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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춘추)-156 春秋(춘추) 襄公 一篇(양공 일편)14
十有四年春王正月(시유사년춘왕정월)
14년 봄 왕의 정월,
季孫宿叔老會晉士匄(계손숙숙로회진사개)
계손숙·숙로(叔老)가 진(晉)나라의 사개(士匄)및,
齊人宋人衛人鄭公孫蠆(제인송인위인정공손채)
제(齊)·송(宋)·위(衛)·정(鄭)의 공손(公孫) 채(蠆)와,
曹人莒人邾人滕人薛人杞人小邾人(조인거인주인등인설인기인소주인)
조(曹)·거(莒)·주(邾)·등(滕)·설(薛)·기(杞)·소주(小邾)나라 사람과 모여서,
會吳於向(회오어상)
오(吳)나라와 상(向)에서 모임을 가졌다.
二月乙未朔(이월을미삭) 日有食之(일유식지)
2월 을삭(乙未朔), 일식(日食)이 있었다.
夏四月(하사월) 叔孫豹會晉荀偃(숙손표회진순언)
여름 4월, 숙손표(叔孫豹)가 진(晉)나라의 순언(荀偃) 및,
齊人宋人衛北宮括(제인송인위북궁괄)
제(齊)·송(宋)나라 사람과 위(衛)나라의 북궁괄(北宮括),
鄭公孫蠆曹人莒人邾人(정공손채조인거인주인)
정(鄭)나라의 공손(公孫) 채(蠆)와 조(曹)·거(莒)·주(邾)나라 사람과,
滕人薛人杞人小邾人伐秦(등인설인기인소주인벌진)
등(滕)·설(薛)·기(杞)·소주(小邾)나라 사람과 모여서 진(秦)나라를 쳤다.
己未(기미) 衛侯出奔齊(위후출분제)
기미(己未), 위후(衛侯)가 제(齊)나라로 망명했다.
莒人侵我東鄙(거인침아동비)
거(莒)나라 사람이 우리 동쪽 변방을 침범했다.
秋(추) 楚公子貞帥師伐吳(초공자정수사벌오)
가을, 초(楚)나라 공자(公子) 정(貞)이 군대를 거느리고 오(吳)나라를 쳤다.
冬(동) 季孫宿會晉士匄宋華閱(계손숙회진사개송화열)
겨울, 계손숙(季孫宿)이 진(晉)의 사개(士匄)와 송(宋)의 화열(華閱)과,
衛孫林父鄭公孫蠆(위손림보정공손채)
위(衛)의 손림보(孫林父)와 정(鄭)나라 공손(公孫( 채(蠆)와,
莒人邾人於戚(거인주인어척)
거(莒)·주(邾)나라 사람과 척(戚)에서 모임을 가졌다.
해설; 14년 봄에 오나라가 용포(庸浦)에서 초(楚)나라 군대에게 패(敗)하 일을 알려왔다. 진(晉)나라가 제후(諸侯)와 상(向)에서 모임을 가진것은 오(吳)나라를 위해서 초(楚)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그러나 범선자(范宣子: 士匄)는 오나라가 초나라의 상사(喪事)를 틈탄 행동을 책하고, 오나라 사람을 물리쳤다. 그리고 거(莒)나라의 공자 무루(務婁)를 체포했으니, 이는 거나라가 초나라와 사절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오자제번[吳子諸樊: 오자(吳子) 승(乘)의 장자(長子)]이 아버지의 상기(喪期)를 끝내자, 아우 계찰(季札)에게 위(位)를 넘겨 주려고 했다. 계찰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조(曹) 선공(宣公)이 죽었을 때, 제후(諸侯)들과 조(曹)나라사람이 모두 조(曹)나라의 새 임금을 옳지않게 여겨서 자장(子臧)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장은 위(位)에 오르지 않고 그대로 떠나 버렸기 때문에 조나라의 임금은 그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말하기를, ‘자장이 능히 절조를 지켰다’고 했습니다.당신은 의리에 정당한 사군(嗣君)이십니다. 누가 감히 주군(主君)을 훼방하겠습니까?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나의 분수가 아닙니다. 저 계찰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자장의 일을 본 받아서 절조를 잃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고 했다. 그래도 굳이 세우려고 하자, 계찰은 집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
여름에 제후(諸侯)들의 대부가 진후(晉侯)를 따라서 진(秦)나라를 쳤으니, 역(櫟)의 싸움에 보복하려는 것이다. 진후(晉侯)는 서쪽 경계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6경(六卿)으로 하여금 제후의 군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경수(涇水)에 이르러서는 저마다 건너가려 하지 않았는데, 노(魯)·거(莒)나라 사람이 먼저 건너갔다. 정(鄭)나라의 자교(子喬)가 북궁의자(北宮懿子: 北宮括)를 보고 말하기를, "남의 편을 들면서 책임을 게을리하는 것보다더 미움을 사는 일은 없다.그러고서야 어떻게 나라를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두 사람이 제후들의 진(陣)을 찾아서 건너기를 권했기 때문에 모두들 경수를 건너서 진(陣)을 쳤다.이때 진(秦)나라 사람이 경수의 상류(上流)에 독(毒)을 풀었으므로 많은 군사가 죽었다. 정(鄭) 나라의 사마(司馬) 자교(子喬)가 정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앞장서고, 모든 군대가 이에 따라서 역림(棫林)에 이르렀으나, 진(秦)나라는 화평을 청하지 않았다. 순언(荀偃)이 명령하기를, "내일 새벽에 닭이 울거든 말에 멍에를 메우고 우줄을 메우고 부뚜막을 헐어버린 뒤, 내 말머리가 향하는 곳을 보라"고 했다.
