당나라의 지방관리였지만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하나의 국가와 다름없었다.
이정기는 한 국가의 통치자였던 것이다.
차 달리고(23초) -잠시보고
세금이 적고 법령이 안정됐던 8세기 청주.
이정기라는 강력한 통치자의 보호아래 관직과
형벌까지 공평하게 집행되던 그때, 청주는
역사상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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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당나라 지도 펼쳐지고-이정기가 관할하던 15개주 표시(이정기의 영토)
#터치 스크린으로 지점 하나씩 짚을 때마다
색이 나타나고, 지역 이름이 나타나고
청주를 중심으로 한 이정기의 관할지역은 주변 15개주에 달했습니다.
동쪽으로는 황해연안의 <등주>에서 <체주>까지,
서쪽으로 보면 위로는 황하 유역의 <북주>, 그리고 아래로는 운하를 통해 중국 전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 <서주>까지 그 세력이 미쳤습니다.
영토가 넓기도 했지만 당시 이 산동성 일대는 당나라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한
지역입니다. 한 마디로 이정기는 당나라의 알짜배기 땅을 모두 차지한 셈입니다.
더욱이 비록 공식적으론 당나라의 지방관리인 절도사였지만
많은 영토들은 당 조정으로부터 관리를 위임받은 땅이 아닙니다.
이정기 군대가 싸워서 확보한 영토입니다.
#분위기 바꿔 걸으면서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정기가 절도사가 된 것이 765년이고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 유민 출신이지요.
이미 백년 전에 망해버린 나라의 후손이 어떻게 이토록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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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그래픽/책(5초)
기록/이정기 고구려인 평로출생(16초) 이정기 일대기를 자세히 기록한 구당서에 따르면
이정기는 고구려인이며 평로,
즉 지금의 중국 조양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조양 줌인(9초) 조양시는 중국 동북지역의 중심도시로
영주라고도 불리던 곳이다.
거리(9초) 기록을 검토해보면 이정기가 태어난 것은 732년.
당시는 당나라 현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였다.
마을 pan 산성(8초) 그렇다면 고구려인 이정기는 어떻게 이곳 조양에서
태어났던 것일까.
고구려 멸망(14초) -고구려 멸망 자막 지나가면
668년 당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됨으로 대제국 고구려는 패망했다.
성벽에서 바라본 마을(6초) 그러나 고구려의 재건을 두려워한 당나라는
2만8천호에 달하는 고구려인을 중국각지로
강제이주시키기 시작한다.
그래픽/고구려 유민이동경로(13초) -그래픽 5초 보다가
고구려 유민들은 장안으로 운주로 혹은 발해로
흩어졌다.그때, 중국으로 끌려온 유민들이
그래픽/줌인 영주(4초) 반드시 거쳐가는 곳, 그곳이 바로 영주, 지금의
조양이었다.
인터뷰/동가오 조양시 북탑문물관리소장
동북지방 소수민족 시단족 무허족 고구려민족 영주와 영주 근처에서 살았다 (20초)
그래픽/기록 -잠시보고
후희일을 절도사로 옹립 조양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 가문에서 태어난 이정기는
군인의 길을 걷는다.
후희일어머니는 이정기 고모 (21초) 768년 서른 셋이 되던 해. 그는 사촌형을 절도사로
옹립하는 일을 주도한다.
한마디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잠시 포즈
고구려 유민출신이 당나라 군대안에서 어떻게
이처럼 세력을 키워갈수 있었을까.
인터뷰/왕샤이즈
당나라 징병 방법은 다른 왕조와 다르다. 소수민족을 군관 군사로 모집
그래서 고구려인 기타 민족 사람들 자기 지역을 관리하게 했다. 변방 지역 한족 사병은
3분의 2를 넘을 수 없었다. 평로군의 경우 3분의 1이 고구려인이었다 (23초)
북탑 줌인(7초) 당시 영주, 즉 조양은 당나라의 동북지역 군사
요충지였다.
