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김중묵 종사는 원기 83년 5월 4일, 79세를 일기로 거연히 열반에 드셨다.
서기 1920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서, 21세시에 원불교의 성직자를 지원하고 56년간 많은 중생을 제도하시는 일에 평생을 바치신 분이다.
이 분은 특히, 생사대사를 깊이 연마하여, {인과의 세계}라는 명저를 남기셨는데 지금까지 우리들이 공부한 죽음의 문제에 대한 전문가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으셨다. 그리고 평생 높은 지위를 애써 사양하시고 재물에 초연하였으며 부귀공명을 뜬 구름처럼 여기고, 오직 야학과 같이 오직 노송과 같이, 또는 유조와 같이 고고하고 표표하며 그윽하게, 그러면서도 동자와 같은 천진스런 모습으로 일생을 거침없이 살으셨다.
양산종사는 평소에 "노모님 가시면 나는 갈 것이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런데 98세 되신 노모님이 가시고 종재를 지낸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양산종사는 바로 열반에 드실 준비를 시작하셨다.
우선 당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수용품, 인연, 통장 등을 정리하셨다.
먼저, 당신이 존경하는 원불교의 최고 지도자이신 대산 상사님과
좌산 종법사님께 정성껏 시봉금을 올리셨다.
그리고, 그 동안 푼푼이 모아 두셨던 자금을 원음방송 설립자금에 보테셨으며
원불교 경전을 CD에 수록하는 사업에 자그마치 1억원의 거금을 쾌척하셨다.
그런뒤 원로원 어른들께도 시봉금을 챙기고서
공익부에 연락하여 평소 먹던 약도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 다음 가족들을 불러모아 유언을 끝내시고
평소 관심을 두었던 많은 후진들에게 자신이 간직했던 물품들을
이별의 징표로 골고루 돌리셨다.
마지막으로 양산종사님께서는 당신의 육성으로
녹음해 놓으신 원불교 정전을 100번을 듣고 가시겠다며 정진하시다가,
76번째 이르러 5월 4일 새벽 4시 30분에 잠자듯이
자유로이 영을 날려 열반상을 나투셨다.
양산종사는 당시 종법사님을 뵈옵고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고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무 걸림이 없으니 해탈은 된 것 같은데
자유는 될 지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대로 영을 날릴 수 있을 지 그건 조금 의문스럽습니다."고
했다고 하신다.
당시 3일까지는 각 교당 행사를 치르고,
5월 5일 어린이날 민속큰잔치가 원광대에서 끝나면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된다.
그런데 4일 날 열반에 드시니 6일날은 발인식 교무교도들이 많이 모였는데
문상 온 모든 대중들의 얼굴은 축제분위기였다.
장하다. 훌륭하다. 부럼다.
우리도 그렇게 되도록 공부해야지.
그러면서도 그런 큰 도인 몰라 뵈었구나.
언제 다시 뵐까 하여 섭섭해 하는 분위기였다.
열반 후 성적을 사정해보니
공부성적 정식 출가위,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정특등으로
교회전체장에 해당하여 국내외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상주가 되어
추도식을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