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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문화유산 스크랩 일제강점기 월악광산의 사무소터와 월악신사터
연바다 추천 0 조회 20 10.04.11 17: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제강점기 월악광산의 사무소터와 월악신사터

 

 

 

                                                                                              柳今烈

 

 

일제강점기 월악산은 중석광산의 채광지는 조선총독부에서 운영한 국광으로 경향각지에서 몰린 노동자는 물론 조선인 근로자 보급대를 투입하여 채광한 것으로 전한다. 월악산 서쪽 기슭에 소재한 월악광산은 1922년 개광하여 중석의 운반 및 광부를 관리하던 일본인 사무소가 소재한 건물지의 석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월악광산 사무소터 지형도 (국립지리원)]

 

[덕산면 월악리 728번지 9호에 인접한 산1번지에 월악신사터 (다음지도)]

 

덕산면 월악리는 산간오지로 일제강점기 광산에서 중석(Tungsten)을 채광을 독려하기 위하여 일본 정신을 함양한 월악신사가 소재하기도 하였다.

『두산백과사전』에,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에 있는 중석광산은 월악산 서쪽 산록에 있으며 화강암 안에 석영맥(石英脈)이 배태되어 있어, 회중선(灰中石)으로 산출된다. 대체로 접촉변성광상(接觸變成鑛床)이다. 1920년 개광되었고, 1941년에서 44년에 품위 66%의 정광(精鑛)을 418톤, 그 밖에 수연광(水鉛鑛, 몰리브덴광) 90% 품위의 정광 40톤을 생산하였으며, 1982년의 경우 93톤의 중석광을 산출하였다.” 라고 수록하였고, 『제천제원사』에, “덕산면 월악리 1014번지에 월악광산의 장풍광업소는 연간 190만 톤을 생산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 월악광산과 연계한 월악신사의 관련 자료는 『내제문화 15집』에 유명상의 ‘권영석 열사의 항일투장 사건보고’에서 주요 내용 발췌하였다. ?1945년 8월 20일 월악학교 비상소집령이 하달, 학생들은 퇴비, 고철, 관솔고부배기 모아서 등교했다. 학교에서 전승기념행사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조회 때 부르던 3회 천황폐하 만세! 대신에 대한독립만세로 바꿨다. 권선생(교감, 4학년 담임, 權寧石)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태극기를 그렸다. 권선생의 지시로 창고문을 열어 목검을 지급하여 4학년을 필두로 13명이 모여서 신사터 월악리 728-9에 인접한 산1번지로 징그미에서 평지로 약 1㎞ 가파른 언덕길을 약 300m 정도이다. 권선생은 당집 문을 열고 종이조각 접은 것을 끄집어내 왔다. 권선생은 “이제 일본 귀신은 불타 죽는다.” 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긴 밧줄을 대문기둥(鳥居도리)에 걸어 영차영차 잡아당겨서 쓰러뜨렸다. 광산 사무실로 들어가 광산 소장(朝田, 아사다), 소장 부인도 무릅을 꿇리고 항복을 받았다. 한국인은 창문으로 도망쳤다. “너희 신은 불타죽었다. 빨리 이 월악을 떠나야 한다. 올 때처럼 빈손으로 가라. 단벌 짚신차림으로 당장 떠나라.” 라고 호통을 쳤다. 광천에 사는 광산소장 김정환이 목갱으로 등줄기를 내려쳤다.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킨 신사가 월악산의 오지에 소재한 것은 중석광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월악에 한 트럭에 가득히 헌병이 출동하여 권선생을 잡으로 왔다. 헌병은 장보구니에 세워두고 태극가가 휘날리는 사택에 들이닥쳤으니 낌새를 알아치리고 수수밭으로 피신하고 산속에 은둔하였다. 왜병은 광산 사무실로 본부를 옮기고 권선생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일본 헌병에 쫓기고 광부들은 노임을 권선생 때문에 받지 못하여 가족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무렵 일본인 광산 소장은 헌병과 함께 도일했다.?

 

【월악초등학교의 연혁】

?월악초등학교는 제천군 덕산면 도전리 증금동(曾琴洞)에 거주한 윤주학(尹柱學)씨가 1933년 5월 1일 증금공회당에서 학술강습소를 창설 경연하던 중 월악국민학교가 인가되므로 인하여 이 강습소로부터 건물 및 비품(備品) 아동(兒童) 일체를 인계인수하였다.

?1944년 4월 1일 월악공립초등학교 인가 4학급 편성하였고, 4학년 수료하고 고학년은 덕산국민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으며, 당시 교장 1명, 훈도 2명, 임시교원 1명, 소사 1명이 상존했다.

?1992년 2월 19일 제45회 졸업식으로 총 1,80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3월 1일 덕산초등학교로 통합되면서 폐교되었다.

 

 

월악광산사무소터

월악광산사무소는 중석광산의 일본인 사무소로 채광한 갱구는 약 600m로 전하며 중석은 소리개차로 운반하여 변전소가 있는 재련장으로 옮겼다. 이 광산은 1950년대 멸실되면서 일본인이 사용한 건물지의 석축이 남아있다.

