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33
10월4일[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연중 제2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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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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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0t-Mp0pqko?si=e0TpteabaQlUHH1C
[작은형제회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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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 가난해져야겠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만왕의 왕이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족이나 귀족처럼 살지 않으시고, 엄청난 부자로 살지도 않으셨으니, 오늘 우리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다 보면 정말이지 일관되게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제한적이나마 극도의 가난을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하셨습니다. 과거나 오늘이나 사람 살아가는 것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사실 웃돈 십만 원만 내셨더라면 분만을 위한 따뜻한 방 한 칸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가정에는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기 예수님께서는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마구간에서 동물들 사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참으로 극진한 자기 낮춤이요, 극도로 가난한 탄생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워낙 가진 바가 없었던 가 봅니다. 소나 양이 아니라 비둘기 두 마리를 예물로 바쳤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또 어떠합니까? 당신 예언의 말씀대로 머리 기댈 곳조차 없어 허공에 매달린 채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운명하셨습니다.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일관된 극도의 가난, 그것이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예수님 인생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공생활 기간은 예외겠지, 했었는데, 웬걸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전도 여행길은 모든 것이 다 갖춰진 럭셔리한 여행길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일정한 거처도 없이, 매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유랑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골고타 언덕이었습니다.
오늘 너무 가난해서 슬픈 우리를 위로해주시기 위해 가장 가난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마침 오늘은 가난의 예수님을 단 한치 오차도 없이 온 몸과 마음으로 추종하고자 노력했던 성인, 그래서 마침내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다른 그 누군가가 아니라 가난하셨던 예수님,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길을 나선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더 가난해져야겠습니다. 더 자주 비우고, 더 자주 떠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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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v96Ikq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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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택으로 계속 후회가 된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명의 새로운 제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 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심각하게 고려해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시며 견딜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고려해보라고 하십니다. 한 제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세상의 시선에 사로잡힌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편의는 물론 세상에서도 완전히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무언가 선택을 하기 전에 꼼꼼히 숙고해보고 결정하라는 내용일까요? 물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을 많이 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뇌가 피로해지기 때문입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압 데익스테르후이스(Ap Dijksterhuis)는 선택에 관한 많은 실험을 통해 복잡한 조건이 많은 선택일수록 오랜 심사숙고가 오히려 많은 후회를 하게 만든다는 결과를 입증하였습니다. 만약 몇 가지 조건만 살펴보면 금방 좋은 차와 나쁜 차를 구별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숙고하는 시간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의 품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 숙고를 많이 할수록 시간이 지난 뒤 후회하는 확률이 커졌습니다. 다른 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그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커진 것입니다. 반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골라야 했을 경우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도가 컸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이 고려하지 않은 덕분으로 내가 이것을 선택하여 잃게 되는 저것의 장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옳을 것이라는 편향이 있습니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든 얻는 이득이 있고 잃는 고통이 있습니다. 대학을 선택한 것도, 학과를 선택한 것도, 직업을 선택한 것도, 배우자를 선택한 것도, 자녀를 더 낳기로 선택한 것도, 덜 낳기로 선택한 것도 후회가 될 수도 있고 잘했다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결과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많은 고려를 하고 선택한 경우는 지금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함이 크게 느껴지고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장점들이 크게 여겨져서 선택에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많은 이들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는 합니다. 그러면 왜 이 길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런 것일 줄 몰랐다!”라고 말합니다. 신중히 고려해보지 않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사제를 선택해서 얻는 행복보다 그것을 선택하지 않아서 얻을 행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크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의 선택이 잘 된 선택이었다고 믿으면 그만입니다. 저는 25살까지는 사제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25년 이상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에 신중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렇게 결심하면 됩니다.
시인 정호승 씨가 기자 생활을 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철스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은 성격이 완고하여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성철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먹고 설거지가 끝난 후 하수구로 내려가기 직전에 걸려있는 밥풀들을 이쑤시개로 하나하나 찍어서 드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려면 부처님께 먼저 1,000배를 해야 했습니다. 또 그분에게 사진을 찍자고 자세를 취해달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정호승 씨는 운 좋게도 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허락 받았습니다. 해인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백련암 방향을 가던 중 백련암 표지판이 나오자 그 앞 바위에 앉아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사진기를 마구 눌러대는데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노. 필름이 안 아깝나?”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합니다. 벌써 필름을 다섯 통도 더 썼습니다.”
