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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후기 <20150208>
* 참석자 (13명)
정혁현목사, 이신정전도사, 정한결, 박성호, 공은주, 이수정, 안태형, 서선미, 심호수, 정명수, 박연옥, 이란희, 이샛별.
* 예배
- 말씀 : 이신정 전도사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본문 : 마가복음 10장 46~52절)
- 시와 함께 드리는 기도 : 공은주 <나, 가는 길”-장이엽>
- 대표기도 : 박연옥
- 헌금기도 : 안태형
- 공동식사 : 이란희
* 예배 후기
기름기 좔좔좔 완벽하게 노릇노릇 구운 싱싱한 고등어님를 바다 내음 가득한 해초와 김과 김칫국과 함께 원 없이 모신 점심이었습니다. 한 점 크게 뜯어 신중하게 입에 넣으니 꼬신 참기름을 막 두른 가마솥뚜껑처럼 고등어님 기름이 입안을 순식간에 코팅하면서 하얀 속살의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함에 황송하고 황망하여 눈물이 다 날 뻔했습니다...씹을 새도 없이 녹아버리더군요. 등 푸른 생선 비린내? 그게 대체 뭔가요?
충격적이었던 점은 호수 씨가 저번 주에 이어 이번 주도 점심을 거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 이 상상 밖의 이해불가 천지개벽 상황에 강력하게 제지했지만 호수 씨의 절박함(?)에 눌려 그냥 보내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는 꼭 함께 먹어요.
식사 후 수정 언니의 피칭상 상금을 놓고 언제 턱을 낼 것인가에 대해 집중 대화가 오고 갔으며 아슬아슬 오는 토요일 저녁으로 잡았지만, 이게 말이나 됩니까요? 어떻게 제가 불참한 날 음식을 논할 수 있는지요? 교인들이 다 모였을 때로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사심가득 입바른 말로 꼬셔 날짜를 미루기로 했습니다. 기약이 없어 조금은 불안합니다만.
* 다음 주 예배 담당
2월 15일
대표기도- 이샛별, 시기도-이수정, 헌금 기도- 이신정 전도사, 공동식사- 이샛별
* 말씀 요약 및 후기
모든 텍스트는 의도를 가지며 이 의도란 ‘욕망’이다. 마가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마가는 자신의 청중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가복음은 예수의 족보를 생략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로 서술된다. 이적과 수난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할 운명적 요소를 인정하고 예수는 잃은 자, 빼앗긴 자, 병든 자, 낮은 자들의 부름을 받아 내가 누구인가를 결단한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과 그 선택에서 오는 수난까지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이때만이 나와 세상이 동시에 변화하는 것이다. 마가는 선언을 통해 스스로 누구인지를 드러냈다.
“너는 누구인가”는 곧 “나는 누구인가”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너의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신다. 인간의 고귀한 높이와 깊이를 보지 않는 자는 남의 허물과 단점을 예리하게 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라고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환경의 산물이자 구조의 효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네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답을 던져주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어떤 매체에 접속하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들은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한다. 스스로 주체로서 살고 있는지 물어야만 한다.
우리는 공포와 탐욕에 사로잡혀 살며,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상상해서 채워 주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타인이 원하는 것’으로 구성되며 타인이 날 본다는 상상으로 나 자신이 그렇게 보이기 위해 애쓴다. ‘그가 원하는 것’을 주고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타자는 나의 환경이자 나의 일부이다. 하지만 마가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뜯어낸다. 내가 환경일 때, 나는 어떤 타자인가? 눈먼 청중에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울어라." 그들을 위해 울기 전에 나를 불쌍히 여겨 울어야 한다.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한 나의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지 질문하라.
모든 변화와 창조는 “상실”로부터 시작된다. 바디매오는 상실을 먼저 인정했다. 그는 가진 것의 전부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지표인 겉옷을 벗고 예수가 부르자 예수께 나아갔고 눈을 뜬 그는 예수가 “가거라” 하는데 예수에게로 왔다.
