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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월남전참전인터넷전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달동네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Ⅰ- ①베이징,옌안,②이육사고문치사당한 베이징 '둥창후퉁 28호,③상하이임정청사-홍커우공원-피난처 가흥,④고려공산당과 난징둥루,⑤광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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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 Ⅰ①옌안,②이육사고문치사당한 베이징,'둥창후퉁 28호,③상하이임정청사
-홍커우공원-가흥,④고려공산당과 난징둥루,⑤광저우,
『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 Ⅱ①의열단의 이동(지린,베이징,난징,충칭),②조선의용군과 타이항산,
③만주와 안중근,④만주와 동북항일연군
『김원봉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①생애와 활동,②서훈 논란(김원봉누구인지?/조선의용군은 북한군의 뿌리/
김원봉 독립운동의실체/북 눌러앉은 김원봉의 행로), ③중국의 평가,④김구·장준하의 평가, ⑤광복군에서의 위상,
⑥월북 후 반 대한민국 활동⑦약산의 행적 오해와 진실
1. 옌안의 휑한 야오동(窯洞)엔 메마른 옥수수만 뒹굴고…
산시성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 뒷산에서 만난 ‘연안파’
어쩌다 중국기행에서 마주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 그 여운은 작은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가슴속에서 끝없는 파동으로 퍼져나갔다. 독립운동의 최대 세력이었으면서도 남과 북 모두에서 지워진 ‘연안파’, 조선의용군의 흔적 찾기에서 시작한 중국 내의 대한독립운동 답사기를 연재한다.
2012년 10월 22일 오후 중국 산시(陕西)성 옌안(延安)의 허름한 뤄자핑(罗家平) 마을 입구. 개천에는 낡은 콘크리트 다리가 걸쳐 있고, 머리 위로는 철교가 볼품없이 지나고 있었다. 좌판이 다닥다닥 이어진 조그만 시골 장터였다.
마을 입구치고는 옹색해 보였다. 입구에는 중장년 남정네 네댓이 잡담을 나누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 중장년 남정네들 바로 옆에 높이 1m 남짓한 표지가 서 있다. 마을만큼이나 허름한 표지였다. 표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글씨는 검은색으로 칠한 누런 석판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구지(旧址) 간개(简介)
(1944~45년)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2년 11월 화베이(华北)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세워졌다. 1944년 1월 학교는 타이항산을 떠나 3개월간 행군하여 4월 7일 (옌안에) 도착했고 촨커우촌(川口村)에 주둔했다, 같은 해 9월 이곳에 교사를 신축하여 12월 10일 완공했다.
1945년 2월 5일 융중한 개교식을 열었다. 주더(朱德)·린보취(林伯渠)·우위장(吴玉章)·쉬터리(徐特立)가 참석하여 축하했다. 교장은 백연 김두봉(한글학자이고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 부교장은 박일우(朴一禹)였다. 학교의 목적은 간부를 양성하여 조선민족의 해방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철학·정치경제학·군사학·일본문제·조선문제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칠대 회의에 참석했고 5월 21일 전체대회에서 연설했다.
1945년 8월 하순 학교는 옌안을 떠나 조선 북부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4개의 야오동(窑洞)이 남아 있다.
옌안지구문물관리위원회
1996년 7월 1일”
중국 각지의 토속 민가(民家)를 찾아 다니던 중이었다. 옌안은 황토고원 특유의 동굴집인 야오동(窯洞)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옌안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한 지인이 옌안에 가면 뤄자핑이라는 마을에 들러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찾아 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여행 중에도 매일 블로그에 쓰는 나의 일기에 한 줄 댓글로 붙여준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울림이 있는 댓글이었다. 그런 연유로 옌안에 도착해 중국 공산혁명 사적지와 여러 종류의 야오동을 답사한 뒤 물어 물어 뤄자핑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표지의 내용을 다시 한 줄 한 줄 새겨 읽어보았다. 알 수 없는 육중함에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주민 몇몇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물었다. 이 표지에서 말하는 네 개의 동굴집이 있는 곳이 어디냐고. 한 사람이 옆에 있던 흰 머리 노인을 가리켰다.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키는 작아 보였다. 노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노인이 앞장서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비탈길을 따라 뒷산으로 올랐다. 마을은 가난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산동네였다. 노인은 산동네를 벗어나 조금 더 올라가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동굴 네 개를 가리켰다.
찬찬히 동굴집을 살폈다. 깊이 8~9m, 높이 3m, 가로 5m 정도의 동굴 네 개가 휑하니 뚫려 있었다. 동굴 안팎으로는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볼품없이 말라버린 옥수수 몇 대가 메마른 느낌을 더했다.
조선의용군의 옌안 시절 독립군 간부 양성학교
조선혁명군정 학교가 옌안 시절 사용했던 동굴집인 야오동(窯洞).
동굴 안팎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다.
옌안의 전통 민가는 동굴을 파 방을 내는 혈거식의 동굴집이다. 메마른 황토고원지대여서 동굴을 파기가 쉬워서다. 동굴집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고 한다. 온돌을 설치하되, 아궁이는 동굴 안과 밖에 하나씩 설치한다. 여름에는 바깥 아궁이에 불을 피워 취사하고, 겨울에는 안쪽 아궁이에 불을 피워 취사와 난방을 겸한다.
옌안은 중국 공산당이 1934년 10월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 위두(于都)를 출발해 368일에 걸친 죽음의 대장정 끝에 겨우 도착한 곳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을 위시한 중국 공산당 수뇌부의 거처 역시 이런 동굴집이었다. 옌안 일대의 가난한 농민이나 도시 서민들은 지금도 이런 동굴집에서 거주한다.
조선의용군이 1944~45년 이 동굴집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해방 이후 조선 북부로 모두 이동한 다음에는 현지인들이 살았을 터이니 그때의 유품이 하나라도 남아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길을 안내해준 노인에게 약간의 사례를 하고 먼저 내려가게 한 다음 한참이나 더 동굴집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뒷덜미를 잡아당겨 돌아갈 버스를 쉬이 탈 수 없었다. 마을 입구 작은 시장에서 매운 국수로 끼니를 때웠다. 질깃한 면발에 산초와 고추가 섞인 양념으로 인해 텁텁한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날 저녁 옌안 시내의 숙소로 돌아와 하루 일정을 블로그에 메모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언젠가 바람소리처럼 들은 이야기가 조금씩 망각의 습자지를 적시며 배어 나왔다. 뒷북 치듯, 그 말이 떠올랐다.
“이게 바로 연안파였구나!”
옌안에 모여 있다 귀국했다고 해서 연안파로 불렸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주력 간부들이 연안파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는 김일성에게 전부 숙청당했다던. ‘무정’이라는 이름도 떠올랐다. 산시성 황토고원 어느 마을 뒷산에서 바로 그 연안파의 흔적을 만나다니! 그날 나는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1940년대 초반 중국 땅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약 1000명의 우리 선배님들이 살던 야오동입니다. 이들은 해방 이후 그렇게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선 연안파라고 불렸지요. (…) 김일성과의 권력쟁투에서 밀려 권력의 명부에서 사라진 이들의 흔적이 낡은 야오동에 묻혀 있습니다. 이제는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돌보지 않고, 현지에서도 육십 넘어 칠십대가 된 사람들이나 겨우 이들의 존재를 기억할 뿐, 표지석 하나 없는 독립운동의 흔적으로 방치돼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이념이나 전쟁보다 혹독한 권력쟁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면서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우울한 상념에 빠집니다.”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연안파라는 존재를 실물 표지로 맞닥뜨리자, 작은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내 가슴속에서는 파동이 퍼져나갔다. 2013년 2월 한 주간지에 연재하던 ‘중국민가기행’의 ‘동굴집’ 편에 중국 공산당과 조선의 독립운동 관련 이야기를 더해 연재를 마무리했다.
애초 독립운동사에 대한 독서량은 부족했고, 지식도 형편없었다. 관심이 별로 없었고, 가끔 흘깃흘깃 쳐다볼 정도였다. 마음 한 구석에 언젠가 한 번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옌안의 뤄자핑을 다녀온 뒤로도 여전히 주저하고 머뭇거림은 계속됐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흔적을 귀띔해주었던 지인과 차 한잔을 하는 가운데 질문 하나가 내 귀에 꽂혔다.
“육사가 노래한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의 모델이 누구인지 아세요?”
“….”
암호와 같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그제야 만주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이 유랑하던 중국 남부의 어딘가도 손에 잡히는 듯했다. 이렇게 해서 ‘인문기행 중국’이라는 답사여행 목록에 ‘독립운동 흔적찾기’라는 새 항목이 추가됐다. 2015년 봄의 일이었다.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돌아온 이름들,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
뤄자핑 마을 입구. 조선의용군 계열 조선혁명군정 학교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가 멀리 보이는 철교 아래 세워져 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따라가는 답사여행은 그해 여름부터 시작했다. 기존의 여행 일정 사이 사이에 일단 베이징·상하이·하얼빈 등 세 곳을 끼워 넣었다. 어차피 오가는 길목이었다. 2016년의 답사 일정에는 우선적으로 독립운동 관련 답사를 채워넣었다.
1월에는 화남과 화중, 2월에는 타이항산, 8월에는 만주를 목표를 잡았다. 40여 권의 단행본과 수십 편의 논문을 찾아 읽었다. 사적지의 위치는 독립기념관의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http://oversea.i815.or.kr)를 주로 참고했다.
여행길에서는 매일 블로그에 답사기를 기록했다. 이들 기록이 135개나 쌓여 기초자료가 되었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들 답사여행을 글과 사진으로 정리해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다. 내 스스로 독립운동사에 눈을 떠가는 과정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굳이 목적으로 삼지 않더라도 중국 어느 곳에서나 독립운동 사적지 한두 곳씩은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영화 <암살>이 개봉되고 <밀정>이 뒤를 이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대중화한 것도 일종의 응원이 됐다.
마침 <밀정>의 기획자인 이진숙(영화사 하얼빈 대표) 씨가 광저우(廣州)에서 우한(武漢)까지의 답사에 동반하기도 했으니, 이것도 글을 쓰게 하는 인연이라 하겠다. 자, 이제 함께 떠나보자. 길을 떠날 때는 주저할 필요 없다. 마냥 주저하다 보면 묘비에 부럽다는 말밖에 남길 게 없지 않겠는가.
2015년 8월, 중국 답사를 시작하기 전 어느 무더운 날,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박물관을 먼저 찾아보았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일본에 의해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처음 세워졌고, 해방 이후까지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하면서 역사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서대문형무소는 개소 이후 증축을 거듭해 1930년대에는 신축 당시의 30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동안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란 범죄 아닌 범죄, 소위 사상범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사람들이 나라의 감옥에 갇혔고, 잔혹한 수감생활 끝에 죽어나가거나 아예 사형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범, 정치 이념이 달랐던 진보적 인사들이 이곳에서 고통을 겪었다. 이들 가운데는 해방 이전의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시대에도 형무소의 정치학과 역사학은 바뀌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이곳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역사는 무덤과의 대화’라고 했던 한 역사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고대사 연구에서 무덤과 부장품은 매우 귀중한 사료라서 답사 때도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 많다는 말이었다. 이에 비견하자면, 한국 현대사는 ‘감옥’에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지난 100년은 그랬다.
정의란 거리에서 시작해 경찰서 유치장을 오가다 다시 거리로 나오고, 다시 들어가면 감옥과 사형장으로 통하곤 했다. 그 전의 100년도 그랬다. 19세기 100년은 수탈에 항거하는 민란이 진압과 감옥과 사형장으로 끝나곤 했다.
20세기 전반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겠다고 국내에서 또는 이국 땅에서 떠돌다 감옥으로 잡혀갔다. 20세기 후반에는 민주주의를 외치던 이들이 거리에서 시작해 감옥으로 이어졌다.
겹치는 독립운동사와 친일 변절사
서울 서대문형무소박물관 외벽에 걸린 걸개그림.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 보인다.
서대문형무소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야외에는 <광복 70주년 기념전-돌아온 이름들>이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열두 폭의 흰 천을 옥상에서 잔디밭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그 위에 266명의 낯선 이름을 써넣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었다.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과연 나는 이들 가운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그로부터 1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 그때의 사진을 꺼내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봤다. 아는 이름은 이화림·주세죽·박차정·유관순·윤희순 다섯 뿐이었다. 처음 서대문형무소 현장에서 이들의 이름을 보았을 때는, 솔직히 단 한 명도 아는 이름이 없었다.
당시에는 심지어 유관순이라는 이름조차 웬일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그나마 지난 1년 동안 독립운동 관련 답사를 하면서 알게 됐다.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 중년 사내들의 민망한 평균인지도 모른다. ‘입으로는 만어(萬語)를 농하지만 흉중에는 일계(一計)도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실내의 상설전시관을 돌아보았다. 해방 전의 독립운동과 해방 후의 민주화운동이 한눈에 보기 좋게 정리돼 있다. 눈에 거슬리는 구석도 있었다. 3.1운동에 대한 이런 언급이었다.
“독립선언을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가혹한 심문에도 의연하게 수감생활을 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고, 그 가운데 양한묵·박준승·손병희 열사 등이 모진 고문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끝까지 그 명예를 지킨 사람이 몇이었던가! 그중 3인은 훗날 노골적인 친일로 돌아섰다. 기독교 대표 가운데 박희도와 정춘수, 천도교 대표 최린,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직접 썼다는 최남선 역시 그랬다. 독립운동에 나섰던 인사 가운데 친일로 돌아선 변절자가 적지 않은 게 우리의 엄연한 역사다.
