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32
10월3일[연중 제2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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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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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aUwLMjZb-s?si=0p1kseW6c7CqMBzS
[서울대교구 강규원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집전(대치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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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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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uO7bm3B9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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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 꿈을 포기하면 무엇이 남을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마음을 굳히십니다. 십자가에 달리려는 마음을 굳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해 달려오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삶의 목표이자 꿈이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길을 선택하면 그저 생존하려는 이들에게 비난 받습니다. 그냥 살면 되지 왜 꿈이니 목표니 하면서 괴롭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은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가끔 힘들고 어려울 때 살아도 사는 게 아니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삶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목적이 없어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꿈이 없으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거나 생존하는 것입니다.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꿈은 나의 생명의 에너지를 소진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그저 생존하는 게 목적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참 생명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스물다섯 살까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였다가 가난하게 되어 돈이 행복이라 믿을 수밖에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자신은 큰 부자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가족도 돌보고 세상에 좋은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만족을 알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바랐던 어머니에게 상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현실을 잊기 위해 마약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큰 선물을 준 사람은 마약을 끊는 기관에서 일하는 상담사였습니다. 그는 그랜트 카돈은 마약에 워낙 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끊을 수는 없을 것이라 단정하였습니다. 그랜트 카돈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성공에 집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마약은 저절로 끊어졌습니다. 6개월 만에 자동차 판매왕이 되었고 지금은 부동산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가 마약을 할 때는 모두 마약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성공에 집착할 때는 그것도 마약인 것처럼 뜯어 말렸습니다. 자신들이 꿈 없이 노력하지 않는 것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랜트 카돈은 성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마약의 삶으로 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냥 생존하기 위해 마약을 하는 삶과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 에너지를 생존하는 데 쓰느냐, 꿈을 이루는 데 쓰느냐를 선택하는 것은 본인이 할 일입니다. 에너지는 어디엔가는 쓰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이 세상을 구하려는 꿈에 쏟아부으셨습니다. 피곤한 하루를 살면 잠이 잘 오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깨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원리입니다. 하루에 자신의 에너지를 꿈을 위해 쏟아붓지 않으면 아침이 괴롭습니다. 마지막 때도 그럴 것입니다. 꿈은 처음부터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상에 유익한 무언가를 하도록 태어났음을 믿고 나아가다 보면 조금씩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거절만 당하던 루저에서 62조 자산가가 된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 전 회장의 인터뷰를 들어봅시다.
“대학 입학 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졌었나요?”
“네, 대학 시험에 3번이나 떨어졌어요. 저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실패들도 많았죠. 전 중요한 초등학교 시험을 2번 낙제했어요. 전 중학교 입학도 3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오늘날에도 저희는 여전히 거절 당합니다. 대학교 졸업 후 3년 동안 취업을 준비했어요. 거의 30번 넘게 지원했지만, 모두 실패했죠. 저는 경찰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적합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저는 심지어 KFC에 들어가려 했어요. KFC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을 때였어요. 총 24명이 KFC에 지원했는데 23명만이 합격했어요. 제가 떨어진 단 한 사람이었어요. 경찰을 지원했을 때는 총 5명이었는데, 저는 여기서도 유일하게 떨어진 한 사람이었어요. 저에게 ‘실패’는 익숙한 거였어요. 그리고 제가 말했죠. 저는 하버드에 10번을 지원해서 10번 모두 떨어졌어요. 저는 매우 낙담해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친구가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추천해줬죠.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바로 이 남자다.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이.’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믿으세요. 그 일을 사랑하세요. 다른 사람이 좋아하든 말든.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요. 당신이 어떤 것을 얻게 될지 결코 알 수 없어요.’ 나는 절대 몰랐어요.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당신과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을 거라는 걸요. 나는 결코 몰랐어요. 하지만 저는 만들어냈어요. 15년 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약 우리가 성공한다면 80%의 중국 젊은이들에게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 아버지도, 막강한 권력의 삼촌도 없습니다. 은행에서 1달러, 정부로부터 1센트도 못 받았어요. 단지 팀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 걱정되는 것이 있나요?”
