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월 무엇을 하며 어떻케 보냈는지 돌이켜 봅니다. 그동안 많이 울었지요 욕심이 많아서 인지내 뜻대로 되는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려서는 학교가 30리 길 7살 어린이가 먼 길을 갔다 오면 지쳐서 숙제도 못하고 여고 시절은 교통이 불편하고 강을 건너 60리 길 그리고 어머니가 많이 아파 하숙과 자취를 했지요. 토요일이면 집에가 집안 일을 돌보느라 숙제를 못 하고 자연 공부는 중간 정도 시골에세 중간 정도하여 대학에 갈수 없었습니다. 우리집은 부유하기에 대학 합격 했다면 갈수있는 형편이지만 어머니가 극도로 쇄약해 지셨으니 집안 살림을 맡아하게 되였고 할아버지가 양조장을 하시니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친정 집을 새로 짓고 수 만평 갯벌 땅을 일꾼들을 시켜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이집은 내집이야 !, 땅은 내 땅 이야 !, 내 집이 되고 내 땅 인줄 알았어요. 오빠가 결혼을 하고 보니 내 것은 없고 모두 오빠 것이 되였지요. 25살에 서울 고모댁에서 양재학원에 다녀 양재 배운지 2달 만에 충주 기술 고등학교 학원 강사로 가 보라 합니다. 패션 전문가 보다 여행을 좋아 하기에 겁 없이 충주 한번 가 보자 ! 학원생은 6개월 배운 언니들 눈을 초롱 초롱 뜨고 바라 보는데 와 ! 첫날 부터 자신이 없어 몇개월 동안 충주 구경을 잘 하고 가자 !. 더 배워 보리라 강남 유명한 양장점에 취직하고 목동 고모댁에서 강남까지 만원 버스에 시달리고 양장점 제품 만드는 장소는 협소하고 열악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내 체질이 아니야 하고 내 팽겨 치고 난 결혼하고 싶지 않아 엄마 처럼 살기 싫어 몸이 아프다고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알콩 달콩 사는 아버지가 미웠고 여자는 엄마 팔자 닮는 다는 말이 싫어 난 결혼을 안 할거야! 하고 외치며 서울에서 유명한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러 갔습니다. 원생들은 60명 교육담당 사회담당 가정 담당 부서로 나누워 있고 보모 한사람이 20명의 생활 책임져야 되기에 쉬운 일이 아니 였습니다. 나는 교육 담당이 되여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 되였고 원생 후원자님께 원생들의 생활을 보고하는 편지를 매달 써야 했습니다 . 신경은 날카로워 지고 몸은 피로에 지쳐 있는 나에게 언니가 미용 기술을 배워 미용실을 차려 보라는 권유를 하여 미용 자격증을 취득하고 기술을 익히려고 취직을 하고 보니 매일 머리 깍은 것이나 쓸고 수건 빠는 것이 전부이고 기술은 배우는 것은 없어 미용사를 두고 미용실을 차렸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 미용사 월급 밖에 수입이 없어 내가 직접 하자 용기 좋케 홀로 했습니다. 파마만 전문으로 했더니 손님들이 많았고 잘 된다고 할 때 중매가 들어 왔습니다. 효자다, 잘 생겼다, 사업을 크게 샷시공장 유리가게 까스가게 싱크대 가게를 형제들과 합동으로 하고 있다고 하여 효자는 착한 사람이니 괜찮을 거야 하고 2달 만에 결혼 허락을 하고 결혼 하니 남편은 사업체를 형제 에게 나누워 주고 샷시 공장과 싱크대 가게만 하고 있으니 수입도 줄고 돈이 쪼달리니 나에게 친정에서 빗을 얻어 오라하여 평생 모아 놓은 돈을 주게 되였고. 내 돈으로 삼층집을 지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 같으니 시 어머니께서 하숙을 하자 하시여 친정 사촌동생과 하숙생을 모아 하숙집을 하니 일은 어머니가 하시고 물건은 제가 사 왔는데 결혼 안한 시동생 시누이 이모님까지 와 있어 이모댁 식구도 매일 오고 대 가족 치닥거리 남는 것은 하나도 없고. 시어머니는 매일 피곤해 죽는 다고 하시고 시어머님댁 식구 먹여 살리는 일인데 나와 내 아들 먹는 것은 내 친정집에서 다가져 오는데 이 좋은 집이 뭐 필요한가? 어머니 자유롭게 사세요. 내가 3년 나갔다 들어 오겠습니다. 하고 분가할 것을 제안 했습니다. 남편은 쾌히 승락 하기에 싱크대 점포에 방이 있어 그곳으로 가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재차 물었습니다. 정말 이사 가고 싶어 하냐고 나는 삼층 집도 싫었습니다. 네 ! 삼년 있으면 시누이 시집도 가고 시동생 취직도 하니 삼년 고생 해 보지 하며 분가를 하기 원하여 이사간 곳은 삿시 공장의 무허가 건물이 였습니다. 아니 여기서 어떻케 살아 아들은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친구들이 거지라고 흉볼 것 갔았지만 내가 분가 하자고 했기에 참고 살아야 했습니다. 