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위안부 사죄 길은 멀었나?
1994년1월 고교동창들과 사이판 여행을 했던일이 있었다. 자연풍광에
매혹을 느꼈지만,가슴을 아프게 찡하게
울렸던 곳, 그 곳은 위령탑 앞에 서였다. 「그 날의 무명으로 떨린 5000명의 꽃 떨기,
白衣 아들 딸들이
여기 일찌기 단군의 백성으로
목숨을 받은 이들은저 일본군의 무모한 자들에 끌리어
죽어간 우리의 그 임들 1944년 7월이여 사이판 하늘이 무너지고
섬이 꺼지는 굉음에 깔리고 軍刀에 찔려 무참히 떼죽음을 당한
우리의 젊은 형제와 꽃 같은 자녀였다.
태평양 푸른파도여 이제는 증언하라
그들이 이 떼 죽음을, 그 통한 의미가
무엇이던가를 이제 조국은 늬들 원을 들어 5천명 얼과 넋을
한덩이 뭉쳐서 번영과 횃불을 밝혀서 ...한국 사회사업 .....뜻을 모아 이역 멀리 하늘에서 헤메는 고혼을
망향의동산 고향언덕에
넋을 달래려 하노니 원컨대 재천 신령이여
이들을품에 안으시어 영생케 하시고
지나는 사람들은 이 작은 돌 앞에 잠시 瞑目하시라.
이영식 목사」 윗글의 비문은 일본에 의한
강제 징용병(총각)과
일본군 위안부(처녀)영혼을 위한 위령탑 내용이다.
사이판을 저의 아버지
께서는 南洋群島라고 하신다.비문을 보며 나는 그 당시 약소국인
조국의 국운을 생각하며
가슴저려짐을 금치 못했다.
일본은 2세대(60년)가 넘어가는 지금도 죄악을
사죄하지 않고 있다. 유엔에서도 용서를 빌라 했는데
죄악을 로비로 무마하려고 있으니,
분통이 터진다.
※비문내용은 10년이 넘은 메모지를 참고하여 적은것이라
틀린 글자가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