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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친일파 뉴라이트 바로 알리기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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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이자 한 때는 애국계몽운동에도 가담했던 그는 애국가의 작사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애국가의 작사가에 대해서는 현재 안창호說 등 이론이 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는 것은 ‘일본을 능가할 수 없다면 그냥 일본에 노예로서 순응하고 살아가라’는 그의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 세계정세에 대해 조금이라도 눈을 뜨고 있던 지식인 친일파들의 공통된 인식으로 보인다. 그러한 현실 인식은 정의가 곧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라는 기독교적 윤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태도로까지 발전한다.
이 당시 지식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사상 중 하나가 바로 ‘사회진화론’이었다. 즉, 다윗의 진화론을 사회현상에 도입한 이 이론은 다윗이 말한 ‘적자생존’과 ‘자연도태’가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으로 결국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되고 말았다.
즉, 강한(또는 우등) 민족(또는 인종)은 약한(또는 열등) 민족(또는 인종)을 복속시켜 개조(또는 개량)해 나가야 된다는 논리이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도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던 것이다. 어느 일본 천황주의자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앞 둔 시점에서 ‘전쟁에서 질 것이라면 신은 일본 민족을 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아 조선의 독립 자체를 가소로운 것으로 생각한 윤치호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가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향의 변을 한다.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 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 민족의 동화에 대한 계획에는 어디까지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 (매일신보, 1915. 3.14.)
그 후 3·1 운동 민족대표로 나서도록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면서 기자회견을 통해 3·1운동에 반대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일본-필자 주)에 대해서 그저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 됩니다”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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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진우, 김활란과 함께 한 윤치호 |
첫댓글 햐아- 아빌님 멋쪄부러. 쌩유....
에고~바위나리님 멋진것이 아닌 줄 아시면서리..보통사람은 자세히 몰랐던 사실이 너무도 충격적이라서리~~ㅊㅊㅊ
이심전심이면 되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