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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도 있거니와,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던 곤궁한
시절, 호랑이보다 무서웠던 것은 먹고사는 일 아니었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였으니 딸린 식구 입에 무엇이라도 넣으려면 그것이 호랑이 아
가리라고 피했을 것인가. 담양 대바구리 장수가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
던 이유일 것이다.
▲ 밥바구리를 지게에 지고 장에 팔러 가는 할머니-1962년 6월2일 이해섭 (담양 향토문화연구 회장) 촬영. |
ⓒ 전라도닷컴 |
대나무도 취하는 날이 있단다. ‘죽취일(竹醉日)’인 음력 5월13일엔 어미 대(竹)에서 새끼 대를 잘라내도 아픈 줄을 모른다고, 그래서 대를 멀리 옮겨 심어도 어미 곁을 떠나는 슬픔을 알지 못하는 이 날 대나무를 심는 풍습이 오래 전해져 온 고장. 마을이 있는 곳엔 대밭이 있고, 대밭이 있는 곳엔 마을이 있는 곳 담양이다.
대를 심고 난 끝에 이어지는 화전(花煎)놀이가 반일운동으로 확대된 일이 있어 이를 두려워 한 일제에 의해 1920년 초 이 아름다운 풍습이 금지됐지만, 이 곳 사람들은 연년이 대를 심고 길러냈다.
‘대의 고장’ 담양에서 연세 지긋하신 어른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말 있다. “담양 대바구리 장시(장수)는 호랭이도 무서워한다”는 말.
▲ 대바구리 저는 아낙네들. 대를 쪼개고 있는 남정네들도 보인다-1956년 오종태(담양 출신 사 진작가)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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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이 저그서 걸어온디 꼭 산 한나가 걸어오는 것맹키여”
“전에 그런 말들을 허고들 댕겼제. 아 그거이 그럴 거 아니라고. 뭐이 저그서 걸어온디 꼭 산 한나(하나)가 걸어오는 것맹키여. 근께 호랭이가 이 사람을 산질(길)서 부닥치믄 딱 걸음이 멈차져(멈춰져) 불제. 그만큼 바구리(바구리) 장시 북데기(부피)가 커. 그렇게 이고 지고 도부꾼들이 꼭두새복부터 줄줄이 들오는 것이여.”죽산양반(78)의 말이다.
담양 양강천변, 전국에서 밀려드는 장꾼들로 대바구니가 둥둥 떠다녔더라는 2·7일 죽물장. 죽산양반뿐 아니라 담양 어르신들에게 그 번성했던 죽물전 얘기는 언제라도 신명이 나는 이야깃거리다. 삿갓 3만 장이 순식간에 동이 날 정도로 삿갓이 인기품목이었던지라 ‘삿갓점머리’라고 불리던 것이 점차 소쿠리전, 죽물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담양 죽물장은 300년의 역사를 가진 장이다.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이해섭(79) 회장에 따르면 중국 봉천(심양)까지도 몽고까지도 담양 죽물이 나갔다고 한다. 구들 놓고 방안 흙바닥에 까는 죽석(대자리)이며, 진소(참빗)며, 호소(말갈기 빗)도 다 수출품이었다. 신의주·만주까지 말구루마(마차)·소구루마가 갔다. “그때는 남녀노소 머리가 길던 시절이라 참빗이 필수품이야. 외삼촌이 참빗장수였는데, 참빗 400∼500개를 가져다 팔고 다시 오는 데 6개월이나 걸렸지.”
이렇게 등짐이나 손수레로 수송하던 죽제품들은 1922년 12월1일 광주에서 담양까지 철도가 개통되면서 중국 봉천, 만주와 몽고까지 단시일 내에 대량 수송됐다. 철도개설을 목전에 두고 1916년에는 진소조합, 여기에 죽석·죽산(삿갓)을 추가하여 1922년 2월에는 담양산업조합이 창설됐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으로 만주와 몽고에의 수출이 중단되고 해방과 더불어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북한으로 판로도 봉쇄됐다. 그리고 60년대 후반 플라스틱 제품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사양길에 접어든 죽세공예는 설상가상 저가의 수입품들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현재는 몇 가지 죽제품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 새벽녘 죽물장에 바구니를 팔러가는 아낙네들-1969년 5월12일 이해섭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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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물장의 옛 모습-1953년 4월2일 이해섭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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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사람들은 ‘대로 묵고 대로 갈치고’ 살아
담양 오일장에서 만난, 무정면 영천리 김태옥(81) 할아버지는 죽물전에서 ‘치(키)’장수를 했다.
