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이는 황금 같은 주말에, 불길하고 조짐이 안 좋아, 어디 나돌지는 못하고 꿩대신 닭 격으로 근처 친구네 집으로 놀러가고 있었다. 희정이는 골목길을 돌아 구멍가게를 거쳐 다음 골목길로 들어서려고 한다.
동네의 O형 친구들은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전부 형사들 틈에서 보호를 받고있다. 그나마 자신이 A형인 것에 대해 감사를 느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며 골목길에 들어서려는 찰나, 희정이는 몸 안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폭발하며 뜨거운 것이 올라옴을 느낀다. 그것도 순간..그 물질은 희정이의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희정이는 몸이 독사에 물린 듯 마비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며 모든 것이 아른한 아지랑이 처럼 흔들거려 제대로 사물을 구별 못한다. 희정이는 한가닥 남은 마지막 힘을 짜내 살려달라고 비명을 칠려고 하지만 곧장 정신을 잃고 몸은 풀썩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그때였다.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어떤 남자가 쓰러져있는 희정이를 어깨에 들러매고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 남자는 승용차로 가더니만 트렁크 속에 희정이를 넣고 재빨리 조수석으로 탔다. 썬글라스를 낀 여자는 남자가 타자마자 기어를 넣고 엑셀을 밟는다. 차는 순식간에 이동을 했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
< 병원...>
강 형사는 서울병원에서 급한 호출을 받았다. 중요한 단서를 발견해냈다는 제보였다. 서둘러 강 형사는 병원으로 도착했고 곧바로 그 현장인 수술실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전 강력계 강 형사라고 합니다..중요한 단서라니..어디에 있습니까?"
"아 네.."
의사는 어눌한 어투로 대답을 했고 바로 즉시 어떤 소녀의 몸 속에서 꺼낸 미세한 칩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이건 오늘 수술하던 여학생의 몸 속에서 발견한 겁니다. 여학생은 **병이 재발되어 이번이 두번째 수술이지요. 처음 수술은 조그만 개인병원에서 시술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번에 수술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치곤 뭔가 수상쩍더라고요...저도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학생의 혈액형이 O형이고 몸 속에 이상한 무언가가 있어 이번 연쇄살인사건과 무슨 연관성이 있을지 몰라서 이렇게 신고하게 된 겁니다."
강 형사는 귀로는 의사의 말을 단어 하나 놓치지 않고 들으며 눈으로는 칩 같은 물질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마이크로칩 같은데..무슨 용도인지는 국립과학수사원에 의뢰해봐야겠군요..아무튼 이렇게 협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형사는 중요한 단서를 얻은 듯했다.
'그래..이것으로 무언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지 몰라..실마리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칩이 몸 속에...그럼 여태까지 여학생들의 공통점이 혹시 내과수술을 받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 이 학생도 악마의 표적이란 말인가? 아..알 듯 모를 듯...뭔가 잡힐 듯한데..차근차근 정리해보자..범행의 장소나 인물은 전국적이다. 그러나 미리 점을 찍듯 악마는 다음 장소를 정해준다..그 말은 거기에 이미 자신이 선택해놓은 표적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마이크로칩? ......."
수많은 생각들이 어지럽고 난잡하게 강 형사의 뇌를 교란시켰다. 강 형사는 잠시 머리를 식힐겸 인적이 없는 복도 끝으로 가서, 계단에서 담배를 태웠다. 그리고 다시 조각들을 짜맞추어가듯 어지럽혀진 생각들을 정리해보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계단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가 짧고 인상이 험악하게 생긴 사내였다. 강 형사는 본능적으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벽에 비벼 끈다. 하지만 그 사내는 강 형사를 스치듯 지나갔고 그제서야 강 형사는 긴장을 늦추었다. 그러나 긴장의 고삐를 풀 틈도 주지 않고 사내는 뒤를 돌며 빠르게 주먹을 내지른다.
'휘이이익'
주먹이 어찌나 빠른지 바람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내 들리는 둔탁한 소리가 한적한 복도의 벽에 반사되어 메아리치듯 진동한다.
갑자기 얼굴을 강타당한 강 형사는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것도 잠시..사내는 몇 계단을 한꺼번에 붕 떠서 내려오더니만 굴러 떨어지고 있는 강 형사의 복부에 또 한 번 강하게 발로 찬다.
'퍼억'
강 형사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두 번 사내에게 얻어맞았지만, 재빨리 일어나 전열을 가다듬고 사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른 주먹을 사내의 얼굴에 날린다. 하지만 사내는 가볍게 주먹을 피하고 정확하게 강 형사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헉..." 강 형사는 순간 숨이 막혀왔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지며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사내는 재빨리 몸에서 시퍼런 칼을 꺼내든다. 순간 날카로운 날이 퍼렇게 광채를 발사하며 강 형사의 심장을 도려낼듯 꿰뚫어버렸다.
