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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창세기 19:1-22 “ 농담으로 여긴 사람들 ”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이미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 기독신문에 만화의 내용이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한 문화에 빠져 있다가 불심판을 받은 내용을 두 컷으로 그리고 나머지 두 컷은 지금 거짓말이라는 영화가 상영되는 이 땅이 불심판을 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경각심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롯의 사위들이 롯의 말을 듣고서 농담으로 여긴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롯의 사위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소식을 듣고도 함께 망한 것은 멸망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서 아니라 듣고서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늘 말씀의 경고를 받고 있는데도 늘 농담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듣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천사들이 나그네의 모습으로 소돔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이 그들을 발견하고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자 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길에서 밤을 지내겠다고 하자 그 성의 죄악을 아는 롯이 그들을 간청하여 자기 집에 모십니다. 그리고 저녁을 대접하고 그들이 자리에 들기 전에 그 성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나그네를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상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방인이 들어 왔으니 허락도 없이 들어 왔느냐 라는 그런 의미에서의 상관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적관계를 가지고자 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인 타락상을 보아서도 알 수 있고 그들 대신에 롯이 자기의 딸들을 대신 내어 주고자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여 하나님을 대접하게 되었는데 소돔성의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기는커녕 그들을 욕보이고자 하였으니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한 소돔성에서 유일하게 나그네를 대접한 사람이 롯입니다. 이 롯이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임을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니 롯의 심령에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을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아니하고 성문에 홀로 있다가 나그네를 대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소돔이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욕보이려고 한 성읍이 또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사기 19:22-23절을 봅니다. “봉독”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어떤 레위인이 첩을 두었는데 친정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레위인이 첩을 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만 이 사사시대의 혼란과 타락이 극에 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레위 사람이 자기의 첩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여부스에 이르러 종이 여부스에서 밤을 지내자고 하였으나 자기의 동족이 아니라고 기브아에 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성문에 기다리는데 아무도 영접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노인이 그 레위인을 영접하여 들였는데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와서는 그 사람을 끌어내라고 우리가 상관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노인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어 놓겠다고 합니다. 결국 그 사람의 첩이 끌려 나가 밤새도록 욕을 당하고는 그 다음날 새벽에 죽고 맙니다. 이 시신을 가지고 가서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내고 그것으로 총회가 열리고 기브아를 치는 것입니다. 기브아에 베냐민 지파가 살고 있었기에 이들에 대한 전면 공격을 하였는데 오히려 이스라엘의 총회가 두 번이나 패배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이스라엘 전체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만 아니라 나머지도 마찬 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뿐 아니라 지금 이 세대도 동일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 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경고하는 모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몇 곳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29:22-26절입니다. “봉독”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말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서 그들과 섞이며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너희가 섬기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에돔이나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예고할 때도 소돔과 고모라 같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사13, 렘50).
신약에서는 세 곳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대비하여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0:14-15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영접지 아니하는 자들이 받은 심판을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복음을 들고 나갔을 때 이들을 영접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오히려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 보다 견디기가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두가 예수님 중심입니다. 다른 곳에서 심판과 멸망을 말할 때는 소돔과 고모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소돔 고모라 보다 더 심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이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하시고서는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적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크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신가를 드러내듯이 심판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기준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서 1:7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거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6-8절입니다. “봉독” 역시 본을 삼은 것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모델입니다. 모델이 있다는 것은 더 본격적인 실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파트의 모델 하우스를 만드는 것은 실제로 짓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있음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로 물로서는 심판을 하시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이제는 불로서의 심판을 소돔과 고모라를 통하여 모델케이스로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3:1-14절을 봅니다. “봉독” 말세에 종말과 심판이 재림이 어디 있느냐고 기롱하는 자 농담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자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의 정욕대로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잊어버림이 사람들로 하여금 바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바쁜데 종말 죽음 심판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보시면 대분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런 일에만 정신을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권세라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농담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성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나그네를 상관하려는 그 무리들 롯을 밀치며 들어오는 그들을 천사들이 눈을 멀게 함으로 보호를 합니다. 