독립운동사에서 ‘훗날의 변절’은 중요하다. 변절이란 단순한 생각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뒤돌아 서서 동포와 동지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이다. 일제강점기는 독립운동사와 친일 변절사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역사다.
서대문형무소 바깥 벽면에는 걸개그림이 걸려 있었다.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었다. 안중근·한용운·윤봉길·이봉창 외에 갓을 쓴 인물도 한 명 있었다. 의병장 허위(1854~1908)다. 허위는 1896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13도창의군 진동창의대장에 추대됐다.
다음 해 한성부 탈환작전을 전개해 서울 동대문 부근 12㎞까지 진격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강 유역에서 체포돼 경성감옥, 바로 이곳 새 감옥으로 끌려와 순국했다.
허위의 가문은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사촌인 허형도 의병장이었다. 허형에게는 두 아들 허규·허발, 그리고 딸 허길이 있었다. 허규도 독립운동을 했다. 허형의 조카 허극(허형식)도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이끌다
1942년 만주군과 교전 끝에 전사했다. 그는 만주 최후의 빨치산 독립투사였다. 허형식의 사촌누이 허길이 바로 육사의 어머니다.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된 베이징
2015년 서울 서대문형무소 박물관이 마련한 <광복 70주년 기념전-돌아온 이름들> 전시회.
열두 폭의 흰 천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위에 266명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름을 써넣었다.
한 가문이 온전히 독립운동에 투신한 바로는 이회영(1867~1932) 일가가 잘 알려져 있다. 이회영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 해 10월 여섯 형제와 함께 가산을 정리해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는 그의 한마디는 선명한 투쟁 의지와 단호한 실행력을 보여준다.
당시 처분한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600억 이상 1000억원에 이른다는 계산도 있다. 이회영 형제들은 만주로 건너가 경학사를 설립해 조선인 부락을 안정화하고, 독립군 양성학교로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돼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를 독립운동가로 키워냈다. 밥 먹이고 공부 시키고 군사훈련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이회영이 감당했다.
이회영은 1920년대에는 주로 베이징에 거주하면서 아나키즘을 자신의 신념으로 굳히고, 이에 기반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32년 만주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상하이(上海)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다롄 감옥에서 고문 끝에 사망했다.
베이징을 먼저 답사하기로 했다. 베이징은 청(淸)대에는 신사상과 신문화가 조선으로 전해지는 통로였다. 일제강점기, 곧 중화민국의 베이핑(北平) 시대에도 그랬다. 조선에서 보면 몽골과 상하이, 멀리 옌안과 충칭(重慶)으로 연결되는 길목이기도 했다.
1920년대 초반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이 많이 모여든 곳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 유일당을 세워야 한다는 유일당 운동의 한 축도 베이징이었다. 조선 유학생들이 비싸지 않은 학비로 유학하던 곳도 베이징이었다.
이육사도 베이징에서 유학했고, <아리랑>의 김산도 20대 초반 베이징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이육사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치사를 당한 곳 역시 이곳이다.
김원봉은 1920년대 전반 5년여 베이징에 의열단 본부를 두고 수백 차례에 달하는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독립운동 1세대인 이회영도 베이징에서 6년 반을 살았다.
베이징에서 이육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곳과 이회영이 살던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서울의 우당기념관(우당은 이회영의 호, 서울 종로구 신교동 6-22)을 찾아가니 관계자가 기꺼이 자료를 찾아주었다.
이회영은 1919년 5월부터 1925년 11월까지 베이징에서 6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엄청났던 가산은 바닥났고, 국내에서 조달되는 독립자금도 끊어져가던 시절이다.
이회영은 3·1운동 이후 새로 펼쳐진 국내외 정세 속에 독립운동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심했다. 그 결과는 아나키즘이었다. 신채호를 비롯해 류자명· 정화암과 이을규·정규 형제 등을 아나키즘의 동지로 만났다. 중국인 아나키스트 동지들도 만났다.
이회영은 과연 어디에서 살았을까? 우당기념관의 자료를 보니 현재의 지명으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거주지는 충원문(崇文門) 밖의 셋집. 이것만으로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 답사에서는 제외했다. 두 번째 거주지는 허우구러우위안후퉁(后鼓楼園胡同)이다.
그러나 베이징에 이런 지명은 없다. ‘원(園)’이 아니라 ‘원(苑)’인 허우구러우위안(后鼓楼苑) 후퉁은 있다. 우당기념관의 자료는 이회영 가족과 후손들의 회고를 주요한 근거로 했는데, 그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오기로 보인다.
이곳은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인 난뤄구샹(南锣鼓巷)과 가까운 곳이다. 지금은 좁고 낡은 사합원과 잡원들이 빽빽한 곳이다. 베이징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담고 있는 후퉁이다. 이회영이 살던 시대도 비슷했을 것이다.
세 번째 거주지는 얼안징(二眼井)이다. 얼안징은 푸싱먼베이다지에(复兴门北大街)에 걸쳐 있던 후퉁이다. 얼안징은 1965년 베이징의 지명을 대대적으로 조정할 때 쑹보(松柏) 후퉁으로 개칭되었다. 그마저 1990년대 재개발로 인해 골목이 통째로 철거되고 새로 지은 고층 빌딩이 뒤덮은 금융가가 됐다. 옛날의 흔적은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주소 역시 쑹보후퉁이 아닌 진룽지에(金融街)로 쓴다.
네 번째는 융딩문(永定门) 안의 관인쓰(观音寺)후퉁이다. 그러나 관인쓰후퉁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융딩문이 아니라 시즈문(西直门) 안에 있고, 현재의 지명은 둥관잉(东冠英)후퉁이다. 다섯째 거주지는 샤오징창(小经厂) 후퉁으로, 이 역시 난뤄구샹 북쪽 입구 건너편에서 아주 가깝다. 여섯번째 거주지는 마오얼(帽儿)후퉁인데, 난뤄구샹에 서쪽으로 이어진 골목의 하나다. 난뤄구샹에 가보았다면 누구든 마오얼후퉁을 걸었거나 최소한 들여다보기는 했을 것이다.
일반 여행객이라면 지도만 있으면 허우구러우위안·샤오징창·마오얼후퉁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세 후퉁 모두 난뤄구샹에서 이어지거나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후퉁을 좋아해 이미 수십 번은 거닐었던 곳이지만, 새삼 다시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2015년 11월 가을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오후였다. 이회영의 거주지는 가로명만 확인됐을 뿐, 호수까지 확인된 것이 아니다. 물론 표지가 설치돼 있지도 않다. 그저 그 골목을 걸으면서 당시의 이회영을 떠올려볼 뿐이다.
‘차로불통(此路不通)’, 그 막다른 길로 뛰어든 이회영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인 난뤄구샹(南锣鼓巷) 근처 차로불통(此路不通)의 허우구러우위안 후퉁(后鼓楼園胡同). 독립운동가 이회영이 베이징 시절에 머물렀던 골목으로 추정된다.
베이징의 후퉁은 바둑판처럼 정정방방(正正方方)한 구조라서 막힌 골목이 적다. 그런데 허우구러우위안후퉁은 막다른 골목이다. 골목 안쪽으로는 한 여자아이가 눈이 쌓인 자동차 차창에 맨손으로 눈을 헤집어 글씨를 쓰며 놀고 있었다. 골목 입구에는 회색 벽돌 담장에 ‘차로불통(此路不通, 이 길은 막혀 있음)’이라고 붉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카메라를 꺼냈다.
이회영이 걸었던 인생은 막힌 골목 아니었을까? 그는 조선의 삼한갑족(三韓甲族) 가문의 일원으로 출생했으니 대충 살았어도 편하게 잘살았을 몸이다. 당시 대부분의 양반 관료들은 그랬다. 그러나 이회영은 막다른 길을 주저하지 않고 그 길로 들어섰다.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에서 신흥강습소를 세운 것 역시 막다른 길로 돌진하는 모양새다.
1920년대 그가 독립 이후의 비전으로 아나키즘을 택한 것도 막힌 골목으로 뛰어든 모습으로 보였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양쪽 모두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쑨원의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은 물론 소련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투쟁방법으로도 외교나 실력 양성이 아니라 의열투쟁을 채택하는 급진 그룹이었다. 이회영은 출신이나 나이로 보면 복벽주의자였을 법도 한데 그는 이미 아나키즘까지 나갔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개명했어도 그에게는 더 이상 되살릴 가치가 없는 폐기물이었던 것이다.
차로불통의 길을 걸어갔으나 역사는 그를 넓은 광장에 우뚝 선 당당한 존재로 기억한다. 민족의 위대한 귀감이다. 그럼에도 소심한 나는 이회영을 생각하면서 갑갑함을 거두지 못했다. 수많은 친일파 가문과 선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국권을 강탈해버렸다는 현실에 쉽게 타협하고, 오히려 적극적인 친일매국으로 돌아서서 자신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탄탄하고 번질번질한 인생을 베풀어준 친일 가문. 그런 친일파 가문이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대해 질시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회영과 같은 길을 갈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소심함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분노와 질시와 자괴감이 일고, 그 대척점에 있는 이회영과 그의 가문이 좁은 골목의 막힌 길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 갑갑하고 아픈 역사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회영의 거주지, 그 가운데서도 막힌 골목을 되돌아 나오는데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다른 강력한 자석이 나를 끌어당겼다. 육사 이원록(陸史 李源祿)이었다. 그가 베이징에서 고문치사를 당한 곳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출처] : 윤태옥 중국인문다큐멘터리 전문제작자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1)> /월간중앙,2017. 1
2. ‘초인’은 시인 아닌 투사 이육사의 깃발
변절의 시대에 무장항일투쟁의 최전선으로… ‘광야’는 해방을 향한 공고한 다짐
육사는 고뇌에 빠져있던 문약한 시인이 아니었다. 적의 심장을 향해 즉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준비된 투사였다. 육사는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했다. 사격술도 뛰어났다.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 계열에 가깝다. 육사가 고문치사 당한 베이징 ‘둥창후퉁 28호’에서의 소회. 그곳은 관광명소인 왕푸징 거리에서 지척이었다.
안동 생가 인근의 육사 시비와 동상.
曠野(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으랴
모든 山脈(산맥)들이
바다를 戀慕(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곧을 犯(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光陰(광음)을
부지런한 季節(계절)이 픠여선 지고
큰 江(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엇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천고)의 뒤에
白馬(백마)타고 오는 超人(초인)이 있어
이 曠野(광야)에서 목노아 부르게 하리라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1904~1944)의 유고작인 ‘광야’다. 해방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또 다른 유작 ‘꽃’과 함께 발표됐다. 원작의 감흥을 살리기 위해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꿔 발표 당시의 표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작품 아래에는 이육사의 친동생인 이원조가 “눈물을 뿌리며 썼다”는 짤막한 쓴 후기도 붙어 있다. 후기는 다음과 같다.
“家兄(가형)이 四十一歲(41세)를 一期(일기)로 北京獄舍(베이징 감옥)에서 永眠(영면)하니 이 두 編(편)의 詩(시)는 未發表(미발표)의 遺稿(유고)가 되고 말엇다. 이 詩의 工拙(공졸)은 내가 말할 바 아니고 내 혼자 남모르는 至寬極痛(지관극통: 寬은 寃의 오기로 보아 ‘지원극통’이라고 읽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편집자주)을 품을 따름이다. 一九四五年十一月十八(1945년11월18일) 舍弟(사제) 源朝放漏(원조방루) 謹記(근기)”
육사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광야’라는 제목 아래 ‘광음’ ‘매화’ ‘산맥’ ‘백마’ 등의 시어가 거친 움직임으로 덮쳐 온다. ‘초인’ 앞에서는 숨조차 멎을 듯하다. ‘초인’이라는 시어는 이제 육사의 전유물이 된 듯하다.
필자는 이 작품을 중학생 때 국어책에서 읽었다. 읽었다기보다 배웠다. 시험에도 빠지지 않고 지문으로 등장했다. 그때 내게 문학이란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청순한 아사꼬,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은 반짝이는 언어들일 뿐이었다.
이들 언어가 우리 민족의 정서가 한(恨)이라는, 거북하지만 당시로서는 반박할 수 없는 담론과 함께 풋내 나는 내 감성을 채워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광야’는 그때까지 나로서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종의 충격이었다.
‘광야’는 일단 묵직했다. 거칠지만 아름답고, 황량하지만 빛났다. 서부영화나 로마신화에나 등장하는 줄 알았던 백마가 우리 전설 속의 신묘한 형상으로 다가왔다. ‘초인’은 고대의 동굴에서 미래의 하늘로 달려가는 환상으로 울려왔다.
하느님이나 신이라는 존재보다 훨씬 강렬한 현실적 존재로 내 인식의 빈 공간을 채우고는 날아가는 듯했다. 이런 느낌은 내 10대가 다 가도록 지속됐다. <광야>로 인해 나는 국어 교과서를 더욱 좋아하게 됐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후 ‘광야’의 ‘초인’은 점차 거북한 것으로 변해갔다. ‘광야’와 ‘초인’과 육사는 그대로였지만, 내 인식이 변했던 것이다. 총을 들고 싸웠어도 모자랄 판에 글이나 끼적거리는 모습이 무기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지식인이랍시고 골방에서 지사(志士)라도 되는 양 소리도 나지 않는 글로 툴툴거리다 무기력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끌려다니면서 치욕스럽게 산 것 아닌가 하는 심사였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그 후 나는 우리 현대사를 적당하게 외면하면서 살았다. 돌아보면 어리석고 유치하기까지 한 인식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몇 년의 반항 뒤에는 그보다 훨씬 긴 일상이 세월을 덮었다.
‘초인’의 실제 주인공은 허형식
둥창후퉁을 알리는 거리 표지판. 베이징의 대표적 관광지 왕푸징에서 지근거리에 있다.