난암(欒黶)이 불평하기를, 진(晉)나라의 명령은 이제까지 이처럼 독단으로 정한 일이 없었다. 내 말머리는 동쪽을 향하려하고 있다"고 하면서 돌아가 버렸다. 하군(下軍)이 이에 따랐다. 좌사[左史: 하군의 부(副)]가 위(魏) 장자(莊子: 絳)에게 말하기를, "중행백(中行伯: 荀偃)을 기다리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니, 위(魏) 장자가 말하기를, "중행백은 대장(大將)의 명(命)에 따르라고 명령 하시었다. 난백(欒伯: 欒黶난암)은 나의 대장이기 때문에 나는 이에 따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중행백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백유(伯游: 荀偃)가 뉘우쳐서 말하기를, "나의 명령이 실로 지나 쳤다.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렇게 되면 진(秦)나라에 많은 포로를 바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하고 마침내 전군(全軍)을 철수할 것을 명했다. 진(晉)나라 사람이 이를‘천연(遷延)의 전역(戰役)’이라고 불렀다. 이때 난겸(欒鍼)이 말하기를, "이번 싸움은 역(櫟)의 패전(敗戰)에 보복하려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으니, 이는 진(晉)나라의 수치다"하고, 사앙(士鞅)과 함께 진(秦)나라 군중으로 쳐들어 갔다. 난겸은 죽었으나 사앙(士鞅)은 돌아 왔다. 난암이 사앙에게 성을 매며 말하기를, "내 아우는 가려하지 않았는데, 네가 불러서갔다.내 아우는 죽었으나 너는 살아 왔다. 이는 네가 내 아우를 죽인 것이다. 너를 쫓지 않는다면 내가죽일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사앙은 진(秦)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의 최저(崔杼)와 송(宋)나라의 화열(華閱)과 중강(仲江)등 세사람은 이번 진(晉)나라를 치는일에 참가했으나, 경문(經文)에 실리지 않은것은 일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앞서 상(向)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로 위(衛)나라의 북궁괄(北宮括)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번에 기록된것은 진(秦)나라를 치는일에 적극협조했기 때문이다. 진백(秦伯)이 사앙(士鞅)에게 묻기를, "진(晉)나라의 대부들 중에서 누가 먼저 망할까?" 하니, 사앙이 대답하기를, "난씨(欒氏)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백(秦伯)이 말하기를, "교만하기 때문인가?" 하니, "그렇습니다. 난암이 비록 심히 교만하고 방자하지만, 그래도 그의 대(代)에서는 면할 수 있습니다. 그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마도 영 (盈: 欒黶의 아들)의 대(代)일 것입니다"라고 했다."무엇 때문인가"라고 진백이 묻자, "무자(武子:欒書)의 은덕이 백성들에게 젖어서 진(晉)나라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는것이 마치 주(周)나라 사람이 소공(召公)을 사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공이 쉬던 곳이라 해서, 배나무도 사랑했거늘, 하물며, 그 난무자의 아들이겠습니까? 난암이 죽은 뒤, 그 아들 영의 사람됨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무자(武子)를 추모하는 마음이 사람들 머릿속에서 사라져가게 되면 난암에 대한 증오심이 강렬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난씨일가는 바로 이때에 멸망합니다"고 햇다. 진백은 이말을 옳게 여겨 진(晉)나라에 청하여 그를 돌려 보내 주었다.
