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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묵상글 ( 재의 수요일. - 오롯한 길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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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재의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길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4)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7-18)
내 앞에
벗 있으니
나와 벗 사이에
다른 이 없도록
오로지 벗에게
마음길 열고
오로지 벗에게
눈길 건네고
오로지 벗에게
손길 내밀고
오로지 벗에게
발길 내딛고
내 앞에
하느님 계시니
나와 하느님 사이에
다른 이 없도록
오로지 하느님께
마음길 열고
오로지 하느님께
눈길 건네고
오로지 하느님께
손길 내밀고
오로지 하느님께
발길 내딛고
내 앞에
나 있으니
나와 나 사이에
다른 이 없도록
오로지 나에게
마음길 열고
오로지 나에게
눈길 건네고
오로지 나에게
손길 내밀고
오로지 나에게
발길 내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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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재의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월 12일(240212) 올리신 글 하단에
내일부터 17일 토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돌아와서 기쁘게 다시 만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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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재의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약속은 맺을 약, 묶을 속, 즉 단단히 묶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 관계가 헐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할 사람 몇몇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안 오는 것이냐?”라고 물으니, “조금 늦는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약속 자체가 많이 헐거워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는 연락이 되지 않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너무 쉽게, “미안, 급한 일이 있어서…. 조금 늦어.”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그만입니다.
약속이 헐거워 짐은 관계 역시 헐거워지게 됩니다. 실제로 몇 차례 약속 시간에 늦는 친구를 보면서 아예 약속을 잡지 않게 되지 않습니까?
주님과 우리는 많은 약속을 합니다. 죄짓지 않겠다. 열심히 살겠다. 가정에 충실하겠다. 사랑하며 살겠다 등등…. 그런데 그 약속이 헐거워진 것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약속을 깨고 “다음에는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뒤에 또 다른 약속을 만듭니다.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아 주님과 헐거워지는 관계가 되면, 결국 전혀 상관없는 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여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묵상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많은 약속을 주님께 하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많이 지으며, 주님 뜻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서 다시 주님께로 향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그냥 입에서만 맴도는 공염불이 될 때가 많습니다. 약속이 계속 헐거워지면서 주님과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재를 얹으면서 사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칭찬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칭찬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참회를 겉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모두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약속이 헐거워지도록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통해 더욱 주님과 단단한 결속을 맺을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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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하려면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에이브스 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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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재의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제1독서>에서는 ‘회개’를 <제2독서>에서는 ‘화해’를, <복음>에서는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라고 말하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말하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옴’ 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신앙의 빛>에서,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회개’가 첫째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수도승들은 ‘제2서원’으로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회개는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으로 지속됩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적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외적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의 요청이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삶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도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는 어둠이 아니지만 어둠과 놀면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희는 빛이 아니지만 빛 앞에 머무르면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늘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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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재의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더 가까이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선할 때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하라.”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모르게 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의 삶이건 신앙의 삶이건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좋은 평판을 받기를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면의 힘을 길러 그런 것에 민감해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적인 힘이 있으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 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기도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가? 그렇게 하셨다면 그 희생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가? 사실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루 세 끼 식사는 꼭 챙겨 드시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면 하실수록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그렇게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행동할 때입니다. 사순시기에 행동한다는 것은 또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도 안에서 멈추고, 사마리아인처럼 다친 형제나 자매가 있는 곳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이웃의 육신 곁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관계없는 세 가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우상들과 우리를 구속하는 집착을 쫓아 버리는, 개방과 자기 비움의 단일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이 회복될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고, 그런 뒤에 멈추어 봅시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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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재의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고통, 십자가와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오늘 사제는 성지(聖枝)를 태운 재를 축성하고 이마에 바르는 예식을 하게 됩니다. 재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는 다양합니다. 우선 재는 불로 태워진 것, 즉 단련의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자신을 태우고 새로 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 재는 남김없이 모두 타 버림으로써 순수한 인간 존재의 본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아울러 새로운 성장과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서의 재를 받음으로써 사순시기 동안의 노력을 통해 부활의 새 생명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를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시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신앙생활의 핵심은 잘못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쁨을 믿고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풀잎 끝에 달린 이슬과 같으니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흙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겸손’과 같다고 합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좀 더 겸손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겸손함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강한 무기입니다. 겸손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정의 밑에 서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흙과 같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겸손은 "기름진 땅"이라는 라틴말(Humus)에서 나왔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서 사순시기를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교회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40일 동안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은 바로 죄를 지은 나를 위한 수난과 고통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은 나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행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40이라는 숫자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정화와 단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와 침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였을 때에 비를 내려서 벌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큰 배를 만들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배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비는 40일 동안 내렸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정화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새로운 일을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성서의 이와 같은 4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받아들여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40일을 마련하였습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4가지를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희생의 방식은 다양 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희생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희생입니다. 양보하는 것도 희생입니다. 신앙은 희생이라는 밭에서 피는 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본당에서도 사순시기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마련한 사순특강에 참여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셋째는 단식입니다. 단식을 하는 의미는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선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저금통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교구는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앙은 나눔으로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2024년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정화시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희생, 기도, 단식, 자선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함께 동참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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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재의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재의 수요일에 대한 기억은 좀 남다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연관이 되어있지요.
제가 추기경님을 만난 건 세 번입니다. 한번은 먼발치에서 강론하시는 것을 들었고, 한번은 미사를 같이 할 수 있었고, 한번은 둘이 함께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신학교 4학년을 마치고 신학교에서 짐을 챙겼습니다. 대학 졸업장만 챙기고 그만하려 했던 것이지요. 집도 어렵고, 또 이 길을 정말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짐을 챙기는데 친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느냐가 중요한 거야. 그러니 하느님께 물어보고 나서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분명 답을 주실 거야. 그러니 물어봐라, 답이 있을 때까지.”