거대한탑(10초) 42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탑은 중국 왕조가
이 지역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게해준다.
안으로(5초) -3초보고
8세기 당나라 최대의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도
그림 가리키고(5초) 바로 이곳 조양을 본거지로 활동했다.
그림/안록산(7초) 안록산은 이곳의 절도사가 된 뒤 그 세력을 키워
안록산(8초) 755년 대대적인 당나라 공격에 나선다.
그때 이정기의 나이 23세.
당나라 평로군의 군인이었다.
현장오디오/이것이 안록산인가? 당나라때 그는 이곳의 자사를 지냈다 (16초)
인터뷰/지배선 교수
안록산도 당나라로보면 이민족. 이정기도 이민족. 먼저 당나라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안록산이지만 이정기는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당의 명령을 받고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상하게 되는 관계에 있다.(28초)
그래픽/영주로 무빙(9초) 당 조정으로부터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평로군의 군사 2만명은 이정기의 지휘아래
그래픽/화살표 등주, 청주로(13초) 발해만을 건너 등주로 향한다.
그때 그의 군사중 대부분은 고구려 유민출신이었다.
전쟁이미지(24초) 이정기의 군대는 산동성일대에서 안록산의 군대와
여러차례 전투를 벌여 나간다.
-잠시포즈
그러나 그 무렵 당 조정은 안록산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변방 각지에서 군대를 모집한다.
그때 합류한 진압군중에 가장 뛰어난 군대가 회홀,
위구르족이었다.
그래픽/기록 이 회홀은 이정기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이정기가 회홀과 각축(24초)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잠시 포즈
여러 민족들이 모인 당나라의 진압부대내에서
이정기는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회홀과 대련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용맹하다는 회홀도 이정기를 이기지
못했다.
인터뷰/지배선
이정기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이정기라는 이름을 중국 병사들, 절도사들에게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볼수 있다. 그때 이정기가 회홀의 병사을 꺽음으로써
그후에는 회홀의 병사들의 오만함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는 이정기가 내부적으로
회홀을 진압했다고 표현할수 있다. (29초)
그래픽/기록
후희일 이정기가 직위해제(13초)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대를 장악한
이정기는 절도사의 자리에 오른다.
그래픽/기록 절도사는 황제가 임명하는 자리
후희일 도망, 이정기 절도사로(8초) 그러나 이정기는 스스로 절도사가 된것이다.
군사들 이미지(22초)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동북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던 이정기는 765년.
평로 치청절도사라는 이름으로 중국 역사에 등장한다.
이것은 중국 대륙속의 고구려 왕국, 이정기왕국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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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서재에서
#앉았다가 일어나 걸으면서
당시 절도사는 일반인들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비록 형식은 황제가 임명하는 것으로 돼있지만 지산의 관할지역에선 황제와도 같은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정기가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대를 장악하게 되자 당나라 현종은 그 절도사
자리를 두 개나 내립니다. 당나라 황제의 신하임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이정기에겐 많은 관직들이 주어집니다.
#이정기가 받았던 7가지 정도의 직위 이름 허공에 뜨고
이것이 이정기가 당 조정으로부터 받았던 작위들입니다.
절도사말고도 해운압 발해신라 양번사라는 관직이 추가됐고, 요왕군왕이라는 작위도 받습니다.
#해운압 발해신라양번사 글자 확대되고
이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이 바로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라는 관직입니다.
<해운압발해 신라 양번사>
이건 당 조정이 바다를 통해 이뤄지는 발해, 신라와의 외교업무를 이정기에게 맡겼다는
뜻인데요.
이 직책을 통해 이정기는 자신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키는 전기를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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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등주-바다(10초)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최단거리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도시 등주.
포구(8초) 중국으로 가는 국가간 공식 사신단은 물론,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가 바로 등주다.