“3남3녀를 치로 다 키웠어. 지게에다 최고 많이 질 때가 60개까지 져. 근디 도란(돌아오는) 장날까지(5일 만에) 60개 맨들기는 애러와(어려워). 한 30개나 만들제. 그 놈을 이렇게 차악 양 어깨에다 걸치믄 영락 날개맹키여.”
바구리 장시가 티(태, 자태)가 있네 치 장시가 티가 있네 하지만, 그 자신 영락 큰 새가 땅에 내려앉은 듯 폼이 썩 좋았었노라 한다.
“같은 담양이라고 해도 열 두 군데(1읍11면)서 나오는 물견(물건)들이 다 달러. 동네마다 잘 허는 기술이 한 가지씩이여. 바구리야 칭이(체)야 치야 삿갓이야 그 놈들이 싹 다 나와 갖고 여그서 쩌어∼그까지 뻐때져서 어우러지면 참 볼 만했어.”
읍내 향교리 사는 박인기(75) 할아버지는 지금도 챙이를 만들어 파는 까닭에 ‘칭이양반’이라고 호가 붙었다. “오일장에 죽물이 싹 죽어 불어서 볼품이 없다고 군에서 장터에다가 죽물점방을 내주어서” 그는 장날마다 죽물을 맛보기로 깔아 놓는다.
“전에 이(머릿니) 있을 적에는 참빗이 불티 났제. 나이롱 플라스틱 없을 때는 대바구리 시상이여. 그 놈 있어야 콩너물도 시치고(씻고) 쑥도 시치고 짓가심(김칫거리)도 시치제. 강완도(강원도)까지 온 나라 살림이 담양에서 나갔어. 대로 뭣이든지 만들어 갔어.”
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는 세상이었던지라 담양 사람들은 ‘대로 묵고 대로 갈치고’ 살았다. 담양에서 대밭 있는 사람은 부자로 통했다. ‘대 한 개 나락 한 가마니’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대밭이 생금(生金)밭’이었다.
▲ 바구리가 둥둥 떠다녔다는 죽물장. 눈이 내린 한겨울에도 죽제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담 양 한국대나무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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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견이 없어서 못 팔아. 통금 있던 시절이라 새복 네 시가 돼야 통금해젠디 12시나 새로(오전) 한 시 되믄 벌써 물견을 갖고들 나와. 먼 질 와서 허기진께 국밥집에서 밥 한 숟구락씩 몰아 묵고.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하숙집에 방을 잡고 하랫밤을 자. 그런께 요 근처 하숙집이 쌨어(많아). 다 대만원이여. 새복 다섯 시 여섯 시믄 그 도방꾼들이 물견을 싹 다 띠어 가 불어. 그런께 날 훤해서 온 사람들은 물짠(안좋은) 물견을 맡어.”
무정면 영천리 김철환(75) 할아버지는 “그때는 쨈매는(묶는) 것만 허는 이들이 따로 있었다”고 회고한다. 짐 있으면 버스는 못 타던 시절이라 여럿이 어울러서 화물차에다 부치는 화물을 야무지게 묶는 일이었다.
읍내 객사리 육황용(80) 할아버지는 쪽대를 파는 일을 하도 오래 한 까닭에 대밭을 척 둘러보면 몇 속이 나올지 한눈에 안다 했다. “목포 강진 해남 해안가로 담양 대가 다 갔어. 두푼오리 800쪽(대)을 한 다발로 엮은 짐발(김발)을 바다에다 넣었제. 근디 그 놈 대가 오직 질어(길어). 그 놈을 짊어지고 큰 산을 넘어댕겼어. 낮에는 땀 흘리고 50리 100리까지 걷고 밤에는 잘라니 어디 방이 쉬워. 그러고들 살았어.”
가지고만 나오면 파는 장이라서 “많이 못 맹그는 것이 원”이었던 담양장엔 돈이 흔했다.
“장날에 돈 빠친(빠뜨린) 사람이 많애. 어떤 어매는 애기를 잃어 불었는디 애기 울음소리가 난 디로 가 본께 애기가 돈보따리를 보듬고 앉아 있었디야. 아 그런께 부자가 되았다고 그래.”