“그래, 그러면 천 번을 찍어라.”
정호승 씨는 이 말씀이 농담인 줄 알았으나 있는 필름을 다 쓸 때까지도 아무 불평 없이 원하는 포즈를 다 취해주었다고 합니다. (참조: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 정호승의 새벽 편지 중)
성철스님은 지나치게 사진을 많이 찍고 이것저것 요구하는 정호승 씨를 만나겠다고 한 것이 후회스럽지 않았을까요? 분명 약간은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만나기로 한 순간부터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매사에 후회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런 마음이 왔는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된 많은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런 잘못에 후회가 없습니다. 발전하는 기회로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냥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지만, 그 이후로는 해충도 많고 물도 부족하고 만나도 맛이 질리고 고기도 먹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도 자꾸 이집트 쪽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탈출시켜 준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회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신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선택은 아버지의 선택 안에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길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던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주님 뜻 안에 머물며 주님 안에서는 나의 모든 선택에 후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모든 선택에 있어서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선택이 하느님 선택 안에 머묾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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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상상력 사전’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시각적인 언어를 표현의 준거로 삼아 말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주로 청각적인 언어를 빌려서 말하는 사람이며, 셋째는 감각적인 언어를 많이 구사하는 사람이다. 시각파들은 ‘이것 봐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이미지를 빌려서 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여 주고 관찰하며 색깔을 통해 묘사한다. 또, 설명을 할 때는 ‘명백하다. 불분명하다. 투명하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장밋빛 인생’이이라든가 ‘불을 보듯 뻔하다. 새파랗게 질리다.’와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청각파들은 ‘들어봐요’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그들은 ‘쇠귀에 경 읽기, 경종을 울리다. 나발 불다’처럼 어떤 소리를 상기시키는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고, ‘가락이 맞는다.’라든가 ‘불협화음, 귀가 솔깃하다. 세상이 떠들썩하다.’같은 말들을 자주 쓴다. 감각파들은 ‘나는 그렇게 느껴, 너도 그렇게 느끼니?’하는 식의 말을 아주 쉽게 한다. 그들은 느낌으로 말한다. ‘지긋지긋해, 너무 예뻐서 깨물어 주고 싶어, 썰렁하다, 화끈하다. 열에 받치다. 열이 식다.’갈은 것이 그들이 애용하는 말들이다.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그 사람이 눈을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일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요구했을 때 눈을 들어 위쪽을 보는 사람은 시각파이고, 눈길을 옆으로 돌리는 사람은 청각파이며, 자기 내부의 느낌에 호소하려는 듯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낮추는 사람은 감각파다.”
무엇이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기질을 타고 나는데 다른 것들을 포용하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관계를 맺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토마 사도는 시각파인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예수님께서는 그런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그런가 하면 바오로 사도는 청각파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 가면 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인은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은 새와도 대화 할 수 있었고, 장미와도 대화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기도하던 성당에는 비둘기 한 쌍이 있습니다. 이 비둘기는 몇 백 년을 이어가며 성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인이 유혹을 견디기 위해서 장미 밭에서 굴렀을 때, 장미는 가시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인이 기도하던 곳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의 다짐을 모아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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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57-62: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떤 사람이 주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57절) 말한다.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시지 않고,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 하신다. 이 말씀은 그를 바로 잡아 하느님 안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늘의 새와 여우는 교활하고 부정한 권능들로 악마의 무리를 의미한다. 우리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채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영들이다. 우리 안에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들어오셔서 쉬실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59절) 하였다. 주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 하셨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례로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은 이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61절)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인간적인 일이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된다고 하여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한다면 가차없이 끊어버려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끊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악마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반대의 길로 가려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아무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개인적인 이유로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는 주 그리스도를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둠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몰두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따르는데 망설임 없이 즉시 따를 수 있는 자세와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여 집착하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봄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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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여기서 ‘어떤 사람’은, 마태오복음에는 ‘한 율법학자’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8,19), 그가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 한 것인지, 그냥 학문적인 제자가 되고 싶어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더라도”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말한 것이겠지만, 어떤 어려움을 얼마나 겪게 될지는 잘 모르고서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는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야기’에(루카 9,51-56) 연결됩니다. 