멀리 바다 줌인(13초) 이정기가 이 등주 일대를 장악한 것은 765년.
그것은 곧 중국의 외교업무와 무역을 장악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픽/기록 자막(20초) 이때부터 20여년간
기록에 따르면 발해와 신라의 사신단이 활발하게
중국을 오고 갔다. 일년에 두세 차례씩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업무를 모두 이정기가 관장한
것이다.
인터뷰/지배선
해운이라고 하는 것은 바다통로, 압이라고 하는 것은 관장한다는 의미가 된다고 보면
되겠죠. 그러니까 신라와 발해에 교통로를 다 관장하고, 바꿔말하면 발해 신라의
사신은 반드시 이정기를 경유해가야한다는 의미가 된다.(20초)
차 숙성촌 달리고(8초) 국가간의 공식외교가 활발해지자 일반인들의 왕래
또한 크게 늘었다.등주 주변 각 도시에는
마을(5초) 신라인들의 마을이 생겨날 정도였다.
자막-기록 이정기가 다스리고 난 뒤 20년후에 이곳을 여행한
엔닌일기중 신라방 관련 (12초) 일본 승려 엔닌이 그 신라인 마을의 존재를 말해준다.
기록/구당서 더욱이 이정기 영토안에선 당시 귀하기로 소문난
발해명마 거래(17초) 발해의 명마가 해마다 끊이지 않고 거래됐다.
외교업무를 맡았던 이정기가 이를 통해 대외무역까지
장악했음을 알게하는 대목이다.
인터뷰/지배선
발해교역시 인질을 갖다 당나라에 두었던 것이 이정기가 있기 전까지 많았다.
이정기가 있고나서는 한번인가?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는 이정기가 발해의 역할을
상당부분 대신해 주었던 것 같다. 이정기는 발해와의 교역에서 많은 얻은 것이
기록되어 있다. 발해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물자를 얻는 데도 이정기가 한몫을 했다.
그래픽/지도-영주, 발해(3초)
그래픽/지도-신라와 일본,항주(11초) 이정기의 세력은 이제 중국 대륙을 벗어나
그래픽/지도-신라 바다돌아 부산(3초) 발해와 신라,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8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중심은 이정기였던
것이다.
차 달리고(7초) 이정기 왕국은 국제교역뿐 아니라 자체생산력으로도
큰 부를 획득했다.
그래픽/곡물생산량 비교 (14초) 이정기가 다스리던 산동성 일대는 곡물생산량이
당나라 전체 생산량의 10%이상을 차지하는 중국내
가장 비옥한 영토였다.
염전(14초) 더욱이 중국 동쪽 해안가를 따라 거대한 염전이
조성돼있었다. 이 염전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내려오는
중국내 최대 규모다.
소금 퍼 올리고(5초) 당시 소금은 황금에 비유될 정도로 귀한 특산물이었다.
소금(4초) 따라서 당나라 전체 소금생산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만져보고-소금(7초) 이정기는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가게 된다.
그래픽/지도-소금생산지역(10초) 이정기 왕국의 생산력은 전 지역에 걸쳐 고르게
분포돼있다.밀주 체주에선 소금이 생산되고
그래픽/지도-철, 동생산지역(14초) 해주와 연주 기주 등지엔 철과 동이 풍부했다.
이곳의 생산량에 따라 당나라 전체의 물자 공급이
좌지우지 될 정도였다.
그래픽/지도-비단생산지역(11초) 체주 복주등에서는 당나라 전체 생산량의 30%가 넘는
비단이 생산됐다.
당나라의 주요물산을 이정기가 장악해버린 것이다.
인터뷰/샤밍차이
산동은 경제근원지. 수산 농산 풍부, 역사적으로 튼튼한 경제기반 있었기에
중앙과 맞설 수 있었다.(24초)
바다/자막 뜨고 (22초) -5초보고
766-779 1년에1회이상 그런데 779년부터 이정기가 관장하던 당나라의 대외업
779-814 총 7회 대외관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먼저 신라의 공식사신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35년동안 총7번 왕래했다면 외교관계가 거의 단절됐음
을 의미한다.
