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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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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본당의 한 자매와 그 자녀가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가스폭발로 큰 상처를 갖게 되었는데 여러 차례의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남편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저는 손을 씻기 위해 세면장에 들어가 있었기에 그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모든 유리창이 깨져 멀리 날아가 버리고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구급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져 있는 아내의 참혹한 얼굴을 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고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아내의 상처가 너무 심해 아들의 상처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아내는 말했습니다. “감사미사를 봉헌하라!” 도대체 무엇을 감사하라는 말인가?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감사하라니....오히려 화가 났습니다.
사고가 있은 다음 날 아침, 어린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 하면서 달려와 품에 안기는 순간 “감사미사 봉헌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어린 손자 손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또한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3일만 고생하면 될 것을! 이렇게 살아서, 고생하게 해 미안하다.”고.
참된 믿음은 어려울 때 알게 됩니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믿음의 사람이 가야 하는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고통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치료해야 할 일이 이 ‘산 넘어 산’이지만 이내 맑은 미소를 간직하고 주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시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주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저는 그 자매에게 위로를 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위로를 받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신 예수님께 사랑으로 응답할 때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면 매 순간이 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앞세우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한 번 또는 두세 번 십자가를 졌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부담일 수밖에 없지만 그분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책임져 주시니 나는 따를 뿐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내가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 (30,15).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30,19).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겨 생명을 선택하고 “제때에 열매를 내며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감당하기 힘들지만, 기꺼이 짊어지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성 요한 비안네).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드러내 주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피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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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월 12일(240212) 올리신 글 하단에
내일부터 17일 토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돌아와서 기쁘게 다시 만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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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 저를 신경 쓰게 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무릎 통증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 났던 적이 있는데, 당시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인지 신학교에 들어가서 계속 통증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무릎에 물이 많이 찼다면서 커다란 주사기로 물을 빼주면서 무릎 사용을 하지 않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안 좋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의사 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반드시 끓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깁스를 한 것도 아니어서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 ‘젊은 놈이 뭘 아파?’라는 식입니다. 무릎 아픈 것보다 꾀병 부리는 것처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고통은 단절과 고립에서 온다고 합니다. 세상에 홀로 있다는 느낌이 있을 때, 우리는 고통 안에 머물게 됩니다. 따라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말할 필요 없이 ‘연결’을 깨닫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님을, 함께할 누군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연결’을 통해서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삶 안에서 단절과 고립은 계속 이어집니다. 육체뿐 아니라 특히 정신 안에서 강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연결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 안에서도 이 ‘연결’을 유념해 두어야 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결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우리와의 연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아 주셨고, 또 함께해 주셨습니다. 이 연결을 위해서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사흘 만에 되살아는 부활까지 이야기해 주십니다. 혹시라도 각종 고통과 시련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을 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즉, 주님과 연결되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연결 없이 과연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계속된 불평과 불만 속에서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주님과의 연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주님과 연결해야 하고, 이웃과도 연결하면서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의 삶이 아닌,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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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사람이다(로맹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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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번째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셋째>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는 일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의 ‘제 십자가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떠올리는 ‘신약의 십자가’가 있기도 전에 사용되고 있는 이 ‘십자가’. 곧 ‘구약의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우선 “계약”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구약에서 ‘십자가’(타브)는 ‘계약의 표’로서 소유, 선택을 나타내는 동시에, ‘구원의 표’로 주어졌으며(에제 9,4.6.), 주님을 따르는 ‘하느님의 종’과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에게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레위기>(25,55)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종들’이라 칭하며, <탈출기>(19,6)에서는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또 하느님의 제사장으로서 ‘계약’을 짊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구원의 표시로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곧 “계약”을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의 소유로 선택되어 거룩한 백성의 삶을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당신을 따르는 이’는 ‘계약’을 짊어지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곧 생명의 길이며, 그것은 목숨을 내놓은 결단을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러한 결단은 <제1독서>에서 생명과 죽음의 길로 드러나며, 생명의 길은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있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루카 9,22)
주님!