 

[신륵사에서 서쪽으로 계곡 상류에 보광암 산문석, 산문석에서 남쪽의 계곡으로 올라가 계곡변에 방호시설의 석축이 소재한다. 산문석에서 서쪽으로 보광암을 향하면서 월악광산사무소터가 드러난다.]

 

 

[월악광산사무소터의 석축은 양쪽의 계곡수가 내려오는 중앙의 건물대지에 석축하였다.]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1]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2]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3]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4]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5]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6]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7]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8]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9]

 

 

[월악광산 사무소터의 석축10]

 

[1단대지]

일제강점기 월악광산의 사무소 석축으로 상단에 해발 384m 지점에서 140도 방면으로 경사지에 석축으로 대지를 조성하였다.

1단대지는 15m 가운데 10m의 석축은 온전하며, 5m는 붕괴되었다. 최고 석축은 2.6m에 이른다. 상단에 대지는 13m의 너비로 전체 면적은 약 195㎡에 이른다.

 

[2단대지]

상단의 석축에서 남동쪽으로 2단 대지는 21m의 구간인데, 지금의 등산로에서 ㄴ자형의 석축은 1단대지의 방향으로 4.6m(최고 0.8m)의 길이에서 회절하여 북동쪽의 계곡방면으로 약 16m(최고 1.5m)의 길이로 석축하여 대지를 조성하였다. 2단대지는 가장 넓은 지역으로 1단대지의 석축 바로 밑으로는 석축을 하지 않았으나 평지가 조성되어 대지로 판단된다.

 

[3단대지]

2단대지의 석축에서 남동쪽으로 25m의 구간인데, 지금의 등산로에서 ㄴ자형의 석축은 2단대지의 방향으로 7m의 길이는 거의 붕괴한 곳에서 북동쪽의 계곡방면으로 회절하여 약 16m의 길이로 석축하여 대지를 조성하였다.

3단대지는 북동향의 계곡변에 상하류로 석축한 구간 가운데 약 8m는 붕괴되었고, 약 13m 구간은 석축이 온전하며 최고 2.6m에 이른다. 특히 3단대지 안에는 방형(1.1m)의 석축(高0.9m)이 계곡변에 있다.

 

[4단대지]

3단대지의 석축에서 남동쪽으로 10m의 구간인데, 석축으로 조성한 대지의 좌우로 계곡이 합수하는 바로 윗면으로 지세가 협소하여 반타원형으로 석축하였다. 남동쪽으로 둥근형상은 약 4m의 길이에 자연석 지대석으로 삼아서 석축한 높이는 1.5m에 이른다. 그리고 북동향으로 계곡변에 3단대지의 석축과 연계한 석축은 최고 1.2m에 이른다.

이 석축의 경사도에 4단의 총길이는 약 69m에 이르며, 양쪽의 계곡으로 최대 너비는 약 31m에 이르므로 전체 대지면적은 2,139㎡이다.

 

[기타석축1]

이 광산사무소 터에서 신륵사 방면으로 해발 371m 지점에 등산로변에 또 하나의 석축이 발견된다.

지금의 등산로에서 ㄴ자형의 석축은 길가로 4.5m 길이의 석축이 온전하며, 계곡방변으로 19m 길이 가운데 약 7m 길이의 석축(최고 1.4m)이 온전하다. 이 대지에는 둥근형(지름 1.5m)으로 참호형의 웅덩이가 보인다.

 

[기타석축2]

보광암의 산문을 가리키는 암석에서 280도 방향은 보광암에서 흘러 온 계곡수이며, 200도 방향의 계곡에서 내려 온 냇물이 합수하는 지점에 해발 338m에 교량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200도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살펴보니 해발 359m 지점에서 계곡변에서 토끼길이 접한 으슥한 곳에서 석축을 발견하였다.

길가에 13m의 길이로 낮게 석축하고 산비알에 이어서 삼각형의 지세에 담장이 형성한 모습이다.

이 대지를 형성한 곳에서 하류로 30m 지점에 5m의 석축과 연계한 방형(長3.6m, 高1m)의 참호시설의 석축이 일부 붕괴되었으나 형태가 완연하다.

이 지역은 지형으로 보아서 월악산 암릉의 능선에서 신륵사 방면으로 통하는 계곡으로 방수시설로 볼 수 있어 주변의 정황을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성이 대두되며 광산의 석축과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일본인은 ‘가나야마 히코노미코(金山産命)’에 ‘광산의 신’으로 신봉한 신사가 소재한 점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 월악산에서 월악광산을 채석하면서 신사를 세운 목적이 확실해 졌다. 즉, 일제는 월악광산에서 채광한 중석은 무기의 원료로 사용하면서 광산에 동원한 광부를 혹독하게 채광량을 증가하면서 광구의 매몰 등  광부의 안전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무사고를 기원하기 위하여 월악신사(月岳神社)를 세운 것으로 판단한다. [淸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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