그리고서는 천사들이 네게 속한 자들이 있느냐고 합니다. 사위나 다른 자녀가 성안에 있다면 빨리 밖으로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롯이 자기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이 성이 죄악으로 멸망당하니 빨리 도망가자 합니다. 그러자 사위들의 말이 14절에 보시면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농담으로 여길 말이 따로 있지 지금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있는데 장인의 말이 농담으로 여겨질 만큼 이 성읍은 죄악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적어도 롯의 사위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지는 아니 하지요. 그러나 그 행위는 롯의 사위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만약 이 지붕이 5분 안에 무너진다 그러면 이 말을 믿었다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벗어나야지요. 그런데 믿기는 하는데 그대로 앉아 있다가 죽었다면 행함이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우리는 롯의 사위들처럼 롯의 아내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소돔성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만약 롯이 스스로 그곳을 벗어났다 라고 한다면 저와 여러분이 별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소돔과 고모라를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6절을 봅니다. “봉독”
롯이 천사의 말을 듣고서 재촉을 하여도 무얼 하고 있습니까? 함께 망한다 빨리 끌고 나가라 하여도 지체 합니다. 미적거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멸망당하지 않으면 이곳에 눌러 앉아 살아야지 하는 미련 그리고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재산 이런 것들을 버린다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불가능합니까? 그러자 천사가 두 사람씩 손을 잡아 끌어냅니다. 롯의 가족이 스스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끌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끌려나옴이 무엇 때문입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더라” 우리의 구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음을 이제야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 긍휼하심 자비하심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끌려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얼마나 더 소돔과 고모라를 그리워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인자를 더하심은 누구의 기도입니까? 29절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성을 둘러엎으시는 중에서 롯을 내어 보내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와 이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롯의 끌려 나오는 그러한 끌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여러 가지 세상의 실패와 환난으로 좌절로 낙담되는 일로, 오늘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마다 이것이 주님의 인자의 손길이구나 하면서 그 뜻을 분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이런 손해가 오는가 하는 것은 아직 소돔과 고모라에 더 눌러 있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바로 세상을 버리게 하시고 포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제로 끌어내시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임을 알 때에 도대체 세상의 두려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끝으로 실화를 하나 소개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1979년 8월 25일 경남 하동읍 비파리 177번지 36평의 단층 슬라브 속에서 가냘픈 경고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40분간이나 계속된 경고 방송의 내용은 섬진강 둑이 폭우로 무너져서 하동읍으로 들어오고 있으니 피하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한번도 침수당한 적이 없는 이곳에 설마 잠길려고 하면서 미적된 것입니다. 그리고 추석 대목을 앞두고 많은 물건도 준비하여 놓았으니 떠나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농담으로 여기고 피하지 않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 재림 직전까지는 경고의 방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의 내용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서 더 잘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농담이 아님을 주님께서 인자를 베푸셔서 알게 해주시고 믿게 하여주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그 나라를 사모하며 사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30. 창세기 19:23-38 “ 롯의 처를 기억하라 ”
수요일도 경고방송을 하고 주일 저녁에도 경고방송을 합니다. 아마 주님의 임하실 때가 가까운가 봅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재림이 처음 믿을 때 보다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이란 재림을 더 사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상한 날짜에 사로잡혀서 카운트다운을 하는 그런 사람들의 모양이 되어서는 안되지요.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하여 쉬 요동하여 먹고 마시자는 식으로 나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절을 봅니다. “봉독” 종말에 대한 자세입니다. 때와 시기는 도적같이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홀연히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을 날짜를 알아맞춘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공부를 미리 해놓은 학생은 시험을 언제 치더라도 상관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준비는 우리로 하여금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9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노하심에 이르게 하시지 않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았으니 사랑하는 신랑과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날을 기다리는 그런 자세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힘이 드는 일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11절에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피차 권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런 자세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격려는 이러한 격려입니다. 히브리서 10:23-25절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여기서의 격려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어려움을 잘 견디게 하는 격려입니다. 그런데 어느 가정사역을 한다는 목사가 이 격려를 가지고 부부생활 가정생활의 화목을 위하여 격려하고 칭찬하자는 말로 한 시간을 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지금 롯의 아내가 자기 사위들과 자기의 재산들을 위하여 염려하고 있는 롯의 아내에게나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성도의 격려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자는 격려입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하여 우리가 더욱 주님의 임하심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는 성도의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사람들은 더욱 바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인간을 편리하게 한다는 기계들이 사람들을 더욱 바쁘게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전화가 휴대폰으로 계산기가 컴퓨터로 이제는 초고속 광케이블로 더 바쁘게 사는 세상입니다. 거기다가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의 정보를 밤새 뒤지면서 앞서 나가야 하는 사람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볼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모이기를 힘쓰는 것도 잘 모이면 복받는다 하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모입입니까?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런 모임에는 가기 싫지요 그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잘하면 복받는다는 그런 날짜 우상에나 붙들려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을 두게 하는 일에 힘쓰지 마시고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옆에 사람을 격려합시다. 조금만 참읍시다-한 30년만)
