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향(杜香)의 일편단심 1편)
훌륭한 성인군자(聖人君子)도 사랑은 한다. 퇴계 이황에게도 한 기생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있다.
이황은 48세 때 단양군수를 제수(除授)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경직(京職)에 있던 관리가 지방으로 부임하게 되면, 노복(奴僕) 한 명과 아들 한 명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이른바 단신부임이 원칙이었다. 그 대신으로 그 관청에 속한 관기(官妓)가 밤낮으로 관리의 수발을 들었다.
춘향전에서 남원 변사또가 기생 점고(點考)를 하고,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 한 것도 이런 법도에서 나온 것이다.
변사또의 전임사또인 이몽룡의 아버지도 부임할 때 이도령과 방자만을 데리고 갔던 것과 같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수청을 든 관기는 18세의 두향(杜香)이었다.
두향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고아가 됐는데, 퇴기(退妓)인 변씨가 데려다가 시문(詩文)과 가야금을 가르쳤다가 후에 기적에 올리게 되었다.
변씨는 매화 분재(盆栽)를 잘했는데, 두향도 이를 따라 배워서 분재에 능했다.
퇴계는 2년 전 둘째 부인 권씨와 사별한데다가 이어서 아들까지 잃어 외로움과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우울할 때 절세미모에다 시문에도 능한 젊은 두향을 본 퇴계는 첫눈에 마음에 들어하며 애지중지하게 됐다.
두향이도 학문과 도덕이 높은 사또를 가까이에서 모시게되어 欽慕하고 존경하였다.
이렇게 둘은 첫눈에 서로 좋아하며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퇴계는 시간이 나면 두향과 함께 강변을 거닐기도 하고, 강가에 자리 잡고 앉아 두향이 타는 가야금 소리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퇴계는 단양의 경치가 하도 좋아 단양 8경을 만들어보려고 했으나, 한 가지가 모자라 7경 밖에 되지 않아 내심으로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경치가 빼어난 옥순봉이 단양 땅이 아니라 이웃 청풍 땅이었다.
이것을 눈치 챈 두향은 넌지시 “이웃 고을 원님께 가서 옥순봉을 달라고 해 보시지요.”하고 귀띔 했다. “옳지 그렇구나!” 하고 퇴계는 그 말대로 이웃 청풍의 원님이었던
이지번(李之蕃:토정 이지함의 형)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이렇게 오늘날의 단양팔경이 이뤄진 데는 두향의 공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향은 관가에 들어오면서 집에서 돌보던 매화 두 분(盆)을 가져와서 퇴계가 기거하는 방에 놓아 두었다.
백매(白梅)와 홍매(紅梅)였다. 이때부터 퇴계는 은은하게 방안에 감도는 매화향기에 취해 매화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와 함께 퇴계와 두향의 사랑도 깊어만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퇴계가 9개월 만에 단양을 떠나게 된 것이다.
퇴계의 친형님 대헌공(大憲公)이 충청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가까운 친인척이 같은 기관에 근무할 수 없는 상피(相避) 제도 때문에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轉任)하게 된 것이다.
제천 옥순봉
- 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옥순봉은 절세미인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절경을 자랑한다.
비 갠 후 여러 개의 푸른 봉우리가 죽순처럼 솟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정조 때 연풍현감으로 부임한 단원 김홍도는 옥순봉의 빼어난 자태를 화폭에 담았다.
옥순봉의 모습은 김홍도가 그린 산수화와 풍속화를 모은 《김홍도필 병진년 화첩》에 남아 있다.
옥순봉은 재미있게도 두 고장에서 나란히 절경에 포함시킨 아름다운 봉우리다.
제천 땅에 속해 있으면서도 제천 10경뿐 아니라 단양 8경에도 포함된다.
이렇게 된 연유에는 퇴계 이황 선생과 단양의 기생 두향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옥순봉은 예부터 청풍부에 속해 있었다. 단양 관기 두향은 옥순봉의 절경에 감탄하여, 당시 단양군수로 부임한 이황에게 옥순봉을 단양에 포함시켜 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이황이 청풍부사에게 건의했지만 허락하지 않자 옥순봉 절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 새기고 단양의 관문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황과 두향의 플라토닉 사랑은 충주호반의 잔잔한 물결처럼 애잔하게 남아 있다.
이황은 단양군수로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풍기군수가 되어 단양을 떠나야 했다.
이황을 간절히 사모했던 두향은 매화나무 한 그루를 선물하며 가슴 찡한 이별시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황은 훗날 "매화에 물을 주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을 정도로 매화를 아끼고 사랑했다.
두향이 선물한 매화는 아마도 떠나가는 사람에게 전하는 애절한 사랑의 징표가 아니었을까?
20여 년 뒤 이황이 숨을 거두자 두향도 이황과 함께 거닐던 강선대 아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장회나루 건너편에는 이황과 두향이 정을 나눴다는 강선대와 두향의 묘가 남아 있다
(두향(杜香)의 일편단심 2편)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퇴계 이황은 무겁게 입을 열어 두향에게 시 한수를 건냈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구나.
내일이면 떠난다. 期約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로구나』
하며 離別을 슬퍼했다. 이것을 듣고 두향도 퇴계에게 시 한수로 답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어느 듯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 할까 하노라』
여기서 ‘꽃 지고’의 꽃은 두말할 것 없이 매화를 말한다.
매화가 지고 봄날이 오면 임이 그리운 새가 된 나는 어이 할 꺼나, 하고 두향의 서러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두향은 떠나가는 퇴계에게 방에서 돌보던 매화 두 분(盆)을 드렸다.