그 마을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들을 그 마을로 보내실 때, 그 마을에 정당한 숙식비를 내고 숙소와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지시하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돈이 적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에도 그렇게 태어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에서 예수님을 낳게 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이 없어서’, 즉 베들레헴 사람들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방을 내주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루카 2,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에 묻히신 무덤도 ‘남의 무덤’이었습니다. 아리마태아 요셉이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7,60) 그처럼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선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그런 처지를 말씀하신 것은, “나를 따르려면, 나를 믿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고, 나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만’ 따라야 합니다. 여건이나 처지나 상황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날 수도 있고, 편안하고 행복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이대로 영원히 이렇게 지내고 싶습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체험을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멈춰 서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너무 힘들다고 주저앉아 있는 것과 너무 좋다고 주저앉아 있는 것은 사실상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여기서 ‘다른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그를 부르신 일입니다. 그 제자가 한 말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금방 다시 오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는 변함이 없지만,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같은 일은 못하겠다는 뜻이고, 복음 선포 활동에 참여하는 일도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집으로 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현세의 인간적인 일 때문에 복음 선포를 하는 일꾼이 되기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인 ‘필리포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 예수님의 여행에 합류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여기서 ‘또 다른 사람’이 한 말은, 표현만 보면,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일을 ‘먼저’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는 말로 보이지만,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해석하면, ‘말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일에 매여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합당하지 않다.”는 “못 들어간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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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먼저“>
우리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활발하게 움직이며 생장과 소멸을 계속 하지요. 하루에도 3300억개나 되는 세포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또 사라집니다. 1초에 380만개나 되는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는 셈입니다. 또한 교체주기가 가장 느린 세포를 기준으로 하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포로 바뀌기까지 약 7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나와 7년 후의 나는 적어도 세포라는 구성성분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늘 새로 태어남’입니다. 더구나 변화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바란다면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적당히 몇 가지만 대충 바꾼다고 해서 새로 태어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면 죽는 시늉만 할 게 아니라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내려놓는 척만 하는게 아니라 완전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에 누리고 있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소유하고 간직한 만큼 미련이 되고 집착이 되어 계속해서 내 발목을 붙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의 모습이나 습관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내버려두고 방치하는 만큼 고집이 되고 생활이 되어 나를 그 자리에 눌러앉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내려놓는 용기와 단호하게 끊어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눈치를 보며 미적거릴게 아니라 즉시 실행에 옮겨야만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주님을 따르며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이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을 들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내뱉는 말은 “먼저”라는 조건입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먼저’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앞과 뒤에 오는 것들의 순서가 문제입니다. 즉 ‘주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따르겠다’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 예언자가 그러했듯, 먼저 자기 신변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걱정거리를 없애면 홀가분하고 완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각자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돌아봅시다. 누군가 내가 정말 좋아하고 고대하던 일을 하자고 권할 때, 한 번이라도 ‘이것 먼저 하고 나중에 천천히 하자’고 답한 적이 있던가요? 보통 우리가 당장 하기를 망설이며 나중으로 미루는 일들은 하기 싫거나 피하고 싶은 일 아니던가요? 그렇게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미루다가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될 적당한 핑계를 찾으면 ‘기회는 이 때다’하고 내팽겨치지 않던가요? 그리고 나중에가서야 ‘그 때 그냥 할걸’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지 않던가요? 그러니 ‘쇠뿔은 단김에 빼야’합니다. 이것저것 조건을 따져가며 미루고 망설이다가는 절대 주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기회, 참된 행복의 기회는 우연히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노력과 결단으로 붙잡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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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세 사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떠돌이다. 너도 무소유의 자유인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출가하여 혈연과 지연 따위의 인연을 끊었다. 너도 모든 인연의 끊을 끊고 무애인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서 현재에 충실 하는 사람이다. 너도 과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현재에 충실할 수 있겠느냐?”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자유를 누리는 길이자 부요하게 되는 길입니다. 혈연과 지연, 학연 따위 인연 묶여 편 가르고 이익을 추구하는 생활은 죽은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혈연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대자비를 실천하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과거는 오늘을 있게 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딛고 서야할 소중한 발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을 잡혀 미련과 회한에 빠지면 현재를 잃게 됩니다. 과거를 거울삼아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모든 것을 실리 위주로 따지고 처신하는 현대인들에게 전부를 요구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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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슬퍼하는 사람”의 행복을 알고 있습니다.(마태 5,3-12참조) 오늘 독서도 화답송도 복음마저도 짙은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마음의 슬픔이 너무나 커서 임금님 대전에서도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가 어려웠고 바빌론 강가에서 불렀던 이스라엘백성들의 노래는 차라리 피맺힌 절규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주님의 고백은 또 얼마나 아프고 시린지요?