그러다 몇 년 전, 지인의 느닷없는 태클 같은 댓글을 보고 중국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의 뤄자핑(罗家平)에서 연안파의 흔적과 맞닥뜨리면서 오랫동안 외면했던 우리 현대사를 다시 직면하게 됐다. 그 후 국내로 돌아와 예의 그 지인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 지인은 육사의 ‘초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초인’의 실제 모델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학교에서 배운 ‘초인’은 관념상의 추상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그 실제 모델이 따로 있었다니…. 육사의 ‘초인’ 이야기는 나를 강하게 자극했다.
그 지인의 말에 따르면, 초인의 실제 모델은 허형식이다. 허형식은 육사의 외당숙, 곧 어머니인 허길의 사촌동생이다. 1930년대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의 핵심 간부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인 독립투사와 중국공산당이 합작한 단체로, 항일 무력투쟁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과 만주군의 잔혹한 토벌에 밀려 1940년 겨울 소련 땅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과 김책도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허형식은 이들과 달리 피신하지 않고 북만주에 남아 끝까지 저항하다. 1942년 8월 일제의 포위망에 걸려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그는 만주 최후의 파르티잔이라고 불렸다.
나는 지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관련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출판계의 한 지인은 박도라는 작가가 쓴 <들꽃>이라는 실록소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신문 연재소설이어서 쉽게 검색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얼마 전인 2016년 11월 <허형식 장군>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가 쓴 <이육사 평전>(2010)도 읽어보았다.
그런데 고구마 줄기 같았다. 육사에 다가서니 김원봉이 등장했다. 육사는 김원봉이 중국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었다. 허형식을 더듬다 보니 박정희도 등장했다. 허형식은 경북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났고, 박정희는 임은동에서 철길 건너인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1942년, 허형식이 북만주의 하얼빈(哈爾濱) 인근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게릴라전을 벌이며 사투를 하고 있을 때, 먼저 소련으로 피신했던 동북항일연군은 88여단으로 재편됐다. 1영장은 김일성이었고, 허형식은 3영장이었다. 그러나 허형식은 3영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전사했다.
자료를 찾아 나가다 보니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것을 비로소 알아채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불붙은 나의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여행은 정리하자면 ‘육사에서 허형식까지’와 다를 바 없었다.
베이징서 만난 이회영과 이육사
대잡원(大雜院) 둥창후퉁 28호 입구.
일제는 1926년 이곳의 건물들을 사들여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중국에 대한 문화침략 전담기구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를 두었고 일부 건물은 감옥으로도 활용했다.
2015년 11월 초 베이징(北京)에서 이회영의 자취를 답사한 데 이어 육사가 순국한 곳을 찾아 나섰다. <이육사 평전>에는 육사가 고문으로 순국한 곳이 베이징의 어디인지 상세하게 설명돼 있었다. 현 주소로 보면 베이징시 둥청구(东城区) 둥창후퉁(东厂胡同) 28호 2층 건물의 지하다.
둥창후퉁은 베이징의 지하철 1호선 왕푸징(王府井) 역에서 북쪽으로 1.5㎞ 정도 거리다. 베이징은 골목마다 거리 표지판이 잘 설치돼 있어 지도만 보아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왕푸징다제(王府井大街)를 따라 걷다 보니 왼쪽 대로변으로 서커보위안(社科博源)이라는 8층짜리 호텔이 보이고, 그 직전에 둥창후퉁이라는 가로 표지가 나타났다.
둥창후퉁으로 들어서서 100m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에 둥창후퉁 1호가 보인다. 1호는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근대사연구소와 세계역사연구소다. 일반인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곳이다. 경비가 정문을 지키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정문 경비실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경비원에게 말을 건넸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 사람이 둥창후퉁 28호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위치를 아는지 물었다. 간결한 대답이 시원하게 돌아왔다. 후퉁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왼쪽에 28호가 있는데, 28호 안쪽 중앙 건물이라고 했다. 지난해에도 한국인 수십 명이 단체로 찾아왔다고 알려주었다.
28호에 다가서니 문머리에 ‘둥창후퉁 28호’라는 빨간 번호판이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28호는 건물 한 채가 아니었다. 2층 벽돌건물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단층과 이층의 벽돌집이 둘러싼 구조였다. 워낙 낡고 지저분해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자세히 둘러보니 일부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었다. 중앙 건물의 쇠락한 현관문에는 ‘28호 주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공지문이 붙어 있었다. 공중변소가 너무 비위생적이니 청결을 위해 한 달에 3위안(元)씩 걷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쓰레기와 버려진 물건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화장실 문은 열려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보고 싶었지만 계단실 입구에 잡동사니가 쌓여 있어 통행이 불가능했다.
이런 주택을 대잡원(大雜院)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재력 있는 사람의 저택이었을 것이다. 대잡원은 지금도 베이징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독특한 주거형태다. 이런 대잡원이 베이징의 20세기 후반 50년을 견뎌온 서민주택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발전이 가속화하면서 도시개발이 급속하게 추진돼 낡은 대잡원이 철거되고 고층빌딩이나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육사가 순국한 곳은 아직 철거되지 않아 낡은 대잡원 모습 그대로였다. 몇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1층 내부를 돌아보았다. 주민이라도 보이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대부분은 이미 이주했고, 일부만 남아 있는 철거 대상이 아닐까 싶었다.
1년 후인 2016년 11월 다시 한번 둥창후퉁 28호를 찾아갔다. 혹시라도 철거됐으면 어떡하나 하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28호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낡고 지저분하고 쓰레기와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건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주민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가운데 2층 벽돌집은 일제의 감옥이었고, 대문 바로 안쪽에 있는 2층 건물이 사무실이었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육사 이원록은 이곳에서 1944년 1월 16일 새벽 숨을 거뒀다. 아니 숨이 끊겼다. 고문치사였으니 말이다. <이육사 평전>을 쓴 김희곤 교수는 육사의 시신을 인수한 이병희의 증언과 이곳에서 심문을 당했던 베이징 현지인의 증언, 그 외의 각종 자료를 조사해 이곳에 일제의 감옥이 있었고 이곳에서 이육사가 고문치사를 당한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옥사 아닌 고문치사
베이징 둥창후퉁 28호 대잡원의 중심 건물.
육사는 일제가 감옥으로 사용한 이 건물 지하에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둥창이란 지명 자체가 어두운 죽음을 연상케 한다. 둥창후퉁은 명나라 시대에 ‘동창(東廠)’이 있었던 곳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군신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다 환관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기관을 만들었다. 3대 황제인 성조 영락제는 이를 확대개편해 ‘동창’이라고 명명했다.
명나라는 등골 서늘한 감시와 사찰의 시대였다. 동창은 비밀경찰조직으로 그 악명이 대단했다. 걸리면 죽음이었다. 어둠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청조는 동창을 폐지했다.
일제는 1926년 이곳의 건물들을 사들여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중국에 대한 문화침략 전담기구인 동방문화 사업위원회를 두었다. 위원회 사무실 외에 일부 건물을 감옥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육사의 죽음 앞에서 발걸음이 더뎌졌다. 늦가을의 축축한 비를 허술한 우산으로 가리고 잡초 무성한 마당을 서성거렸다. 육사는 경성에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이곳 베이징까지 끌려와 죽었다. 육사가 이곳으로 잡혀온 상세한 이유는 아직 불분명한 듯했다. 체포영장도, 재판도 없었다.
육사의 죽음을 옥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육사의 죽음은 분명한 고문치사다. 육사가 시인이기만 했다면 고문치사를 당할 이유가 없다. 그의 시들은 생경하거나 유치한 정치적 선동 문구가 아니다. 작가는 작품을 이유로 고문을 당하지는 않는다.
조선인이 고문치사 당했던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독립운동이란 죄뿐이다. 일제가 육사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다그쳤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육사의 행적을 보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육사의 생전을 잠시 돌아보면 이렇다.
육사 이원록은 1904년 출생했다. 20세이던 1924년 1년 정도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 후 대구에서 사회활동을 했다. 1926년에는 베이징에 유학해 7개월 정도 중국대학(中国大学)에서 공부했다.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의거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30년 26세의 나이에 지면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이즈음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나 경찰서에 들락거리는 일들이 이어졌다.
1931년 육사는 3개월 동안 만주에 다녀왔다. 허은(육사의 외사촌)의 회고에 따르면 육사의 외삼촌인 허규가 독립운동자금을 운반하는 데 동행한 듯하다. 이 무렵 육사는 외당숙인 허형식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허형식은 1930년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5월 1일 노동절투쟁의 일환으로 조선인 청년 40여 명을 이끌고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을 맨손으로 습격하는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로 허형식은 북만주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해졌다. 그 이후 항일무장투쟁에서 상당한 전적을 쌓아가고 있었다.
육사는 1932년 베이징과 톈진(天津)을 거쳐 난징으로 갔다. 난징에서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학해 군대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귀국했다. 1933년 경성과 상하이(上海) 등지를 오가며 '레닌주의 철학의 임무' 등의 시평을 썼다.
1934년 난징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사실이 발각돼 국내에서 구속되었다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그 이후 1942년까지 건강이 나빠져 요양하는 일이 잦았다. 이 시기에 편집 일을 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시사에서 문학으로 글쓰기의 영역을 넓혔다.
사회주의자 이육사
※이미지(위) 설명
1) 왕산 허위는 의병장으로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이름이다. 서울 동대문 근처 신설동역오거리에서 청량리 밖 시조사삼거리까지 3.2㎞의 도로가 왕산로인데, 바로 이 ‘왕산’이 허위의 호다.
2) 허은은 육사의 외사촌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손자인 이대용의 부인이다. 그가 구술한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는 독립투사 가족들의 실생활이 어떠했는지 실감나게 전해주는 귀한 내용을 담고 있다.
3) 허형식에 관한 연구로는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책임연구위원)이 잘 알려져 있다. 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박도 지음)이 최근 출간됐다.
4) 왕산 허위의 손자인 허웅배(1928~1997)는 1951년 북한이 국비로 소련에 보낸 유학생이었다. 1958년 다른 유학생 7명과 함께 북한 국적을 버리고 소련으로 망명했다.
육사는 1943년 4월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와 강제 동원이란 엄중한 상황에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육사는 충칭(重慶)으로 가서 요인 한 명을 모시고 옌안으로 갔다 귀국할 때 무기를 반입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문학에서 무장독립운동으로 무게중심이 전환된 것이다.
그러나 1943년 늦가을 모친과 맏형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 경성에서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고문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런 흐름을 보면 육사는 1931~33년과 1943년에 집중적으로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다. 육사가 김원봉이 설립한 군사학교 1기생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시인으로만 알았던 육사가 군사학교를 나왔을 뿐 아니라 사격술도 뛰어났다니…. 육사는 고뇌에 빠져있던 문약한 시인이 아니었다.
적의 심장을 향해 즉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준비된 투사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평론이 문약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평론은 식민 치하의 암울한 사회를 매섭고 냉철하게 분석했다.
육사에게 1943년의 베이징행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당시의 엄혹한 환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후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모든 조선인에게 친일과 굴종을 넘어 황국의 신민이 되라고 몰아세우던 시기였다. 문단도 예외가 없었다. 저명한 문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태평양전쟁 지원을 선동했다. 지금 돌아보아도 가장 치욕스런 시기였다.
시인 주요한은 “천황폐하 만세를 목청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지원병 참전을 독려했다. 소설가 이무영은 “대동아전쟁은 10억 유색인종이 한 덩치가 되어 단란하게 살자는 것”이라며 일제의 파시스트 전쟁을 찬양했다.
시인 서정주는 ‘반도 학도 특별지원병에게’라는 헌시를 지어 바치고, ‘징병 적령기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빨리 아들을 지원병으로 내보내라고 외치던 시대였다.
시인 노천명도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라고 읊조리면서 사악한 미문(美文)으로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떼밀었다.
육사는 이런 격랑에 쓸려가지 않고 오히려 항일투쟁의 최 전선인 중국 대륙 한복판으로 나섰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1943년 그의 베이징행은 시인이던 육사가 투사가 되어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행동이었다. 이육사는 베이징에서 충칭과 옌안을 오가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충칭에는 김구의 임시정부가 있었고, 옌안에는 김두봉의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전쟁을 확대할수록 패망이 가까워진다는 판단에 따라 독립운동의 좌우 합작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육사가 고문을 당해 죽음에 이르면서도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은 국내와 충칭과 옌안의 독립운동을 연계하려는 그 어떤 움직임이 아니었을까.
육사의 정치적 이념 역시 새롭게 음미하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육사가 조선이나 중국의 공산당에 가입한 조직상의 당원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육사의 친동생 이원조는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조직해 초대 서기장을 지냈다.
그는 1947년 월북해 활동했고, 1953년 북한에서 박헌영 그룹이 김일성 일파에게 숙청당할 때 함께 투옥됐다. 원조와 원록은 특히 친밀한 형제였으니 육사 생전에도 특별한 연계가 있었을 것이다.
‘초인’의 실체
육사의 이념적 성향은 한마디로 공산주의였다.
육사의 독립운동과 사상 편력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규명되기 시작했다.
육사의 이념적 성향은 1931년 김원봉과 관련한 발언과 그 시기에 국내에서 발표한 평론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육사는 자신이 입교한 군사학교의 창설자이자 교장인 김원봉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비판의 요지는,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사상이 애매하고 비계급적”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를 위반하여 “조선인이 중국에서 조선의 혁명 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중국 국민당과 연계에 대해 당시의 젊은 세대는 대부분 비판적이었다. 무엇보다 장제스(蔣介石)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부패가 상당했다. 게다가 장제스가 일본제국주의 위협과 침략에 대해 적극적 항전이 아니라 소극적 타협으로 물러나고, 오히려 국내에서 공산당 때려잡기에만 몰두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장제스가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항일에 적극적이지 않으니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였다.
