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가 아빠를 따라 태안으로 온 지도 벌써 2년이 되었어요. 오늘도 같은 반 친구와 다툰 민규는 먼바다에서 꼬물거리는 고깃배의 집어등을 세며 앉아 있었어요. 해변엔 잔파도가 바닷게처럼 노을빛 거품을 게워내고 있었어요. 구름 속에서 막 나온 달이 히죽거리자 민규는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달을 향해 돌멩이 하나를 힘껏 던졌어요.
민규는 행복하게 웃는 친구들이 꼴도 보기 싫었어요. 그래서 매번 그런 친구들과 싸웠어요. 그럴 때마다 아빠는 담임선생님께 불려 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어요. 그런 아빠의 모습에 민규는 자존심이 상했어요.
취로사업을 하는 아빠는 늦은 시간에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갔어요. 대화를 하고 싶어 말을 걸면 아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누웠어요. 한 달에 한 번 읍내에서 만나는 엄마는 햄버거 가게에서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다 만 원 한 장 주머니에 슬쩍 넣어주고 바람처럼 가버렸어요. 돌아오는 길엔 방금 만난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서로 헤어져 사는 게 다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한 민규는 그래서 항상 아빠를 원망했어요. 민규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세 식구가 까치처럼 모여 단출한 밥상에서 자신의 숟가락에 싫어하는 시금치와 김치를 올려주던 그 시절로. 지금이라면 싫어하던 그 반찬들을 맛있게 먹는 척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민규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어요.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갯벌을 따라 한참을 걸었어요. 갈매기 울음소리가 바닷바람에 떠다녔어요. 그런데 후미진 갯벌에 묻힌 뭔가가 달빛에 반짝였어요. 그건 푸른빛이 감도는 병이었어요. 달빛에 찬찬히 살펴보니 푸른병 속에 돌돌 말은 종이가 들어 있었어요. 민규는 코르크마개를 파내듯 조금씩 뜯어냈어요. 그러자 그 푸른병이 물위로 튀어나온 해녀처럼 숨비소리를 냈어요.
“고 마 워.”
푸른병은 헐떡거리며 말했어요.
“넌 누구니?”
민규는 다소 당황하며 물었어요.
“난 스카치위스키야.”
“이름이 희한하네.”
푸른병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속에 종이를 게워냈어요. 민규는 도로 불빛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편지를 펼쳐보았어요.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어요.
“이건 뭐니?”
“편지야.”
“누구?”
“르네의 편지야.”
“르네는 누구야?”
“르네는 말콥 아저씨의 어린 아들이야.”
“말콥 아저씨는 누군데.”
“젊은 어부야.”
계속 된 질문에 푸른병은 다소 귀찮아하는 것 같았어요.
“르네가 누구에게 쓴 편지야?”
“엄마에게.”
“르네는 엄마랑 같이 안살아?”
“르네의 엄마는 르네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르네는 그걸 모르니?”
“말콥 아저씨가 거짓말을 해서 모를 수도 있지.”
“뭐라고?”
“엄마는 멀리 갔다고. 엄마를 만나려면 배를 타고 몇 달을 가야 한다고.”
편지를 훑어보던 민규는 너무 어두워 글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푸른병과 편지를 가방에 넣고 집으로 향했어요.
집에 도착한 민규는 씻지도 않고 책상으로 향했어요. 스탠드 아래서 편지를 다시 펼치자 르네가 먼저 인사를 했어요.
“안녕.”
“만나서 반가워. 르네”
르네는 무척 슬퍼 보이는 아이 같았어요. 민규는 르네도 자신처럼 엄마가 보고 싶어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넌 왜 병편지를 보냈니?”
“친구들이 알려줬어. 멀리 있는 사람에겐 병편지를 보내라고. 병편지는 바다를 떠돌다 언젠가 그 사람에게 가닿는다고.”
“아빠에게 엄마 보러 가자고 하지.”
민규는 르네가 엄마의 죽음을 아는지 알고 싶었어요.
“엄마 말을 꺼낸 날엔 아빠의 얼굴이 슬퍼 보였어. 그런 날은 밤새 아빠 방에 불이 꺼지질 않았어. 그 후로 난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
“엄마는 어디 계신데?”
르네는 민규의 물음에 묘한 웃음을 보였어요.
“왜 그렇게 웃어?”
“사람들이 너처럼 물어 본 적이 있어.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난 알고 있거든.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진 않았어.”
“그 대답이 뭔데?”
“하늘나라에.”
“그럼 엄마가 돌아가신 걸 알고 있니?”
“알아. 오래전부터.”
“그럼 왜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답을 안 한 거야?”