백매와 홍매였다. 퇴계는 이 매화 두 분(盆)을 들고 豊基 땅으로 떠났다.
두향은 고개 마루에까지 가서 배웅을 하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두향은 그 후 신관사또에게 기적(妓籍)에서 빼어줄 것을 사정했다.
신관사또는 두향이 퇴계를 사모하는 정이 애절한 것을 알고 기적(妓籍)에서 빼주었다.
두향은 퇴계와 함께 풍류를 즐기던 강선대 밑에 초막을 짓고 수절하고 살았다.
그러면서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퇴계만을 생각했다.
퇴계도 두향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법도로는 사또가 임지를 떠나 관기(官妓)였던 두향을 만나러 갈 수도 없었고, 두향을 새로운 임지로 데려올 수도 없었다.
오매불망 두향을 잊지 못한 퇴계는 단양을 떠난 지 4년 만에 인편(人便)에 두향에게 이런 시를 지어 보냈다.
누런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면서 텅 비고 밝은 방안에서 초연히 앉아 있네.
매화 핀 창가에서 또 봄소식을 보는구나
거문고를 바라보며 줄이 끊어졌다 한탄하지 마라』
『오래된 책(黃卷)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성현들의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텅 빈 방안에서 네 생각을 하느라고 멍하니 앉아 있구나.
창밖을 내다보니 매화(두향)가 피어 또 봄이 오는데 두향아, 거문고를 맥없이 바라보며 정든 임을 이별했다(絶絃: 든 사람을 이별함)고 너무 슬퍼 말아라.』 생이별한 두향이를 그리워하는 퇴계의 마음이 넘쳐흐른다.
주자의 맥을 이었지만 주자보다 더 언행일치(言行一致)의 도덕군자(道德君子)로 성현(聖賢)의 반열에 오른 퇴계였지만 애틋한 사랑을 잊을 수는 없었다.
퇴계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놓고 말 할 수 없어서, 매화시를 써서 은근히 깊은 마음을 두향에게 전한 것이다.
(두향(杜香)의 일편단심 3편)
퇴계는 두향이를 만나 매화를 알면서 부터 매화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됐다.
퇴계는 매화에 관한 시를 평생 118수나 지었고, 매화(梅花) 시 로만 엮은 《매화시첩》이란 책도 냈다.
매화 시 가운데는 상당수가 매화를 그대(君, 公), 형(兄)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이 가운데 두향이를 염두에 두고 지은 시가 많다.
그만큼 두향은 퇴계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퇴계는 이른 봄 추운 달밤에 매화가 피는 모습을 보기 위해 특별한 椅子 를 고안하기도 했다.
의자 밑에 火爐를 놓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화로의 온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불을 덮어 쓰고, 달밤에 얇은 잎을 파르르 떨며 봉우리를 터트리는 매화의 개화(開花)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곤 했다.
매화가 추위를 이기며 꽃을 피우느라고 떠는 모습을 지켜보는 퇴계의 눈에는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아무리 어려워도 정절(貞節)을 팔지 않는 두향이의 모습이 겹쳐보였을 것이다.
퇴계는 두향이 준 매화분에서 가지를 꺾어 머무는 곳마다 옮겨 심었다.
서울 집에도 매화를 옮겨심기도 하고, 매화를 분재(盆栽)해서 방에 놓고 두향이를 보는 듯 바라보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올 때는 매화를 상대로, ‘매화야 잘 있거라, 내 다녀오마.’ ‘염려 말고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는 내용으로 문답시를 짓기도 했다.
60세 때에 도산서원이 준공되었는데, 그때도 두향이 준 매화가 옮겨 심어져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지금도 이 설중매(雪中梅)들은 해마다 이른 봄이면 두향이처럼 淸純한 氣稟과 고고한 정절을 뽐내며 만개하고 있다.
퇴계는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除授)했지만, 55세 이후엔 안동 토계에 내려와서, 마지못해 잠시 벼슬길에 올라갔다 내려온 것을 제외하고는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퇴계와 두향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가슴 아픈 일이다.
퇴계는 1570년(70세)에 안동에서 숨을 거둔다.
숨을 거두면서도 퇴계는 아들에게 “매형(梅兄)에게 물을 잘 주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으면서도 두향이를 잊지 못한 것이다.
퇴계의 부음(訃音)을 강선대 초막에서 들은 두향은 소복을 입고 안동까지 걸어가서 먼발치에서 장례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곤 걸음걸음 눈물을 흘리며 단양 강선대로 돌아왔다.
두향은 아침 저녁으로 상식(上食)을 떠놓고 안동 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곡을 했다.
그러면서도 두향은 자기 입에 밥 한 술 떠 넣지 않았다.
穀氣를 일절 끊고 자리에 누운 두향은 초막에서 혼자 굶어서 죽었다.
혹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죽거든 강선대 아래 묻어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두향의 유언대로 강선대 아래에 묻어주었다.
그러나 충주댐이 생기면서 두향의 무덤이 물에 잠기게 되자 후에 강선대가 바라보이는 높은 곳으로 옮겼다.
지금은 배를 타고 건너야 두향의 무덤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두향은 죽어서 450여년이 지난 후에 그 절개를 제대로 稱頌받고 있다. 단양군에서 매년 5월에 두향제를 올리며 두향을 추념하고 외로운 넋을 달래고 있다.
천원 짜리 紙幣에는 퇴계의 초상(肖像)과 함께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도산서원 위에 퇴계가 그토록 사랑한 매화 20여 송이가 활짝 피어 있다.
두향이와 퇴계의 사랑이 우리들의 가슴 속에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는 듯 하다.
첫댓글 낮퇴계 밤퇴계란 말이 여기서 나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