그럼에도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되고 성문들이 불에 타 버린 사실이 너무 슬펐던 느헤미야는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을 이루어 참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바빌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 갖은 수모를 겪으며 지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느님을 향한 “시온의 노래”를 잊지 않고 찬미했기에 마침내 귀향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지녔던 속 깊은 슬픔은 세상을 향한 연민이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었기에 그분의 행복이었음을 감히 짐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마음속에 생각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십니다. 때문에 “먼저”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꾸미는 일이 그릇되고 자신이 계획에 의해서 ‘믿음’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번 일만 해결되면 성당에 열심히 나가겠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마무리 지은 후에는 정말 기쁘게 봉사하겠다고 미루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고 따끔히 일러 주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깔끔하게 자기 삶을 정리한 후에 말끔히 새 단장된 마음으로 새롭고 단정하게 주님을 따를 계획이야말로 하느님을 뒤로 미루는 일임을 말씀하신 것이라 짚어 봅니다.
하느님 나라를 미루는 일은 “그러나 먼저” 아직 닥치지 않은 내일을 예비하기 위해 골몰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택하고 주님의 일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내버려 두고”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는 명령이라 새깁니다.
오늘 우리들이 느헤미야처럼 그분의 일 때문에 고통스럽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분의 뜻을 생각하여 피맺힌 절규를 올리는 아픈 날이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마음이 너무 슬픈 우리이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 하루가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꽉 채워져서 그분의 슬픔을 체험하는 참으로 행복한 날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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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서원 하고 수품을 받는 것은 하느님께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항구하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에게서 얻지 못하는 것을 다른 무엇에서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행을 맛보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것과 천상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데 차마 한 가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매달리다 둘 다를 잃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할 것도 없고, 그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더더욱 되씹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일에 묶이면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오늘 순간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최선으로 다하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음에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수품 때의 마음으로 기쁨이 넘쳐나야 하지만 그 마음은 꼭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가시밭길을 걷기 원하지 않았고 세상 것을 더 많이 즐기고, 세상 것을, 더 달콤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거기에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천상 것을 더 찾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저에게 그래도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두 마음 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저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는 제 마음을 당신이 아오니 부족함을 꾸짖어 주시고 당신께 대한 한결같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강복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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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는 운전해서 낯선 지방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도를 보고서 경로를 미리 확인해야 했습니다. 만약 조수석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수시로 지도를 보면서 길을 확인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종이 지도를 보지 않습니다. 보험회사에서도 이제 보험 가입할 때 지도를 선물로 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적의 정보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창기에는 검색 속도가 느려서 그냥 종이 지도 보는 것이 더 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당연히 빠르게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이 편합니다. 심지어 대중교통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경로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아마 그만큼 내비게이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때, 불안해하지도 또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비게이션을 신뢰하는 정도는 될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그 길은 아니라며 자기 편해 보이는 반대편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마음 가는 대로만 살겠다면서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하느님 나라가 아닌 엉뚱한 곳에 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첫 자리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가장 정확하게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면서 함께하도록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달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충분히 허락할 수 있는 이유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작별 인사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걸린다고 이 정도도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결단을 가져야 할 정도로 중요하고 긴박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긴박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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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을 따라서>
루카 9,57-62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을 따라서>
주님
따르러
오롯한
마음으로
내딛는
나의 한걸음
그 앞에는
오직
앞서 가시는
주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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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볼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 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미 인준 회칙 23장)
저는 오늘 이 두 말씀으로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야말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잘 알고 찬미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선이라는 것은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선이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지 무슨 하느님이냐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관념이 있고, 이런 관념 차원에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또는 어떻게 좋으신지 이해하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하고 좋으신 하느님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이 말은 관념적인 선은 하느님이 계시지만 부산에 계시고 지금 내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고 아무리 좋으신 하느님이어도 내가 좋아해야지 내게 좋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좋은 분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고, 스마트폰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지요.