길을 인도하시는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따라 걷게 하소서.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어도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고난을 스스로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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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습니다. 먼저 시를 함께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2000년 전에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들은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고,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들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충만함과 희열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고난과 절망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하였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선생님이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군인이 입는 제복도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아버님은 교직에 계시지는 않았지만 사범학교를 나왔고, 고모부도 사범학교를 나와서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그런 제게 예수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부르시지는 않았지만, 운명처럼 저는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신학교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의 모습도 멋져보였습니다. 성소(聖召)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없이 본당 신부님께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성적표를 가져 오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님과 면담하였습니다. 당시 쉬고 있던 아버지가 성당에 나오는 조건으로 허락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입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뒤로는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 하였습니다. 사제가 된지 3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교사나 군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제가 선택한 사제의 길은 교사와 군인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사제는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는 교사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선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군인은 전선에서 적을 막아내고, 국민을 보호합니다. 사제는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우들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사제의 직무에는 교사와 군인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선택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계명과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사제는 서품 받기 전에 3가지 서약을 합니다. 독신서약, 신앙고백, 교구장에 대한 순명입니다. 사제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독신으로 살고, 자신의 뜻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고, 교구장의 뜻을 충실히 따른다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둘째는 선택함에 있어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도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달콤한 열매만 찾아가는 선택은 당장은 좋겠지만 그 끝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일찍 죽는 것 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치고 도와주시어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마치게 하소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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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다시 한번 주님의 말씀을 새겨봅시다. 다시 한번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생각해 봅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다. 우리의 이런 호칭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라오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는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내 마음의 소리는 다를 수 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 어떤 길을 원하시는지 알지만, 우리 마음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 뜻을 잠시 내려둔 채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자신을 버린 신앙인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십자가가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상처와 같은 십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잘못에서 오는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나 자신이 십자가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려놓을 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전체가 나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를 주님께서는 힘차게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힘겹지만 내 십자가를 나로 여기며 걸어가는 우리가 바로 믿는 이, 즉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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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도 살아갈 수 있다.
얼마전 외부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본당 안에 있는
사무실 앞 카페에 앉았습니다.
밖은 참 추운데 안은 따뜻했습니다.
밖은 새찬 바람이 부는데
안은 커다란 창을 통해
빛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다육이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육이는 새찬 바람과 추위로부터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따뜻한 햇살만 골라받고 있었습니다.
다육이 주인이 참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갑자가 입속에서 기도 한줄이 튀어나옵니다.
우리도 이렇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품에서 겨울을 피하고
따스한 햇살만 골라 받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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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선택입니다
-짐이 아닌,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
다산(茶山) 정약용과 논어 공자(孔子)의 오늘 말씀이 멋집니다.
“꽃향기를 맡기위해서는 먼저 허리를 숙여야 한다. 시냇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다산
“육포 한묶음 이상을 예물로 갖춘 자를 나는 가르치지 않는 적이 없다.”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겸손과 감사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학인의 기본적 품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가 ‘재의 수요일’이자 ‘발렌타인데이’인줄은 후에 초코렛 선물을 받고 알았습니다. 외출후 귀원하니 집무실 앞에 정체불명의 봉투가 있었고 초코렛이 들어 있었습니다. 후에 카톡 메시지를 받고 알았습니다.
“신부님, 오늘 재의 수요일이면서 Valentine’s day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코렛 선물하는 날입니다. 사랑합니다!! 봉투에 글을 읽어 보세요! 제가 신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아, 자매님 선물이었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봉투가 보이지 않네요!”
“초코렛 넣은 bag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봉투에 영문글자들이 보였습니다.
“Thank you, is the least I can say to you show my appreciation for everything you have done for me”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제 감사를 보여줄 수 있는, 당신께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아름다운 말마디는 그대로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어제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은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는 요지로 전개했는데 후에 생각난 내용을 첨가하지 못했음이 아쉬웠습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요 진실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진실도 끝입니다. 삶이 연장되는 것은 하루하루 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 주어진 날들인 것입니다.”
얼마전 교구 신부님과 대화하면서 은퇴신부들의 처우에 대해 나눴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양산되는 고령 은퇴 사제들의 처우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선물인생인듯 생각했는데 이제는 교회에 불편하고 무거운 짐들로 느껴지고 있는 노은퇴사제들입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제가 늘 화두로 삼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받을 때는 선물이었는데 받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대부분 불편하고 무거운 짐이, 쓰레기가 됩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병들고 아프면, 심지어 나도 병들고 아프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선물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영적 본능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도 선택, 행복도 선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탄식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명의 주님, 희망의 주님,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여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용감하게, 무거운 짐 인생이 아니라, 가벼운 선물 인생을 선택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희망차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신명기 모세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가 대상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번성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 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라는 말마디가 참 은혜롭습니다. 헛것인 우상에, 결국은 버려질 짐같은 것들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께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제1독서에 “”오늘이란 말이 무려 4회 나옵니다. 영원한 오늘, 지금 여기 오늘을 뜻합니다. 모세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신약의 새모세,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 바로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여 따라야 할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한결같이 날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 생명의 길, 행복의 길, 성인의 길이요 예수님과의 일치도 날로 깊어져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야 비로소 늘 선물인생이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힘껏 늘 십자가의 길 선물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다음 고백기도대로 살 때 하루하루 날마다 선물 인생이 될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 오늘을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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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과연 나의 십자가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
모든 이가
지닌
십자가
누군가는
지는
십자가
누군가는
지우는
십자가
너
살리려고
내가
지는
십자가
나
살려고
너에게
지우는
십자가
과연
나의 십자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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