“요즘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가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리고 꿈을 잃고 불평불만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꿈이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아는 사람은 꿈을 포기한 사람들을 가장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차갑거나 뜨거우면 삼키겠지만,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생존에 집착하든, 진정한 삶에 집착하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소명과 성공에 집착하지 않으면 중간밖에 못 간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만큼 생존 욕구에 집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생명을 바칠 나의 소명을 찾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꿈을 포기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죄를 짓는 일만 남습니다. 인생은 오르막 아니면 내리막입니다. 매일매일 예루살렘으로 오를 결심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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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최초의 조선인 정도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선을 시작한 사람은 태조 이성계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ㅠ이성계의 힘과 신진 사대부의 지혜가 결합하여 고려의 시대를 끝내고ㅠ새로운 조선을 시작하였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힘과 신진 사대부의 지혜를 결합 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사람이 정도전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조선의 ‘틀’을 설계한 사람이 정도전이라고 합니다. 정도전이 이루고자 한 세상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왕은 국가를 다스리지만 국가는 백성이 주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ㅠ왕이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장 먼저 느끼고, 백성들의 즐거움은 가장 나중에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정도전의 생각은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17세기 서양의 사상보다 200년 앞선 통찰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에 마음이 아팠고, 백성들의 정성에 감사했습니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혁명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3가지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재상이 국가를 운영한다는 ‘재상론’입니다. 재상은 청렴하며, 경륜이 높은 자들 중에서 왕이 선택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국가를 운영하면 어진 왕이고, 지혜로운 왕이면 좋지만 왕 중에는 어린 왕도 있고, 어리석은 왕도 있고, 무도한 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국가의 운영은 재상들이 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언로가 막히면 안 된다는 ‘언론’입니다. 젊은 선비들이 강직하게 재상의 허물을 비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 막히면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먹고,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를 수 있을 정도로 예의를 알도록 ‘토지개혁’을 이야기 경자유전의 법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토지는 국가가 소유하고, 백성들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며 그 수익의 일부분을 국가가 세금으로 걷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오리라.” 즈카르야가 생각하는 주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그 나라가 어떤나라이기에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올까요? 통치자들이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통치자들이 백성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나라가 아닐까요? 통치자들이 백성들의 소리를 외면하고 강압과 억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백성들의 고통을 경청하고, 백성들이 바라는 것을 주는 왕이 아닐까요? 소수의 권력자들이 부를 독점하고, 백성들을 가난으로 내모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더 이상 굶주림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나라가 아닐까요?
정도전은 권력의 다툼에서 밀려나 죽고 말았습니다. 정도전이 이루고자 했던 나라는 조선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국민을 섬기는 정치는 21세기인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는 권력자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가 가진 강한 군사력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가 앞세운 계명과 율법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대사제가 가졌던 권위와 권력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외면한 십자가와 희생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용서와 나눔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 권력자들의 힘, 군중들의 야유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나라’를 세우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세례를 받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나의 가족이, 나의 공동체가 평화의 마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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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51-56: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며,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 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서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 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도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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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라는 말은, 지금 예수님의 여행은 수난, 죽음, 부활을 향해서 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이 예수님의 일행을 거부한 일은,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여기서 심부름꾼들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신자들의 숙소와 음식을 미리 준비하려고 간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려고 그 마을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룻밤을 지낼 곳과 음식을 구하려고 갔습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유대교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적대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원래 두 민족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면서 접촉 자체를 하지 않았는데(요한 4,9), 큰 축일을 지내려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때에는 사마리아인들의 적대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신앙과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지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려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에, 아마도 크고 작은 충돌이 자주 일어났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을 거부한 것도 아니고, 메시아를 거부한 것도 아닙니다. ‘낯선 유대인들’을 거부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과 사도들 입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가는 순례 여행 중에 생긴 일이기 때문에 ‘종교박해’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들은 ‘어떤 마을의 사마리아인들’이지 사마리아인들 전체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요한 4,28-30.39ㄱ.40-41)
그렇다면 56절에 언급되어 있는 ‘다른 마을’은 ‘다른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일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사마리아인들 때문에 몹시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두 사도가 바로 심부름꾼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단순히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심한 폭언과 모욕과 폭행으로 예수님의 심부름꾼들을 쫒아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입니다. 두 사도에게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은 두 사도가 그만큼 크게 화가 나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당신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이야기에서는 그냥 그 마을을 떠나서 다른 마을로 갔다고만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마을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앙갚음하지 않고 그냥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 자체도 ‘복음의 씨’를 뿌린 일이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흩어진 신자들은 가장 먼저 사마리아 지역으로 갔고,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사도 8,5)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사도 8,14-15)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전파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25)