바다-물살(13초) 양국간의 특별한 마찰이 없었다는 점을 놓고보면
이건 분명 이정기가 당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정기가 서서히 당 조정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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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서재에서
당의 외교업무를 장악하면서 거대한 경제력을 확보해가던 이정기는
그러나 779년부터 조금씩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합니다.
우선 자신의 거점을 청주에서 운주로 옮깁니다.
한마디로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지도/청주와 운주 반짝반짝 시작되고
운주는 황하강 유역의 도시로 중국의 수도 장안과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수도를 옮길 때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텐데요.
이정기가 이런 대대적인 이동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때는 이정기가 내륙 5개주를 추가로 점령하고
명실공히 중국내 황제 다음가는 최대 세력으로 부상하던 때였습니다.
당나라 입장에서 보면 강력한 군대,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세력이
수도 가까이 접근해 들어오는 상황입니다.
당나라로서는 우려하던 일이 결국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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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차 달리고(14초) 이정기 왕국의 제2의 수도, 운주.
그 위치를 놓고 볼 때 운주는 지금의 동평현 부근이다.
취재팀은 동평현에서 이정기의 운주성을
이정표(5초) 찾아보기로 했다.
현장오디오/경찰과 대화...교차로 2개 지나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차 달리고(8초) -3초 보고
동평현은 황하강을 끼고 있는 중국 내륙의 도시다.
자전거타고 가는 사람들(6초) 그러나 시내 중심부에선 옛 성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현장오디오/오래된 운주성이 어디인가? 모른다..
들어보지 못했다.
차 달리고(9초) 이번엔 도심 바깥쪽을 살펴보기로 했다.
할아버지 만나고(7초) 이정기가 쌓았다는 두 번째 성. 운주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현장오디오/동핑 저쪽이다. 오래된 성 저기 있다. 15리 더 가면있다. 물에 잠겨있다.
차 달리고(5초) 거리에서 만난 노인은 동평현의 옛 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사장에서 묻고(8초) 노인의 말에 따라 10여분을 더 달려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현장오디오/지금 남아있는 건 없다. 성은 물에 잠겼다.
호수쪽으로 나가고(15초) 이 마을 사람들은 옛 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진으로 성이 파괴됐고, 물에 잠겼다고 한다.
그러면 전혀 성을 볼수 없는 걸까.
동핑호 pan(10초) -5초보고
마을앞에 펼쳐진 거대한 호수, 동평호.
강물(5초) 마을 사람들이 가르쳐준 곳이 바로 여기다.
줌인 철책(11초) 이 호수속에 옛 운주성이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인터뷰/우자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이 근처일거다.
배 타고 나가고(8초) 취재팀은 혹시라도 호수 부근에 남은 유적은 없는 지
점검해보기로 했다.
배 가고-호수(11초) -5초보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호수인 동평호는
현재 동평현에서 관광지로 개발중이었다.
섬 다가서고(7초) 호수 가운데 떠 있는 섬 하나를 발견했다.
호수가 생기기전 저 섬은 육지였을 것이다.
취재팀 걷고(12초) 옛 운주성의 흔적을 찾고있다는 말에 마을 주민들은
한 공사현장으로 취재팀을 안내했다.
공사장-비석(7초) 섬에서는 오래된 절터를 발굴해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여러 비석들(6초) 주민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공사도중 수습한
마을의 옛 유적들이었다.
설명하고(5초)
대명(8초) 깨어진 비석 조각들을 살펴봤다.
이것은 명나라때 유적이다.
설명듣는 피디(3초) 섬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대청(11초) 명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정기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유적이다.