육사가 1933년 국내에서 발표한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라는 글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난징의 군사학교에 입교하기 전에 투고한 것으로, 육사가 난징에 있을 때 발표됐다. 난징으로 가기 전 육사는 이미 공산주의 철학과 정치이념에 상당히 심취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독립운동과 사상편력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본의 경찰 기록과 만주의 항일역사 연구 성과에 접근하면서 구체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했다.
육사는 외가의 독립운동 내력을 상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육사의 외가는 의병장 허위와 허형(이육사의 외조부)은 물론 그 후손들 대부분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투신했다.
외삼촌 허규(1884~1957)도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왕산 허위의 의병투쟁에 형제들과 함께 가담했다 왜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15년 광복단 사건으로 수사선상에 오르자 만주로 망명했다. 3·1운동 때도 6개월간 형을 살았다.
1928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했다 체포돼 또다시 5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동안 20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했다. 허은의 회고에 따르면 육사는 외삼촌 허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촌동생이지만 육사보다 5세 연하인 허형식이란 존재도 육사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육사는 숨이 끊길 때 허형식이 이미 2년 반 전에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가 ‘초인’이라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눌러쓸 때, 백마를 즐겨 탔다던 허형식은 살아 있었을까, 아니면 이미 전사한 다음이었을까?
독립운동사의 모호한 이념 구분
그의 시는 독립운동에 관한 공고한 다짐으로 읽힌다. ‘초인’은 허형식은 물론 허규 또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해방의 깃발 아니었을까? ‘광야’는 투쟁을 포기한 자의 한탄이 아니다. 투쟁에 지친 피로감이나 무력감에서 나온 미래로의 도피도 아니다.
실패와 도전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해방이란 목표에 집중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육사의 ‘광야’에 대한 나의 젊어서의 소심한 외면은 베이징의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서 웅장한 영웅의 노래로 되살아났다. 그는 내게 초인으로 나타난 것이다.
육사가 순국하기 전 해에 이곳 둥창후퉁에서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또 하나의 고문치사로 인한 순국이 있었다. 바로 이원대(1911~1943, 건국훈장 독립장)다. 육사가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할 때 간부학교에 입교할 젊은 인재들을 찾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육사는 청년기에 다녔던 경북 영천의 백학학원 후배 이원대와 이진영(1907~1950 건국훈장 독립장)에게 정치학교 입교를 권했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상하이로 가는 우편선을 이용해 상하이를 거쳐 난징으로 가서 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다. 특히 간부학교 졸업 후 중국 국민당 군대에 배속돼 지하활동을 하던 이원대는 일본군에 체포돼 둥창후퉁으로 압송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이진영은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귀국 후 국방군 장교가 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화순에서 인민군과 격렬한 전투 끝에 전사하고 말았다.
비극이다. 이원대와 같이 지하활동을 하던 전우들은 훗날 옌안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의 핵심이 됐다. 화순에서 이진영과 전투를 벌였던 인민군은 적장이 옛 전우의 절친한 고향친구이자 혁명의 동지였다는 것을 알았을까? 일제의 강점과 남북분단이 이어지며 생겨난 한국현대사의 비극의 한 단면이다. 이원대와 이진영의 후손들은 호형호제하면서 선친들의 독립운동사를 찾고 알리는 일에 애쓰고 있다.
둥창후퉁 28호를 뒤로 하고 귀국한 후 생각이 많아졌다. 육사는 당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기울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독립운동사를 다룬 지금까지의 저술들에서는 ‘민족주의’가 대세다. 이 민족주의는 무엇이고, 그 이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짧은 지식으로 곱씹어보면 ‘민족주의’는 체계를 갖춘 철학이나 사상 또는 정치적 이념의 집합체라기보다 ‘민족을 우선하는 태도’라고 두루뭉술하게 묘사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해 국권은 침탈당하고 백성들은 극심한 고통에 빠졌다.
그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으로 우리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자연발생적으로, 그러나 뚜렷하게 세워졌다. 이런 태도와 지향과 관념 등을 한데 묶어 민족주의라는 말로 압축해야 온당할 것 같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민족주의는 대부분 종교적 배경이 강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천도교·대종교와 같이 태생이 우리 민족인 경우는 예외로 치자.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무관한 외래종교이고 교리상으로도 유일신 체계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의 민족주의를 고양시켰다.
3·1운동에서 민족 대표를 자임한 사람들이 모두 종교계 지도자란 점도 주목하게 된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이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독립운동을 논하면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이분법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스스로를 어떻게 칭하느냐는 것도 중요하다는 면에서 민족주의 진영이란 말을 사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말을 슬쩍 가리는 용어라는 게 답사여행 1년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돈 생각이다.
이제 우리 독립운동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 어느 하나도 온전히 담지 못하고 민족주의라는 모호한 말로 묘사되곤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갈 차례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누가 뭐래도 헌법상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국가 아닌가? 나는 다시 간단한 배낭을 꾸려 상하이로 향했다.
[출처] : 윤태옥 중국인문다큐멘터리 전문제작자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2)>-‘초인’은 시인 아닌 투사 이육사의 깃발 /월간중앙,2017. 2
3. 피난처에서 피어난 망명객의 애잔한 사랑
신톈디 옆 마당로 청사는 두 번째… 첫 임정 청사 터는 루이완프라자 공터
3·1운동으로 결집된 해방을 향한 민족의 의지는 임시정부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앞날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 지난했던 흔적이 상하이 시내와 도시 인근에 흩어져 있다. 첫 임정 청사 터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 그리고 그로 인해 급히 피신한 김구의 피난처까지…. 피난처에서는 노 망명객과 그를 보살피던 처녀 뱃사공의 애잔한 사랑이 얽혀 있다. 그 길을 따라가보았다.
현재 상하이 루이안플라자 앞 빈 터로 남아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청사 부지와 유일하게 남은 당시 청사 사진.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법통은 물론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공화’라는 국체도 임시정부에서 그대로 이어받았다. 심지어 초대 대통령까지도….
임시정부는 광복의 순간까지 조선인 또는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강하게 항거했다는 징표이자 국제사회에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근거의 하나였다. 임시정부를 이어받은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도 전쟁과 국정파탄을 극복하고 정치·경제적으로 기적적 성장을 이룬 보기 드문 국가 사례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동전의 양면을 갖고 있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굵은 줄기였지만 전체 민족의 다수를 충분히 끌어안지는 못했다. 대한민국은 아직 두 동강난 민족의 반 토막일 뿐이고, 여전히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임정과 대한민국이 공유한 ‘초대 대통령’에서도 동전의 한쪽 그늘이 짙게 드러난다. 임시정부는 초대 대통령을 탄핵해 쫓아냈고, 대한민국은 초대 대통령을 민중의 피를 흘려가며 하야시켰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양면은 독립운동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중국 현지답사에서도 임시정부의 비중은 높을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나라 잃은 망국노(亡國奴)였고, 뭉쳐서는 망명정부를 벗어날 수 없었던 중국대륙에서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아 상하이(上海)로 간다.
빈 터로 남아 있는 첫 임시정부 청사
첫 임정 청사를 묘사한 <독립신문> 기사.
본인 기자가 쓴 1919년 <상해일일신문>의 기사를 전재한 것이다.
임시정부라고 하면 대부분 상하이 마당로(馬當路) 302~4호의 임시정부 청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내게 그곳은 늘 두 번째로 밀려난다. 첫 번째는 당연히 1919년 임시정부가 처음 만들어진 자리다. 상하이 지하철 1호선 황피난루역(黃陂南路站) 2번 출구 바로 앞, 화이하이중로(淮河中路)와 마당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의 동남쪽 코너에 루이안플라자(瑞安廣場)가 있다.
루이안플라자의 앞마당이 바로 그곳이다. 플라자 입구와 인도 사이에 호젓하게 넓은 경관용 공간이다.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곳에 있었던 한 건물에 자리 잡았다. 루이안플라자에는 ‘RUI AN PLAZA’가 아닌 ‘SHUI AN PLAZA’로 표기돼 있다. 방언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평소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상하이의 대표 관광지인 ‘신톈디(新天地)’의 입구다. 이곳에서 마당로를 따라 남쪽으로 600m쯤 걸어가면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그 임시정부 청사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두 번째 임시정부 청사다.
1919년 첫 임시정부 청사 자리, 아무런 표지도 없는 이곳에 발길이 닿는 순간 다소 황망할 수 있다. 마땅히 시선을 줄 곳이 없다.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건물 경비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피기도 한다. 텅 빈 공간에서 시선을 추스르는 데 잠시 시간이 걸린다.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시선이 산만해지곤 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현대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첫 임시정부 청사의 풍모는 어떠했을까? 1919년 <상해일일신문>의 일본인 기자가 당시 임시정부를 방문 취재했는데, 이를 <독립신문>이 전재(1919.9.30.자)한 기사가 남아 있다. 이 기사를 통해 당시 청사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당당한 집, 엄중한 경계, 정숙한 내부상태
한국 독립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가 프랑스 조계에 있다고 들었으나 한 번도 가서 본 일이 없었다. 어떤 곳인지 모르고 위험한 곳이라는 소문만 들었다. 그러나 조선독립당으로 흉도악한의 집합체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방문했다.
의외로 큼직한 건물이 울창한 수목으로 가려져 있어, 형용해 말하자면 일국의 영사관 같다. 정원은 넓고 온실화원까지 있다.
문을 지키는 인도인(당시 상하이에는 붉은 터번을 머리에 두른 인도의 시크인들이 경찰보조나 경비원 등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과 교섭해 몇 사람 양복 입은 청년들이 응답했으나 수십 분이 지나도 도저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장시간 교섭에 겨우 얼굴이 희고 수염이 없는 청년이 접견하는데 최씨라고 하면서 시간이 없다고 하여 내일을 약속하고 돌아 나왔다. 첫날은 문 안으로 서너 걸음 들어간 것이다.
다음날도 문 앞에서 여러 번 거절당했으나 최종에 최씨와 면회하게 되었다. 그가 민족주의를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것을 들으면서 관찰하니 내부의 질서는 무던히 정돈된 듯하다. 최씨는 독립운동의 근거가 심고함과 각자의 기관이 완비함을 역설하고 정부의 기초가 나날이 견고해지고 있다고 말하였으나 따로 들은 바가 있기로 내가 관찰한 바는 나중에 쓰기로 한다.”
키 큰 나무들, 붉은 터번의 인도 시크인 경비원, 정돈된 내부, 조선 민족주의에 대해 기염을 토하는 청년 등을 통해 1919년 가을의 임시정부를 대략이나마 상상할 수 있다. 전형적인 라오상하이(老上海)의 풍취가 느껴진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민족적 독립 의지가 모여 세워졌다. 3·1운동은 망국 10년 만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 대중운동이다.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淸朝)가 사라졌고, 이듬해인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독일은 제정이 몰락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됐다.
3·1운동은 외부적으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가장 큰 계기가 됐다.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의 기만적인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1918년 1월 처음 발표됐을 당시에는 세계 곳곳의 약소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27개 전승국이 전후 처리를 위해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시작된 일련의 국제회의, 소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는 동시에 3·1 만세시위를 통해 국제사회에 거족적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내보이려고 했다.
3·1운동은 천도교·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의 조직을 통해 준비됐다. 종교지도자들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문장가 최남선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종교 조직과 학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시위 계획이 전파됐다.
그러나 시위의 시작으로 알려진 3월 1일 정오 탑골공원에는 민족대표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민족대표들은 ‘폭력시위’를 우려해 종로의 한 식당에 모여 자체적인 선언식을 갖고 일본 경찰을 불러 자수했다. 침략자에 대항하는 민족의 대표라고 하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이었다.
시위는 불발에 그칠 뻔했다. 오후 2시 학생들이 이미 탑골공원으로 모여들었다. 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황해도에서 상경한 서른세 살의 기독교 전도사인 정재용 역시 탑골공원에서 무엇인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시위에 방아쇠를 당기기로 예정된 사람이 아니었다.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결국 정재용은 스스로 나섰다. 떨리는 목소리로 품 안에 간직했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제목부터 큰 소리로 읽어나갔다.
불발할 뻔했던 3·1운동
두 곳의 상하이 임시정부는 유명한 관광지인 신텐디(新天地)를 사이에 두고 600m 정도 떨어져 있다. 신텐디의 야외 카페.
“조선 독립 선언….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인의…”
학생들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모아지고, 낭독이 끝나는 순간 만세 소리가 터져나왔다!
“대한독립 만세!!”
이렇게 해서 아슬아슬하게 방아쇠가 당겨졌다. 시위는 폭발했다.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3월 중순에는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고 농촌과 산골까지 퍼져나갔다. 시위는 조직화하며 확산됐다.
3월 하순에서 4월로 넘어가면서 일본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는 공세적 시위가 크게 증가했다. 아울러 노동자대회가 시위로 연결되고 파업으로 퍼지면서 시위의 성격은 질적 변화를 보였다. 만세시위는 4월 10일을 전후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점차 수그러들면서 5월 말까지 계속됐다.
만세시위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넘어 해외로까지 퍼져 나갔다. 압록강 너머 서간도, 두만강 너머 북간도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도 마찬가지였다. 미주에서도 결의안을 채택하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시위 뉴스는 더 널리 퍼져나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조선인이 살아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지휘부가 없었다. 모든 것은 산발적이었다. 당연히 지휘부, 곧 정부 구성이 국내의 시위 현장 속에서, 국외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뜨겁게 쏟아져 나왔다.
