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김희호 씨가 벌써부터 곁에 와 앉는다. 오늘의 할 일은 많지 않다. 1박 2일 여행 짐 싸기.
점심 먹고 나서 만나자고 했는데 벌써 내 옆에 앉아 계신다. 나만 바라보신다.
같이 할 게 없는 시간에도 곁에 있는 것이 자신의 선택이라고는 하나, 한 사람이 미련해 보이는 모양새가 될까 우려된다.
김희호 씨는 내가 집에서의 생활 외에는 모든 걸 같이 하리라 생각하고 계신 듯하다. 매일 “내일 또 와? 같이 해?”하며 물어보신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설명해 드려야 한다.
“희호 씨, 제가 실습생, 학생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이 또 있어요. 무엇을 배웠고, 느꼈는지 일기를 써야 해요.", "희호 씨, 저는 희호 씨의 여행을 돕고자 온 사람이잖아요. 희호 씨랑 여행 잘 다녀오기 위해서 지금은 제 할 일을 할게요. 그래도 될까요? 희호 씨랑 여행 갈 때 잘 다녀오려면 희호 씨는 희호 씨 할 일을 하고, 저는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때가 필요해요.”
이리 설명하여도 김희호 씨는 옷 다 싸뒀다며 곁에 앉아 바라보신다.
“합시다, 할까요?” 말하면 오고. 그전까지 기다리고. 이 모양새는 당최 무얼까.
“내일 뭐 할까요?”부터 물었어야 했다.
김희호 씨가 주도하는 여행 준비가 되도록.
김희호 씨는 이것을 오늘 하고 싶을 수도 있다. 오늘은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을 수도 있다.
나와 목적이 다르다. 오늘의 계획이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와 김희호 씨가 생각하는 나와의 관계가 다르다.
나는 김희호 씨 담당 선생님, 양어머니처럼 자주 만날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걸 다 함께하고, 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말 그대로 여행 도우러 온 사람이다.
나한테 의지하고, 기대하는 바가 없었으면 좋겠다. 없는 사람, 그저 거드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김희호 씨가 처음에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묻고, 말씀하셔서 기억을 못 하시나, 헷갈리시나 싶었다. 그래서 매번 다시 설명해 드렸다. 이제야 깨닫는다. 그게 아니고, 그냥 대화 나누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였다.
김희호 씨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현재 김희호 씨의 삶이 다양하지 않다(과연 그럴까?).
나는 김희호 씨랑 어떤 이야기를 할까.
김희호 씨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 왔다. 여행을 도우러 왔다. 그러니 여행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다.
둘레분들께 인사드려 나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김희호 씨가 한글 교실, 자립센터,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새 나는, 김희호 씨에게 여행 일정만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김희호 씨가 나에게 여행 이야기만 반복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여행을 앞둔 사람은 그 여행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여행 이야기만 한다.
나는 김희호 씨와 어떤 일상을,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여행이라는 과업을 돕고자 왔다고 여행에만 초점을 두면서,
일상적인 대화 나누자고 갑자기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람 사이의 대화라는 게 그렇게 칼 같지는 않을 텐데.
이따 김희호 씨에게 여쭤봐야겠다.
“희호 씨, 오늘 밥 드셨어요? 뭐 드셨어요?”
여느 일상의 대화.
2024년 7월 4일 목요일, 오후 13시 4분, 이다정
첫댓글 관계라는 것이 무 자르듯이 그럴수가 없지요.
복지요결에서 관계가 친밀해지고 그럴만한 '때' 가 되었을 때 부탁을 해야 상대방도 도와줄 마음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명분과 진정성은 관계를 초월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뜻을 잘 설명하고 성의정심으로 부탁하면 바로 잘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끔 만나는 사람과는 꼭 필요한 말을 하고 어려운 사람과는 할 말이 없듯이
요즘 제일 많이 오래도록 보고 있는 사람이
다정 씨이고 다정하게 말해 주고 들어 주니 하고 싶은 말들이 많고, 많이 얘기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이 다음에 지금 일들을 생각하며 아마도 다정 씨 얘기를 많이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