풀밭사이 걷고(6초) 그렇다면 애당초 이 부근엔 운주성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기와파편들(7초) 이정기 성이 있었다면 최소한 그때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조사하는 모습(4초)
당대벽돌 보고(9초) 결국 취재팀은 마을 들판에서 당나라대의 문양이
새겨진 벽돌을 찾아냈다. 이정기 시대의 흔적이다.
호수 전경(12초) -5초보고
그러나 더 이상 이정기의 두 번째 성, 운주성의 자취를
찾아볼수 없었다
돌(3초) 779년 청주를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그는 왜
맷돌(10초) 이 황하강변으로 수도를 옮겼을까.
그가 이곳에서 하려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문물관리소 가고(13초) 유적을 찾을 수 없었던 취재팀은 동평현
문물관리소에서 관련 기록을 검토해보기로 했다.
기록넘기고(4초)
고민하고(4초) 우선, 운주성이 왜 호수속에 가라앉았는 지
찾고(5초) 그 정확한 이유부터 점검했다.
기록/운주는 황하범람으로(13초) 동평주지에 따르면 운주성이 호수속에 가라앉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천년전의 일이었다.갑작스런 황하의
범람이 그 이유였다.
지도보며 설명(9초) 황하 유역의 도시들은 이렇듯 항상 범람의 위험에
노출돼있다. 그런데도 이정기는 왜 이곳을 선택했던
것일까.
그래픽/지도-청주에서 운주로(10초) -3초보고
이정기 영토안에서 보면 운주는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해있지만 당나라 수도와는
그래픽/지도-낙양,장안(7초) 아주 가까와진다.
이정기의 목표는 당나라 수도였던 것이다.
인터뷰/지배선
운주로 갔던 것은 낙양과 가깝다.직선거리로 200킬로미터. 그것은 이정기가 국가,
더 나아가 황제를꿈꾸면서 당나라에 대항할 의사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것은 구당서 이보신전에 보면 기록이 있다. 보신과 정기는 이제다.하는 말.
바꿔 말하면 이보신과 이정기는 두 황제였다.라고 하는 기록.
그렇기 때문에 이정기가 낙양 가까운 운주성으로 치소를 옮긴 것이다.(40초)
그래픽/제음(7초) 운주로 성을 옮기자 이에 당황한 당 조정은 변주에
성을 쌓고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그래픽/변주축성(3초) 이정기의 군대는 제음 일대에서 대대적인 군사훈련
그래픽/치청 깃발 들어오고(13초) 을 단행한다.
그러나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이정기의 10만 대군은
속속 제음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제음벌판(6초)
넓은그림(18초) 당의 입장에서 보면 이정기는 황제가 임명한
지방관리인 절도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미 이정기는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당나라와 이정기와의
전쟁은 피할수 없는 대결이었다.
그래픽/기록(17초) 그 무렵,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발생한다.
이정기는 성덕절도사 임명과정에 개입해,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을 임명하라고 요구한다.
이정기 반란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전투이미지(22초)
-잠시 포즈
고구려를 패망시켰던 당나라와 고구려의 후손이
세운 나라 , 이정기 왕국.
그 결전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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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서재에서
#VCR 마지막 그림 모니터로 보고 있던 유인촌씨 분위기 바꿔 멘트
이정기와 당나라와의 결전은 처음부터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무렵 이정기는 당 조정의 절도사 임명에 관여할 정도로 당당히
당나라와 맞서기 시작합니다.
당나라 입장에서 보면 이건 황제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위협을 느꼈음은 당연한 일일겁니다.
이정기의 당나라의 한 판 대결.
과연 그 전투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정기 영토 그래픽중 제음 반짝/변주 반짝
당시 이정기는 이곳 제음 일대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당나라는 변주에 성을 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강, 변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위 그래픽에서 장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강물 색 변하고 강조
누가 승리하느냐, 전투의 승패는 바로 이 강의 운하에 달려있었습니다.
