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평안도에서 서울로 유학와 홀로 서울에 남게 되신 아버지는 해방후 한남동에 시유지를 불하받아
우리형제들은 모두 한남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내가 4.5세 무렵 청파동으로 이사가서 64년 효창국민학교에 입학했고
65년 봄 다시 한남동으로 이사와 한남국교 2학년에 전학왔고 66년 5월경 다시 청파동으로 이사갔으니
내기억속에 한남동은 65년과 66년 초밖에 없다.
우리집은 ㄷ자 한옥인데 소설 마당깊은 집처럼 많은 집들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신작로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거의 벌판에 가까왔고 집아래에는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남국교 마당뒤는 해병대부대가 있었고 학교앞에는 너른 논도 있었다. 나는 쉬는시간 친구들과 해병대 울타리에서
아카시아 꽃을 따먹었고 방과후에는 개구리 잡으러 다녔고 공군부대 울타리 너머 잠자리를 잡기도 했다.
65년 봄 언젠가 형들과 남산약수터에 갔다가 어떤 아저씨가 우리를 쫓아와서 부리나케 도망온적도 있었다.
그땐 문둥이가 어린아이들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남산에는 자유센터라는 해골탑처럼 생긴 높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무렵 김성수라는 사람이 자유센터 경비병을
쏴죽이고 군경에 사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동네애들은 그때 "1절은 도끼를 마음대로 후두르는 사나이 그이름은 고재봉
성난 고재봉, 2절엔 카빈을 마음대로 쏘아대는 사나이 그이름은 김성수 성난 김성수" 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우리집위에는 찔레꽃 울타리가 있고 마당엔 하얀 진도개가 있던 집이 있었는데 그집 딸은 은희였고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은희네에서 기르던 진도개를 이태원에 팔았는데 약 1달후 그개가 피를 흘리고 은희네 집에 찾아와 그다음날
죽었다고 어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지금도 은희라는 이름을 들으면 새침했던 예쁜 여자아이가 생각난다
우리 집에서 산쪽으로 같은 반애네 집에 놀러갔는데 거기서 한강이 보였고 난 그동네 만화가게를 자주 갔었다.
그리고 학교에선 선생님이 맹호부대 노래를 알려줘서 나는 지금까지 그노래를 기억한다.
담임선생님은 20대 중후반 여자였는데 숙제를 안한 애들을 불러서 팬티를 내리고 손을 들게 하곤 했는데
나도 어떤 여자애와 같이 불려나와 팬티를 내리고 벌을 선적이 있었는데 무지 챙피했었다.
우리집앞엔 아이노꼬라고 불리는 미국 남자 형제애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애들은 같은 나이지만 우리보다 훨씬 컸었고
가끔 우리랑 놀때는 캄온이라는 소리를 자주 했었다.
집앞에는 큰 우물이 있었고 우리집에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먹었었다.
그런데 엣날에 어떤애가 물을 긷다 우물에 빠져 죽었다며 애들은 그근처에 못오게 했었다.
문간방엔 장소령이라는 분 가족이 살았는데 아침마다 짚차로 군인이 태우러 왔었고 어떤날엔 밀가루 포대를 방으로
내리고 갔다. 어느날은 손에 칼쿠리를 단 상이군인 아저씨가 우리집 대문을 차고 마당에 들어와 너희들만 잘사냐
우리들도 먹고 살아야 될거 아니냐라고 소리지르며 마당에 눕기도 했었다.
큰길가에 높은 계단위엔 태평극장이라는 극장이 있었고 학교가 끝나면 나는 그계단에서 놀곤 했었다.
우리집 인근에 살던 막내이모와 쌍무지개드는 언덕, 사르빈강에 노을이 지다 등 몇편의 영화를 본적이 있고 사르빈강에
노을이 지다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 곳을 떠나온지 55년동안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태어났고 어린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
엊그제 김영철의 동네한바퀴에서 한남동을 하길래 내가살던 집이 어디쯤 되나
인터넷에 조회해보니 아직도 그자리가 남아 있고 어느 시인은 내가 태어난 주소인 한남동 산15번지라는 시를 발표했다.
