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28> 함양박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2-04-03 17:45:31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日 천황 암살미수 박열·의병장 박기대… 독립투사 다수 배출
박혁거세 29세손 경명왕의 8대군 시조… 고려 예부상서 박선이 중시조
조선 개국공신부터 중기엔 한 가문 8형제가 동시대 관직 올라 위세 떨쳐
무정부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열과 그의 아내이자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 박열을 사랑해 조선독립운동에 뛰어든 후미코는 그와 함께 무정부주의 운동과 조선독립운동을 하다가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후미코 혼자 옥사하고 말았다. 국경을 뛰어넘는 둘의 사랑은 수많은 화제를 낳았고, 뮤지컬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필자는 박씨와 관련하여 “밀양(密陽)을 본관으로 하는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의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전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 반남(潘南)·죽산(竹山)·함양(咸陽)·순천(順天)·고령(高靈)·무안(務安)·충주(忠州)박씨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어 이를 ‘8박’이라고 부른다(25회 박씨의 유래)”고 했다. 그리고 26회와 27회에서 밀양박씨와 반남박씨에 대해 거론하였다. 이번 28회와 29회에 걸쳐 밀양박씨와 반남박씨를 제외한 함양박씨 등 8박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함양박씨는
함양박씨(咸陽朴氏)는 경명왕의 아들이었던 8대군파 중에서 속함대군의 후손이다. 중시조는 고려의 예부상서 박선(朴善)이다. 이에 대해 함양박씨 종중에서는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이 8대군을 분봉할 때, 셋째아들 박언신(朴彦信)을 속함(함양의 옛이름)대군으로 봉함으로써” 본관을 얻었으나, “문헌이 유실되어 선계를 밝힐 수 없어 고려조 예부상서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진 박선을 시조로 모셨다”고 밝히고 있다.
함양박씨는 중시조 박선이 가문을 연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그중 김경손과 함께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하여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박신유(朴臣?)가 유명하다. 그리고 박신유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후손이 6개 지파로 갈라졌다.
즉,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을 지낸 박지문(朴之文)의 후손이 군기소감공파를, 위위윤(尉衛尹)을 지낸 박지빈(朴之彬)의 후손이 문원공파를, 1∼2차에 걸쳐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의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휘하에서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로 출전하여 일본 대마도와 규슈지방을 공략한 박지량(朴之亮) 후손이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박지수(朴之秀)의 후손이 부사공파를,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박지온(朴之溫)의 후손이 감찰어사공파를, 금오위중랑장(金吾衛中郞將)을 역임한 박지영(朴之穎)의 후손이 중랑장공파를 이루고 있다. 그중 문원공파와 부사공파에서 가장 많은 후손과 인물을 배출하였다.
함양박씨에서는 고려조에서 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고 조선조에서 문과 73명, 무과 59명을 배출했으며, 청백리 1명에 공신 3명이 나왔다. 현재 함양박씨의 인구(2000년 통계청이 발표)는 전국에 3만8788가구 총 12만3688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함양박씨의 연혁과 인물
함양박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중시조 박선을 비롯하여 응천군 박신유뿐 아니라 박충좌(朴忠佐)·박초(朴礎)·박습(朴習)·박대립(朴大立)·박세영(朴世榮)·박세무(朴世茂)·박세옹(朴世?)·박민헌(朴民獻)·박헌(朴軒) 등이 있다.
박충좌는 충숙왕 14년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안렴사(全羅按廉使), 경상도 관찰사, 개성부윤을 지내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중국 당태종과 신하의 문답이나 군신사적을 분류 편찬하여 위정자의 참고로 했던 책)를 시강(侍講)했고, 역학(易學)의 대가(大家)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5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인 박소(朴?)는 전의록사(典儀錄事)를, 둘째 박정(朴珽)은 경상도관찰사와 찬성사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며, 셋째 박경(朴瓊)은 판서를 지냈다. 넷째 박번(朴?)은 지평(持平)을 지냈고, 다섯째 박전(朴琠)은 밀직사(密直司)와 지신사(知申事)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박경의 아들 박거실(朴居實)은 판서 우윤(右尹)을 지냈고, 박거실의 아들 박희문(朴希文)은 창왕 때 문과공정(工正) 군사(郡事)를 지냈다. 또 박전의 아들 박문재(朴文?)는 지밀직부사(知密直府事)를 지냈고, 그의 아들 박원택(朴元擇)은 개성부윤(開城府尹)을, 박원택의 아들 박규(朴規)는 세종 때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지냈고, 둘째 박구(朴矩)는 예조참의(禮曹參議)와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와 우군총제(右軍摠制)를 역임했다.
문양공 박리의 아들 박길중(朴吉中)은 호부시랑(戶部侍郞)이고, 그의 아들 박부(朴敷)는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둘째아들 박헌(朴軒)은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고, 군위군(軍威君)에 봉해졌다. 그 후 박헌의 후손들은 군위박씨로 분적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셋째아들 박초(朴礎)는 고려 말에 부패한 불교를 척결하자는 척불소를 올렸으며, 병조참의를 거쳐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를 역임하였다.
병부상서 박계원의 손자인 박언(朴彦)은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박성건(朴成乾)은 현감을 지냈고, 박성건의 첫째아들 박권(朴權)은 정언(正言)을 역임했으며, 아우 박조(朴槽)는 광주판관(光州判官)과 수사(水使)를 지냈다.