시위 현장에 뿌려진 수많은 전단 속에서 다섯 개의 임시정부 수립 방안이 제시됐다. 주요 인사의 이름까지 거론됐으나 공통점은 모두 공화제였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의 부활, 곧 복벽주의가 아니었다. 서거한 고종에 대한 백성들의 애석함은 있었지만, 순종에 대한 기대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 혹은 대한제국은 이미 정치적으로는 소멸된 상태였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20여 만 명의 조선인을 배경으로 대한국민의회가 만들어졌다. 상하이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 국제도시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이미 상하이로 많이 몰려들었다. 이곳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달아올랐다.
국내와 만주·일본·러시아 등지의 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여들었다. 1919년 4월 11일 각 지역의 대표로 구성한 임시의정회(의회)가 만들어졌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골격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9월 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했다.
한편으로는 상하이임시정부에 앞서 만들어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작업이 병행됐다. 그러나 통합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양측이 합의해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각각 해산하고 통합하기로 했는데, 상하이임시정부 측에서 합의를 준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미 해산을 결의했던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에 다시 세워짐으로써 두 임시정부의 완전한 통합은 실패했다. 다만 연해주 측 핵심인사였던 이동휘가 1919년 11월 상하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통합의 모습을 갖췄다.
백지상태에서 각지에서 각각 활동하던 다양한 성향의 운동가와 명망가들을 결집해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어려움을 감안한다면 상하이임시정부는 조선인 다수의 독립 의지를 망라했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350~630명 피살, 800~1600명 부상, 8000~9000명 투옥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대가로 상하이임시정부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2000만 동포의 의지가 모여들었던 첫 임시정부 청사 터에는 지금 조그만 표지 하나 없다. 중국인들이야 남의 나라의 옛 이야기일 뿐이니 관심을 가질 리 없다. 우리나라도 마당로의 임시정부가 있으니 이곳까지 손길이 닿지는 않은 모양이다.
당시 건물 사진도 독립기념관에서 갖고 있는 딱 한 장뿐이라고 한다. 중심가치고는 제법 널찍한 공간이 마련돼 있어 잠시나마 머뭇거릴 공간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루이안플라자에서 마당로의 두 번째 임시정부 청사까지 거리는 고작 600m 남짓이다. 걸어가도 15분이면 넉넉하다. 왕복 2차선의 이면도로를 따라 횡단보도 네 개만 건너면 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 거리를 옮겨가는 과정, 즉 1920년부터 1926년 12월까지 임시정부의 부침은 안타까운 여정의 연속이었다.
임시정부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내부의 갈등과 부실한 조직으로 인해 위축되고 쇠락했다. 임시정부가 공들여 추진했던 외교 교섭은 모두 실패했고, 명망가들은 분열했다. 머리는 컸지만 몸뚱이는 공중에 들려진 채 발은 땅바닥에 밀착시키지 못했다. 혼돈 그 자체였다.
신텐디(新天地) 인근 마당로의 임정 두 번째 청사
상하이의 유명 관광지인 신톈디(新天地) 인근 마당로의 청사는 임시정부의 두 번째 청사다.
당장의 독립운동 방략부터 아무런 규정 없이 공허했다. 다양하게 제시된 의견을 통합해내지 못한 채 논쟁에 논쟁을 거듭하다 분열하고 말았다.
이승만 등은 대미 외교에 치중하고자 했고, 만주와 연해주 출신 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안창호는 모호한 실력양성론이었다. 기호파·서북파·미국파 등 지역에 따른 갈등도 가미됐다. 자금 문제는 갈등을 증폭시켰다.
무엇보다 1920년 전후 임시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추진했던 외교 교섭이 모두 실패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걸었던 희망은 헛발질이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전승국의 논공행상 파티였다.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눠 먹자는 것이지,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곳에 끼어들어 독립을 도모해 보겠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헛짚은 것이었다. 외교는 정의의 토론장이 아니다. 싸늘한 현실을 등에 지고 강자 중심으로 벌어지는 화려한 가면무도회다.
외교론과는 정반대의 발상을 했던 김원봉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김원봉은 “민족의 사활이 걸린 큰 문제를 외국인에게 호소해 그들의 결정을 기다린다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 열국이 무엇 때문에 우호국과 원수를 맺으면서까지 약소민족을 위해 싸워줄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김원봉은 비밀리에 뜻을 같이하던 김철성에게 권총과 실탄을 주어 파리로 보냈다. 파리강화회의 현장에서 일본 대표를 보란 듯이 척살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다. 누군가 김철성의 행장에서 권총과 실탄을 빼돌렸던 것이다.
그 다음해에 이어진 태평양회의를 목표로 한 외교활동도 실패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비판이 고조됐다. 이승만이 미국에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조선을 통치해 달라”는 소위 위임통치 청원 사실이 드러나면서 강력한 비난이 쏟아졌다. 이승만의 청원은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43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처리를 준비하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40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으니 미국이 이승만의 청원을 외교정책으로 채택했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는 꼴이 됐다.
임시정부는 재정과 조직에서도 실패했다. 1920년 임시정부는 교통국을 설치하고 비밀 행정조직으로 연통제를 통해 국내와 만주의 조선인들과 연결하고자 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실행하는 중요한 몸체였으며 자금줄이었다.
그러나 1921년 들어서면서 교통국 조직이 일제의 검거로 무너졌다. 임시정부는 조선의 인민들과는 괴리된 채 물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성과는 없고 대중조직에도 실패했으니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1923년 4월 이승만 탄핵안이 임시의정원에 제출됐고, 1924년 9월에는 ‘대통령 유고’가 결정됐다. 임시의정원은 12월 박은식을 대통령 대리로 추대했고, 다음해 3월 이승만을 탄핵해 면직시켰다.
이승만은 이에 반발해 미주동포로부터 거둬들인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에 넘기지 않고 자신의 대통령 행세에 사용했다. 임시정부의 자금난은 더욱 심해졌다.
만주에서의 무장투쟁 역시 빛나는 승전 뒤에 거센 역풍을 맞았다. 만주의 독립군들은 통일된 체계를 갖추지 못했지만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의 청산리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두 번의 승전은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큰 충격이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까지 연전연승을 구가하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민병대 수준의 독립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승리가 안겨준 자긍심은 하늘을 찔렀지만 일제의 보복으로 선혈이 낭자했다. 일본은 군대를 증파해 대대적 토벌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군이 뿌리를 내린 북간도 지역의 조선인 부락을 무차별적으로 초토화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3600여 명이 피살되고 상당수의 가옥이 불탔다.
독립군은 소련 땅 연해주로 밀려갔다. 약소민족을 지원한다는 레닌의 정책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을 받아주면 대일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일본의 강한 반발로 소련은 조선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다.
독립군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소련군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독립투사가 허무하게 학살당했다. 주변 강국으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가슴 아픈 망국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상하이임시정부를 주목시킨 김구의 ‘의열투쟁
윤봉길 의사의 거사 현장인 훙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루쉰공원 내 매헌에서 바라본 매화.
임시정부 외부에서 임시정부와 이승만을 비판하는 세력은 주로 베이징에 많았다. 이들 임정 비판세력은 1920년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제기된 주요한 비판은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유임시켜 민족의 체면을 손상한 점, 사당(私黨)을 불식하지 않아 민심을 분열시킨 점 등이다. 임시의정원이 널리 국내외 동포의 의사를 구하지 않고 극소수의 사람만으로 대표를 구성한 점,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과 이를 인지한 안창호를 각기 국무총리와 내무총장으로 임명한 점, 대한국민의회와 사기적 교섭을 한 점 등을 들어 임시의정원을 불승인한다”는 것이었다.
1921년 상하이의 주요 운동가들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자고 제창했다. 베이징의 임정 비판 세력들이 이에 동조했고,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도 이승만 퇴진과 임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1923년 1월 지역대표와 단체대표로 인정된 130여 명이 상하이에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독립운동 사상 가장 큰 규모의 회의가 4개월 정도 지속됐다.
참석자들은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와 임정을 개혁하자는 개조파로 나뉘었다. 두 주장이 맞서다 개조파가 대회에서 탈퇴하는 바람에 반쪽이 됐다. 창조파 80여 명이 남아 새 임시정부로 조선공화국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우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새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1923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 2월 소련이 이들에게 국외 퇴거를 요구하면서 조선공화국 수립 자체가 무산됐다. 국민대표회의도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내분과 논쟁을 거치며 쪼그라들어 간판만 남게 됐다. 1925년 박은식이 사망한 이후 1년 동안은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도 공석이고 내각을 구성하지도 못한 채 정치적 빈혈 상태에서 휘청거렸다. 1926년 12월 김구가 국무령 직을 수락해 그나마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26년부터 임시정부가 자리잡았던 곳이 바로 최근 많은 한국인이 찾는 마당로의 임시정부다. 상하이 도심 신텐디(新天地) 근처 푸칭리(普慶里) 골목 안이다. 연립주택 세 채를 묶어 복원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하이시 루완(盧灣)구 인민정부가 1990년 루완구의 보호문물로 지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舊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를 성공시키고, 그 후폭풍으로 항저우((杭州)로 옮겨갈 때까지 임시정부는 이곳에 있었다.
김구가 정치적 빈혈로 허덕이던 임시정부를 위해 만든 출구는 의열투쟁이었다. 임시정부는 김구의 책임 아래 1931년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 요인을 암살하거나 주요 시설을 폭파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 전반 임시정부는 김원봉의 의열단 투쟁을 부정했다. 1922년 3월 의열단이 상하이 와이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임시정부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과격주의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비난해 많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그랬던 임시정부가 의열투쟁을 도입한 것이다.
임시정부 의열투쟁의 가장 극적인 성과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다. 일본군은 1932년 1월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상하이에 진주했고, 일왕의 생일에 맞춰 전승 축하 행사를 훙커우공원에서 거행했다. 이 행사장에 잠입한 윤봉길은 단상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강도 일본의 상하이 수뇌부 면상에서 폭발했다. 조선과 중국 침략에 앞장서온 군부와 정·관계 핵심 인물 다수를 살상했다. 일본은 경악했다. 조선인들은 살아있는 항일투쟁에 환호했다.
중국은 조선의 강력한 항일투쟁에 놀랐고, 세계는 조선이 살아있음을 다시 인식했다. 특히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를 격동 시켰다. 이 사건 이후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윤봉길이 임시정부를 회생시킨 것이다.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에 중국인들까지 격동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일제의 단속을 피해 임시정부는 급히 상하이를 떠나 유랑길에 오른다.
이후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지도.
후폭풍은 거셌다. 김구를 포함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모두 잠적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후 김구의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 그리고 치장(綦江)을 거쳐 1940년 충칭(重慶)에 자리 잡을 때까지 유랑과 다름없는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임시정부를 되살려낸 윤봉길의 거사 현장인 훙커우공원은 지금 루쉰공원(魯迅公園)으로 바뀌어 있다. 루쉰공원 안에 입장료를 따로 내고 들어갈 수 있는 매원(梅園)의 매헌(梅軒)이 바로 윤봉길의 생애사적 진열관이다.
윤봉길의 생애와 거사의 앞뒤를 설명하는 자료들이 깔끔하게 전시돼 있다. 그의 전기를 입체적으로 읽는 것 같다. 서울 양재동의 ‘시민의 숲’에도 윤봉길 동상과 매헌기념관이 있다.
장제스의 윤봉길 찬사는 대단했다. 장제스가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69년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헌시를 써 윤봉길 기념사업회에 보내기도 했다.
別順逆辦是非(순리와 역리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판별하였고)
明大義知生死(대의를 밝히고 생사의 도를 깨달았구나.)
留正氣在天地之間(하늘과 땅 사이에 정의의 기개를 남겼으며)
取義成仁永垂不朽(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니 영원할 것이라.)
상하이의 유서 깊은 공원 한가운데 있는 윤봉길전시관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되새기게 한다. 윤봉길의 의거는 장제스 시대에 장제스 관할지역에서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중화민국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윤봉길기념관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신중국이 배려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공산당 역시 타이항산(太行山) 지역에서 팔로군이 조선의용대와 합동작전을 펼쳤다. 만주에서는 동북 항일연군 등을 통해 조선인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장제스의 중국이든 마오쩌둥의 중국이든, 중국이 우리 독립운동의 실질적 동맹이란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데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윤봉길기념관에서 내 머릿속에 진하게 남겨진 한마디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는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윤봉길이 집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그는 집을 떠나 남의 나라 땅에서 거사를 일으켰고, 일본의 사형장에서 죽어 해방된 뒤에야 유골함에 실려 돌아왔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장중하고 묵직하다. 소심한 생활인으로서는 그것을 읽기조차 버겁다.
윤봉길의 폭탄이 터지기 직전부터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조선인이란 조선인은 전부 잡아들일 듯 악을 쓰고 상하이 전역을 들쑤시고 다녔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서둘러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도피했다. 항저우에서도 이리 숨고 저리 옮기면서 18개월 정도를 버텼다.
타국에서의 도피란 누군가의 적극적 방조가 있어야 한다. 바로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중국인들이었다. 쑨원(孫文)의 중화민국도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장제스의 중화민국도 1942년에야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임시정부가 조선 전체를 대표하기엔 역부족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시정부를 승인해 일본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게 그들의 국익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내밀하게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국제조약은 없었지만 실질관계로 보면 임시정부의 동맹은 이승만이 매달리던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미국 정부는 1948년 모스크바 3상회의까지 단 한 번도 조선의 독립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독립운동의 실질적 동맹은 중국
1, 2. 자싱(嘉興)시 중심부의 고풍스러운 맛이 나는 옛 거리 메이완(梅灣)가 남쪽에 접한 시난후(西南湖) 주변의 김구 피난처. 김구는 이곳에서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 (朱愛寶)와 부부 행세를 하며 지냈다. / 3. 김구의 두 번째 피신처인 차이칭 별장(載靑別墅).