'스으윽'
사내의 칼은 두부자르듯 강 형사의 가슴을 난도질하였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올랐다. 강 형사는 단지 놀란 토끼눈으로 사내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어억..억.." 차갑고 날카로운 물질이 몸 안을 마구잡이로 해집고 다닌다. 강 형사는 단순히 내뱉은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함께 입에서도 한웅큼의 피를 쏟아낸다. 반대로 사내는 눈에 힘을 주더니 칼을 힘껏 돌리기 시작했다. '우두둑` 살과 뼈가 칼에 닿는 소리가 난다.
그때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소란에 웅성웅성대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싸움이 시작된지 1분이 경과한 시간이었다.
사내는 강 형사의 몸을 뒤적거리더니만 자신이 가져가고자 했던 물건을 챙기고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갔다.
강 형사는 칼이 자신의 심장으로 날아오는 순간 간신히 몸을 피하여 심장은 안 다칠 수 있었다. 하지만 출혈이 과도하게 많았다. 의식이 가물가물 흐려지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꿈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해져갔다.
16) 마이크로칩
마을은 공포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예상과는 달리 O형이 아닌 A형을 가진 희정이가 납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로 인해 이제는 모든 아이들이 외출이 금지당했고 성식의 마을은 경찰과 형사들로 분주했다. 학교 역시 중요수업만 진행해나가고 보통 때보다도 일찍 하교길에 오르게 했다.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텅 빈 오후의 학교는 악마의 또다른 희생자를 보는 듯 했다.
무엇때문일까? 악마는 여태까지의 공식을 스스럼없이 깨 사람들을 더욱 혼란에 빠지게 했다.
왜? 왜? 왜?
언론은 다음 희생자의 표적이 될 장소가 어디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직 나오지 않은 희정이를 언론은 벌써부터 죽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단순히 시청자의 확보에만 급급하는 모습이 흡사 야누스의 두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누가 진정한 선이고 악이란 말인가?
답답한 마음을 감출 길 없는 염 노인은 씁쓸히 혼란스러운 마을을 지켜보았다. 이번 희생자가 하필 성식의 여자친구라니..멀리 희정이의 집이 눈을 통해 들어온다. 이미 희정이의 집 앞에는 많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유독 성식의 모습이 눈에 띤다.
성식은 슬픔에 잠긴 탓에 힘이 하나도 없는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런 성식이를 위로의 눈길로 안타깝게만 쳐다보고 있는데, 서로 눈길이 마주친다. 성식이는 더욱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 악마의 집...>
머리칼이 짧은 사내은 악마에게 마이크로칩을 건네주었다.
"수고했다..너는 이제 어디 멀리 딴 곳으로 가서 잠시 몸을 숨기도록 해라..다음 명령은 차후에 알려주겠다..그리고 잊지 마라. 이제 거의 다 이루어졌다. 예정보다 일이 빨리 끝날 수가 있겠구나."
"네."
짧게 대답을 하고 사내는 물러갔다.
'험..이게 발견이 되다니 실수다..그래도 다시 찾아왔으니 다행이지만 이것으로 중요한 정보를 흘리고만 셈이다. 언제 발각될지는 시간문제일 뿐...실험이 성공에 다다른 지금, 필요없는 실험체 안의 마이크로칩을 없애야겠군..버튼 하나면 끝이지만 자고 있을 무렵에 들키지 않게 실시해야겠다.'
다른 인격체의 악마는 마이크로칩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발로 밟고 `우직` 소리가 나도록 몇 번이고 칩을 부서버렸다. 부서진 칩 속에서 미량의 액체가 흘러나온다. 악마인간 역시 몸에서 미량의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악마의 인격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다시 본래의 인격으로 돌아온 사내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간단히 음식을 챙겨 희정이가 쉬고 있는 지하실로 갔다.
희정이는 아름답고 하얀 몸을 빛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마비가 되었을때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주어서 아직도 몸에서는 비누와 샴푸냄새가 가득했다. 사내는 희정이의 긴머리에서 나는 샴푸냄새를 맡고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몸이 금방 후라이팬에 달군 듯 뜨거워진다. 잠시 주체못할 욕정이 불타 올랐지만 실험 때문에 간신히 억눌러버렸다.
< 서울대 병원 응급실...>
강형사는 의식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죽음에서 탈출한 기분이었다. 다행히 병원에서 사고를 당한지라, 급한 응급치료 덕분에 목숨만은 건질 수가 있었다.
옆에 있던 조 형사와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 형사는 가슴 부근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바늘로 콕콕 쑤시듯 아파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를 조 형사에게 말하려고 하였다. 중요한 게 틀림 없었다. 고통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뭔가를 조 형사에게 더듬으며 말한다. 조 형사는 잘 들리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누가 들을까봐 그래서인지 귀를 바싹 댔다.
"조..조..조사해줘..여학생의 몸 속에서 치치칩이 나온..헉헉..그 학생을 처음 수술한 내과의사를 조조사해봐..그리고... 죽은 희생자들이 어렸을 때 혹시 내과 수술를 받은 흔적이 있는지 화화확인해봐."
조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 형사는 의식이 흐려지더니만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