(스튜디오의 지도 그래픽 확대되면서 VCR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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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강물 줌아웃(13초) 이정기와의 결전이 다가왔음을 감지한
당 조정은 군사들에게 하나의 지령을 내린다.
기록/이정기 반란,용교 와구 지켜라(17초) -7초 보다가
용교와 와구를 지켜라.
당나라가 결코 이정기에게 내줄 수 없었던 곳
용교와 와구. 당나라는 왜 그곳을 지목했던 것일까.
그래픽/운주 조주(7초)
그래픽/돌아서고(4초) 당시 이정기의 중심 활동무대는 운주와 조주.
그래픽/서주 용교(3초) 하지만 용교와 와구는 그보다 훨씬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그래픽/용교 줌인(3초)
차 달리고(9초) 당나라 때 용교로 불리던 곳은 지금의 숙주시
부근이다.
거리 부감(13초) -3초보고
중국 남부지역에서 북부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숙주는 남부의 식량과 물산이 집결하던 도시다.
거리 사람들(9초) 숙주시 사람들은 그때 불리던 이름, 용교를 지금도
많이 기억한다. 거리 곳곳에서 용교라는 이름이
용교 간판들(10초) 들어간 간판을 쉽게 볼수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 때 용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낙천원(6초) 당대 최고의 시인 백거이를 기리는 낙천원.
백거이 동상-이름(9초) 백거이는 이정기가 활동하던 무렵,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용교별업도(7초) 그때 백거이가 그린 용교별업도속에
당시 모습이 담겨있다.
그림/강가-다리(6초) 시내 한복판으로 강이 흐르고, 다리가 놓여져있다.
그림/배오고(9초) 배들이 연이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이 강은 상당히
크고, 수심도 깊었음을 알 수 있다.운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건물-다리(4초) 당시 용교는 이 강으로 인해 번성했던 도시였던
것이다.
거리 걷고 (9초) 그렇다면 지금 그 강은 어디에 남아있을까.
-잠시보고
용교루 줌아웃 옆으로(13초) 숙주시 문물관리소 관계자는 바로 이곳을 지목했다.
-잠시 포즈
이곳이 바로 용교 다리가 있던 곳으로 남송시대부터
수백년에 걸친 도시의 토사의 유립으로 강이 사라져버
린 것이다.
인터뷰/기하 문물관리소 부소장
이 거리 중산거리 거리 전체가 강바닥위에 만들어져.
옛날에는 제방에 집 짓고, 가운데 다리 있었다.(15초)
거리 pan(11초) 바로 이 자리에 천이백년전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엔 운하가 건설돼 장안까지
식량과 물자가 이동했다.
인터뷰/기하
대운하 개통이후 남부 식량 북부에 조달해준다.
정치적으로 중앙정부에서 남부 통치위해 군대 주둔. 수 당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 했던 곳이다.
건물 틸다운 부감(15초) 용교의 운하를 지키는 일은 곧 운하를 통해 들어오는
남부의 거대한 식량과 물산을 지키는 일이다.
당나라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래픽 생성되고(13초) -5초보고
용교의 운하를 장악하라.
이정기와 당 양측 군사들에겐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석양-말 달리고(30초) -잠시보고
제음 벌판에 주둔해있던 이정기의 군대는 강을 따라
남하해 먼저 서주의 운하를 공격했다.
-잠시 포즈(5초이상)
서주 또한 장안의 식량수송선이 오가는 운하가 있는
지역이다.
-잠시포즈
빠르게 서주를 장악한 이정기 군대는 그 여세를 몰아
용교 부근에 집결해들어갔다.
그래픽/용교와 와구 전쟁 시작(26초) -잠시 포즈 (7초정도)
용교를 손에 넣으려는 이정기와 이를 수비하는 당나라
간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쪽은 이정기였다.
운하(15초) 장안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물길, 즉 서주와 용교의
운하를 이정기가 점령하자 당나라 수도 장안과
낙양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배 가고(6초) 식량과 물자가 공급되지 않는 경제 대공항 상태가
벌어진 것이다.