쑨원의 중화민국,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마오쩌둥의 공산당 모두 조선인에게는 실질적인 동맹이었고 고마운 이웃이었다. 그 증표의 하나가 상하이를 탈출한 김구와 임시정부에 대한 중화민국과 중국인의 적극적인 지원이다.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지금의 중국정부가 사적지로 보존하는 항저우의 김구 피난처 두 곳에서도 독립운동의 실질적 동맹이 누구였는지 느낄 수 있다.
김구 피난처 중 한 곳은 상하이 중심에서 서남쪽으로 110여㎞ 떨어진 자싱(嘉興)시 중심부의 메이완(梅灣)가라는 옛 거리에 있다. 고풍스러운 맛이 나는 옛 거리다. 깔끔하게 잘 복원돼 있다.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메이완가 남쪽에 접해 있는 시난후(西南湖) 가에 김구의 피난처가 있다. 메이완가 안내판에 표시돼 있어 찾기도 쉽다. 관리인이 상주하는데, 2층의 김구 침실까지 둘러볼 수 있다.
김구를 피신시킨 사람은 국민당 원로이자 당시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인 추푸청(楮輔成)이다. 당시 일제는 상하이사변에서 승리해 상하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훙커우사건의 책임자를 숨겨준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김구를 수륜사(秀綸絲)라는 공장에 피신시켰다 동탑사(東塔寺)를 거쳐 이곳으로 옮기게 했다.
김구가 피신한 집은 추푸청의 수양아들인 천퉁성(陳桐生)의 집이다. 2층 집인데 김구는 2층 침실에 기거했다. 침실 바닥에는 1층 현관 쪽을 내다볼 수 있는 조그만 창을 냈다.
1층 복도로 내려가 바로 쪽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비상구와 사다리도 있다. 평상시에도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가 젓는 놀잇배를 타고 호수 위에서 하루를 보낼 때도 많았다. 주아이바오는 5년여나 부부로 위장해 김구를 보살폈다.
1932년 여름 자싱역에 일본의 밀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이 김구의 종적을 탐지한 것이다. 위험이 다가오자 추푸청은 김구를 자싱의 남부 하이옌(海盐)현에 있는 차이칭이란 별장(載靑別墅)으로 옮기게 했다. 그곳은 추푸청 큰 아들의 처가, 곧 사돈의 별장이었다.
이곳 역시 김구 피난처라는 이름의 유적지로 보존돼 있다. 차이칭 별장은 메이완가에서 남쪽으로 35㎞가량 떨어져 있다. 하이옌의 난베이후(南北湖)가에 있다. 난베이후는 산과 강과 호수가 어우러진 관광지다. 우리 정부는 1996년 추푸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가족들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독립운동의 동맹에 대한 감사 표시다.
*붙임: 지난호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2’ 기사의 ‘육사의 가계도’ 가운데 육사의 외삼촌 허규의 큰아들은 ‘허화’가 아니라 ‘허엽’으로 바로잡습니다.
[출처] : 윤태옥 중국인문다큐멘터리 전문제작자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3)>-피난처에서 피어난 망명객의 애잔한 사랑 /월간중앙,2017. 3
4. “사랑이여! 자유 위해서라면 그대마저 바치리”
어느 애송이 독립투사의 애틋한 사랑과 이별이 깃든 상하이 아이런리(愛仁里) 42호… 인기 관광지인 난징둥루 중심가엔 고려공산당 창당의 역사 밴 건물도 남아
마오쩌둥(毛澤東)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반혁명 작가. 조선의용대원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 ‘최후의 분대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사람.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간 재중작가 김학철. 그가 조선민족혁명당 상하이행동대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당시의 자취를 따라 간다. 일부러 가리거나 짐짓 외면했던 공산주의 계열의 행적도 함께 떠오른다.
상하이는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용광로였다. 서구 열강들에게는 군대와 자본과 탐욕을 쏟아붓는 창구였고, 중국인들에게는 신문물을 찾아가는 출구였다. 오늘날의 상하이.
상하이(上海)는 우리가 일제의 강점 하에 신음을 토해내던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용광로였다. 1843년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상하이. 서구 열강에는 제국주의를 앞세워 군대와 자본과 탐욕을 쏟아 부은 항아리이자, 중국인들에게는 전통시대를 내던지고 신문물을 찾아가는 대양으로의 출구였다.
개항 당시 20만 명이던 인구는 19세기 말 50만 명을 넘었고, 1920년대에 이미 300만 명을 돌파해 대상하이(大上海)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엄연히 중국 땅이었지만 치외법권이라는 깃발을 꽂은 조계지가 깨진 유리알처럼 박혀 있는 기묘한 다국적 도시. 서양과 일본의 민간회사와, 그들을 위해 일하는 중국인 매판들과,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여행객이 넘쳤다. 아편에서 영화까지, 경극에서 발레까지, 치파오(旗袍)에서 영국 신사복까지 서양과 일본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 뒤섞였다.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이 조선혁명당 상하이행동대로 활약하던 시절에 머문 아이런리 42호의 현재.
왼쪽 붉은 원 부분이 입구다. 이곳에서 김학철과 송일엽의 사랑도 함께 익어갔다.
정치적인 용광로이기도 했다. 아나키즘부터 자유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까지, 파시즘의 민족주의에서 식민지의 저항 민족주의까지, 이념과 사상과 주의가 끓어올랐다. 그런가 하면 각국의 군대와 헌병과 경찰, 일본의 밀정과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한데 섞여 음험하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제5전선이었다.
사람들은 더욱 다양했다. 인력거꾼에서 중국인 세관원까지, 미국 외교관에서 일본 경찰까지, 영국 무역상에서 장쑤(江蘇)성의 매판까지, 인도의 시크인 경비원에서 볼셰비키 혁명에 떠밀려온 유대인에 고려인삼을 팔러 온 조선인까지, 그리고 일제에 반항하는 조선인 망명객과 그들을 잡아 일본에 넘기려는 밀정들까지…. 조선인 망명객 가운데는 노신사와 중년의 사내는 물론 여성과 스물도 채 안 된 애송이도 있었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순진한 일념으로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라는 거대한 도시로 뛰어든 한 독립운동가의 청년기를 찾아 필자는 상하이로 날아갔다.
그곳은 당시의 주소로 말하면 프랑스조계 포시가(프랑스 육군 원수의 이름에서 따온 가로명) 아이런리(愛仁里) 42호다. 지금 주소로는 베이징시루(北京西路) 218룽(弄) 4~11호다.
황허루(黃河路)와 베이징시루가 교차하는 사거리의 서북쪽 코너. ‘룽’은 ‘골목’이라는 뜻으로, 상하이 등지에서 제(街)나 루(路) 아래 주소로 쓰이는 말이다. 아이런리는 작은 주택단지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기억의 주인공은 항일독립군 조선의용대에서 ‘최후의 분대장’으로 불리는 김학철(본명 홍성걸)이다. 김학철은 1935년 늦은 여름, 스무 살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며 임시정부를 찾아왔으나, 아이런리 42호에 머무르면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의열단의 후신)에 들어가 상하이 특구의 행동대와 선전대의 일원으로 암약했다. 이곳에서 김학철이 연상의 여인 송일엽과 사랑하고 이별했던 이야기가 영화처럼 펼쳐졌다.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함경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중학교는 서울에서 유학했다. 보성고보에 재학 중이던 1935년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각오로 학비를 들고 교복차림 그대로 서울을 떠났다. 상하이로 향한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햇병아리로 몇 가지 황당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압록강을 건너 선양(瀋陽)과 친황다오(秦皇島)·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무사히 상하이역에 도착했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그는 인력거꾼이 데려다 준 동양관이라는 일본여관에 투숙했다.
학생복차림 탓에 인력거꾼이 일본인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하루 숙박비가 쌀 반 가마니나 되는 비싼 곳에서 하루를 자고는 다음날 부리나케 훙커우(虹口)의 싸구려 중국여관으로 옮겨 갔다.
중국여관으로 숙소를 옮기고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아 나섰다. 운 좋게 걸어서 10분 만에 ‘조선요리 경성(京城)식당’이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실내는 서양식이었다. 그가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데 치파오 위에 스프링코트를 걸치고 핸드백을 든 30대 후반의 미인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이 여인은 김혜숙이었다. 당시 서울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펼치다 일본 경찰에 잡혀 투옥돼 있던 정태희(1898~1952,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의 부인이다. 김혜숙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본부는 난징)이 상하이에 둔 촉수 중 한 사람이었다.
주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김혜숙은 다짜고짜 김학철의 테이블로 가서 맞은편에 앉았다. 어수룩한 김학철은 자기 집에 빈 방이 있다는 김혜숙의 말에 그날로 숙소를 옮겼다. 2층 집이었는데 그게 바로 아이런리 42호다. 60여 가구가 함께 사는 상하이식 연립주택 가운데 하나다.
김혜숙은 김학철에게 2층 가운데 방을 내주었다. 한쪽은 김혜숙의 방이었고, 다른 한쪽은 김혜숙의 이종사촌동생인 송일엽의 방이었다. 송일엽은 공동조계에 있는 메트로폴리탄(大都會舞廳)이라는 클럽의 ‘택시 댄서’, 손님들의 사교춤 파트너가 되어주는 직업 댄서였다.
자정이 지나야 귀가하고 아침에도 열 시는 넘어야 기동하는 터여서 처음에는 두 사람이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아무튼 상하이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김학철은 독립운동 조직의 시야에 들었고 안전한 숙소까지 잡았으니 그에게는 나름 행운이었다.
김혜숙의 집에 방을 얻어 산 지 며칠이 지나자 김혜숙은 김학철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김학철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훙커우(虹口)공원이 어딘지 물었다. 하루 종일 함께 구경을 다닌 다음날 김학철은 자신이 임시정부를 찾아왔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김혜숙은 실망스러운 답을 했다.
“그 하늘같이 바라고 온 임시정부가 지금은 상하이에 없다고요. 지난번 그 폭탄사건(윤봉길의 훙커우 투탄 의거)으로 이 조계에서 배겨나지 못해 풍비박산했거든요. 사실 임시정부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죠.”
김학철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활동하려면 중국어와 영어를 먼저 공부하라는 김혜숙의 말에 따라 중국어와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국어 교사는 김혜숙이 소개한 심성운(본명 심상휘)이라는 조선인이었다.
김학철이 당시에는 몰랐지만 심성운은 조선민족혁명당 상하이특구 선전부장이었다. 김학철에 관한 김혜숙의 보고를 듣고 김학철을 포섭하기 위한 1단계 조치였던 셈이다. 영어는 김혜숙과 송일엽으로부터 배웠다.
상하이에 도착한 지 두어 달이 되자 순진한 김학철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남녀상열지사가 벌어졌다. 김학철의 회고를 인용하면 이렇다.
“어느 날 밤 곤히 자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있어서 돌아누우려 했더니 침대가 유별나게 비좁은 것 같았다. 영문을 몰라 잠이 가득 실린 눈을 떠보니, 아~ 이게 웬일이냐! 술내· 분내·향수내 따위를 뒤섞어 풍기는 여자 하나가 내 싱글베드의 거의 절반을 딱 차지하고 있잖은가. 내가 깜짝 놀라 일어나려 하니 그 여자는 한 번 킥 웃고는 ‘푸울(Fool)!’ 하고 내 목에 팔을 감는 것이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자정이 퍽 지나서야 돌아온 송일엽이었다.”
긴장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망국노 내지 망명객 신세의 남녀가 가까이 살면서 자연스레 사랑의 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통속적인 듯하지만, 음미할수록 외국의 어느 골목에서 만난 두 남녀의 애틋한 연분에서는 신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런 곡절을 거쳐 김학철의 진심을 확인한 조선민족혁명당은 그를 1936년 난징으로 데려가 입당시켰다. 입당한 김학철은 상하이특구의 행동대에 배치돼 돌아왔다.
행동대는 조선인·일본인 등을 대상으로 목표 인물을 처단하거나 금품을 강탈해 활동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러 비밀작전을 펼쳤다. 행동대장은 노철룡(일명 최성장,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방호산부대 참모장, 전후 군사정변 획책혐의로 총살됨)이었다.
혁명의 길에도 사랑은 있다
김학철은 후자좡(胡家庄)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상을 당한 채 포로가 돼 일본 나가사키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총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 해야 했다.
송일엽은 그날 이후 김학철의 연인이자 동지가 됐다. 그녀는 클럽에서 일본인을 상대하면서 얻은 정보를 민족혁명당에 전해주었다. 송일엽의 오빠는, 영국 상하이해관에서 마약거래상에게 받은 뒷돈으로 치부한 어느 조선인을 턴 주인공이다. 그러나 다른 사건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희생됐다.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터뜨렸다. 전쟁이 터지자 김학철은 상하이행동대에서 선전대로 전보됐다. 중국의 라디오 방송이 매일 밤 10분씩을 조선민족혁명당에 할애했고, 김학철은 ‘동포들에게 고함’이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매일 출연했다. 송일엽도 몇 차례 함께 출연했다.
그러던 1937년 8월 13일 난징의 본부에서 소집령이 떨어졌고, 김학철은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은 정규 군대를 갖춰 항일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 김학철을 포함한 젊은 대원들을 난징으로 소집했던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계획은 국민당정부의 협조를 받아 장제스 측의 군관학교에서 군관 교육을 시켜 정식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김학철은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될 때 창설 멤버가 됐다.
