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가시면류관, 1570
가인과 아벨
기도하는 성 캐더린, 1567-68
참회하는 막달라, 1533
세례요한, 1540
수태고지
아담과 이브
유혹하지말라, 1511-12
마리아와 예수, 1530
예수의 매장, 1525
밧모섬의 요한, 1547
피에타, 1576
성모자와 주교, 1513-14
십자가앞에서 무릎꿇는 안토니오, 1575-76
신들의 식사, 1514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다이아나, 1553-54
바커스와 아리안느, 1523-24
비너스의 경배, 1516-18
비너스와 큐피드, 1548
플로라, 1515
티치아노 (Tiziano Vecellio, 1488? ∼ 1576.8.27)
이탈리아의 화가. 북이탈리아의 피에베 디 카도레 출생. 베네치아에 전해진 플랑드르의 유채화법을 계승 하여 피렌체파의 조각적인 형태주의에 대해 베네치아파의 회화적인 색채주의를 확립하고, 생애의 마지 막까지 왕성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9세 때 베네치아로 나와 모자이크장인(匠人) 주카토의 문하에 들어갔 다가 얼마 후 젠틸레 벨리니에게 사사하고, 다시 그 동생인 조반니 벨리니의 문인이 되었으며, 동문인 조르조네에게도 배웠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제작은 1508년 조르조네의 조수로서 독일인의 상관(商館) 폰다코 디테데스키에 그린 벽화이다. 그 이전의 ‘알려져 있지 않은 티치아노’의 기간이 너무 오래되 어, 최근에는 그의 생년을 1488~90년으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초기 작풍은 조반니 벨리니와 조르조 네의 기법을 따랐으며, 피티화랑의 《합주(合奏)》 등은 조르조네의 작품인지 티치아노의 작품인지 판단 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유명한 《성애(聖愛)와 속애(俗愛)》(로마 보르게미술관 소장)에서는 이미 그 특 유의 사실적인 묘사의 견실함과 명쾌한 색채를 보여주었으며, 1518년 완성된 베네치아 프라리성당의 제 단화 《성모승천》에서는 선배들의 영향을 벗어나 자유로운 동적 표현으로의 진로를 보였다. 또 마드리 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있는 《비너스의 예찬》 《주신(酒神) 축제》를 비롯하여, 23년의 《바커스와 아리 아드네》(런던 내셔널갤러리) 등 일련의 고전신화 그림, 드레스덴회화관의 《공전(貢錢)》, 루브르미술관 의 《장갑을 쥔 사나이》 등은 구도의 동적 리듬에 한층 진보가 보이며, 색채도 명도(明度)를 더해서 원 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확고한 기반을 닦은 그는 국내외의 여러 왕후들로부터 위촉받아 더욱 명 성을 떨쳤으며, 그 중에서도 독일황제 카를 5세를 위해 그린 33년의 《개를 데리고 있는 입상》(마드리 드 프라도미술관)은 그의 초상화 중의 걸작이다. 당시의 《마리아의 참배》(베네치아 아카데미아미술관) 《파르도의 비너스》(루브르미술관) 《우르비노의 비너스》(우피치미술관) 등은 풍속화적 ·풍경화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며, 인간성에 중점을 둔 독특한 작풍을 보여준다. 또한 풍만한 나부(裸婦)의 표현도 주 요한 모티프를 이루며, 40년대에는 《큐피드와 비너스》(우피치미술관) 《음악가와 비너스》(프라도미술 관) 《다나에》(나폴리국립미술관) 《거울을 보는 비너스》(워싱턴국립미술관) 《유로파의 겁탈》 등 독 자적 관능성을 발휘하였다. 45년에는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의 초빙으로 《교황 바오로 3세와 측근자》 (나폴리국립미술관)를, 48년에는 카를 5세의 초빙으로 《카를 5세의 기마상》(프라도미술관)을 그려, 원 숙한 기법을 보여주었다. 또한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많은 초상과, 《프랑수아 1세의 초상》(루 브르미술관) 《리미날디의 초상》(피티미술관), 그 밖의 몇 점의 자화상 등, 그 성격묘사의 예리함은 그 의 투철한 사실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만년에도 왕성한 제작욕을 보여 《형관(刑冠)》(뮌헨미술관)과 같 이 격정적인 장면을 즐겨 그렸으며, 필치는 더욱 강해져서 마침내 그의 예술은 단려한 고전적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선구로서 17세기의 P.루벤스, H.렘브란트로 이어지는 길을 개 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