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 고전에서 읽어내는 우리 존재의 빛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다소 충격적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충격적인 까닭은, 개인이 어떤 외적 강제도 없이 스스로를 책임지는 존재로 자유와 행복을 구가해야 한다는 믿음이야말로 데카르트와 칸트 이래, 그리고 프랑스 인권선언 이후 인류의 신성불가침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런 믿음을 거부한다. 인간이란 자율적 존재이기에 홀로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바로 그 안에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불안, 우울, 허무주의의 주범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영웅으로 살지 않아도 각자 ‘성스러운’ 존재로서 충분히 의미 있게 살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시작하여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 단테의 『신곡』, 그리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서양 고전들을 다시 읽어냄으로써, 어떻게 인간 삶이 고대의 성스럽고 빛나는 경험 세계로부터 창백하고 우울한 피로 사회로 떨어져버렸는지를 이야기한다. 의미의 원천을 초월적인 신의 사랑에서 찾으려 한 중세나, 자율적 개인의 내면에서 찾으려 한 근현대의 시도가 모두 현대의 허무주의로 가는 도정이었다는 것이다.
■ 세상의 무수한 신(神)들이 던져주는 삶의 의미들
저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자각된 개인’ ‘계몽화된 개인’이라는 내면의 견고한 영웅주의에 취해서 스스로를 꽁꽁 닫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세상이 던져주는 빛들에 대해 열린 존재가 된다면, 성스러움을 다시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보고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뛰어드는 의인의 행동, 야구장 관중석에서 하나 되어 환호하는 기쁨, 아침에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 한 잔의 즐거움이 그런 빛들이다.
이 책 『모든 것은 빛난다』는 이것을 고대의 다신적(多神的) 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다신적’이라는 말이 종교적 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무수한 신들이 던져주는 의미의 순간들을 만끽하고 감사함으로써 성스러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의미의 ‘생산자’로 보지 말고, 세상이 일으켜 보여주는 의미들의 ‘발견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 바꾼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이 가능해지지는 않는다.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 스쳐지나가는 사건들(퓌시스, physis)에 대해 우리의 지성과 신체를 끊임없이 밀착시키고 연마하는 활동(포이에시스, poiesis)을 함으로써, 광포한 감정의 선동이나 차디찬 이성의 명령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지키는 기술(meta-poiesis)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은 빛난다”(All Things Shining)라는 이 책 제목의 뜻이기도 하다.
■ 이 책의 내용 - 성스러움의 회복을 위한 안내서
실존의 과도한 짐은 허무주의를 부른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신이 없기에 모든 것을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로도 읽힌다. 이처럼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런 실존적인 선택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선택 대신 완강한 자기 확신에 취해 있는 사람이나 대중오락, SNS, 약물 등에 매달려 자신을 잊는 유형이 그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고현장에서 망설임 없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경기장에서 몰아적인 플레이를 행하는 선수처럼 주저 없이 선택을 행하는 행동적 유형도 많다.(1장) 그러나 어떤 태도를 취하건 선택의 상황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개인의 모습은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다. 특히 자살한 미국의 천재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 Wallace)는 이런 현재적 실존의 상황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싸웠던 인물이다. 월리스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야 하는 오늘날의 반복적인 삶에서도 끝까지 삶의 가치를 추구했고, 그런 과제로부터 주의를 빼앗고 정신을 중독시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제는 결국 월리스를 자살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2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의 행복했던 세상
반면에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칭송한 인물들은 그런 현대적 실존 상황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헬레네는 파리스와 연정에 빠져 도망쳤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의 칭송을 듣는 여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와 가정의 신 헤라가 한 인물을 동시에 지배하듯이, 신들이 정해주는 정조(mood)에 자신의 전 존재를 조율(tuning)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특징이었고,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윤리적 관점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고대의 미덕(arete)이었다.(3장)
그러나 호메로스 시대의 충만했던 삶은 아테네 전성기인 아이스킬로스 시대와 초기 기독교를 거치면서 통일적이고 일원론적인 인간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복수와 분노가 지배하던 고대의 원시적 정념들이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아폴론의 법질서로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 역작이다. 또한 예수는 한 걸음 나아가 유대 공동체의 율법적 질서를 인간 내면의 욕망이라는 문제로 바꿈으로써 전혀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한다. 물론 그 욕망은 신에 대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수렴될 때만 인정될 수 있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개인의 욕망을 신의 사랑과 일치시키려고 한 내면적 투쟁기로 읽을 수 있다.(4장)
