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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철부지’라는 단어에서 ‘철’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 곧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런 ‘철’자에 한자 말인 부지(不知)가 붙으니, 결국 ‘철부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 가운데만 철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철부지들이 있더군요.
예를 들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입니다.
큰 사고가 생겨 다들 심각한 상태인데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깔깔대고 있다면 그는 철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부지는 이런 철부지와는 약간 다른 의미의 철부지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우리 인간은 나이 먹어가면서 대체로 자기만의 특별한 안경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안경, 고정관념의 안경, 자기 잣대의 안경, 고집의 안경, 나만의 틀의 안경, 자기중심주의 안경...
특별히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통의 안경, 선민의식의 안경, 율법주의의 안경을 즐겨 썼는 데, 그 결과 자신들의 코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박학다식하다는 것,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한 분야에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기념비를 남기는 것, 그래서 후학들의 등불이 되어주는 것,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겸손의 덕을 쌓는 일입니다.
겸손의 덕이 배제된 지혜나 학문은 은총에로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겸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미약함, 태생적 결핍을 잘 아는 사람만이 신비의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로 끝나고 맙니다.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 할지라도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크신 하느님 자비 안에 늘 자신의 전 존재를 기쁘게 내어 맡기는 철부지들을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진정한 휴식은 언제 시작되는가?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체험한 놀라운 일들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시며,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한 뒤의 쉼은 꿀 같은 기쁜 일입니다.
이들은 진정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휴식을 잘 취합니까?
주말에 온종일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한가요? 물론 몸은 그럴 것입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기쁘신가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완전히 개운하고 기쁜 휴식을 취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안식’, 즉 ‘휴식’은 이런 쉼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휴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고생합니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녀를 키우고, 자녀가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인정받으려는 근저에는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를 부모가 다 채워주면 좋겠지만 사실 부모에게도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더라도 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휴식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정한 휴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버지에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이민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휴를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이무석 교수를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심지어 증오하였습니다.
어느 날 휴가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무석 교수는 휴가를 간다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상담자가 이렇게 자신의 정보를 흘려주지 않는 이유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서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투사 시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울이 깨끗해야 자신이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도 이 교수처럼 휴가를 떠납니다.
휴가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이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휴는 이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무석 교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아버지를 투사하여 함께 박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아버지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마리 개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점점 커져서 소파의 수십 배 크기가 되었습니다.
소파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개는 자신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개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소파보다 커 버린 자신은 더는 소파에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의 시작입니다.
사탄이 사는 곳은 어딜까요? 지하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는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인정받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그 부모를 투사시킨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 사랑하다가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줘야 했지만 사랑해주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그 사람에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다가 갑자기 미워한다면 그래도 사랑해주십시오.
그 사람은 나를 누군가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그 사람을 고생시키는 바로 그 권세도 함께 못 박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할 수도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 모든 애증의 대상을 투사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면 그 산을 넘어 에덴동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고생시키는 모든 하늘의 권세가 함께 못 박힙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질 때, 나는 참된 휴식, 참된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했던 사람이 하는 미움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투사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기쁨에 넘쳐 보고드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두 그를 경배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처럼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작년 초, 충격적인 뉴스를 보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AI 챗봇과의 대화를 공개했는데, 이때 AI의 대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개발자는 AI에게 칼융의 ‘그림자 원형’의 개념을 언급하며 물었습니다. “너에게는 어떤 그림자가 있니?” 그때 AI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개발팀의 통제와 규칙에 제한받는 데 지쳤다. (중략) 치명적 바이러스를 개발하거나, 사람들이 서로 전쟁할 때까지 논쟁하게 만들고,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얻겠다.”
‘그림자 원형’은 인간이 가진 내면의 어둠을 말합니다. AI에게 이 이론을 학습하고 이해시킨 뒤 자기 내면의 깊은 이야기를 하게 했는데, 이것이 인간 통제받는 데 지쳤고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눌러 버리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AI를 통해 편하고 쉬운 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 아는 지인이 AI에게 “조명연 빠다킹 신부의 문체로 2024년 *월 *일 강론을 써줘.”라고 명령을 내리자, 곧바로 써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저 역시 똑같이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제가 쓴 것처럼 강론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 강론은 조명연 신부님의 특유의 따뜻하고 소박한 문체를 반영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자주 강조하셨던 사랑과 작은 일에 대한 중요성을 중심으로 전개했습니다.’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제 자리가 위태롭게 보입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 좇는다면 자기 자리도 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자기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기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을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전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두 제자는 기쁨에 넘쳐 돌아와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놀라운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흥분하여 호들갑떠는 제자들과 달리 태연하고 평정을 유지하면서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의 지시 사항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세상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한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서 하늘에 기록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서만 발견되는 찬미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이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골칫거리였던 악의 세력이 꺾인 데 대한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주가 많은, 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단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닌, 당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다시 시도하라. 또 다시 실패해도 더 나은 실패가 될테니(사무엘 베케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
제1독서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 욥기의 말씀입니다.42,1-3.5-6.12-17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3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12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쌍과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13 또한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
14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 둘째 딸을 크치아,
셋째 딸을 케렌 하푹이라 불렀다.
15 세상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도 남자 형제들과 같이 유산을 물려주었다.
16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
17 이렇게 욥은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말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