내 돈으로 아파트는 하나 살텐데 남편에게 다 주고 빈털털이가 되였지만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있으니까 삼년 있으면 본가로 들어 가리라 삼년을 눈물 바람으로 살고 삼년 되여 시어머니 보고 본가로 들어 간다고 하니 시 어머니가 공장으로 나와 사신다고 하시니 시어머니를 내 쫒고 본가로 들어가 산다고 할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의 건축 사업은 점점 더 안되고 생활비를 한푼도 주지않아 친정 조카를 데리고와 초등학교 전학 시키고 조카를 돌 본다는 수고로 생활비 일체를 친정 도움 받고 살아 가다가 조카가 중학교 입학 하니 오빠가 집을 사서 딸들에게 조카를 돌보라고 하니 우리집 생활은 말이 아니고 10년 동안을 공장 판자 집에서 살았기어 더 이상은 무허가 판자 집에서 살기 싫어 이혼을 해야겠다 선포하고 명절에 시댁을 안 갔더니 명절 하루 지나 남편이 술을 잔뜩 먹고 와서 너 같은 인간은 죽어야 한다고 커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쫓아와 죽여라! 죽여 차라리 죽는게 났다. 이게 사는 것이냐? 말 대꾸 하니 막대기를 머리 위로 내리쳐 죽기는 싫었는지 손으로 막대기를 잡았더니 팔이 뚝 부러졌습니다. 나는 죽자니 자식이 걸리고 살자니 도저히 벌래도 나오고 생활비도 안주는 사람과 살수가 없어 이불쓰고 울고 장농 속에 들어가 울고 갯천 가서 울고 밤 낮으로 울다가 옆집에 사시는 병원집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병원 자리를 세 놓는데 가운데 1칸이 남았다고 하여 세를 얻어 식당을 차려 보자 식당 경험도 없는 사람이 가게도 외상 그릇도 외상 간판도 외상 모두 외상으로 식당을 차렸더니 외상값 다 값고 보니 샷시 공장 건물은 주인이 연립 주택 짓는 다고 공장이 헐리게 되여 본가로 들어가게 되였습니다. 나는 지쳐서 다리도 휘둘 거리고 눈 도 시력이 나빠져 도저히 걸을 수가 없는데 시어머니는 내가 본가로 들어 왔다고 너 ! 살림해라 ! 하고 딸집에 가버리고 명절날 오시 였습니다. 추석 차례를 하고 1주일 후 시아버지 제사 였습니다. 제사 상도 내가 준비 하여 지내고 늦게 셋째 시동생이 왔는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남편이 구두 티겟 3개가 있기에 나 하나 줘요 했더니 너를 왜 주니 하기에 나를 안주면 누구를 줄려고 하며 그때 옥신 각신 하다 쌓이고 쌓였던 울분이 ** 너를 왜? 주니! **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는 더 참고 살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로 인정 안하는 사람 하고 왜? 살아야 하나. 내 돈 다가져 가고 생활비도 안주고 도와주지도 않는 사람과 내가 왜? 살아야 하느냐? 도움이 안 되는 사람 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고 나쁜점만 보이지 좋은점은 한가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함께 살지 않는 다면 기대하지 않으리 혼자 사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으로 식당에서 자고 집에 가지 않코 있으니 아들이 매일 같이 식당에 와서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가는데 아들을 버리고 떠나 갈 수가 없어 아들 대학가면 떠나리 겨울에는 춥고 여름은 더워도 참고 살았더니 아들이 대학에 합격되여 식당을 정리하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서울 생활 녹녹치 않했습니다. 이것도 해 보고 저 것도 해 봐도 아들 생활비 보내기는 쉬운 것이 아니 였습니다. 아 !! 죽자니 자식이 걸리고 살자니 초라해 가는 내 모습 죽고만 싶었 습니다.그러나 아들이 있기에 아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니 아들 뒷바라지 해야 하는 의무로 난 살아야 할 이유가 되였습니다.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내 할 일을 부여한 아들에게 오히려 감사 하답니다 고난과 역경은 이 또한 지나 갑니다. 아들은 잘 성장 했고 결혼도 하고 예쁜 며느리가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 주고 2달 후 아들을 똑 닮은 손주가 태여 난 답니다 꿈같은 이야기 입니다 이제는 소풍 잘 하고 간다. 라고 말 하도록 나의 삶은 더 행복하게 잘 살도록 노력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