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종말과 냉전의 종식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승리인가?
민주주의의 필연적 승리나 진보가 아니라 역사의 좁은 고비와 예상하지 못한 뒤틀림에 관한 이야기!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우며, 우리는 어떤 미래, 어떤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고민해야 한다.
역사가의 임무는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 새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오래된 것이며, 전통으로 숭배하던 것들이 최근 발명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20세기 유럽 역사에 대한 전통적(유럽 중심주의적) 해석과의 단절: 20세기 유럽 역사는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파시즘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급속하게 잊혀졌다. 볼로냐의 시의회는 말을 탄 형상의 무솔리니 동상을 녹여서 두 명의 파르티잔 동상으로 바꾸었고, 프랑스는 비시 정권에 일치단결해서 저항했던 기억을 칭송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뻔뻔스럽게도 히틀러의 첫 희생자라는 점을 부각시켰고 나아가서는 ‘오스트리아의 자유를 위한 반나치 투쟁’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유럽을 실제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고, 그 대신 신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불편한 기억들은 삭제해 버리고, 자유가 필연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유럽’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가? 부유함, 안정, 평화, 개인적 자유, 사회적 연대, 풍부한 문화적?물질적 자원과 전통,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데 있어 종교·언어·정치적 차이가 문제되지 않는 곳. 국가의 사회적 책임성과 시민의 자유가 공존하는 곳이 아닐까?.
그러나 어제의 유럽은 20세기의 킬링필드였다. 1912~1949년까지 유럽은 전쟁, 빈곤의 현장이었으며, 대륙 인구 전체를 절멸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인종·정치적·민족적·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수십억의 유럽인들이 사망하거나 불구자가 되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삶의 뿌리를 뽑혀 추방되었다. 19세기 진보에 대한 낙관적 전망, 도덕적 믿음 따위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같은 곳에서 이렇게 전혀 다른 사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유럽의 20세기 역사가 민주주의, 진보, 자유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는 기존의 전통적 해석과 단절하고 있다. 전통적 해석은 파시즘과 같은 권위주의 체제들은 자유민주주의로의 긴 도정에서 잠깐의 일탈이나 에피소드라고 본다. 그러나 마조워는 오히려 유럽의 20세기 전반부는 폭력과 뿌리 깊은 증오와 잔혹함에 의해 압도되었으며, 따라서 암흑의 대륙은 아프리카나 제3세계가 아니라 바로 유럽이었다는 것이다.
마사리크가 말했듯이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과도 같았다. 극단주의, 불관용, 인종주의, 제국적 야심과 민족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파시즘과 공산주의. 러시아의 예술가 엘 리시츠키(El Lissitzky)는 세계대전 덕분에 우리는 인류의 모든 가치를 시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공산주의·파시즘은 각각 자신만이 인류를 위한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사회와 유럽, 나아가 세계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 유럽을 자기 방식대로 조형하려는 이들 세 이데올로기 간의 끊임없는 투쟁이 20세기 내내 일어났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파시즘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급속하게 잊혀졌다. 볼로냐의 시의회는 말을 탄 형상의 무솔리니 동상을 녹여서 두 명의 파르티잔 동상으로 바꾸었고, 프랑스는 비시 정권에 일치단결해서 저항했던 기억을 칭송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뻔뻔스럽게도 히틀러의 첫 희생자라는 점을 부각시켰고 나아가서는 ‘오스트리아의 자유를 위한 반나치 투쟁’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유럽을 실제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고, 그 대신 신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불편한 기억들은 삭제해 버리고, 자유가 필연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승리였는가?
마조워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유럽 민주주의의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으며, 기본적으로 파시즘의 붕괴는 민주주의의 반격이 강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치닫게 만든 파시즘 내부의 한계, 소련과의 전쟁에서의 결정적 패배, 그리고 미국이 개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승리일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의 승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크 마조워는 다양한 이념적 각축과 유럽의 미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들 간의 경쟁 끝에 유럽이 도달한 민주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논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유럽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목적지이자, 역사의 간지가 아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이며, 어떤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인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암흑에 대륙 20세기 유럽 현대사’는 바로 여전히 민주주의를 벼리고 확장해야 할 오늘 우리에게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한다.