욕망을 포기하는 것의 대가는 점점 커지는데 이것은 타협하지 않는 ‘욕망의 순수성’이다. 사회는 그런 자들을 억압하고 불순한 자로 점찍는다. 내가 누구인지를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결단하는 순간 무언가 잃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조건과 상황을 최대치로 활용할 줄 안다.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고대 동굴벽화에서는 보는 나와 대상으로서의 내가 포함된 (사람과 동물이 혼합된 이미지) 이미지인 반면 이집트 벽화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인체 형태가 왜곡되는 정면성) 그리려고 했다. 전자의 세계에서는 사냥과 수렵으로 생존을 연명했다면 후자의 세계는 비옥한 토양을 확보하면서 ‘여가’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여가’는 ‘Scole 학문, 학습, 학교’라는 어원을 가진다. ‘대상을 보는 나’와 ‘보이는 세계’ 사이의 거리를 확보한다는 것은 ‘거리 두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며 ‘사유가 가능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여가를 내기 위해서는 이익의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보이는 우상을 폐기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진리 화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묻고, 읽고, 학습하라. 오로지 불행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운 인간만이 질문하고, 읽고, 학습한다. 그런 인간만이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하나님은 말로 세계를 만드신다. 우리의 관성을 중지시키고 다른 말의 세계로 이끄신다. 내가 누구인가를 끝까지 묻고 요청하는 사람만이 “먼 곳을 보는 자”이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자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인 이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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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밀회’라는 드라마 전편을 3일에 걸쳐서 봤다. 아름답고 지적이고 차분하고 우아한 김희애의 연기는 절정이었고 이 드라마 한 편으로 그녀의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해 볼만큼 혁명적인 결론을 보여주었다. 대기업의 개로 살아가는 오혜원(김희애)에게, 개 같은 날들로 점쳐온 구역질 나는 그녀의 인생에 사랑이 찾아왔다. 젊고, 재능 있고, 아름다운 청년의 피아노 선율은 하찮은 존재임을 회피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녀의 삶을 산산이 부쉈다. 마지막회의 감동이 생생하게 또 뜨겁게 다가온다. 그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명장면. 5번이나 돌려봤다. 그녀의 삶은 실체 없는 삶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을 어떤 존재로 포장해왔던 삶을 그녀의 선언으로 끝장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無”로 돌려놓았다. 법정에 서서 선언하는 행위가 그녀의 예배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모르는 부끄러움을 깨달았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며 이 사회에서 구성된 존재로서의 고유했던 자신을 깨버렸다. 세상이 우리를 대접할 때는 우리가 진리를 양보할 때뿐이라고 했던가? 진리가 발생하는 일은 자기 삶의 사건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이다. 그녀의 선언은 그녀 삶의 진리를 세운 사건이고 그녀를 진리의 존재로 규정한 순간이다. 법정에 선 그녀의 대사를 옮겨본다.
“저는 지금 오직 저 자신한테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한성숙 이사장, 서필연 회장을 대신해서 피고인석에 앉아계신 홍태영 이사, 그리고 변호인단을 총지휘하시는 김인겸 전무님까지, 저 분들이 어떤 벌을 받건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주범이 아니라는 말로 선처를 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행한 모든 범법 행위는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오직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잘못된 거죠. 그 덕에 저는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법인 카드, 제단 명의의 집, 자동차, 고용인. 저의 성장배경이나 저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 그 모든 걸 진짜 다 제 것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제가 포기한 음악의 세계에도 맘껏 힘을 행사하고 싶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처럼, 유전자에 저금이 돼있는 것처럼 아무도 뺏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뜻하지 않게 제 인생에 대차대조표가 눈앞에 펼쳐졌어요. 그렇게 사느라고 잃어버렸던 것들, 생각하기도 두렵고 인정하기도 싫었던 것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거냐고. 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제 인생의 명장면이죠. 난생처음 누군가 온전히 저한테 헌신하는 순간이었어요. 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절절한 고백의 말을 해준 것도 아니었어요. 그 친구는 그저 정신없이 걸레질을 했을 뿐입니다. 저라는 여자한테 깨끗한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애썼던 것뿐인데 전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누구한테서도 그런 정성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걸. 심지어 나란 인간이 나 자신까지도 성공의 도구로만 여겼다는 걸. 저를 학대하고 불쌍하게 만든 건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고 살면서 저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한테 상처와 절망을 주었겠죠. 그래서 저는 재판 결과에 승복하려고 합니다. 어떤 판결을 내려주시든 항소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고 주름 하나 없는 옷을 입던 오혜원은 드라마 내내 고급뷰티샵에서 머리를 손질 받으며 우아함을 과시하고 허세를 떨었었다. 그녀는 감방에 들어가 머리를 잘린 채 면회 온 이선재(유아인)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오혜원의 대사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밖의 선물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나 잊어도 돼. 너는 어쩌다 나한테 와서 할 일을 다 했어. 사랑해줬고, 다 뺏기게 해줬고․․․.내 의지로는 절대 못 했을 거야. 그래서 고마워. 그냥 떠나도 돼.”
