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수 년전 가을의 일이다. 산악회를 따라 노고단을 거쳐 삼홍소로 내려와 연곡사 부도를 꼭 보고 싶었다. 그러나 대구에 출장을 가게 되어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새벽 5시에 깨워 달라고 숙박업소에 얘기하고 늦은 잠을 청하고 아침에 일어나기 무섭게 고양이 세수만 하고 구례 연곡사로 차를 세차게 몰아갔다. 88고속도로를 따라 가는데만도 4시간 이상이 걸렸다.
연곡사 입구로 들어서서 얼마 가지 않아 벌써 일행은 산행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있는게 아닌가? 반가운 만남은 잠시... 서울로 가는 버스 꽁무니만 한참을 바라보다 힘없이 돌아선다.
돌아오는 길에 구례의 누렇게 익어가는 벌판의 평화로움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도 그 유명한 최고의 길지이며 양택지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이라는 雲鳥樓 앞 벌판은 내 마음을 빼았기에 충분했다. 그날 햇살은 얼마나 따스하고 온화한지... 순간 여기서 한 5년 정도만 살아 봤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감흥을 잊지 못 한다.
지금은 자손이 퇴락하여 몇 년전에는 그 집 할머니께서 입장료를 받아 살아가고 있었는데... 너무 안타까웠다. 정말 잘 지켜야 할 지방문화재인데.... 그 많던 책이며 쟁기며 그 옛날 생활도구들이 모두 그 알량한 골동품상이나 그것을 훔쳐다 팔아 돈을 챙기려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 중요한 자료와 사료들이 깡그리 사라져 버린 것은 너무나 통탄할 일이다.
문득 웹에서 보이는 운조루라는 그 이름 석자에 눈이 뜨여... 이렇게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 가을 다시 한번 그 곳을 다녀 오고 싶다.
황금들판으로 빛날 그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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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의 외출이었는데,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진다.
여행 이튿날,
개일 듯한 날씨가
백석의 싯구처럼
'비가 나리듯'
왠 종일 그러하다.
지리산 산동에서
돌아오는 길에
운조루에 들렀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 섬진강과 만나 넓은 평야를 형성한 곳,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구만들'이라고 부른다.
처음 운조루를 갔을 때는
지리산의 매서운 바람이 들 전체를 휘감던 날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만큼이나
운조루는 그 위용에 어울리지 않게
대청마루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고
행랑채는 바람에 떨며
퇴락한 고가로 남아 있었다.
그 뒤 구례가는 길에
가끔 들리면
솟을 대문 앞 연못도 정비가 되어 가고
대청마루에도 올라설 수 있어
사람냄새가 조금씩 진해지고 있었다.
옛 지사(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잡은 구례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음(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성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명혈(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가락지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 행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금환락지라는 곳은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다.
현재 토지면(土旨面)의 지명도
본래는 금가락지를 토해 냈다는 토지면(吐指面)이었는 바
모두 이와 같은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또 어떤 이들은 금환락지는
지리산의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하고
그때 비녀도 함께 떨어뜨렸는데
그곳은 금잠락지(金簪落地)라 표현하기도 한다.(운조루 홈페이지)
# 사랑채- 구름 속에서 학이 놀았다(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뜻의 누마루가 호방하다.
운조루(雲鳥樓)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골짝을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저 새 돌아올 줄을 아네
집을 지을 때
경사가 진 곳을 억지로 평평하게 만들지 않고
비탈을 만들어 자연스런 맛이 있다.
규모가 큰 한옥에서
마루로 오르기 위해 디딤돌이 있는데
여기는 나무로 되어 있으니 디딤목이라 해야 할 듯 하다.
사랑채에서 본 솟을 대문
사랑채 기둥의 목재가 튼실하면서도
나무의 결이 그대로 남아 있어
더욱 아름답다.
사랑채 뒤 안채와 통하는 곳에
각종 꽃과 나무들을 가꾼
작은 화단을 두었다.
황량하던 그 옛날보다
사람의 손길이 느껴져 반갑기 그지 없다
모든 집은 사람이 살 때에
역설적으로
더 오래가고 생명력이 느껴지는 법일 게다.
굴뚝이 나직막한 것은
연기가 높이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부잣집에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면
가난한 이들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 행랑채와 솟을 대문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서면
솟을대문 너머로
맑은 날에는 멀리 백운산이 보인다.
사랑채 누마루 밑의
거대한 수레 바퀴를 보면
이 집의 옛 영화를 엿볼 수 있다.
누마루의 기둥 길이도
땅의 모양에 따라 높낮이를 달리하여
천연덕스럽다.
이게 무슨 용도인지
처마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활주의 받침대 인 듯 한데...
좀 더 알아 봐야겠다.
타인능해(他人能解) - 사랑채에서 안채 가는 중문에 있는 쌀독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뒤주라서
네모지지 않고 둥그런 원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뒤주의 특이한 장치는
하단부에 가로 5센티 세로 10센티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쌀을 직접 나눠주지 않고 직접 가져 가게 한 것은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까지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적인 모습일 게다.
안채는 이층 구조로 되어 있다.
정갈한 장독대를 보면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 뜰의 절구(돌확)와 맷돌
기와에 ' 닭장'이라고 적었는데,
흐흐, 닭장이 없네 그려
사당가는 길의 배수로
이곳에 아흔아홉칸의 대저택을 세운 사람은
삼수공(三水公) 유이주(柳爾胄)였다.
유이주는 1726년 경북 해안면 입석동 출신으로
28세 되던 1753(영조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개와 힘이 뛰어났고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났을 때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 버렸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담대했다.
또 벼슬에 있을 때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함흥성 축조작업 등 대규모 건축사업에 봉직하여
운조루 창건자로서 손색없는 경력을 보여준다.
창건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말해주는 유이주의 행장에는
"세상 사람들이 이 오미동 집터를 길지라고 했으나
바위가 험하여 누구도 감히 집터로 할용하지 못한 것을
공(公)이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고 말하며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터를 닦았다."라고 나와 있다.
유이주는 경북 대구 사람인데
그가 이곳으로 이주해 온 배경은
전라도 승주에서 낙안 군수로 재직하였던 시절 금환락지 명당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안 군수 시절, 관직에서 은퇴하면 이곳에 세거를 이룰 것을 작정하고
그때부터 운조루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다.
운조루의 대역사는 7년에 걸쳐 진행되는데
1776년에 유이주가 함흥성 오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는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천리길을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는 전설도 있다. (운조루 홈페이지)
솟을 대문 아래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어
그 담대함을 느낄 수 있다.
이전에는 연못이 없었는데,
새로이 정비되어 각종 연꽃이 만발하였다.
첫댓글 이 모임에서 낼 성악 공룡 간다네요 ... 역마살은 언제 잠잘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