“사람들은 역사를 승리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대체로 현재를 통해 과거를 해석한다. 예를 들어, 냉전이 이런 식으로 종식되었으므로 자유민주주의가 유럽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여러 투쟁과 불확실성 가운데서 비롯된 하나의 결과일 뿐이라는 새로운 역사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 역사 해석이 정치적으로는 덜 유용할지 몰라도 진실에는 더 가깝다. …… 1989년 사건을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산주의가 전체주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가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해 승리할 수밖에 없고, 역사적으로 미리 예정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는 유럽이 어떤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지, 또는 건설하고자 하는지 더 두고 봐야 하는 이치와 같다. 이 책의 핵심은 간단히 말해서, 필연적 승리나 진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좁은 고비와 예상하지 못한 뒤틀림에 관한 이야기다”(12쪽).
나치즘은 유럽 역사에서 일탈인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나치즘이었던 이유
무기력한 부르주아의 ‘수척한 눈동자’와 젊은 파시스트의 활력 베르트랑 드 주브넬은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다고 말했다. 앙리 드 몽테를랑은 무기력한 부르주아의 ‘수척한 눈동자’와, 파시스트 “신체 혁명의 수혜자”로서 잘 훈련 받은 젊은 권위주의자의 활력을 대조하고 있다. 루마니아의 젊은 지성들인 에밀 시오랑이나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민주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한 히틀러의 공격을 찬양했으며, 히틀러가 가진 메시아적이고 영적이기까지 한 전체주의의 에너지에 찬사를 보냈다. 자유주의가 이기적인 개인들을 미화하는 데 반해서, 전체주의는 자기희생과 복종,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을 제시했다(45).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간기 동안 유럽은 민족국가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를 공고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을 압도했던 대안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였다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파시즘 운동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강력했고 나아가 유럽 전반에 걸쳐 가장 대중적인 발전 모델로 추종되었음을 실증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헌법적 권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반면, 사회적 책임에는 무관심했던 당시의 민주주의는 20세기보다는 오히려 19세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까지 대다수 유럽인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근대성의 도전에 대해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이다. 유럽은 그들의 전통과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권위주의라는 정치 질서를 발견했고, 이를 사회 산업 기술을 통제하는 아주 효율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1945년 직후, 사람들은 국가사회주의에 대해서, 악마에 사로잡힌 광기 어린 한 독재자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었던 정치적 병리 현상쯤으로 생각했다. ……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국가사회주의는 독일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역사와도 매우 잘 어울리는 이념이었다. 인종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복지 체제의 건설은 유럽인이 가진 일반적인 사고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했던 경제(독일)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권력을 쟁취한 결과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징인 베르사유 체제를 힘으로 붕괴시킨 것은 소련이 아니라 [나치] 체제였다. 독일의 제3제국이 20세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마조워는 전간기 진정으로 급진적인(radical) 위협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로부터 왔다고 본다. 그것은 당시 주요 사회적?정치적 사고 및 실천과 쉽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나치 국가의 개입주의적이고 우생학적이며 인종주의적인 접근은 많은 사람들에게 논의되었으며, 특히 우생학은 사회민주주의자들, 자유주의적 개혁가들로부터 보수주의자들, 극우 권위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 유럽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 예컨대, ‘열등한’ 사람들에게 불임수술을 받도록 장려하고 강요하는 법은 독일에서 시행되기 전에 이미, 캘리포니아, 스웨덴, 스위스 등지에서 먼저 제정되었다.
또한 일상성과 숙명론에 점차 함몰되고 있었던 서유럽 지식인들에게, 의지와 행동을 강조하는 파시즘은 자유주의나 개혁적 사회주의보다 훨씬 ‘현대적’이고 역동적인 경제 체제로 보였다. 영국 노동당 하원 의원인 오스월드 모슬리도 비슷한 심정에서 노동당을 떠나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결성했다.
민족주의의 승리와 소수민족의 비극적 운명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옛 제국들이 붕괴한 것은 민주주의의 승리만이 아니라 동시에 민족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국경선 안에 존재하는 타민족들이 종속적 지위로 떨어짐을 의미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당시 6천만 명이 국가를 얻었지만 2천5백만 명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적어도 종족 간 관계에서는 상당히 배타적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유럽이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유럽 전체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으며, 유대인에 대한 학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소수민족을 해결하는 방법은 현지 민족국가에 동화시키는 것, 독일인들이나 헝가리, 그리스와 터키처럼 인구를 교환하는 것, 그리고 추방, 감금, 대량 학살이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소수민족을 같은 시민으로 인정하기를 꺼려했으며, 대규모 인구 교환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그리스와 터키의 경우 그리스인 120만 명과 터키인 50만 명을 교환했다). 1915년 터키는 80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으며, 루마니아는 1924년 국내 거주 유대인 10만 명을 무국적자로 만들었고, 폴란드는 이들을 감금했다. 바이마르 독일과 프랑스 제3공화정도 유대인들을 집단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5백~6백만 명의 유대인들, 20~50만 명이 집시·세르비아인·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 등이 죽음을 당했다. 이 같은 대학살과 추방, 인구 공학을 거치면서 그 전에 대규모로 존재했던 동유럽의 소수민족들은 대폭 감소했으며, 유대인이나 독일인, 우크라이나 소수민족들은 거의 사라졌다.