모든 변화와 창조는 “상실”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가진 것의 전부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지표인 겉옷을 벗고 수의를 선택했으며 머리를 잘렸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선택했고 새로운 빛을 얻었다. 그녀는 사랑으로 자신의 선택해왔던 모든 것들을 책임졌고 자유를 얻었다. 사랑은 희생이 아니며 둘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둘은 주체로서 각각의 삶을 구성하며 각각의 고유한 삶의 관계에 있다. 자신의 존재 소멸을 마다치 않는 그것이 사랑이며 이 사랑만이 존재의 본질이다. 그것이 우리의 가능성이다. “최초의 창조는 최초의 하나님의 죽음이다. 이것이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다. 존재의 문제에 윤리의 문제가 걸려있다. 존재의 사랑! 그 외의 가능성은 없다(목사님 설교 中).”
첫댓글 와우~글쓰기 워크샵 모범생답게 독창적이고도 해석이 돋보이는 예배후기네여...감사합니다^^
진짜 오랜만에 썼네요...참 안돼요. 글쓰기. 습관처럼 쓰고 싶은데 사생결단하는 각오 시간이 더 길어요.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포기는 빠르고요. 예배후기 통해서 일단 스따뜨~! 전시 끝나고 요즘 소설과 밀린 드라마, 영화보며 불안(작업 안하는 그 불안)에 떨고 있습쬬.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후기네요. 덕분에 이성부 시인의 시도 다시 읽고 훌륭한 밀회 감상문까지... 편의상(?) 마가라고 통칭하기는 했지만 마가는 이미 개인이 아니었을 거예요. (물론 오랜 역사 속에 더해진 편집과 재구성의 손길도 있었겠지만.) 성경을 새롭게 읽고 전유하며 다시 증언하는 과정 속에 우리 역시 개인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는 거겠죠? 샛별씨가 이렇게 창의적인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제자도의 실현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라니씨 정성 깃든 가정식 백반도 잘 먹었고, 수정씨 다큐 수상소식도 축하드립니다. 함께 기뻐하는 향응의 시간은 더 많은 참여를 위해 선물처럼 남겨두는 것도 좋겠네요.
얼마 전에 배우 박정자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칠십 넘은 노배우의 고백이 인상적이더군요. 무대에 서지 않을 때, 연기를 쉬고 있을 때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 비참과 우울을 견디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샛별님의 당찬 글쓰기에 녈렬한 박수를 보내는 바이오! 대단하오! 짝짝짝짝짝
아 박정자...연기를 쉴 때의 그 고백이 정말 쩌릿쩌릿하네요. 언제까지 초조해야하나. 죽을때까지 이렇겠지. 그러면 숨이 턱턱 막혀요. 그걸 견디기 위해 또 작업을 해야겄지요... 워메~~워어어메~
훌륭한 후기네~박정자 글도 읽어봐야겠네 좋은글 잘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