술 한잔씩 걸치고 난 장꾼들은 으레껏 지푸라기에 동여 맨 생선 한 마리라도 들고 갈 요량들을 했던 까닭에 주변 장 다 돌고 난 장꾼들이 ‘폐품(신선도가 떨어진 고기)’을 갖고 와도 되는 장이었다. 담양장에 ‘썩은고기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 ‘치(키)’만들던 김태옥 할아버지, 죽부인 만들어 온 어르신, 지금 도 챙이(체)를 만드는 박인기 할아버지가 삼총사처럼 나란히 섰다. (왼쪽부터) |
ⓒ 김태성 기자 |
“손이 찢어져서 피가 나도록 부지런히 해야 30개여”
용면 사는 광주떡(81)은 죽물전에 바구리를 냈다.
광주 처녀가 시집을 와서 보니 “남자들은 (대를) 쪼개고 여자들은 절고, 남자들은 지고 나가고 여자들은 이고 나가는” 곳이 담양이었다.
“열 아홉에 시집을 왔는디, 열 다섯 열 여섯 살부터 해온 담양 각시들허고는 솜씨가 틀려. 손이 찢어져서 피가 나도록 부지런히 해야 30개여. 오일장에 30개 맞촤(맞추어) 가기가 그렇게 애러와. 좋게 절믄(만들면) 500원도 받는디 얼멍허게 물짠 것을 갖고 나가믄 200원배끼 못받은게 속이 상허제. 시방은 걸어댕기는 사람이 없지만 그 때는 순전히 걸음으로만 살아. 용면서 죽물전까지 십리 길이여. 눈밭에 옴서도 땀을 찍찍 흘림서 오제. 와서 보믄 새복 다섯 시 여섯 시여도 자리가 없어. 한 간디(군데)서만 오잖애 사방 디서 오거든. 비라도 오믄 맨 흙바닥인게 자갈을 모태 놓고 그 욱(위)에다 바구니를 놓제. 사람은 멍쳐도(젖어도) 바구리를 멍치믄 안 된께.”
그나마 객지로 팔러 다니는 것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객지 가믄 1000원도 받고 2000원도 받고 돈을 더 받아. 그런께 어떤 사람들은 바구리를 열차편에 부치고는 찾아서 폴러 다님서 열흘도 있다 들오고, 보름도 있다 들오고 그랬제. 걸어서 가자믄 하래내(하루내내)도 가. 벌써 캄캄해졌는디 어디 가서 ‘조깨(좀) 잡시다’ 허는 소리가 얼능 안나와. ‘옷장시는 방에서 서방님 밥상에다 겸상해 주고, 바구리장시는 부삭(부엌)에 부뚜막에다 밥 준다’고 말이 있어. 바구리 장시들은 땀도 흘리고 추저분허거든. 등거리(등)에다 지고 머리빡에다 이고 짐이 원체 큰께.”
하지만 포개포개 이고 돈사러 나설 때는 발걸음이 짱짱했더라 했다.
“그러고 댕길 때는 서른 및(몇) 살 마흔 및 살 때여. 맘은 큰애기 맘이고 피가 지글지글 끓을 땐디 겁나는 것이 없제. 글고 그 때는 애기들이 잘잘헐 때여. 믹여야만 헌께 어짤 수도 없고.”
이고 진 짐만큼 삶 앞에 버티고 선 의지가 그쯤 형영하였기에 호랑이도 주춤했을 것인가.
▲ 용면 사는 광주떡. 대바구리 30개씩 이고 죽물전에 나다니며 애 기들을 다 키워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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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산길 넘어야 했던 바구리장수들에게 힘 되던 말
“호랭이 물어갈 놈”이란 욕이 있다. 응징을 받아야 할 상대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를 들어 겁을 주고자 할 때 내세우는 동물이 호랑이다. 실제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경기도 지역에서만 한 달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호환을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호랑이를 특별히 두려워했던 것에 대해 민학회 강현구 부회장은 호식장(虎食葬) 풍습을 들어 설명한다.