운하에 떠가는 배(9초) 물가는 뛰었고, 당나라는 식량을 구하려는 백성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당나라 최대의 위기였다.
인터뷰/왕싸이스
당 운하는 생명선이다. 북부와 남부를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운하를 통해 남부의 물산이
항저우 쑤저우 쉬저우에 도착했다. 이 운하는 당나라 존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거다.
차 달리고(23초) -5초 보고
이것으로 전쟁의 승패는 판가름이 난 듯했다.
운하를 손에 넣은 이정기에겐 대대적인 장안 공격만이
남았을 뿐이다.
-잠시 포즈
고구려 유민 출신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점령하려는
순간이었다.
석양-이정기 사망이미지(7초) 그러나 막바지 전투가 한창이던 781년 여름.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자막-사망(16초) -자막 뜨고
이정기가 갑작스런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병명은 악성종양.
평로치청 절도사로 중국 대륙에 모습을 나타낸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큰 강(6초)
작은 배 들어오고-배들(18초) 이정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용교의 운하는 당나라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다음해인 782년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이끄는
군대는 용교, 와구를 재탈환했고, 운하는 이정기왕국의
손에 들어간다.
그래픽/기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국을 통치하게 된 이납은
제라 칭하고 백관임명(18초) 전쟁을 마감한 뒤
국호를 제라 선포하고, 백관을 임명함으로
온전한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인터뷰/샤밍차이
법률과 군대, 제국과 같은 정치구조와 조직 있었다.
백성 부담 줄이고 안정된 나라를 추구했다.
배 가고(22초) 중국안에 세워진 고구려 나라
이납의 대에 이르러 더욱 강성해진 이정기왕국과
당나라간에는 피할 수 없는 또 한번의 전투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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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비록 이정기는 죽었지만 당나라 덕종과의 전투가 끝난 뒤 이정기의 나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지속됩니다.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나라 이름을 <제>라 선포하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 자리는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 이사고로 세습되어 갑니다.
#커튼식으로 화면 젖히면, 대형 지도 뜨고
그때 이정기 나라의 모습입니다.
중국내 물산이 풍부한 경제의 핵심지역은 모두 손에 넣었고,
운하를 장악함으로써 중국 경제를 좌지우지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바다를 통해 발해와 신라, 멀리 일본까지, 외교와 무역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이정기 나라는 8세기말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력적인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819년. 당 헌종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내지 못한
이정기의 나라는 55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마감하고 맙니다.
#잠시 포즈/분위기 바꿔주고
전쟁이 끝난 뒤 당나라는 군인만 천이백명을 몰살시킬 정도로 잔인한 보복조치를
내렸고, 주민들은 여러 지역으로 분산이주 시켰습니다.
한반도 출신 유민들의 집단행동을 원천적으로 막아보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정기에 관한 역사 기록들은 여기까지 기록한 뒤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이정기의 나라는 이대로 끝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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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서주박물관 줌인(11초) -3초보고
운하를 통해 중국의 남과북 동과 서를 잇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서주.
내부(5초) 당나라 남부 지역의 중심도시였던 만큼
당대유물(9초) 서주의 박물관에는 당대 유물이 보관,
전시돼있다.
역사용(13초) 유물들중 대부분은 당의 강성한 힘을 나타내는
것들이다.한때 이곳 운하를 점령하고 서주를
통치했던 이정기왕국의 자취는
전체모습(6초) 남아있지 않다.
방안(5초) 취재팀은 서주에 전해지는 역사기록들을 점검해보기로
했다.
책 꺼내고(10초) -5초보고
박물관에 보관돼있는 이 지역의 옛 기록중에서
얼굴(3초) 서주박물관장의 도움을 받아
책 넘기고(11초) 819년 이정기왕국이 패망할 당시의 기록들을 검토했다.