군대가 진(秦)나라 정벌에서 철수하자 진후(晉侯)는 신군(新軍: 상·중·하 3군 이외에 새로편성했던 군대)을 폐지했으니, 이는 예에맞는다. 큰 나라라도 천자의 군대의 반을 넘을수 없는 것이 법도이다. 주(周)나라가 6군이니, 제후는 아무리 큰 나라고해도, 3군 이상을 편성할 수는 없다. 위(衛)나라의헌공(獻公)이 손문자(손림보)·영혜자(寗惠子:영식)와 식사를 함께하자고 불렀으므로,두 사람은 예복을 갖추어입고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날이저물어도 부르지않고 위후(衛侯)는 동산 안에서 기러기를 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찾아갔으나, 위후(衛侯)는 피관(皮冠: 사냥할 때 머리에 쓰는 것)을 쓴 채로 말했다. 두 사람은 노하며 물러나왔으며, 손문자는 영지인 척(戚)으로 갔다. 손괴(孫蒯)가 일이 있어 조정에 들어 갔는데, 위후는 술을 마시게 하고 태사(太師)에게 교언[巧言: <시경(詩經) >소아의 편명]의, 끝 장(章: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위후는 손문자를 그런뜻으로 비꼬았다)을 노래하라"고 명했다. 태사(太師)가 노래하기를 사양했는데, 사조(師曹)가 자진해서 노래 하기를 청했다. 당초에 위후에게 총애하는 첩이 있어, 사조를 시켜서 거문고를 가르치게 했는데, 어느때 사조가 이를 채찍으로 때렸으며, 이말을 들은 위후는 또 노해서 채찍으로 300 번을 때린 일이 있었다. 사조가 이 시(詩)를 노래하려고 한 것은 손문자를 노하게 만들어서, 위후(衛侯)에게 보복 하려는 것이다. 공(衛侯)이 노래하기를 허락하니 사조는 이를 노래 했다. 손괴가 문자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우리를 미워하고 계십니다. 선수를 쓰지 않는다면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고 했다. 문자는 가족을 척(戚)으로 옮기고서 조정으로 들어가 거백옥을 보고 말하기를, "주군(主君)이 포악한 것은 그대도 아는 바이다. 나라가멸망하게 될 것이 근심스러운데 어찌하면 좋을까?" 하니, 거백옥이 대답 하기를, "임금이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면 신하가 감히 이일에 대항할 수는 있지만, 이에 대항한다고 해서 더 좋아지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하고 곧 떠나 가까운 국경으로 가서 나라를 벗어 났다.
