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은 오직 ‘연기緣起’뿐
불교서적을 읽고 있으면,
알기 어려운 불교술어를 만난다.
그래서 불교는 알기 어렵다고들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실은,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실상實相’ ‘묘유妙有’ ‘진공眞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등,
실은, 다 같은 것인데, 여러 각도에서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진짜 알기 어렵다고들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정말 쉽다. 이론만은.
경전에 의하면,
“일체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
생기生起하고 있다. 無自性이다.
그래서 空이다.”라고 있다.
그렇다면,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인가?
“있는 것?
그것은, 오직 연기법緣起法뿐이다.”
.
빨리어 경전의 『니까야』에 의하면,
“진리(dharma)를 ‘연기緣起’라고
부르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은, 緣에 의해 일어나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한다.
곧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곧 ’연緣‘이야말로
진리 그것이고, ’모든 것‘이라고
하는 답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연기법을 너무 쉽게 보고 있다.
그리고 간과하고 있다.
모든 것은 이 연기법에 의해
변천해가는 ’무상성無常性‘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혹은,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눈앞의 욕심에 구애되어,
그것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緣起‘는, 알기 쉽게 말하면,
일체 모든 것은 ’상호의존성‘에
의해 있는 것, 더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도움을 주고 받거나 하는 모양.
또는, 그 관계의 ‘연의 세계’로
성립하고 있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 독립하여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것이 ‘空’이고 ‘無常’이고 ‘無我’이며,
또는 ‘無自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지 원인과 조건이 하나가 되어
인연화합했을 때, 일체의 것은
우리들의 눈앞에 임시로 존재하기에
지나지 않다고 관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타자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데, 자타를 분리하여
자기중심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기만 옳고, 자기 것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 자기중심의 미혹, 어리석음으로부터
떠나게 하기 위하여 ‘空’이 설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空도, 緣起도, 無常도, 無我도,
보는 각도의 차이 때문에 있는 것이고,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나는 객관 세계의 그 모든 것에 의해 존재되고
나라고 하는 존재가 탄생한다.
그리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다 살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나툴 것인가.
내가 돼지면 상대도 돼지가 되고,
내가 부처가 되면 상대도 부처가 된다.
상대로 인해 자신을 존재시키지 말고,
나로 인해 상대를 존재시키고 싶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