<만일에 화가 난 두 사도가 원한 것처럼 예수님을 거부한 마을에 ‘천벌’이 내렸다면, 사마리아인들의 반감과 적대감만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나중에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주님의 복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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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루카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나 마태오 복음서와 비교할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자세하게 다룹니다.(9,51―19,28 참조)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중심에 속하는 부분의 첫 번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마치신 예수님의 시선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하셨는데, 이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파스카 사건을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24,25-27.46 참조) 9장 51절은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을 향하여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먼저 사마리아인의 고을을 방문하십니다. 그러나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부당하셨듯이(4,16-30 참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의 첫 방문에서도 사마리아인들에게서 환대를 받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한 사마리아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을 내려 사마리아인들을 심판하여야 한다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9,22.28-36.44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반대자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전하는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기를 바라시는데,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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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마치 구약의 엘리야가 적들에게 벌을 내린 것처럼(열왕기 하권 역사서 1장 10절-12절 참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여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두 제자를 꾸짖으시고는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이루시고자,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뒤에 필리포스를 통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선포(사도행전 8장 5절-25절 참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직 당신의 사명을 이해할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흔히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거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때 상대방과의 관계는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메마르게 됩니다. 단비로 다시 땅이 촉촉하게 젖어 들 듯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시고 행동하실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가 될 수 있으며, 그 기도의 응답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면 오늘 복음의 두 제자처럼 예수님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매정한 마음이 아닌,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마음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며 소금임을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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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 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받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야단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7) 예수님께서는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카 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르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합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하다 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기도합니다. 기도는 삶의 활력소이고 품을 키울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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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스승이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여기 바위가 하나 있다. 이 탑은 꼭대기까지 10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는 이 바위를 탑 꼭대기까지 날라야 한다.”
제자는 바위를 끌어안고 힘겹게 탑 입구까지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탑으로 올라가는 문이 너무 좁고, 그에 비해 바위는 너무 큰 것입니다. 아무리 바위를 이리저리 돌려 보아도 문을 통과시킬 방법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게 불가능한 과제를 주셨습니다.”
이 말에 스승은 망치를 가져오더니 바위를 깨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쉽게 문을 통과시킬 수 있었습니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바위가 네 마음이다. 마음이 깨져야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우리 마음이 깨져야 할 순간은 언제일까요? 어쩌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제자는 바위가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스승이 보여준 것처럼 분명히 방법이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깨야만 했습니다. 고정관념으로는 주님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기에,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중에,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문제는 그곳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은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유다인들은 과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월절을 그리짐산에서 지냈지요. 따라서 전례적인 차이를 들어서 예수님 일행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면서 야고보와 요한이 분개합니다. 자기 스승에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홀대를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불을 불러 내려서 사마리아 마을을 불살라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불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를 폭력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꾸짖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어떻게든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 주님의 뜻에 일치하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과감하게 깨고 주님의 뜻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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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걸음>
루카 9,51-56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한걸음>
한 삶의
첫걸음부터
마지막 한걸음까지
살리기 위하여
기꺼이 죽으러 가는
길 위에서
걸림돌마저
쉬이 걷어차지 않고
슬며시 돌아서는
한걸음
한걸음에는
살림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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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파스카의 삶, 파스카의 꽃, 주님의 전사-
오늘은 단기4356년 10월3일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의미로서 단군왕검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하여 역사를 개창한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입니다. 어렸을 때 달력엔 단기와 서기로 병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단기4356년 서기2023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에 앞서 숱한 예언자를 보내셨듯이 당신 외아드님인 세상의 구원자이자 빛이신 예수님에 앞서 이땅에 그 아득한 옛날에 단군왕검을 보내시어 나라를 개창하게 하셨으니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개천절은 전국 방방곡곡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날이요 어김없이 개천절 노래(정인보 작사)와 애국가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오래다 멀다해도 줄기는 하나다
다시필 단목잎에 삼천리곱다
잘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오니
잘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오니.”
가사와 곡이 좋아 참 오랜만에 들으며 불러본 개천절 노래 1절과 3절 가사를 써봤습니다. 시간되면 한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만세육창으로 시작된 하루, 나라가 안정되고 평화가 정착되기까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정말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50만 죽었다 합니다. 이 백해무익하고 무의미한 어리석고 악한 전쟁 빨리 끝내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기건 지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건 너무나 큰 재앙입니다. 그 상처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는지요.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어제도 고백상담차 집무실에 들렸던 여러분들에게도 보속으로 말씀처방전과 더불어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부르는 분이나 듣는 저나 숙연한 분위기에 마음도 순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어 몇분과는 십자고상-태극이 앞에서 함께 카톡 사진을 찍으니 흡사 독립운동가처럼 보인다고 웃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을 첫째로 사랑하여 모시고 살아가는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입니다. 거부감없이 순수한 모습으로 애국가 1절을 부를 때는 그대로 성가요 기도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가 이루어질 예루살렘을 향해 갈릴래아를 떠나시는 모습이 참으로 단호하고 장엄합니다. 흡사 큰 영적전쟁을 앞둔 모습처럼 비장해보이기도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이제부터 본격적 영적전쟁의 시작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의 영적전쟁에서 일어날 수난-죽음-부활-승천의 파스카의 승리를, 파스카의 신비를 보여주실 것이며, 그리고 마침내 하늘에 올라가시는 승천의 엑소도스 탈출로 장엄한 결정적 영적승리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주님의 전사요 전우로 날마다 파스카의 삶을 살아갑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파스카의 꽃같은 파스카의 삶입니다. 궁극의 희망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하니 백절불굴의 믿음에 힘이납니다.