“호환을 당해 죽은 사람은 그 넋이 창귀가 되어 호랑이의 종이 되는데, 다른 사람을 유인하여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게 하고 나서야 창귀에서 벗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호환을 당한 사람은 그 남겨진 유골을 태워 항아리에 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올려 금역임을 표시했다. 돌무덤은 풀이 나지 않으니 후손이 벌초한다고 와서 혹여 창귀 들리는 일을 막자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에 시루를 얹고 쇠젓가락(쇠꼬챙이)을 꽂는 것은 철옹성을 뜻하는 항아리로 창귀를 가두고 사악한 것을 찌고 삶아 없앤다는 뜻이며, 벼락을 의미하는 쇠젓가락까지 더해 창귀를 제압하고자 했다. 조탑이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닌 곳에서 보이는 돌무더기는 호식총(虎食塚)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듯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호랑이가 출몰할지도 모르는 산길을 깜깜밤중 꼭두새벽을 가리지 않고 넘어야만 했던 담양 바구리 장수들에겐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여, “담양 대바구리 장시는 호랭이도 무서워한다”는 그 말은 두려움을 떨치는 강한 ‘무기’와도 같은 말이되었을 터.
관방제에서 만난 죽산양반은 그 말을 달리 풀었다. “호랭이가 영물(靈物)이여. 근께 속이 텅 빈 것(대)으로 내가 맞아야(맞을 수가 있는가) 그런 자존심을 가진 것이제. 내가 대(竹)로는 안 맞을란다 허고 피허는 것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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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섭 회장은 호랑이가 무서워하는 것은 죽창이라고 한다. “멧돼지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대꼬쟁이를 비스듬히 잘라서 만든 죽창을 뾰족뾰족 세워두었다. 대에 찔리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엄청난 부피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면 오직이나 힘이 좋겄냐 싶어서도 더욱 대바구리 장수를 무서워했을 것이다.”
관방제 평상에 앉은 어르신들은 호랑이가 특별히 대나무밭을 가려 새끼를 낳는다고 믿고 있었다. 대나무밭에는 기(氣)가 많다는 것을 호랑이도 안다는 것. 무당집 신(神)대가 대나무 아니더냐고, 신이 내려오는 나무인데 오죽하겠냐며 죽산양반은 전설 하나를 들려준다.
“그전에 박서방이라고 살았어. 근디 그 집 죽순을 못씨게(못쓰게) 맹글어 논 놈이 있드란 말여. 얼매나 부애가 나서 죽창을 갖고 찾으러 댕겨. 이놈 나와봐라 허고. 근디 그 속에 새끼 호랑이가 들었어. 인자 애기마니로(처럼) 쳐다본게 못 죽이제. 어치고(어떻게) 죽이겄다고. 호랭이도 새끼는 이삐다고 안. 근게 죽창을 놔뚜고 와 불었어. 지 애미가 와봉께로 죽창이 있단 말여. 호랑이가 영물이라서 짐작을 헌 것이여. 감사 표시로다 요만헌 멧돼지를 잡아다 바쳤다고 해. 그런 얘기가 있어.”
김동현(광주교대 음악과) 교수의 풀이도 들어본다. “범종의 종뉴에 조각된 포뢰용은 고래를 무서워한다고 알려져 있다. 종을 치는 당목(撞木)을 고래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무서워서) 잘 울게 하려는 뜻이다. 엎드린 호랑이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만든 국악기가 있다. 등줄기에 27개의 톱니를 세운 ‘어’라는 악기다. 이것을 치는 것이 대(竹)다. 9조각으로 갈라진 견죽(대나무채)으로 호랑이 머리를 세 번 치고 나서 톱니를 긁어내리는 것을 세 번 반복하여 음악의 끝을 알린다. 국악기에 드러난 호랑이와 대의 관계를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다.”
▲ 마을이 있는 곳엔 대밭이 있고 대밭이 있는 곳엔 마을이 있는 곳 담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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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보다 무서웠던 것은 먹고사는 일
호랑이가 대를 무서워했는지, 대바구리 장수를 무서워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속은 비어 욕심 없고, 겉은 단단하나 때로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그 대의 성질을 가지기로야 고단한 삶의 길 꿋꿋하게 걸어가던 사람들도 매한가지였을 터.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 猛於虎)-《예기(禮記)》”는 말도 있거니와,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던 곤궁한 시절, 호랑이보다 무서웠던 것은 먹고사는 일 아니었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였으니 딸린 식구 입에 무엇이라도 넣으려면 그것이 호랑이 아가리라고 피했을 것인가. 담양 대바구리 장수가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근디 호랭이가 잡았어도 입을 안 댔을 것이여. 묵고사니라고 애간장이 다 타고 녹아 불고 없었을 것인께.”
‘징헌’ 세월 살아낸 것, 지금 와 돌아봐도 장하다는 광주떡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