사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은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타입은 변화합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타입이 커서까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느님을 나도 좋아하려면 내 좋아하는 타입이 바뀌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맛의 변화 곧 달콤했던 것은 입에 쓰게 되고 쓴 것은 달콤해지는 맛의 변화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이런 입맛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것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것이 맛있어지는 맛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맛있어지는 것은 맛 들이기 나름이고, 맛 들이는 것 특히 싫어하는 것을 맛 들이는 것은 반복의 문제라고.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던 고수를 계속 먹게 되면 차츰 맛 들이게 되지요. 그러므로 다시 여기서 관건은 쓴 것을 맛 들여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인데 쓴 것을 맛 들이기로 마음먹는 이 단계에서는 보통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싫어하는 맛을 들이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을 들이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건 맛이건 싫어하는 것을 들이는 것 곧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것은 싫고,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 허용하기 마련인데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만나고 끌어안게 하시듯 말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은 단지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이 아니라 그 싫고 두려운 나병환자를 포옹하게 하신 하느님과 포옹한 것이고, 그 하느님을 좋으신 하느님으로 포용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래서 쓰고 쓴 것들이 달고 달콤해진 뒤에는 하느님도 달고 달콤해졌고, 맛보고 맛볼수록 하느님이 더 달고 달콤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그래서 좋으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말자고 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감미로우신 분, 사랑할 만한 분, 좋아할 만한 분, 온전히 모든 것에 앞서 세세 영원히 바랄 만한 분”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영광을 드리고, 드높이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라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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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랑으로 가는 길>
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름과 관련한 세 가지 경우에 대한 얘기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스스로 따르겠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 장사를 치루고 따르겠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장사는 죽은 이가 치루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사람도 스스로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가족에게 인사하고 따르겠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세 사람 중에 누가 예수님을 결국 따르게 되었는지 오늘 복음에서는 그 결과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는 진지하게 이에 대해 자문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수도원에 들어온 것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반대로 주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르지 않겠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분명 따르겠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지금 바로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길, 가시밭길이어도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 죽음까지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성찰을 하니 하루를 시작하는 이 새벽 참으로 슬픕니다. 40년 가까이 수도생활 한 것이 헛짓을 하고 허송세월 한 것 같아 슬픕니다. 주님은 저 앞에 가시어 가물가물한데 저만 혼자 한참 뒤처져 갈 길 아득하니 외롭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을 따름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방자하지 않고 겸손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소풍이 아니라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므로 들떠서 가지 않고 인내와 열정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말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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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9,57)
<겸손한 순종!>
오늘 복음(루카 9,57-62)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와 셋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고, 둘째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자녀가 되려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걱정을 버리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성당에 나와 미사 드리는 것도 어렵지만,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 따름의 결과가 이제와 영원한 부활이기에 우리는 인내로써 따름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늘은 회개한 이후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시고,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시며, 평화의 사도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큰 축일을 맞이한 프란치스칸 가족들과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평화의 마을인 이태리 아씨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그런 그에게 몇 번에 걸친 실패 체험 후, 그는 나병 환자와 결정적 만남(1205년 말)을 계기로 '완전한 회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느냐? 아씨시로 돌아가라. 거기서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1205년 봄, 스뽈레토 계곡에서의 환시)
"프란치스코야,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다오."(1206년, 성다미아노 성당에서 들었던 십자가 음성)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1208년, 포르치운쿨라성당 미사 때 들은 복음)
이후 프란치스코는 '완전한 회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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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UpjS5jmw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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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하느님의 가난을
따랐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삶입니다.
청빈한 삶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가장 좋은 형제가
되었습니다.
가난의 선택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선택이며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가난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공동체가 파괴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요원한
것입니다.
물질문명의
삭막함을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이
위로하며
채워줍니다.
따스한 피가
흐르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서게 합니다.
가난의
핵심가치는
평화입니다.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은
소중합니다.
청빈은 그래서
비우는 것이며
비우기에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청빈이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비워내는
가난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올바른 관계의
실천이
가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가난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붙잡지 않는
그래서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도 평화도
가난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가난함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난의 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분명 가난입니다.
가난하기에
숨길 것이 없고
묶여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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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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