“아빠는 내가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는 눈치였어. 사람들은 입이 싸거든. 엄마가 먼 곳에 가 있다고 내가 믿는 게 아빠를 덜 힘들게 할 거라 생각했어.”
“그럼 왜 병편지를 쓴 거야?”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거잖아. 그게 너무 슬펐어. 그래서 멀리 계신다 생각하고 보낸 거야. 언젠가 받아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엄마 얼굴은 기억나니?”
“어렴풋하게. 언젠가부터 엄마는 친구들 엄마처럼 생겼을 거라 생각했어. 그럼 얼굴 잊어버릴 일은 없거든.” 르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겠다.”
“내가 뭣 모를 때 아빠는 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으면 하룻밤만 자면 온다고 하셨어. 그래서 난 해 질 녘 항구가 보이는 쪽에 서서 엄마를 기다렸어. 매일 그렇게 기다리는 나를 보고 어느 날 아빠는 말씀하셨어. 엄마는 오지 않는다고. 우리가 찾아가야 만날 수 있다고.”
“엄마에 대한 기억은 있니?”
“엄마는 나를 안은 채 내가 엄마를 기다렸던 것처럼 항구를 바라보며 아빠를 기다리곤 했어. 항구에 해가 질 땐 엄마의 얼굴에 붉은 노을이 물들었어. 난 노을이 엄마의 얼굴에서 피어나 바다로 번져간다고 생각했어. 나중에 엄마를 기다리는 내 얼굴에도 노을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난 알게 되었어. 노을은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엄마는 왜 돌아 가신 거야?”
“잘 몰라. 침대에 누워 우시던 기억 밖에.”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매일 술에 취해 돌아오셨어. 그리고 나를 붙들고 엄마 이름을 불렀어.”
“아빠는 어디 계시니?”
“아빠는 바다에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어. 난 아빠가 멀리 간 엄마를 찾으러 갔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엄마처럼 항구 쪽을 바라보며 아빠를 기다렸어.”
“그 후엔 어디서 지낸 거니?”
“로시 이모네 집에서 지냈어.”
“집이 그리웠겠구나.”
“언젠가 이모 집 앞 마을길에 노을이 물들고 있었어. 난 무작정 노을을 향해 달렸어. 노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 노을이 나를 기다리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서 피어나 내게로 번져 온 거라 생각했거든. 그렇게 달려가면 엄마 아빠가 있는 곳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엄마가 병편지를 정말 받아볼 수 있을까?”
민규가 물었어요.
“그럴 거야. 분명 엄마도 내게 답장을 보낼 거야. 그렇게 믿고 있어. 그래서 난 매일 바닷가에서 엄마가 보낼 병편지를 기다릴 거야.”
민규는 문득 자신이 그동안 했던 행동을 돌이켜보았어요. 그토록 원망만 하던 엄마 아빠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엄마 아빠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신 르네를 생각하며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시 편지 마지막 부분을 읽으려는데 글씨가 번져 잘 보이지 않았어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망가진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한참 고민하던 민규의 귀에 아빠가 돌아오시는 소리가 들렸어요. 평상시와 다르게 아빠가 일찍 귀가하셨어요. 아빠의 한 손엔 시금치 한 다발이 들려있었어요.
“또 시금치네.”
“또 투정이구나.”
아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규는 평소와 다르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나 시금치 된장국 좋아하는데.”
“거짓말 하지 마라. 너가 제일 먹기 싫어하는 거잖니.”
“아니에요. 이젠 김치도 잘 먹어요.”
아빠는 의외인 민규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이젠 커서 식성이 바뀐 모양이로구나. 아빠가 씻고 저녁 준비 할 테니 들어가 공부하고 있어라.”
르네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던 민규의 귀에 저녁 먹으라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민규는 오랜만에 아빠와 함께하는 저녁식사가 정말 좋았어요. 시금치 된장국도 일부러 맛있게 먹었어요. 식사하는 내내 자신의 곁에 있어준 아빠가 고맙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시키지도 않은 설거지를 하는 민규에게 아빠가 물었어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니?”
“르네라는 아이를 만났어요.”
“그 애가 누군데?”
“만난 진 얼마 안 됐어요. 저보다 더 마음이 슬픈 아이에요.”
잠시 말을 잃은 아빠가 민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많이 힘들었구나. 아빠가 참 미안하구나.”
아빠의 말에 그동안 꾹 참았던 눈물이 민규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저도 그동안 잘못했어요. 이젠 잘할게요.”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간 민규는 책상에 앉아 번져서 엉망이 된 글씨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가 헛기침하며 방으로 들어왔어요.
아빠가 책상 위에 놓인 푸른병과 편지를 보고 말했어요.
