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원 및 변천
한말에 내한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따라서 인천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크리스토교 복음을 먼저 접할 수 있었다.
미감리회 개척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도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도착해서 한 주일 머문 후
일본에 갔다가 6월 20일 다시 나와
7월 29일 서울로 들어가기까지 38일 인천에 머물면서
선교를 준비했다. 내리교회에서는
이것을 교회 설립의 근거로 삼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그 후 1888년 서울 정동에서 사역하던 올링거(H. Ohlinger)는
전도인 노병일을 인천에 파송해서 전도한 결과
김기범과 이명숙, 장경화 등의 교인을 얻어,
1890년 안골(내리)에 6칸 초가집을 마련하고 집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을 오늘 내리교회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처음에는 제물포교회라 불렸다.
1892년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출신 강재형을 인천에 보내
웨슬리회당에서 학교(영화학당)를 개교하였다.
1893년 이화학당 스크랜턴(M. F. Scranton) 부인이
전도부인 백헬렌을 인천에 보내 전도한 결과 교인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위해 4칸짜리 초가집을 사서 여성 집회소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남녀가 따로 예배를 드리다가
1900년 우각동에 ‘애즈베리회당’이라 불린
12칸 한옥 예배당을 마련하고 휘장을 친 후
남녀 교인이 함께 예배드리게 되었다.
이 예배당을 마련해 준 선교사 존스(G. H. Jones)는 1892년부터 인천 구역 담임자가 되어 우각동(현 창영동)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인천에 상주하면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의 지도로 1897년 엡웟청년회 인천지회로 나인드회가 조직되었고, 그해 교인수가 2백 명을 넘었다.
이처럼 교인이 늘어나자
1901년 다시 내리 언덕 용동에
십자형 붉은 벽돌 고딕 예배당을 건축하고 옮겼다.
이때 마련한 예배당을 ‘웨슬리회당’이라 칭했는데
통상 내리교회로 불렸다.
1901년 미감리회 연회에서 김기범이
한국인 최초 개신교 목사로 안수를 받고
존스가 인천을 떠난 1904년 이후 내리교회를 담임하였다.
1902년 12월 첫 번째 하와이 이민선이 떠날 때
이민단 121명 중에 장경화와 안정수, 우병길 등
내리교회 교인이 50명을 포함되었고,
홍승하는 이민단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하와이 이민으로 내리교회 교세가 잠시 하락하였지만,
1907년 3월 부흥운동이 일어나 교세가 급증하였고
주일학교 학생만 9백 명이 넘었다.
내리교회는 인천과 강화, 연안, 해주 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었고, 인천 담방리교회(만수교회)와 굴재교회(계산중앙교회), 화도교회, 주안교회 등을 개척 설립하였다.
내리교회는 인천지역의 교육·사회·문화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영화 남녀보통학교 외에 1916년 우각동에
영화유치원을 설립하였고,
1919년 인천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3년 인천소년회,
1925년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도 내리교회에서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4년 목회자 갈등으로 교인 일부가 우각동에 창영교회를 분립해 나가는 사건도 있었다.
해방 후 내리교회는 감리교단의 재건파 분열(1946년),
호헌파 분열(1953년) 때 혼란과 시련을 겪었다.
또한 1958년에 지은 2층 벽돌 예배당이
1964년 화재로 전소하는 일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