예전 써놨던 “파스카의 꽃”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죽어 떠날 그때까지
그 삶의 자리
꽃자리에서
날마다
새롭게 폈다 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2022.6.9
정말 참으로 훌륭하게 싸워오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온 형제자매들을 보면 나이에 관계없이 아름답습니다. 젊음의 꽃향기보다 노년의 열매향기가 더 그윽하고 매력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노년에도 내적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분들을 보면 저절로 감동에 젖습니다.
그렇습니다. 젊음은, 아름다움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는 열정에, 사랑에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들어도 열정의 불은 여전히 타올라야 합니다. 이런 열정과 함께 가는 순수와 지혜요 겸손과 용기입니다. 참으로 멋진 주님의 전사로서의 덕목들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최고의 전우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적전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죽어야 제대요 죽어나 끝나는 영적전쟁에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바로 여기서 참 좋은 전우인 성모님께서 함께 하시니 용기백배하게 됩니다. 10월은 묵주기도성월,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바치는 묵주기도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다혈질의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이런 이해와 시야가 아주 부족했기에 예수님을 박대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대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파스카의 결전을 앞두고 이런 사소한 일로 전력을 소모할 수는 없는데, 두 제자는 어리석게도 잠시 교만과 분노에 눈이 멀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파스카의 시야를 지니지 못했기에 이런 열화와 같은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 대노하는 두 제자를 꾸짖으시고,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지혜롭게 이들을 피해 다른 마을로 이동하십니다.
미풍이 태풍이 되지 않고 미풍으로 끝내는 것이 영적전쟁의 지혜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때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이 되게 한 경우도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진정 지혜로운 주님의 전사는 미풍은 미풍으로 끝내고 태풍은 미풍으로 바꿉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서는 메시아 시대의 행복을 보여줍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예루살렘 성읍 사람들의 외침이 그대로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의 외침같습니다. 메시아 시대의 행복이 마침내 이 거룩한 미사중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아 만나려 이 파스카 잔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다른 민족 열사람은 후에 주님을 믿게 된 우리 이방인들, 그리고 유다사람 하나가 상징하는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말이 다른 민족 열사람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대로 ‘여러분’을 ‘예수님’으로 바꾸면 너무 잘 어울립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래서 임마누엘 예수님이라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로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게 하시며,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과 함께 “영적승리의 삶”을,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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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9,52)
<배척 당하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9,51-56)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 공생활의 주 활동 무대로써,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인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여정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이 여정의 시작이 갈릴래아의 여정 때처럼 배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갈릴래아에서는 희년이 선포된 후 곧바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는데,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에서는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배척을 받으십니다.
'배척 당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백성의 지도자들로부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부터, 그리고 유다인들이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마침내는 수난과 죽음이라는 결정적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결정적 배척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적 배척을 통해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배척이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성경에서 45권째 해당되는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이 예언서는 완전히 배척 당한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라는 배척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스라엘의 기쁨과 희망을 전하는 아름다운 예언(신탁)입니다.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배척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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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EINEL-YS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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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마음을 굳혀야
삶다운 삶이
시작됩니다.
마음을 굳혀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것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가치입니다.
마음을 굳히고
마음을 꿰뚫는
우리의
결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려면 저마다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 던지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고귀한 사랑을
만납니다.
사랑도
마음을 정한 곳에서
하느님 사랑을
닮아갑니다.
마음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되고
구원이 되는
그 길의 시작은
마음을 굳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망설임이 아니라
십자가의 여정을
받아들이는
열림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굳혀야
마음이 열리는
마음의 신비이며
마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을 굳히시는
결단과 결심의
길을 가십니다.
피할 수 없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순명의 날입니다.
마음을 굳히는 것이
순명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마음의 결단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의 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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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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