-잠시보고
장보고(9초) 그런데, 그 기록들속에서 뜻밖에도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장보고였다.
그래픽/이정기 토벌군(9초) 장보고의 이름이 이 서주에 남아있는 것은
그가 당시 무령군의 군중소장으로 이정기를 토벌하던
그래픽/무녕군 반짝(6초) 당나라 연합군에 소속돼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리인더
장보고 무녕군 참가. 이사도 포함 다른 군대 반란도 진압했을 것이다.
장보고 참여는 확실하지만 그가 몇 번 참가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36초)
청해진 줌인(24초) 그렇다면 이정기왕국과 장보고는 어떤 관계였을까.
현재 장보고에 관한 기록은 이정기왕국이
패망한 직후부터 10년간 공백상태로 남아있다.
-잠시 포즈
그가 다시 역사속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828년
청해진에서였다.
뱃길에서 본 청해진(17초)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최대 국제무역 조직을 이끌었던 그는
어떻게 10년만에 이런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
될 수 있었을까.
인터뷰/김문경
군대 있을 때 익힌 지식과 주변 신라인 고구려 유민 들로부터 얻은 정보들
이런 것들로 인해 장사하지 않았을까...그것으로 정치 외교기반 잡았다.(49초)
법화원 오르고(3초)
법화원(9초) 장보고의 국제 무역을 가능케 했던 것은 중국 산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재당신라인들로 알려져있다.
불상-그림들(24초) 그 신라인들은 이미 7세기이전부터 당나라에 들어와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모여 살았다.
때로는 배고픔에 때로는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이기지 못하고 당나라행 배를 탔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운하 주변에 모여 살게 되면서 장보고 무역의
핵심조직을 만들어낸다.
엔닌기록/밀주에 가면 신라인마을(10초) 그런데 당시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중국여행을 했던
엔닌일기에 따르면 밀주에 신라인마을이 있었다.
엔닌기록/등주에 신라관과 (10초) 등주에도 신라관과 발해관이 있다고 전한다.
밀주와 등주라면 그건 바로 이정기의 영토다.
그래픽/적산포 나오고(9초) 이뿐만이 아니다.
당나라때 신라인 마을이 있었던 지역중에서
그래픽/빨간색 영토표지(8초) 절반이상이 이정기 영토안에 속한다.
이정기 왕국에는 신라인들도 대거 살고 있었고,그들이
다시 장보고의 국제무역을 이끌었던 것이다.
인터뷰/김문경
갑자기 생긴 것 아니고 오랜시간 두고 생긴 거주지.
그러면 이사도 이사고 멸망이 819년 19년에서 20년 밖에 차이 안 나.
평로치청이 지배하던 그 당시 그 지역엔 우리나라 출신 사람들이 살았다.
운하 통한 신라인 거주지가 그걸 말해준다.
이정기 집단과 장보고와 모두 연결된다. (1분13초)
해뜨고(28초) 이정기 왕국이 패망하고 난 뒤
중국 동해안 산동성 일대의 한반도 출신 유민들은
장보고의 이름아래 다시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군사력이 아닌 경제력으로
다시금 중국내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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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클로징)
이정기 일가가 만든 중국내 55년의 역사는 바로 고구려 역사의 연장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곧 우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강한 군사력과 깨끗한 통치, 그리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당나라와 대항하며
당시 중국내에서 활동한 어떤 민족, 어떤 세력보다도 우수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정기의 나라를 평가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 때 이정기와 함께 나라를 이끌었던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은
그 나라가 끝난 뒤에도 중국내 한반도 출신 유민들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서로 협력하여 힘을 모았을 때 얼마나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는 지, 깨닫게 한 것입니다.
해상왕 장보고의 동아시아 국제 무역도 바로 그런 바탕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천이백년전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이정기.
그는 패망한 나라의 이름을 150년간 연장시킨 마지막 고구려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