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의 놀라운 점은, 잘 읽히는 것과 별개로 저희가 아는 장르 구분의 얼개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스릴러라기에는 반전이랄 만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개 따위 없었고, SF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생태주의 소설을 읽는 듯한 안도와 평온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죠.
오스트리아의 작가 마를렌 하우스호퍼(Marlen Haushofer, 1920~1970)는 잉게보르크 바흐만과 함께 독일, 오스트리아 현대 여성문학의 선구적 작가입니다. 1963년 자비출판에 가깝게 발표한 이 소설로 아르투어 슈니츨러상을 수상하는 동시에 작지 않은 대중적 인기를 거머쥐었죠. 1960년대 첫 출간된 이후로, 1980년대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권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에 랭크되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라디오, 연극에 이어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그사이 이 세계는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여성성에 대한 적잖은 재고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저 정복대상으로만 삼았던 동물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낯선 이해도 움틉니다. 소비주의나 핵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시민 대다수가 공유하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정치적, 존재적 소외는 여전하며, 최근 닥친 새로운 감염병 앞에서 인류는 근원적인 무력감에 몸서리치며, 연대와 분리를 동시에 갈망하기도 합니다.
더는 불리지 않는 존재,
더는 비교대상이 없어진 존재의 자기이해
그의 이름은 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타인과 구분되지 않을 때, 타인의 기대를 받지 않을 때, 이름이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도 몰개성해지지도 않는 상황에 처한 주인공은 역설적이게도 이 궁핍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느낍니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누구의 기대도 느끼지 않는 유일한 자기 자신을요. 심지어 그녀는 실종된 가족이나 자녀, 친구를 사무치게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헌신적이고도 순도 높은 감정은 자신을 둘러싼 작은 동물들에게 쏟아지는 듯합니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벌이는 노동이 남긴 약간의 시간에는 그저 씁니다. 좋아하던 필기구도, 촉감을 고집하는 사치도 요구하지 않는 글쓰기가 그녀를 지켜냅니다.
챕터 구분도 기승전결의 포물선도 없는 낯선 읽을거리
"이 책에는 챕터 구분이 없나요?"
≪벽≫의 한국어판을 만드는 작업에서 몇 번이나 거듭되었던 질문입니다. 벽이 생긴 이후 고립된 상태로, 생존의 기반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가는 여성에 관한 우화와도 같은 이 장편소설에서, 주인공의 시간관념은 무뎌지고 시계도 멀쩡할 리 없습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더듬어 추적한 일자 관념들이 엿보이는 대목마다 진동하는 듯한 서체를 적용해 눈에 띄엄띄엄 걸리게 디자인했습니다.
400쪽에 달하는 거대한 소설이지만, 배경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연극이라고 해도 무방한 이 좁고 제한된 곳이 전 세계이고, 과거와 미래를 잇는 유일한 연결고리에 다름 아닙니다. 챕터로 나뉘거나, 눈에 띄는 변혁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저 현재지향으로, 생존지향으로 계속해서 씌이고 있는 글입니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로 한때 세계였던 폐허가 펼쳐지는 한편, 안쪽으로는 작지만 확실한 생명의 약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벽을 대단한 사회적, 생태적, 정치적 위기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범위를 좁혀생각해보면, 결국 벽은 나와 타인,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배제하는 일상적인 경계이기도 합니다. 이 벽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익히 경험했듯 타자의 무방비한 침입을 맞서 돋아난 보호벽이 되는 법도 있을 거예요.
이 소설과 비슷한 소설이 몇 작품이고 떠오르지만 이 소설과 똑같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18세기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새로운 세계에 발들인 ≪벽≫의 주인공은,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처럼 자길 제외한 나머지 '그들'을 정복하지 않습니다. 19세기 헨리 소로의 ≪월든≫처럼 대자연 속에 처한 유일한 인간이지만, 엄숙히 독립을 선언하는 자주적인 인물로서, 선택하는 인간으로서 등장하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