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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9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코 2,23-28
용서받지 못하면 회개하지 못 한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왠지 ‘공동체’의 중요성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공동체는 죄를 용서받는 장입니다.
그러나 규율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는 죄의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이런 규율이 지배하는 대표적인 공동체를 ‘바리사이들’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는 하늘 나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죄의 용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남의 집 땅에서 자라는 밀이삭을 훔쳐 먹었습니다.
율법 규율이 그 집단의 지배 원리인 바리사이 공동체는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어기는데도 그들을 옹호해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율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는 참다운 안식이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을 뛰어넘는 당신이 그 안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그렇게 이루어진 안식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주인이십니다.
피아제와 콜버그는 사람은 성장하면서 도덕성도 발달한다고 말합니다.
도덕성의 발달은 규율로부터 얼마나 자유롭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래의 지문을 읽고 하인츠의 행동이 정당했는지 살펴봅시다.
“하인츠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는 데 필요한 약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때 한 약국의 약사가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하인즈는 약을 사러 갔지만 약사는 제조비의 대가로 원료값의 10배인 한 알에 2000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인츠는 모든 지인에게 찾아가 돈을 빌렸지만 1000달러밖에 구하지 못해 약사한테 사정을 해봐도
약사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인츠는 절망하고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약국을 부수고 약을 훔쳤습니다.
이때 하인츠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가요?”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유아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존에 유익한 것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법을 지켜야지요. 법은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혹은 “돈을 안 내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잘못된 거죠.”라고 대답하면 어린이 정도의 도덕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혼나기 싫어서 부모의 말에 복종합니다.
자율적 판단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단 횡단하거나 신호등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참지 못하고 신고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더 높은 단계는 법보다 상황과 사람을 더 중요시하는 단계입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 벌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과 자비가 법을 넘어서는 단계입니다.
장발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 죄로 19년을 복역했습니다.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을 주시합니다.
장발장은 19년 동안 자신이 당연한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나라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에서 하정우는 가슴 따듯한 사람으로 나오고 그의 후임으로 온 친구는 그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무자비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후임을 용서하지 못하고 후임은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발장도 용서받지 못했기에 남의 물건을 훔칩니다.
먹여주고 재워줘도 주교관에서 금 촛대를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만약 빵을 훔친 것에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였다면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교는 그것을 그냥 준 것이라 말합니다.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장발장은 그날 이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겉보기엔 남의 곡식을 훔쳐 먹고 안식일을 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함께라면 그 공동체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아마 다시는 예수님께 그런 상황을 만들어드리지 않기 위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는 처음에 바오로와 바르나바 공동체와 함께 다녔습니다
(물론 그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 사가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르코가 바오로의 뜻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더는 마르코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르나바는 마르코가 사촌이었기 때문에 그를 옹호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관 일을 맡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마르코는 자신의 믿음이 교회 공동체 때문에 형성되었고 그 공동체가 자신 때문에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오로가 용서해 주어서 자신이 변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르코가 회개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새로 태어남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벌 받는 게 두려워서 지켜야만 하는 율법주의자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누군가의 회개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9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히브리 6,10-20
마르코 2,23-28
해질녘 강가, 과수원에서
어린 시절, 주말만 되면 저는 ‘고기잡이 전문가’였던 형을 따라 강으로 계곡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저도 슬슬 재미를 붙여 해지는 줄 모르고 고기를 잡았습니다.
고기를 잡는 방법도 다양했지요. 낚싯대로 잘 안 잡히면, 커다란 해머로 물에 잠긴 바위를 내리칩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위 밑에 숨어있던 고기들이 기절을 해서 떠오르지요.
어떤 날, 저는 하루 온 종일 형과 같이 타고 간 자전거의 페달만 열심히 돌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형은 페달을 돌릴 때 생기는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서 고기를 ‘감전’시켜서 잡았습니다.
또 형은 손으로 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정말 귀신같았습니다.
그렇게 잡은 고기는 날걸로 먹기도 하고, 튀겨먹기도 하고, 매운탕도 끓여먹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해가 넘어가곤 했습니다.
강가에는 큰 과수원이 하나 있었는데, 늦여름 쯤 되면 사과의 크기도 크기지만, 그 빛깔이 너무 고왔습니다.
낮에는 괜찮았는데, 해만 떨어지면 그리도 유혹이 커졌습니다.
때로 유혹을 참지 못해 과수원 담을 타고 넘어갔습니다.
크고 잘 익은 것은 미안해서 손을 못 대고, 떨어진 것들 몇 개씩 주워서 나오곤 했습니다.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는 말, 누가 했는지 정말 정답이었습니다.
그 맛이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씩 주인아저씨에게 들켜서 밤늦게까지 벌도 서고, 거름도 옮기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우리 시골 전통 안에 ‘서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젊은이들이 혈기를 한번 부려보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관대한 마음으로 눈감아주는 좀 특별한 전통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닭서리’ ‘수박서리’ 인데, 아직도 그 기억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했었지요. 요즘같이 ‘차 때기로’, ‘무자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안해하면서,
닭 한두 마리, 혹은 수박 한 두통, 그 정도였습니다.
어르신들도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허허’ 하고 슬쩍 눈감아주셨지요.
요즘같이 경찰에 고소한다든지, 법정에까지 간다든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리란 것은 적정선의 ‘장난끼’가 발동되는 것이었습니다.
심각하게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호기부리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가다 보니,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장난기가 발동되었습니다.
아니면 어린 시절 밀 이삭을 잘라먹던 추억이 떠올랐겠지요.
자연스럽게 밀 이삭 몇 가닥을 뜯었습니다. 비벼먹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웃으면서 따라했겠지요.
장난으로 그랬지, 그것을 ‘노동’한다면서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지금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기가 치지도 않았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안식일을 정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신체구조, 신체리듬 상, 한 엿새 일하고 나면 지치기 마련입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칩니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만 갑니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되면 일의 능력도 떨어집니다.
그 정도 되면 일이 기쁨이요 보람이 아니라 인간을 힘들게 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괴로움의 원천이 됩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노동은 삶의 큰 보람입니다. 노동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안식일(혹은 주일)이라도 먹어야 합니다.
안식일이면 오히려 재미있게 지내야지요. 안식일 날 꼼짝 없이 집 안에서만 지내기보다는 산으로 들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쐬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겠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나와 있는 것처럼 송장처럼 꼼짝없이 지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웃기는 일입니다.
당시 안식일 규정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때로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규정이어서,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규정이어서 배를 쥐고 웃을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안식일의 세부 규정 때문에 안식일이 오히려 더 괴롭고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1,392미터 이상 걸으면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밀 이삭을 한 개 자르는 것 역시 큰 위반이었습니다.
꽃 한 송이 꺾는 것도 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열매에 손대는 것조차도 위반이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위반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쫀쫀하게’ 된 바리사이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주고 싶으셨습니다.
안식일의 핵심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월19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2,23-28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이 노력을 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본래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적으로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즉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여 생명이나 생명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생긴 것이며, 그 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법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인간이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간은 칠일로 되어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는 노동을 위해 주셨고, 하루는 기도와 휴식과 죄 씻음을 위해 허락하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엿새 동안 이런 저런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날에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주님의 집에 가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주님께 대한 감사로 기도를 마무리 하여야 한다. 그렇게 깨끗하게 된다면 제단으로 나아가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를 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대한 대답을 하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정하셨다는 천지창조 사화(창세 1,26-2,4)의 이야기와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원칙적인 답변이다. 즉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다. 즉 법률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즉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가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판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일을 잘 사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