조선의용대 안에는 장제스의 항일 의지가 희박하고 반공에만 집착하는 것에 실망한 대원들이 많았다. 결국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타이항산(太行山)의 팔로군(중국공산당 군대)과 합류하기 위해 1941년 초 황하(黃河)를 건너 북상했다. 김학철도 함께 북상했다.
그러나 1941년 일본군과의 후자좡(胡家庄, 이 부분은 연재 7회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포로가 돼 일본 나가사키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총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해방 후 그는 외다리로 귀국했다. 서울에서 좌우 갈등이 격해지면서 1946년 월북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신체가 온전치 못했던 김학철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베이징(北京)에서는 중국 측이 배려해 이화원(頤和園) 안에 있는 소와전(邵窩殿)이라는 자그마한 전각에서 2년간 살기도 했다. 그 이후 옌볜(延邊)에 정착해 작가로 살았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삶은 또 다른 고난의 협곡이었다. 1957년 중국의 소위 반우파투쟁에 걸려들어 강제노역에 처해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때 김학철은 마오쩌둥(毛澤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썼다.
그러다 1967년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이 미발표 소설이 발각됐다. 그는 반혁명작가로 낙인 찍혀 1977년까지 10년 동안 지옥 같은 감옥살이를 했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뜨고 난 뒤인 1980년에야 복권됐고, 그 이후 계속 작품활동을 하다 2001년 세상을 떠났다.
김학철에게는 조선의용대원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 당시를 증언했기 때문에 ‘최후의 분대장’이라는 별칭이 남았다. 그의 일생은 우리가 질곡 속에서 일부러 가리고, 모른 체 지우고, 짐짓 외면했던 치열한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김학철이 애송이 시절 조선의 독립혁명에 몸을 던져 한편으로는 달콤한 사랑을 맛보며 머물렀던 곳이 바로 아이런리 42호다. 1937년 8월 김학철이 민족혁명당의 소집령을 받고 상하이를 떠나던 날, 연상의 연인 송일엽이 “못 가요, 못 가요. 못 간다니까!” 하고 외치면서 “눈물을 뿌리며 몸부림치던” 곳이기도 하다.
김학철은 “상하이를 떠나면서 미쳐날 지경으로 격동해 헝가리의 시인 페데피의 시 ‘사랑이여’를 읊조리고 읊조리고 또 읊조렸다”고 회상했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하지만 사랑이여/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상하이에서 시간 여유가 있거든 아이런리 42호를 찾아보시라. 아니, 일부러라도 한 번쯤 찾아볼 일이다. 지금도 아이런리라는 작은 표지가 문루 상단에 남아 있다. 그 안쪽으로 들어가보라. 어느 집이 42호인지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으나 분명히 어느 독립투사의 애틋한 사랑과 가슴 저린 이별이 그곳에 깃들여 있을 터이다.
와이탄 저격사건의 추억
상하이의 상징이기도 한 와이탄 북단의 황푸공원.
이곳에서 의열단의 김익상·오성륜·이종암 등 세 요원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상하이에는 우리가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독립운동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1910년부터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한 1937년까지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상하이를 오갔으니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사연이 깃들여 있겠는가? 그 가운데 하나가 와이탄(外灘)이다. 상하이를 찾는 외국인은 물론 타지의 중국인 역시 상하이에 오면 꼭 찾는 곳이다.
강변 도로를 따라 근대 서양식 건축이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강 건너 푸둥(浦東) 지역에는 방송관제탑인 둥팡밍주(東方明珠)와 현대식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와이탄은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의열단(단장 김원봉)의 김익상·오성륜·이종암 등 세 요원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려 했던 곳도 와이탄이다.
상하이임시정부가 내분으로 몸살을 앓을 때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비판하면서 의열투쟁을, 그야말로 맹렬하게 전개했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1922년 다나카 일본 육군 대장을 암살 목표로 잡았다. 다나카는 일본제국의 영토 확장이라는 국가전략의 지도적 이론가였으며, ‘다나카 상주문’이라는 유명한 글을 쓴 장본인이다.
의열단은 다나카가 필리핀에서 도쿄(東京)로 귀국하는 길에 상하이에 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다나카가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하선하는 순간을 노렸다. 오성륜이 권총으로 저격하고, 김익상은 폭탄을 던지기로 했다. 최후에는 이종암이 칼로 처단하기로 했다.
김익상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심산 김창숙의 소개로 김원봉을 알게 됐고, 그의 시국담에 감동해 의열단에 합류했다.
그는 1921년 9월 12일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해 경성의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제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쉽게도 그가 폭탄을 던진 방은 총독 집무실이 아니라 비서실이었다. 그는 폭탄을 투척한 뒤 총독부 안팎이 소란한 틈을 타 유유히 빠져 나와 베이징으로 귀환했다. 신출귀몰이었다.
와이탄 거사 당일 그곳, 오성륜이 먼저 권총을 쏘았으나 불행히 다나카 뒤에 있던 영국 여성이 총을 맞고 절명했다. 뒤이어 김익상이 폭탄을 던졌으나 한 선원이 발로 차 강물에 빠뜨리는 바람에 불발되고 말았다. 다나카는 곧바로 피신했고, 김익상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김익상은 일본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감형을 거쳐 20년을 복역했는데, 출소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인 경찰과 함께 나간 뒤 실종됐다고 하니 그들의 손에 죽은 듯하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오성륜은 도주하면서 경찰 몇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자동차를 탈취해 도주했으나 영국 경찰에 붙잡혔다. 영국 경찰은 오성륜의 거주지가 프랑스조계라는 이유로 프랑스에 넘겼고, 프랑스는 다시 일본 영사에게 넘겼다.
오성륜은 일본 영사관 3층 감옥에 수감됐다. 감옥에는 일본인 다섯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일본인 수감자는 조선인 오성륜을 동정했고, 오성륜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했다.
<아리랑> 김산의 멘토, 오성륜
상하이의 유명 관광지인 난징둥루 한가운데 스제광창(世纪广场) 서북쪽 모서리의 진장즈싱(锦江之星) 호텔 체인 건물. 고려공산당이 출발한 곳으로, 당시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오성륜은 한 미국인 집에 숨어 있다 광둥(廣東)을 거쳐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이곳에서 독일 아가씨와 연애하면서 한동안 그녀의 집에서 살기도 했다. 이후 오성륜은 독일의 소련 영사를 찾아갔고, 소련은 그를 모스크바로 보내주었다.
모스크바 동양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오성륜은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4년 만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마치 한 편의 스파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런 시대였다.
이들이 다나카를 암살하려 했던 곳은 와이탄 북단에 있는 황푸(黃浦)공원이다. 황푸강 건너로는 둥팡밍주 탑이 마주 보인다. 상하이시 인민영웅기념탑과 황푸공원 수문참(水文站)이 있다. 아마도 그 사이 어디쯤 아닐까? 독립운동가의 암살과 밀정의 암약이 툭툭 튕겨 나오던 시대의 상하이였다.
오성륜은 김산의 <아리랑>에서 김산의 멘토로 등장한다. 김산이 열여섯 살이던 1921년, 서른 살의 오성륜을 상하이에서 처음 만났다. 1926년 광저우에서는 한 조가 되어 활동했다. 김산은 공개적인 지도자였고, 오성륜은 그의 뒤에 있는 비밀 지도자였다. 오성륜은 1927년 12월 중국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 봉기에 김산과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광저우 봉기는 3일천하로 끝나고 중국국민당 군벌에 쫓겨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다 김산과 헤어졌다. 생사를 모르고 서로 죽은 것으로 생각하던 김산과 오성륜은 1928년 10월 상하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이 재회한 곳도 바로 이곳 와이탄이었다. 김산은 오성륜과 재회 장면을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어느 날 나는 황푸강을 쳐다보면서 황푸탄을 따라 무작정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환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얼굴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익히 알고 있는 뼈만 앙상한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었어!’ 우리는 마치 한 몸인 듯 얼마 동안은 못 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오성륜이 우는 표시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후 오성륜은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갔다. 1930년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고, 1936년 항일민족 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8년 만주지역의 동북인민혁명군과 이외의 항일무장단체가 연합해 창립한 항일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김일성의 상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1년 일제에 검거된 이후 변절해 일본 경찰에 협력하다 일제가 패망하자 팔로군에 체포됐다.
와이탄에서 멀지 않은 난징둥루(南京东路)의 보행가 역시 필수 관광 코스의 하나다. 널찍한 보행가를 걸으면서 즐기는 화려한 야경은 중국에 중국이 아닌 곳이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듯하다.
100년씩은 됐음직한 유럽식 건축에는 라오상하이(老上海)의 정취가 가득하고, 좌우로 즐비한 현대 건축물들은 세련된 의상이나 첨단 IT 기기들과 함께 21세기의 상하이를 자랑한다.
난징둥루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사적지 하나를 찾아볼 수 있다. 난징둥루의 보행가는 동서로 약 1㎞다. 그 중간에 스제광창(世纪广场)이 있고, 이 광장의 서북방향으로 셴스다루(先施大楼)라는 바로크식 외관을 한 건물이 있다. 상하이를 방문했던 여행객이라면 몇 번이고 스쳐 지났을 곳이다.
이 건물 1층에는 상하이 패션스토어(上海时装商店)가 있고, 2층 이상으로는 진장즈싱(锦江之星)이라는 유명 체인 호텔이 들어서 있다. 주소는 난징둥루 670호. 이 건물은 해방 이전에 상하이 4대 기업 가운데 하나였던 셴스공사가 1917년 백화점과 호텔 등을 개업한 곳이다.
진장즈싱 호텔 입구가 1층의 중간에 있는데, 그 입구에 이 건물이 셴스공사가 있던 곳이라는 동판 표지가 부착돼 있다.
난징둥루(南京东路)에 남은 고려공산당의 자취
바로 이곳에서 1922년 고려공산당이 창당됐다.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국내 대표 8인을 비롯해 중국과 러시아에서 온 20여 명이 모여 회의를 했다. 이동휘 위원장을 수위로 13인의 중앙위원을 선임했다.
박헌영도 상하이와 인연이 있다. 박헌영은 1920년 11월 상하이로 왔다. 1921년 3월 고려공산당 산하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고려공청은 공산당원 중에서도 활동력이 왕성한 청년들의 조직이었다. 박헌영은 1922년 3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는 국내로 활동기반을 옮기기 위해 입국했다가 체포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훗날 그는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창건했고, 일본 제국주의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검거와 투옥, 출옥과 탈출, 재건과 검거라는 고난의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고문강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명예로운 별칭이지만, 그만큼 극심한 고문을 온몸으로 당해야 했다. 심지어 정신이 이상해지면서 자기 똥을 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해방 직전 마지막 몇 년 동안 박헌영은 완전히 잠행하며 체포되지 않은 조직원들과 연락하고 있었다. 그는 해방의 순간까지 살아남았다. 해방된 서울에는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지여! 어서 나타나 있는 곳을 알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아갈 길을 지도하라!”는 포스터가 나붙을 정도로 신망 높은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였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배운 독립운동가는 김좌진·유관순·김구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희미했다. 특히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나 공산당이라는 말은 끼어들 수 없는 금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분단과 이념 대결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남과 북의 권력자들이 합작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3·1운동에서 확인되듯 독립의 열망은 황제의 나라 제국(帝國)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나라 민국(民國)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때 독립된 나라를 어떤 시스템으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사람에 따라 자본주의나 아나키즘 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향했다. 어떤 사회를 지향하든 그들의 공동 목표는 민족의 독립과 국권의 회복이었다.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라고 해서 가리거나 깎아 내릴 이유가 없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해방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은, 국내와 만주와 타이항산 등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의 독립운동이 다수를 점한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중국에서 김구가 고집스럽게 임시정부라는 간판 아래 활동을 지속했을 뿐이었다.
국내에서도 끝까지 버틴 독립운동가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이었다. 반면 민족주의 진영의 운동가는 대부분 친일로 변절하고 말았다.
무장투쟁에서도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아쉽게도 일본군을 향해 단 한발의 총도 발사하지 못했다. 실제로 일본군을 향해 총을 쏜 것은 타이항산의 조선의용대 혹은 조선의용군과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이었다. 이것이 실제로 전개된 역사다.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에 맞춰 일어난 1926년의 6·10만세운동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중심이 돼 산발적 항일투쟁을 한데 모아 투쟁지도부를 결성해 주도한 것이다.
1946년 4월 박헌영은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선언에서 이렇게 썼다.
실제로 전개된 역사는 다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해방까지 조선의 독립 운동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의 독립운동이 다수를 점한다. 1926년 신의주공산당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헌영(가운데). 오른쪽은 윤덕병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국내에서만 수천의 생명을 희생하였고 (누계로 하면) 6만 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우리가 단독으로 일본 제국주의자의 집중적 공격을 받은 것은 당 발전에 커다란 지장이었으나, 동시에 조선 민족 부르주아의 커다란 수치다. 그들도 당연히 우리와 공동전선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반항하여 투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해방사에서 그런 영웅적인 호화로운 기록은 없다. 우리는 새 역사의 첫 페이지에 그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금자(金字)로 기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물론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선언이니 그에 따른 수사와 과장이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주체인 조선공산당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는 말로 치환하면 독립운동의 실상에 훨씬 근접하게 된다.