17절을 봅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가는 길이 살 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망가야 합니까? 뒤를 돌아보지 말라. 들에 머무르지 말라. 산으로 도망가라. 그렇게 끌려 나와서 도망을 가면서 롯의 머리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계산이 빠른지 아무리 빠른 컴퓨터라도 사람이 자기의 생존에 관계된 일에 머리가 돌아가는 것을 따라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계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롯이 뭐라고 합니까? 두렵건대 산까지 가다가 재앙을 만날까 두렵사오니 저기 조그만 성읍에 가면 안되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서 약 3킬로미터 거리랍니다. 산으로 도망가라는데 다시 도시 속으로 옛날에 아브라함이 먼저 선택하라고 하였을 때 도시를 선택한 롯이 다시 도시를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허락을 합니다. 그러자 소알성으로 성이 작다고 소알이라고 부릅니다. 성으로 들어가는데 문제는 이때 롯의 아내는 그들의 뒤에 남아서 들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에서 도망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가는 것도 억지로 마지못하여 끌려 나왔는데 몸은 성밖에 나왔지만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였지요? 그러니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고 귀하다고 여기는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지금 과연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입니까? 땅입니까? 위입니까? 아래 입니까?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하였다면 절대로 위엣 것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탐심이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쏟아지는 것입니까? 우상숭배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라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 전도와 헌금이 교회 봉사가 자기의 탐심을 위한 것이라면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충성을 강조하는 것이 정말로 주를 위한 것인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 키우기를 목표로 하고 위장하여 광명의 천사처럼 하나님의 일을 합시다 하면서 관심이 자기의 교회에 있다면 이것을 잘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결국 열매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잘 보셔야 합니다. 그러한 자라면 목사라도 예외 없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롯의 아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 하면서도 세상 것 불타니 교회에 헌금 많이 하여 교회 키우자 하는 말을 하면 역시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4절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마음을 두고 사는 것들이 모두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끌려나온 롯과 그 가족, 이끌어낸 후에 돌아보지 말고,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사람의 생각은 수도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계산을 해보는 것입니다. 산으로 가서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전에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도 롯이 먼저 선택한 땅은 산이 아니라 도시였는데 산으로 가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끌려나오면서도 뭐라고 합니까?
19절입니다. 주께서 은혜와 큰 인자를 베푸셔서 저를 구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산까지 가다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오니 저 성으로 가게 하옵소서. 누구의 모습입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여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너무 고생은 시키지 말아 주옵소서 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원을 들어 줍니다. 그러면서 소알성까지 가는 동안 심판을 행할 수 없으니 그곳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를 입은 자가 안전지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심판을 연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소알에 이르고 하나님이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립니다. 유황은 성냥끝에 있는 화약같은 것입니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을 다 엎어 멸하신 것입니다. 그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하여 가는 중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 기둥이 되었다기 보다는 들에 머물러 뒤를 돌아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불과 유황이 비같이 쏟아지고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역청과 소금이 많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쏟아지는 불의 파급이 함께 롯의 처에게 뒤집어 쓴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921년전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 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이때의 묻혀진 도시가 1,500년이나 있다가 발굴이 되었는데 그때 화산으로 덮일 때의 고대의 생활상이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이 화산재로 뒤덮여 굳어 버리고, 그 시신은 분해되어 없어지지만 그 구멍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구멍에 시멘트를 넣어서 굳히면 사람이 화산으로 인하여 피할 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이 말을 하는 것은 옛날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도시를 발굴중에 조금만 더 도망을 갔으면 살 수가 있었는데 엎드려져 죽어있는 사람의 형체가 발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하고 보니 그 사람의 가슴부분에 금과 은같은 보물이 들려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보물이 없었다면 그 화산폭발로 화산의 용암이 뒤덮이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남 목요일 오후 극동방송에서 어느 나라에서 우박이 떨어졌는데 농구공만한 4킬로그램짜리가 떨어져서 종말이 오는가 하고 놀랐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만이 아니라 이 시대도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은 영원히 안전한 곳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롯의 처를 생각하며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기분이 좋을 지 안좋을지 저는 여러분의 심정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고 있느니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박이야기 조금 더 봅니다. 출애굽기 9:22-26절 “봉독” 우박이 사람과 짐승까지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박속에 불덩이가 섞여 내리는 것입니다. 얼음과 불덩이가 섞여서 쏟아지는 것입니다. 계시록 16:21절 “봉독” 우박의 무게가 한 달란트 약 20-40킬로그램 4킬로 정도의 우박이 아니라 40킬로의 우박이 내리는 곳에서 이리 저리 피하며 사시렵니까?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시겠습니까?
끝으로 누가복음 17:28-33절입니다. 먹고 마시고 심고 집을 짓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지 종말과 심판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살고자 뒤를 돌아 본 것이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면서 자기 목숨을 보존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이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