저는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고는 어느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10일간 침묵하며 기도하기로 한 것입니다.
피정을 출발하는 날, 머리를 빡빡 깎았습니다. 머리를 깎던 미용사가 물었습니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어디 가세요?’ 조폭으로 오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피정하러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피정이 뭐냐고 또 묻는 겁니다. 가톨릭에 대해 모르기도 하고 또 귀찮기도 하고 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아십니까?’ 그분 만나러 갑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분은 그러냐고 하면서 좋은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깎고 달랑 배낭 하나로 피정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재의 수요일이 다가왔습니다. 수녀님께서 제게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사님, 내일 미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큰 테이블을 옮겨야 한대요. 도와주시겠습니까?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방해는 됐지만 기꺼이 하기로 했습니다. 수녀님과 테이블을 가지러 갔습니다. 테이블이 있는 방에 들어갔는데 웬 신부님이 테이블에 기대서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신부님에게 ‘신부님, 테이블 가져가야 하는데요.’라고 하니 신부님은 테이블을 내주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말입니다.
방을 나오며 제가 수녀님께 물었습니다. 말하면 안 되는데 너무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침묵을 깼던 것이지요.
‘수녀님, 어느 교구인지 몰라도 김 추기경님과 너무 비슷하신 분이 계시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피식 웃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기도는 엉망이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추기경님이다. 아니다.’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재의 수요일이 되었습니다. 아침기도를 마치고 미사를 시작하는데 김 추기경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렇게 추기경님과 재의 수요일 미사를, 재를 얹는 예식을 했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재 머리에 재를 얹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라고 말입니다.
매년 해오던 그 예식이 왜 갑자기 눈물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떨어지는 재를 보며 그렇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한참을 울었습니다. 미사 내내 말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먹기도 하고 벌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살지는 마십시오. 그곳에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하지는 마십시오. 언제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날, 내일이 될지, 오늘 밤이 될지, 혹은 1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그날을 위해 오늘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며, 용서하며, 이해하며, 그리고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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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재의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
-“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
오늘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삶을 새롭게 확립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오늘 본기도 또한 사순시기의 영적전투의 시작에 앞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 그리스도를 믿는 저희가, 거룩한 재계로 악의 세계와 맞서 싸우려 하오니, 극기의 보루를 쌓게 하소서.”
어떻게 극기의 보루를 쌓으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베네딕도 규칙서 “제49장;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항목도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유익한 가르침을 줍니다.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런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심기일전,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대로 온전한 삶, 참된 삶을 다시 새롭게 살기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사순시기의 참된 삶을 위한 세 지침입니다.
첫째, “회개하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는 삶입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삶, 회개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사순시기입니다. 기후위기는 물론 날로 복잡하고 혼란해지는 사회 현실을 대할 때 신자들은 물론 전 국민의 생태적 회개와 더불어 전방위적 회개가 급박한 위기의 시대처럼 생각됩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의 규칙서 제49장에서 사순시기, 회개에 우선적 강조를 둡니다.
“우리가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요엘서 서두에서도 강조하는 바 회개의 촉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주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잃었던 나를 찾아 참으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야 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오늘 요엘서가 말하는 회개는 개인의 회개는 물론 전공동체적 회개의 실현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전공동체적 회개에 응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합니다.
참된 신자 삶에 우선적 조건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깊이에서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겸손한 삶, 참된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 역시 바오로 사도를 통해 사순시기는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시기이자 화해의 시기임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사순시기 지금은 바로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이니 바로 회개를 통해 이뤄지는 구원의 현실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회개의 진정성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에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요 오늘 복음은 사순시기 사랑의 세가지 실천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적 세가지 사랑의 수행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절합니다.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요, 모두가 사랑의 표현인 수행입니다. 이웃 사랑의 개방이 자선이요, 하느님 사랑의 개방이 기도요, 자기사랑과 개방이 단식입니다. 사랑의 기도는 단식으로 단식은 자선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하느님 중심의 숨겨진 삶! 참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사랑으로 활짝 열린 이들이 참으로 부요하고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관상가, 신비가. 영성가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자선이, 기도가, 단식이 참된 회개, 참된 사랑, 겸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셋째, “진실하라!”
예수님이 참으로 혐오한 것은 안과 밖이 다른 표리부동의 진실치 못한 위선자 허영과 교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말씀 역시 자기 중심의 허영과 교만의 사람에게 주시는 질책이자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으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이런 자기 중심의 위선적 삶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하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한결같이 역으로 진실하라, 정직하라, 솔직하라는 말씀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좋은 삶, 참된 행복, 참된 사랑도 선택입니다. 부단한 회개로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선택할 때 참된 사랑, 참된 행복, 안과 밖이 같은 진실한 삶입니다.
그러나 명심할 사항이 있습니다. 사순시기 과도한 절제나 극기, 고행으로 어둡게 우울하게 침통하게 심각하게 지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권고가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순시기를 보내라 하십니다.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참 놀라운 것이 즐거움이란 말마디가 규칙서중 여기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라는 장에서만 2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사순시기,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게 수행생활에 충실하라는 충고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하느님 중심의 즐겁고 행복한 삶을 새로이 선택,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재의 예식중 다음 사제의 말씀을 상기하며 하느님 중심의 회개와 겸손의 삶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부단한 회개와 겸손의 삶에서 샘솟는 참기쁨, 참행복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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