박지량의 5대손인 정헌공(定憲公) 박성양(朴成陽)은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조참판과 도총부부총관을 지냈다. 그의 아들 박중무(朴沖武)는 강계도호부 판관을 지냈다.
부사공 박지수의 아들 박우는 공민왕 때 판삼사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박양계(朴良桂)는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지냈다. 또 둘째아들 박인계(朴仁桂)는 우왕 때 도원수(都元帥)로 왜구를 무찌르다 전사,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박양계의 아들 박안(朴安)은 창왕 때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는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역임했다. 박안의 아들 실(實)은 세종(世宗) 때에 전라도 수군처리사(全羅道水軍處理事), 도총제(都摠制)를 지냈다.
박충좌의 6대손 박영창(朴永昌)과 박영문(朴永文) 형제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형 영창은 천령군에 봉해졌고, 동생 영문은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오위도총부도총관 호조참판에 올랐다. 하지만 탄핵을 받아 파직되자 난(亂)을 모의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박영창의 아들 박유(朴瑜)는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고, 아들 박민헌(朴民獻)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대사헌·강원도관찰사·한성부좌윤·오위도총부부총관·동지중추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박인규(朴仁桂)의 아들 박원렴(朴元廉)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손자 박덕상(朴德祥)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박덕상(朴德祥)의 아들인 박습(朴習)은 태종 때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으나, 병조판서로 제수된 뒤 강상인(姜尙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었고, 그의 아들 박의손(朴義孫)도 남해로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로 인해 함양박씨는 한동안 가문의 세가 기울었으나, 조선조 중기에 박규(朴規)의 후손과 박세영·박세무·박세옹 3형제의 8아들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를 함양박씨 가문에서는 향오린(鄕五鱗), 경팔립(京八立)이라고 한다.
향오린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박규의 증손인 박눌(朴訥)이 상주의 향리로 있으면서 모정(茅亭)을 짓고 후학에 전념하여 문과에 급제시킨 다섯 아들을 말한다. 첫째 박거린(朴巨鱗)은 군수 장령을, 둘째 박형린(朴亨鱗)은 부사 참의를, 셋째 박홍린(朴洪鱗)은 대사헌을, 넷째 박붕린(朴鵬鱗)은 한림학사와 지평을, 다섯째 박종린(從鱗)은 이조정랑을 지냈다.
경팔립은 돈령부도정을 지낸 박세영의 세 아들 박대립(朴大立, 좌찬성), 박사립(朴思立, 우승지), 박희립(朴希立, 목사)과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한 박세무의 세 아들 박소립(朴素立, 이조판서, 우참찬), 박응립(朴應立, 군수), 박성립(朴成立, 거유), 그리고 이조참의를 역임한 박세옹의 두 아들 박연립(朴挻立, 목사), 박명립(朴名立, 통례원상례)의 8형제를 말한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현직에 있으며, 함양박씨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그 외 박응립의 아들 문목공(文穆公) 박지계(朴知誡)는 벼슬은 동부승지에 머물렀으나 도덕과 학문이 높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박세옹의 6대손 박찬신(朴纘新)은 영조 때 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했다.
함양박씨의 근현대 인물
함양박씨는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독립운동에 힘을 쏟은 박기봉(朴基鳳)과 학자이자 의병장(義兵將)으로 유명했던 박기대(朴基大)와 봉천감옥에서 순직한 박찬희(朴燦熙)가 있으며, 무정부주의자로 일본 천황을 죽이려 했던 박열(朴烈)이 특히 유명하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함양박씨에서는 정·관계 유명인물이 많이 나왔다. 통일교 한국문화재단의 박보희 총재, 법조계의 박일환(대법관), 박재승(전 대한변호사회 회장,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 박재순(한나라당 최고위원, 농어촌공사 사장) 등이 있다.
박열은 1902년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동경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이념에 심취하여 김찬·조봉암 등과 함께 의혈단을 조직하였으며, 김약수·원종린 등과 함께 항일 사상단체인 흑도회와 흑우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와중에 일본 천황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22년2개월이라는 장기간의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해방 후에는 반공산주의와 중도우파적인 노선을 걸었다.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납북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조소앙·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회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군대 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를 주장했다. 1974년 1월 17일 서거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대한민국 정부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군위박씨
군위박씨(軍威朴氏)는 함양박씨인 박길중의 둘째아들인 박헌(朴軒)을 시조로 삼고 있다. 박헌은 신라 경명왕의 셋째아들 박언신(朴彦信, 속함대군)의 15대손으로서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개국원종 공신이다. 그는 가선대부 공조전서가 되고 군위군에 봉해졌는데, 이때부터 본관을 군위로 정하였다.
박헌의 아들 박무양(朴茂陽)은 조선 때 좌수사(左水使)를 지냈고, 그의 아들 박지생(朴枝生)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로서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박지생의 아들 박이계(朴以戒)는 무관(武官)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어 용맹을 떨쳤다.
군위박씨 집안에서는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다. 박필흥(朴必興)은 건공장군(建功將軍)이 되었고, 박무궁(朴務躬)은 절충장군(折衝將軍)을, 박수연(朴秀運)·박인범(朴仁範)·박문필(朴文弼)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이외에도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박문영(朴文英)과 박태권(朴泰權)·박용우(朴用雨) 등이 명성을 날렸다. 현재 남한에는 489가구에 1613명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