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지나간 시월 둘째 주 일요일이었다. 나는 이맘때 응달 산자락 꽃향유 향기와 산마루 바위틈에서 피어나는 구절초 꽃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더랬다. 용추계곡을 들어 진례산성 동문 터를 넘어 진례 평지마을로 향하던 길이었다. 산비탈을 내려서다 후손이 다녀가는 무덤을 지나다가 커다란 상수리나무 아래 도토리가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도토리를 주워 배낭에 담았다.
도토리는 다람쥐나 멧돼지 먹이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워낙 많은 도토리를 보고 그냥 스치기엔 땅바닥에 떨어진 알곡을 외면하는 듯해 발길을 멈추었다. 반시간 남짓 주워도 금세 배낭이 묵직했다. 배낭을 가득 채우면 무거워 짊어지고 갈 수 없을까 봐 더 줍지 않았다. 내가 도토리를 주웠던 자리엔 못다 주운 도토리가 남아 있었다. 나는 도토리가 든 배낭을 짊어지고 산자락을 넘어갔다.
깊어가는 가을에 그윽하게 피어난 꽃향유와 구절초꽃은 목표한 대로 잘 완상하였다. 이제 등에 짊어진 도토리를 어떻게 처분할 일이 남았다. 나는 마음에 둔 데가 세 곳이었다. 고향 형수님한테 보내면 도토리묵을 잘 빚는다. 지난 추석 전 주웠던 도토리도 귀성 때 고향 집으로 보내 도토리묵 맛을 본 바 있다. 그런데 시골은 벼 수확과 대봉감 따기 등 일손이 무척 바쁜 때라 보낼 수 없다.
주운 도토리를 폰 카메라로 찍어 두 친구에게 전송했다. 한 친구는 초등학교 동기생으로 같은 아파트단지 산다. 고향 면서기로 출발해 도청에서 사무관을 거쳐 지금은 서기관이 되어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에 파견 근무 중이다. 도시에 살아도 친구 집사람이 묵을 빚을 줄 안다. 다른 한 친구 거제 어느 초등학교 교장으로 나간 대학 동기가. 시골 계신 친구 장모님이 도토리묵을 빚을 줄 안다.
두 친구에게서 즉각 회신이 왔다. 그 도토리는 산행을 마친 일요일 오후 귀로에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사는 초등학교 친구한데 보냈다. 그 친구는 봄날 내가 산나물을 장만해 오다가 더러 나눠 먹는 사이이기도 했다. 우리 아파트단지 입구에서 친구를 접선해 도토리를 안겨주었다. 친구는 도토리를 많이도 주웠다고 했다. 나는 지나가는 말로 그대 집사람이 묵을 빚으면 나누어 먹자고 했다.
새로 시작된 한 주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선 정기고사였다. 주중 수요일 저녁 반송시장 횟집에서 어떤 자리를 가졌다. 진해의 어느 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친구를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앞서 도토리를 보냈던 친구로부터 자기 집으로 방문해 주었으면 하는 요청이었다. 밤늦은 시각은 아니었다만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설 수 없음을 양해 구했다.
서로는 이튿날 아침 출근 전 얼굴을 보기로 했다. 동이 트자 휴대폰 착신음이 울렸다. 바로 이웃한 동에 사는 친구가 아파트단지 뜰에서 보자고 했다. 곧장 내려갔더니 친구한데 묵직한 도토리묵 보따리를 건네받았다. 내가 보낸 도토리 무게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묵 보따리였다. 자네는 먹을 것 남기지 않고 나한테 모두 보내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친구는 자기 집에도 넉넉하다고 했다.
친구는 도토리묵을 찬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내면서 먹으라고 했다. 묵 보따리를 헤쳐 보니 그 양이 아주 많았다. 어디 시골 할머니라면 반송시장 노점에 펴 놓고 팔면 길 가는 사람들이 쉽게 사 갈 듯했다. 친구 집사람 솜씨가 아주 훌륭했다. 도토리묵은 향기야 나지 않지만 노르스름한 빛깔이 곱고 촉감이 매끄러웠다. 나는 친구가 시키는 대로 도토리묵에다 정수기 물을 뽑아 담가 두었다.
사람마다 식성은 다 다르다. 나는 뼛속 깊이 박힌 촌놈 DNA는 어쩔 수 없다. 내 성장기는 귀하기도 했지만 피자나 햄버그는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이런 식성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라 거들떠보질 않는다. 대신 된장국이나 호박잎쌈을 즐긴다. 친구를 잘 둔 덕에 도심에서도 도토리묵을 맛볼 수 있음이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 산자락 주인장인 다람쥐나 멧돼지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14.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