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적인 신분제도, 폐쇄적인 관료제도, 변질된 조세제도
노비제도의 폐해로 노비가 혼인한다면, 양반의 중요한 재산상의 관심사이다. 양반집 노비가 양인과 혼인해 아이를 낳아도 노비가 늘어나는 것이다. 양반이 첩을 데리고 살다 아이를 낳으면 법적으로 노비가 된다. 양반이 생전에는 노비 취급을 받지 않지만, 양반이 죽으면 이복형이 동생에게 주종관계를 요구한다. 노비제도의 동요는 시장경제의 성장과 인구 증가, 양반의 보유 경지 면적의 축소 등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부정한 방법으로 호적을 바꾸어 족보를 위조했다. 이를 ‘환부역조‘라 부르고, 자신의 직업이 유학이라 사칭하는 사람을 ’모칭 유학‘이라 했다. 노비 신분을 벗기까지는 처절한 노력이 필요했다. 노비를 면천하는 면천첩이나, 공명첩을 조정에서 팔아서 재정을 확보하자 이때 노비를 면하는 부자 노비들이 많았다. 그리고 유학으로 호칭하면서 지역 내의 향리 가문과 혼인하는 등 신분 상승에 성공하려 했다.
폐쇄적 정치제도로 조선의 개혁을 거부한 조정이 있다. 조선 건국 100년도 지나지 않아, 사역 문제가 부정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컸다. 즉 왕실, 관리 등 세력가 노비까지 감싸주고 세력이 없는 농민인 ’잔호‘는 별도 장부 관리해 사역을 전가한 것이다. 수구적인 지배계층은 개혁을 주장하면 일관된 논리가 ’조종의 법제‘는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법은 임금도 함부로 바꾸면 안 되고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취제도나 환곡제도에 시행 규정과 감독체제의 미비로 민생이 개선되지 않았다. 이는 총론에는 강하고 각론에 약한 제도로 형이상학적 성리학 위주로 무장해서 생기는 문제다. 법령의 집행에 허점이 많은 감독체제는 조선을 설계한 자들이 탁상공론적 제도를 입안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치의 미흡이 발생한다. 건국 초기는 부국강병책을 강구했으나, 중기에 도학 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등장한 이후 부국강병은 패도정치로 매도당한다. 급진적 조광조의 개혁 실패가 불러온 결과는 군주를 교화하기 위한 경연을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수사장리와 소격서를 폐지하고 향촌의 안정과 자율을 위한 삼강행실도, 주자가례, 소학 등의 유학 서적을 보급함이 포함되었다. 여기서 성리학자들은 나와 다른 논리를 배척하는 문화가 사문난적이란 주장이 생긴다. 즉 송시열이 반대파인 윤휴를 사문난적이라 매도한 문화가 시작되었다.
정부의 책임과 인민의 저항권은 임진왜란에서 국가의 기본적 책무인, 나라 수호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의 수호를 못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무책임한 군주 선조는 요동으로 건너가 중국으로 도망칠 궁리를 한다. 조선은 책임을 묻지 않는 정치를 했다. 신상필벌을 제도화하지 못했다. 긴 전란이 끝나고 공신 중, 직접 전투에 참여한 선무공신은 18명이고, 선조를 호송한 호성공신이 86명 선정된다. 선조는 종전 후 8년을 더 집권하는데, 그 기간에 명나라에 대한 보은과 왕비를 간택하고 왕자를 보자, 세자를 어찌 세울까로 세월을 보내다, 광해군이 즉위한다.
포용적인 경제 제도는 존재했는가. 조선의 토지와 조세제도는 고려의 전제 개혁으로 건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재정의 압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다. 조선의 재분배 체제는 상공업을 억제하고 재분배 위주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학의 원리에서 찾았다. 여기서 조선의 핵심 산업이 중농정책이 되었다. 동양 삼국의 국가 세입을 보면 중국 세입은 5,000만 석, 조선은 250만 석, 일본은 1,225만 석이다. 조선이 상공업을 억제하는 동안 유럽은 상업혁명 대항해 시대를 맞아 전 세계에 전파되고 있었다. 왕도정치를 위하여 조선은 상공업을 억제한다. 따라서 조선은 가난하다. 인구 절반이 넘는 양반계층은 체면 때문에 아무런 생산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굶주리더라. 책을 읽고 허례허식에 목을 매고 상공업을 천시했고, 체면 때문에 장사를 못 하고 가난을 택했다. 그러나 중국은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은 상업만 못 한다.”란 교훈이 있다. 상공업과 국가의 성쇠는 어떻게 연결되나?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엄청난 금은보화와 부를 축적해 전쟁, 사치, 호화 건축물에 낭비하고 산업 육성을 하지 않아, 육체노동과 상공업을 무시하고 경멸한 결과 쇠퇴했다. 네덜란드는 해상무역과 산업 육성 정책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경제성장을 이룬다.