“저건 뭐니?”
“아까 말씀드린 르네라는 아이가 보낸 병편지에요.”
푸른병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시던 아빠가 말했어요.
“이 병은 100년 전에 만든 것이구나.”
아빠의 말에 놀란 민규가 푸른병 밑 부분을 자세히 보니 정말 1912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어요. 그때서야 르네의 병 편지가 100년 전에 쓰여 졌다는 것을 알았어요. 르네의 병 편지가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 가닿으려고 100년이란 긴 시간동안 그 먼 바다를 떠돌았고, 노을이 번지는 바닷가에 서서 오지 않을 엄마의 답장을 기다렸을 르네를 생각하자 민규는 가슴이 아파왔어요.
민규는 병편지에 답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엄마의 병편지를 기다릴 르네를 생각하며 편지를 썼어요. 르네에게 편지를 다 쓰고 난 후 엄마와 아빠에게도 편지를 썼어요. 엄마에게 쓴 편지는 엄마를 만나면 드리기 위해 책꽂이에 꽂아두었어요. 그리고 아빠에게 쓴 편지는 아빠의 낡은 외투에 몰래 넣어두었어요. 방을 나오려 할 때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어요. 민규는 한참 동안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았어요. 그날따라 아빠의 얼굴이 노을처럼 불그스름해 보였어요. 민규는 아빠도 어쩌면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했어요.
“아빠. 이젠 엄마를 기다리지 마세요.”
다음 날 민규는 어제 학교에서 자신과 다툰 친구에게 사과했어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바닷가로 향했어요. 타고 가는 버스 창으로 비릿한 바닷냄새가 밀려들었어요. 정류장엔 삼삼오오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정류장 빈터에 좌판을 깔고 바다 한 움큼을 올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시장 아주머니들의 모습도 보였어요. 그런데 그 모습들이 전과는 다르게 행복하고 따스하게 느껴졌어요. 민규는 늘 자신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던 바닷가로 갔어요. 멀리서 숨을 쉬는 갯벌이 뱉어낸 잔거품들이 뽀글뽀글 튀어 올랐어요.
민규가 가져온 편지를 조심스럽게 푸른병에 넣고 비닐로 뚜껑을 막 닫으려는 순간 푸른병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어요.
“이제 가는 건가?”
“어. 르네에게 돌아가야지.”
민규가 대답했어요.
민규는 갯벌로 걸어 들어갔어요. 그때 민규의 얼굴에 노을이 붉게 번졌어요. 민규는 그 노을이 아직도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르네의 얼굴에서 피어나 바다로 번져가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민규는 푸른병에게 마지막으로 말했어요.
“잘 부탁해.”
그러자 푸른병이 대답했어요.
“안녕, 민규.”
민규는 편지가 담긴 푸른병을 힘껏 바다를 향해 던졌어요. 그리고 파도에 밀려 먼바다로 멀어져가는 그 푸른병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어요.
첫댓글 좋은 정보 고마워요!
반갑습니다.
가슴이 뭉클하네요. 읽을 수 있게 늘 배려 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이디가 예쁜 호수님!
따뜻한 댓글 고마워요.
호수님 마음이 더 예뻐요.
환타지님의 부지런함을 배워야 해요. 오늘은 동짓날이네요. 난 어제 뒷집 언니가 동짓죽을 가져 와서 먹었네요.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버렸어요. 친구들이랑 새알을 먹지 않으려고 밀고 당기고 했답니다. 안 먹으면 나이를 먹지 않는 방법 없을까요?
호호호^^
동짓죽 드셨군요.
저는 가족모임을 했어요.
암과 손잡고 노력하는 가족을 보는 일은 안타까웠어요.
언어장애가 부끄럽다고 말하는 걸 피하더군요.
그 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더군요.
작은 일에도 어여쁜 마음으로 응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파이팅!!
어쩌나! 사람은 병을 달고 살아가지만 힘든 병을 앓고 살아가는 일은 정말 힘이 드는 일이지요. 이 세상 그 어떤 위로가 위로가 될까요. 미국 카톨릭병붠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열중을 시키게 만든다더군요.그러다보면 고통을 조금은 잊고 산다는 군요. 그러고보면 우린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사니 얼마나 행복한지요.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렇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지요.
그래서 오늘으 내 생애 최고의 날처럼 껄껄껄 웃으며 삽니다.
엄마와 헤어진 아빠를 따라 바닷가 마을로 귀촌한 소년이 갯벌에서 편지가 든 푸른병을 주워 편지의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잊고 현실에 적응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동화다운 발상이지요.
정영숙 선생님!
꼼꼼히 동화를 살피시네요.
평론가 같아요.
굿!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