위후(衛侯)가 자교(子蟜)·자백(子伯)·자피(子皮)를 보내어 손문자와 구궁(丘宮)에서 맹세하게 했는데, 손문자는 이들을 모두 죽였다. 4월 기미(己未)에 자전(子展)이 제(齊)나라로 망명 했다. 위후(衛侯)는 자행(子行)을 손문자에게 보냈는데, 손문자는 이를 또 죽였다. 위후가 제(齊)나라로 망명했다. 손문자가 이를 추격하여, 위후의 종자(從者)들을 아택(阿澤)에서 쳐부셨다. 당초에 윤공타(尹公佗)는 유공차(庾公差) 에게서 활쏘기를 배웠으며, 유공차는 공손(公孫) 정(丁)에게서 배웠다. 두 사람[타(佗)와 차(差)]이 위후를 추격했는데, 마침 공손정(丁)이 위후의 수레를 몰고 있었다. 유공차가 말하기를, "활을 쏜다면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안 쏜다면 죄를 범하게 된다. 쏘는 것이 예에 맞는다"하고, 수레의 멍에 두 군데를 쏘고 돌아 갔다. 윤공타가 말하기를, "당신에게는 스승이 되지만 나와는 인연이 멀다"하고 돌이켜서 추격했다. 공손 정이 말고삐를 위후에게 넘겨주고 활로 윤공타의 팔을 쏘았다. 자선(子鮮: 위후의 동복 아우)도 위후를 따라서 국경에 이르렀다. 위후가 축종(祝宗)에게 종묘(宗廟)에 망명하는 일을 알리고 또 아무런 죄도 없음을 알리게 했다. 정강(定姜)이 말하기를, "신(神)이 없다면 알려서 무엇 하겠는가. 신이 있다면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하겠는가. 대신(大臣)을 버리고 미천한 신하들과 일을 꾸몄으니 죄가 하나요, 선군(先君)께서 재상(宰相)을 정해 놓으시고, 가르침을 받도록 해놓으셨는데도 이를공경하지 않았으니 죄가 둘이며, 내가 건즐(巾櫛)로써 선군을 섬겼는데 나를 심하게 박대했으니, 죄가 셋이다. 망명했다고만 알릴 뿐 죄가 없다고 하지는 말라"고 했다. 위나라 사람은 공손 표(剽)를 임금으로 세웠다.
가을에 초자(楚子)는 용포의 보복으로, 자낭(子囊) 에게 명하여, 당(棠)에서 군대를 출동 하여 오(吳)나라를 치게 했다. 그러나 오나라 군대의 동정(動靜)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철수하고 말았다. 자낭은 오나라가 실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경계를 소홀히 했다. 오나라 사람은 고주(皐舟)의 요해(要害)에 복병(伏兵)했다가 맹렬하게 공격했다. 초나라 사람은 앞 뒤가 서로 연결되지 못하여 크게 패했다. 오나라 사람은 초나라의 공자 의곡(宜穀)을 사로 잡아 갔다. 자낭은 오나라에서 돌아오자 죽었다. 죽을 때 아들 경(庚: 자경)에게 유언하기를, "반드시 영(郢)에 성(城)을 쌓으라"고 했다. 군자가 자낭을 논평해서 말하기를, ‘자낭은 충신이다. 임금이 훙했을 때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기를 잊지않았고[공왕이라는 사호를 올렸음], 죽기에 임해서는 나라를 방비하는 일을 잊지않았다. 어찌 충성되다하지 않겠는가. 충신은 백성의 존경하는 바다. 시(詩)에 이르기를,‘이제 주나라로 돌아 가면 만백성이 우러러 받들 것일세[行歸于周(행귀우주) 萬民所望(만민소망)]’라고 했으니, 이것은 그 충성 때문이다"고 했다.
진후(晉侯)가 위(衛)나라의 내란에 대해서 중행헌자(中行獻子)에게 물었다.그가대답하기를, "현상(現狀) 그대로 진정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나라는 임금이 이미 정해 졌으니, 이를 친다 해도 제후(諸侯)를 괴롭힐 뿐, 목적을 달성 하지 못합니다 사일(史佚)은 말하기를, ‘무거운 것은 이를 다루어서 편안 하게 하라[무거운 것은 옮길 수 없기 때문임]’ 했으며, 중훼(仲虺)는 말하기를 ‘망하는 것은 이를 업신 여기고, 어지러운 것은 이를 차지하라. 망하는 것은 없애 버리고 존재하는 것은 튼튼하게 하는것이 나라를 경영하는 도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군께서는 위(衛)나라를 현상대로 안정시켜서 때를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겨울에 척(척)에서 모임을 가진 것은 위나라를 안정 시키려는 것이다[공손 표(剽)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 범선자(士匄)가 우모(羽毛)를 제나라에서 빌려 왔으나 돌려 보내지 않았으므로, 제(齊)나라 사람이 두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