조선의 시장 형성을 억제하는 제도는 시장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을 “비싼 것을 싼 것으로 하고, 싼 것을 비싼 것으로 하는 사람은 장 80대를 치는 형벌이 가벼우니 변방으로 옮기라”는 상소를 도승지 ’이자건‘이 왕 (연산 8년) 에 한다. 시장 개설을 적극 반대한 이유는 조선의 시장은 ’장시‘라 했는데 15세기 후반 전라도에서 오일장이 형성되면서 생긴다. 장에서 물물교환하며 목숨을 보전했다. 수령들이 시장 개설을 반대한 이유는 농민이 상업에 종사하면서 말단의 이익만 추구해 놀고먹는 자가 늘어나 논밭이 황폐해지고 물가를 오른다는 점이다. 또 농촌에서 이탈한 무리가 시장을 배경으로 살아가면 도적의 무리가 늘어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폐쇄적 제도가 불러온 침체는 상공업의 싹을 살라버리고 착취적인 제도로 환원되었다. 1833년 한양의 도고(도매상인)의 매점매석으로 쌀값에서, 폭리를 취하자, 상인의 집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이런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었다.
재산권과 조세제도는 가장 중요한 사유재산권이다. 조선은 재산권 보호제도의 취약점이 있었다. 토지대장의 관리 문제가 소유권을 표시하는 장부라기보다는 조세 수취의 징세대장으로 간주하였다. 토지주 양반의 이름 대신에 경작자인 노비의 이름 두 자만 기재했다. 체면 중시 양반이 세금을 낼 때 노비의 이름으로 대납함으로 비롯된 것이다. 토지 분쟁을 계기로 조정은 양전 사업을 추진해 노비 이름이 아닌 양반의 이름을 등록했다. 핵심은 소송의 공정성인데 지방 수령은 심한 고문을 수행해 횡포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들 수령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우리는 조선의 사례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조선은 정치제도는 500년을 유지할 저력이 있었다. 그러나 한마디로 착취적 성격이 뚜렷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양반 관료들의 특권, 착취적 지방 행정, 착취적 조세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병역제도와 환곡 등의 복지제도까지 착취적으로 운영되었다. 대외무역을 통제하고 국내 상업활동도 억제해 상공업 발달, 이를 통한 생산과 소득 증대를 도모하기 어려웠다. 형이상학적인 도덕철학에 심취한 지배층은 경제성장의 필요성이나 방법론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상공업을 경시한 문화는 시장 발달을 저해하고 기술자의 신분 천시, 생계 불안 등으로 연결되어 기술 개발이나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없었다. 기술자는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최소한의 대가만을 받고 천대받으며 작업을 했다. 조선의 재정이 취약한 것은 작은 정부를 지향한 정책 탓도 있겠으나, 조선의 경제력이 큰 재정을 받쳐줄 정도로 튼튼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정이 그러니 사회간접자본이나 국방력의 증강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조선이 스스로 선택하고 운용한 제도가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지 못하고 폐쇄적이고 착취적이었다는 점이다.
제도와 경제성장의 관계를 신제도학파, 성장 이론으로 볼 때 성장은 제도가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어야 한다. 500년 이상을 유지한 조선은 정치적으로 실패하지 않는 제도라 말할 수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의 제도가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단다. 우리가 조선에 대해 분석했듯이 우리 후손들로 현대를 분석할 때 폐쇄적인 제도 때문에 더 발전할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의 문제가 결코 조선에 국한된 논의가 아니라 현대에도 적용되는 유효한 관점이다. 현대에 와서 제도가 장기적인 경제성장에 중요하다는 것은 정설이다. 이러한 정설의 성공모델에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의 경제성장이 꼽힌다. 일본과 한국의 경제성장을 통항 ’정부주도형 성장‘이라고 한다. 정부주도형 성장이 의미하는 것은 정부가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제도를 먼저 만들어 놓고 민간 주체들이 ’인센티브‘를 좇아 따라오게 만들어 성장을 도모한다는 의미이다.
기업이 파격적인 인센티브에 호응해 열심히 투자하고 경제활동에 매진할 제도를 먼저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1960~70년대 한국이 시행한 정책이었다. 1990년대 이래로 중국의 경제성장 성공 사례는 1980년대 후반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으로 알려진 제도 개혁을 주도했다. 즉 쥐를 잡을 수만 있다면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상관없다는 의미로,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 체계건, 사회주의 체제건 따질 것이 없다는 과감한 제도 개혁 주장이었다. 특히 한국이나 중국 같이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급속하게 성장을 추진할 때 대단히 유용한 전략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제도의 효과와 정부의 역할에 도취하여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고 다원화된 이후에도 과거의 제도를 혁신하지 않고 새로운 제도를 덧붙여 추가하는 관행을 이어왔다. 이는 과도한 제도가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각 부분을 옥죄는 규제로 작용하고 있다. 어느 부분을 육성하기 위해 설정해 놓은 제도가 기득권을 보호하는 제도가 되었다. 이익집단의 압력으로 새 경제활동을 규제한다. 한번 형성된 기득권은 한 부분에 독점적 특권을 인정하면서 다른 부분으로 배분되어야 할 자원과 부를 착취하는 제도로 작용한다. 지금은 금융, 보건, 의료, 교육, 정보통신, 등 서비스 산업에 남아 있는 제도를 혁신하기 위해 과감한 규제철폐 조치가 있어야 할 때라 필자는 주장한다.
2024.06.23.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3rd
정병석 지음
시공사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