예수와 바울,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치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초점이 된 내면의 욕망 문제는, 육체와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의 현세적 삶과 신의 정신적 사랑을 일치시키기는 어렵다는 문제에 늘 봉착하곤 했다. 단테에게도 이 문제는 큰 난제였다.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존의 상황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악마의 특성으로 돌린다. 세계를 움직이는 신의 사랑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는 개인의 의지야말로 꽁꽁 얼어붙은 지옥에 속한다는 것이다. 단테는 이렇게 인간의 자율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옥에 가둔 반면, 데카르트와 칸트에 오면 자율성은 인간의 가장 존엄한 특징으로 복권된다. 칸트에 이르면 드디어 인간은 “스스로 세운 도덕 법칙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평가될 수 있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5장)
허무의 시대에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길
이 책 6장에서 우리는 ‘의미의 무한한 원천’이라는 자리를 두고 개인과 신이 벌이는 장엄한 투쟁을 보게 된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 바로 그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소다. 흰 고래는 무한대의 힘을 감추고 있지만 얼굴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분노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반면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다리(곧 그의 실존)를 잘라버린 존재를 대면하고 정복함으로써 스스로를 의미의 완성자로 세우려는 인물이다. 이런 영웅적 개인과 유일신 사이의 싸움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배와 선장이 함께 침몰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저자들은 『모비 딕』의 화자(話者) 이슈메일에 주목한다. 이슈메일은 유일신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적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언제든지 주어진 상황에 자신을 조율할 수 있는 다신적 태도를 갖춘 인물이다.(6장)
대단원의 장인 7장에 이르면, 우리는 다신적 사고가 현대에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저자들의 답을 들을 수 있다. 다신적 사고는 우선 퓌시스(physis)라는 세계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한다. ‘자연’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퓌시스’는 어느 날 피어났다 사라지는, 휙 스쳐가는 사건들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즉 야구장에서, 집회 현장에서, 일터에서, 아침 식탁의 향기에서 늘 퓌시스를 경험한다. 그러나 퓌시스는 거칠고 일시적인 힘의 외양을 띠기에 히틀러의 위험한 선동 같은 데 빠질 소지가 있다.
저자들은 여기서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고도의 양육적 기예를 제시한다. 우리 삶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차이에 대해 둔감한 사람은 의미의 구별도 할 수 없으며, 걸어 다니는 자동기계와 다름없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의 커피 마시기를 성스러움의 순간으로 포착하는 사람만이 세상이 던져주는 다신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성스러움이란 이런 문화적 실천(praxis)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서 오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허무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현대의 삶이 이룩한 위대한 진보의 표식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런 견해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비참한 가난 속에 살았던 과거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
--- p.20-21, 「1장」 중에서
19세기 이래로 서양의 역사는 어쨌건 진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와 이후 시대야말로 이런 발전의 정점에 이른 시대라고 배워왔다. 자유의 자기충족성, 이성의 투명성,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안정성,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진보를 가리킨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존재한다. 즉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탈마법화된 상태야말로 끝없는 쇠퇴와 상실의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다. 자유의 대가로 안게 된 홀로서기의 짐, 이성의 거침없는 행진이 닦아놓은 무미건조하고도 무자비한 길,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생기 없는 얼굴, 이 모든 것이 역사의 퇴보를 가리킨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야기도 옳지 않다면? 즉 경이와 매혹이 저 멀리로 사라졌다는 생각이 현대 세계를 오해한 결과라면?
--- p.171-172, 「4장」 중에서
우주의 궁극적 스토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데 있지 않다. 비록 에이해브가 만난 모비 딕처럼 우리에게 무관심한 신도 있지만 말이다. 어린 선원 핍이 외롭게 버려진 미아처럼 바다에 조난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생각, 즉 세상은 “신처럼 냉담하다”는 생각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그런 신과 달리 세상에는 또 다른 신들, 즉 즐겁고 성스러운 신들과 사악하고 복수심에 차 있는 신들도 있다. 우주가 그 신들 가운데 궁극적으로 어떤 신이냐고 묻는다면, 어느 하나의 신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들의 만신전(萬神殿)일 것이다.
--- p.343, 「6장」 중에서
오늘날의 역사 단계에서는 특별한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우리에게 있는 성스러움의 양태들 각각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기술이다. 세계가 지닌 다차원적인 성스러움들 속에서 사는 장인은 어떤 순간에 전자레인지가 필요하고 어떤 순간에 감사의 축제가 필요한지를 반성 없이 즉각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거칠고 열광적인 스포츠의 신들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동시에, 광적이고 위험한 선동가에 이끌리지 않도록 구별하는 기술도 습득하고 있다. 그의 삶은 빛나는 사물들에 조율되어 있으며, 따라서 신들이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열어두고 있다. (…) 하지만 고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자기 이해는 신들을 추방하는 결과를 빚어왔다.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성스러운 것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덮거나 막아왔다는 얘기다. 신들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음에도, 우리가 듣기를 멈춰버린 것이다.
--- p.402-403, 「7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