전후 유럽이 누린 경제 발전과 안정된 민주주의와 긴 평화, 복지국가, 국가 간 협력 등은 유럽 주변부와 유럽 밖의 희생과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유럽은 그 혜택을 이들과 공유하는 데 인색했고, 냉전이 해체된 이후 미국에 의존하고 정치로부터 한발 물러남으로써 유럽 자신의 문제(유고 내전을 비롯한 동유럽의 비극)를 방관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유럽은 동유럽의 평화 질서를 구축하는 데 기꺼이 비용을 감수해야 하며, 유럽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저임금을 제공했던 국내 이주민들을 적극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유럽의 정치경제적 진보는 언제든 퇴락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위협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 요약
마크 마조워는 1958년 런던 북서쪽의 골더스 그린(Golder’s Green)에서 태어났다. 북부 런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어머니는 물리치료사, 아버지는 유니레버를 다녔다. 마조워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호른을 연주하거나 끝이 없는 클래식 곡을 작곡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적당한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가능하면 학교를 오래 다니고 싶었기 때문에 수업도 3년 과정이 아니라 4년 과정을 선택했으며, 졸업반이 되어서는 연구비를 지원해 줄 곳을 찾아 이탈리아 볼로냐에 있는 존스 홉킨스 국제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마크 마조워는 옥스퍼드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 현대 그리스 역사를 전공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다시 말해 현대 그리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일자리도 없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국에는 일자리가 없었지만 다행히 프린스턴 대학에 자리가 났고, 이곳에서 그는 역사학자로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1929년 그리스 경제라는 그의 전공에 흥미를 갖는 학생이 없었다는 점이다. 마조워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 주제를 찾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찾은 것이 나치였다.
한편 그는 쿠르드 발트하임(Waldheim) 전쟁에 대한 TV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는데, 이를 위해 그리스에서 18개월을 머물며 조사를 진행했다. 이때 그는 점령군으로서 독일 나치의 병사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이들 대부분에게 그것은 다른 나라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었을 것이며, 신문과 사진 기록들을 보면 일종의 관광처럼 보였다던 것이다. 이는 마조워의 첫 번째 책인 ??히틀러의 그리스??의 주제가 되었다.
이후 그는 서식스 국제관계학과에 자리를 잡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유고슬라비아가 내전으로 붕괴했다. 마조워는 당시 모든 사람이 그에게, 발칸 전문가이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말해 달라고 물어 왔다고 회상했다. 몇 년 후 프린스턴 대학 방문 교수로, 그리고 버크백 칼리지를 거쳐 지금은 컬럼비아 대학 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버드 대학에서 근무하는 부인 때문에 요즘은 뉴욕과 보스턴을 오가는 기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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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이 사람 주장에 별로 동의하긴 힘들군요. 파시즘이 유럽의 본 모습이라니... 어느 국가나 자본의 지배를 받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파시즘적인 성격이 생기는 것이지 본래 특정 지역만이 가진 "본 모습"은 아닌 거 아닌지... 대충 보고 지나가는 거라 오해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글 제목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은 그렇군요^^;;;
2차대전 이전, 북서유럽을 제외한 유럽 상당부분은 권위주의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고, 그 북서유럽에서마저도 파시즘이 그렇게 인기없는 것이 아니었으니...
인정하기가 힘든 글이라능.
나치가 영국을 항복시켰더라면 저 사람의 생각이 현실로 드러났겠죠. 정말 한 끗발 차이로 유럽의 온건한 민주주의가 살아남았다는 ㄷㄷ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가는 글이네요.. 독일의 경우엔 한 사기꾼이 군복을 입고서 은행의 돈을 가져간 사건이 있었고(은행 직원은 군복만 보고서 군말없이 돈을 줬다더군요..), 프랑스의 경우에도 드레퓌스 사건 등에서 그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드러났으니깐요.. 개인적으로는 1차대전과 2차대전이 있었기에 현재의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좀 극단적인 논리이기는 하지만 사실 유럽의 '문명적'임은 과대평가되는 부분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됩니다. 저기서 하는 말중에 틀린 말이 없잖아요...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링크된 카페도 엄청난 곳이군요.
꼭 읽어봐야겠네요 제가 보기엔 거의 맞는 얘기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