호적등본을 띄면 본적지 한남동 산15번지가 화인처럼 따라다니는 한남동 이봄날이 가기전에 꼭 가보고 싶다
한남동 산15번지
ㅡ양진기
꼭대기의 교회 첨탑이 하늘의 말씀을 수신한다
북적대던 도깨비시장은 인적이 끊겼다
버려진 좌판은 먼지가 더께를 이루고
파라솔에 덧댄 비닐들이 펄럭인다
계단 아래 골목 그 아래 계단
쪼그려 앉아 별높 별낮*
둥근 딱지를 뒤집으며 세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방구를 외치며 술래를 피해 달음질치던
꼬마들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계간 ‘애지’ 여름호에서
첫댓글 86년부터 3년간 한남동에서 살았습니다
제목 보니 반갑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66년 이후 한남대교만 가봤지 살던동네는 못가봤습니다^^
한남동의, 추억에 빠져 읽는 내내 저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동감적인 부분이 많아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구초심이라 이제 60대중반이 되니 어릴때 살던 동네가 그립습니다^^
저도 한남동 태평극장 주위에 살았는데
창밖을 보면 남산타워가 보이도 대교 위 차들이 졸라니 있는 모습이 보며 야경을 즐겼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태평극장 한남동의 상징이었는데 없어져서 안타깝습니다.
저 같은 촌 사람도 빠저들게 하네요
누구에게나 유년은 다락방
제가 어릴때는 원효로 개천에서 붕어, 미꾸라지 잡고 한강에서 멱감기했었죠^^ 유년의 기억은 나이들수록 잊혀지지 않는것 같습니다.
@기정수 저도 모래내 가서
미꾸라지 송사리 잡았습니다
동네 형들 졸졸 따라 다녔지요
님의 어린시절 기억을 따라
저도 추억여행 잘 했습니다.
나이들어서는 추억을 먹고산다고
추억이 많으시니 행복하시지요~ㅎ
저도 그 시절 그 때가 그립습니다
음악선곡도 너무 좋으네요.
감사합니다. 한남동은 제가 태어난 곳이고 어린 시절 추억이 선명하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지요
아마 제가 살던 동네를 찾지도 못할수 있겠지만 그래도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기억력이 참 대단하십니다
한남동이 그랬었군요
이북이 고향인 분들은 본적이 가호적이지요
저도 가호적입니다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203번지 18호
저도 북아현동 굴레방다리에서의 추억이 많습니다
저는 아현극장과 신영극장엘 다녔습니다
나중에 대흥극장이 생겼지요
추억에 잠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시절은 지금도 뚜렷이 기억되는대 최근의 일은 기억을 잘 못합니다. 한남동 산15번지는 제가 조만간에 꼭 한번 찾아가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의 원적은 평안남도 성천군 능중면 창의리 인데 지금은 호적등본제도가 없어 나머지 주소를 어떻게 찾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이 아시면 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정수 혹시 종친회가 있으면
족보에 올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희 족보는 그렇습니다
수안이씨 평산파
저희 원적은
황해도 평산군 고지면 완정리 563번지 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행정구역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황해남도 봉천군 봉암리입니다
번지수는 모르겠습니다
면 단위가 아예 사라졌습니다
군 아래가 바로 리이고
리의 규모가 커졌습니다
리 단위로 협동농장이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구요
구글어스로 위치검색도 가능합니다
단 예전 번짓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에 창의리가 남아 있다면
예전 번짓수가 의미있을 수도 있지만
주변의 다른 리로 핲쳐졌다면
무의미하겠지요
남아 있다면
평안남도 성천군 창의리 ~~번지
그럴겁니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정수 현재 성천군은 1읍(성천읍)과
4구 (신성천로동자구,장림로동자구, 은곡로동자구, 군자로동자구),
그리고 22리
(남원리,룡흥리, 암포리, 향품리, 상하리,
온정리, 대봉리, 룡산리, 덕암리, 백원리,
문목리, 삼덕리, 기창리, 금평리, 신풍리,
장삼리, 삭창리, 거흥리, 회천리, 계석리, 운봉리)가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B2%9C%EA%B5%B0
아쉽게도 창의리가 없네요 ㅜㅜ
아마 옆의 다른 리로 편입됐을겁니다
북한지역 행정구역 검색하시면
과거 창의리가 어디로 들어갔는지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청솔네 감사합니다. 네이버블로그 이북5도민 작가에 문의하여 1952년에 평안남도 성천군의 일부 지역과 황해남도 곡산군의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회창군을 새로 설립하면서 능중면은 회창군에 넘어간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의리 몇번지인줄 몰라 제적등본을 떼보니 아버지의 본적도 한남동 산15번지이고 원적지 정확한 주소를 찾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원적지 주소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겠습니다
@기정수 1952년은 첫번째 옛날이구요
80년대인가? 두번째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습니다
제 아버님 고향도
1952년 황해남도 평천군으로 됐다가
이후 다시 봉천군으로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