분단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실정법을 기반으로 부여하는 독립유공자의 영예를, 김일성 정권 수립과 6·25라는 민족적 대비극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사에서 그들을 삭제하거나 저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다. 우리에게는 독립운동의 온전한 역사를 정리해 후손에게 전할 의무가 있다. 상하이 난징둥루 보행가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같은 맥락에서 1920년대 중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포함한 많은 조선인이 독립의 희망을 품고 모여들었던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를 찾아간다. 그곳에서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생애를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윤태옥 중국인문다큐멘터리 전문제작자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4)>-“사랑이여! 자유 위해서라면 그대마저 바치리” /월간중앙,2017. 4
5. 배신의 광풍 속에 물거품이 된 광복의 꿈 - 세상이 몇 번 뒤집어진 다음에야 되찾
은 이름, 김산… 님 웨일스의 손을 빌려 쓴 회고록 <아리랑>에 회한 남겨
독립운동가 김산. 그의 생애는 미국의 작가 님 웨일스의 손을 빌려 쓴 회고록 제목인 <아리랑>만큼이나 한스럽고 처절하다. 그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멍에를 메고, 일제 간첩이라는 용수를 쓰고, 함께 투쟁하던 동지들의 손에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고도 독립투쟁이 아니라 중국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조국으로부터도 한동안 외면받았다. 그러나 그가 집을 떠나 압록강을 넘은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질곡의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현기증 나는 그의 한 많은 생애를 광둥에서 만난다.
광저우 봉기를 기념하는 광저우 치의리에시링 위안(广州起义烈士 陵园)의 석탑.
아리랑은 내게 두 번의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가 내한공연에서 선보인 연주곡 ‘아리랑’이다. 일렉트로닉 기타의 고고한 쇳소리를 휘어 퉁기는 선율로 시작해 합창단의 허밍으로 받쳐주는 아름다운 연주곡이다. 폴 모리아의 아리랑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처연함 대신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느낌으로, 내겐 충격이었다. 사랑스런 아리랑에 흠뻑 젖어본 다음에야 나는 가슴 저린 한의 아리랑도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게 1980년 전후였다.
아리랑으로 인한 두 번째 충격은 중국대륙을 누빈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이야기 <아리랑>(1984, 동녘)을 읽으면서였다. 광저우 봉기, 삼일천하, 해륙풍 소비에트, 테러리스트, 옌안, 님 웨일스(Nym Wales) 같은 낯선 어휘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중국의 공산혁명에 왜 조선인 젊은이들이 죽어갔을까? 충격이었다. 김산이 피신했던 해륙풍 소비에트는 환상 속의 소국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결혼을 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8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 후 내 생활은 일상의 과제들로 채워지면서 폴 모리아와 김산은 기억창고로 밀려났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16년 1월 나는 스마트폰에 폴 모리아의 ‘아리랑’을 담고, 중고서적으로 다시 구입한 김산의 <아리랑>을 배낭 속에 넣고 광저우(廣州)행 비행기를 탔다.
김산이 생사를 걸고 헤매던 그곳에서 그의 아리랑을 음미해보고 싶었다. 비행기는 어둑한 시간에 광저우 바이윈(白云) 공항에 나를 내려주었다.
광저우에 도착한 그날 밤 바로 광저우치의리에시링위안(广州起义烈士陵园)을 찾아갔다. 능원(陵园) 중앙에는 손으로 움켜쥔 구식 총이 하늘을 향하는 형상의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경관조명 덕분에 한결 멋지게 보였지만, 기념비에 총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이 생경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생생한 혁명의 전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탑의 기저부에는 ‘광저우치의(广州起义)’당시의 시가전을 부조로 새겼다. 기념탑 옆의 나무에 핀 빨간 꽃이 눈에 들어왔다. 무장봉기와 빨간 꽃, 그것이 ‘No War’를 외치는 것 같기도 하고, 혁명의 과정에서 흐른 피로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피를 부르는 전조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다시 능원으로 갔다. 기념탑 옆에 있는 열사의 묘로 올라갔다. 열사의 묘는 높이 6.2m에 지름 43m나 되는 커다란 봉분이다. 가로 2m 정도의 석판 수십 개로 분묘를 둘렀다. 그 석판 하나에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었다. 제법 긴 문장이었지만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 ‘朝鮮等國際戰友(조선등국제전우)’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혁명 기록에 ‘조선’이라는 말을 선명하게 새긴 것이다. 광저우 봉기에는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그의 멘토 오성륜을 포함해 150여 명의 조선인이 참가했다.
1927년의 혁명은 실패했다. 5700여 명의 혁명가와 진보인사가 죽었다. 거기에 참여했던 조선인 대부분도 살해됐다.
열사의 묘에서 내려와 조그만 호수를 건넜다. 중자오런민시에이팅(中朝人民血誼亭)이라는 안내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로 세로 13m 정도 되는 2층 누각이다. 누각 1층 중앙에는 석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 석비에는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우의여, 만고에 푸르라!”는 국가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예젠잉(葉劍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능원에서 보이는 중국인들의 조선인 동지들에 대한 예우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당시 희생된 조선인은 150여 명. 이들은 어쩌다 압록강 건너 만주도 아니고 황해 건너 베이징(北京)이나 상하이(上海)도 아닌 중국 남해안의 끝자락 광저우까지 와서 남의 나라 폭동에 참여해 바람에 날린 꽃잎처럼 스러져간 것일까?
김산의 아리랑에는 두 개의 물줄기가 이어진다. 하나는 1927년 12월 10일 중국 공산당이 광저우에서 폭동을 일으키기까지의 중국 현대사고, 다른 하나는 김산을 광저우까지 오게 한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다.
열여섯의 나이에 압록강을 건너다
열사의 묘 둘레석에 새겨진 비명. 중간에 ‘朝鮮等國際戰友 (조선등국제전우)’라는 문구가 보인다.
중국의 청조는 18세기 100년의 전성기를 넘어서면서 급격하게 쇠락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서구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었다. 백성들은 고통의 늪에 빠졌다. 혁명가 쑨원(孫文)은 청조 타도를 외치고 나섰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졌고, 그 힘을 받아 1912년에는 중화민국이 세워졌다. 청조는 막을 내렸으나, 혁명을 이끌었던 쑨원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축출당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는 혁명을 배신하고 황제 놀음을 벌이다 병사했다. 그가 남긴 것은 군벌이 할거하는 찢겨진 중국이었다.
쑨원은 1919년 일본에서 상하이로 복귀했다.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돈과 무기가 필요했다. 1924년 코민테른과 손을 잡았다. 이게 제1차 국공합작이다. 쑨원은 코민테른의 자금과 무기로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웠다. 광저우는 중국의 혁명 메카로 떠올랐다.
쑨원은 1925년 “아직도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했다. 황푸(黃埔)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蔣介石)는 북벌군 총사령관이 되어 1926년 북벌전쟁을 개시했다. 1927년 4월 장제스의 북벌군은 상하이를 점령했다.
장제스는 돈줄을 코민테른에서 장쑤(江蘇)·저장(浙江)성 재벌들로 바꾸기로 밀약하고는 국공합작을 깨기로 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민당을 깨끗이 한다(淸黨)’는 슬로건을 내걸고 공산당원과 노동 운동가 등 진보적 인사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상하이에서만 며칠 사이에 5000여 명이 시체로 나뒹굴었다.
그는 상하이에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곧이어 상하이에서와 같은 학살의 광풍이 중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거리와 광장과 감옥 도처에서 도살이 벌어졌다. 조선인 혁명가도 적지 않게 살해당했다.
국민당에 입당해 북벌전쟁까지 함께했던 공산당은 장제스에게 처절하게 배신당했다. 그들은 장제스의 학살에 대항 폭력으로 맞서기로 했다. 1927년 8월 ‘난창치의(南昌起义)’에 이어 9월에는 추수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조직화되지 않은 민중봉기는 국민당 정규군에 맞설 수 없었다
. 패잔병들은 일부가 징강산(井冈山)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그해 12월 광저우에 집결해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이게 바로 광저우 봉기다. 쿠데타와 반쿠데타, 혁명과 반혁명, 폭력과 대항폭력이라는 이름으로 화중·화남지역 전체가 전란에 휩싸인 광폭한 시대였다.
중국인들이 조선인 동지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중자오런 민시에 이팅 (中朝人民血誼亭). 누각 1층에는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우의여, 만고에 푸르라!”는 전 국가중앙 군사 위원회 부주석 예젠잉(葉劍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24년 황푸군관학교가 세워지면서 독립을 열망하던 조선인들이 광저우로 모여들었다. 3·1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고, 그 힘을 받아 세워진 임시정부의 외교교섭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내부 논쟁과 분열로 허우적댔다.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한 식민지 청년들에게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정연한 논리와 견고한 조직, 국제주의 연대와 선명한 투쟁으로 조국의 해방이라는 꿈을 키워준 것이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중국의 국공합작이라는 새로운 정세를 목도하면서 혁명의 메카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의열단의 김원봉도 1924년 무기와 자금을 구하기 위해 광저우를 찾았다. 의열단은 1925년 가을 근거지를 베이징에서 광저우로 옮겼고, 김원봉은 쑨원과 면담을 통해 의열단원들의 황푸군관학교 입교 길을 열었다
. 김원봉 자신도 1926년 1월 입교했다. 중국 공산당이나 독립군 조직을 통해 만주와 시베리아의 조선인들도 황푸군관학교로 몰려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도 젊은이들을 보냈다.
쑨원은 황푸군관학교나 중산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에게 학비를 면제해주고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후원이었고 동맹이었다. 장제스의 북벌전쟁에는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도 많이 참전했다. 국내의 독립운동이 꽉 막힌 상황에서 중국의 혁명이 조선의 해방과 혁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북벌전쟁에서 승승장구하자 이대로 화북으로, 만주까지, 최후에는 조국으로까지 밀고 가는 독립전쟁을 꿈꾸었다. 그러나 중국의 혁명 역사는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뒤집혔다.
광저우 봉기와 좌절, 그리고 ‘해륙풍 소비에트’
하이루펑 소비에트의 주역인 펑파이의 동상. 김산은 펑파이에게 혁명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김산은 이런 시대의 젊은이였다. 그는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은 조선의 청춘들을 독립운동으로 나서게 했다. 김산도 그랬다. 중학생으로 3·1 만세시위에 나섰다 3일간 구류에 처해졌다.
1920년 열여섯의 나이로 압록강을 건넜다.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했다.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독립신문>의 교정과 식자 일을 했다. 임시정부 안에서 많은 것을 가까이에서 목도했을 것이다.
김산은 1921~25년 베이징의 의학대학에서 수학했다. 임시정부에 실망한 조선의 젊은이들은 대안을 찾았다. 김산 역시 이 시기에 공산주의로 기울었다. 김산은 1925년 혁명의 메카 광저우로 갔다. 중산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도 했다. 김원봉·오성륜·김성숙 등과 함께 정치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1926년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할 수 있는, 조선인 전체가 참여하는 통일된 정당을 만들자는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안창호가 제기하고,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령이었던 홍진도 나섰다. 중국의 국공합작도 큰 자극이었다. 민족 유일당 운동은 광저우에서도 조직됐다.
김산도 이 활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러나 유일당 운동은 1928년 정체에 빠졌다.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국공합작이 깨지고, 코민테른 역시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결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927년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가 터지자 3일 뒤에는 광저우에서도 무차별 학살이 시작됐다. 난창과 창사(長沙)에서 폭동에 실패한 중국 공산당은 광저우에서 1927년 12월 다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인 150여 명이 참여했다.
김산의 회고에 따르면 폭동의 주축이었던 2000여 명의 교도단(폭동 개시 후 ‘적군’으로 개칭됐다) 가운데 8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원래 광저우에 살던 조선인도 적지 않게 봉기에 참가했다고 한다.
하이펑현 도심에서 멀지 않은 펑파이 고거.
12월 10일 밤의 거사는 일단 성공이었다. 군벌 장파쿠이(张发奎)는 도주했다. 다음날 3만 명이 운집한 군중집회를 열어 광저우 소비에트 정부를 선포했다. 광저우 시내에는 평화가 찾아왔으나 다음 수순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다. 혁명이 성공했다고 생각한 군중 일부는 퇴근하듯 집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교외로 밀려났던 군벌이 전열을 정비해 반격을 시작했다. 폭동으로 도시를 장악했으나 통치할 능력이나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후퇴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방법도 몰랐다. 준비 없는 후퇴를 시작한 폭동의 대오는 급격하게 무너졌다. 3일 천하였다.
김산의 대오는 동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며 20여 일이나 행군한 끝에 하이펑(海丰)·루펑(陆丰)현 지역에 도착했다. 이 두 지역을 묶어 ‘하이루펑’이라 하는데, 김산의 <아리랑>에 나오는 ‘해륙풍 소비에트’는 바로 이곳에 결성돼 있던 지방정부다.
하이루펑 소비에트는 1927년 11월 중국 농촌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소비에트 정부다. 혁명지도자는 펑파이(湃彭)라는 인물이다. 김산이 혁명을 배웠다고 회고한 사람이다. 펑파이는 하이펑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유학을 하면서 혁명에 투신했고, 귀국해서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 11월 고향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소비에트 정부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펑파이가 장악한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김산이 속한 무장대오가 피신해 온 것이다.
김산의 혁명 스승, 펑파이
광저우에서 동쪽으로 280㎞ 정도 떨어진 산웨이시 하이펑현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된 곳이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 수립 기념 군중대회가 열렸던 홍장.
김산과 그의 부대는 이곳에서 숨을 돌렸다. 김산은 이곳에서 혁명의 실제를 경험했다. 하이루펑 혁명재판소 7인위원회의 일인이 되기도 했다. 재판 없이 펜 놀림 하나로 처형 여부가 결정되는 순간도 있었노라고 김산은 이 시기를 회고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둥의 군벌이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왔고, 이들은 또다시 패주했다. 김산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1928년 8월 피로와 부상과 병에 지친 몸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홍콩으로 탈출했다. 홍콩에서 조선인 인삼장사의 도움을 받아 여객선을 타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간 것이 1928년 9월이었다.
광저우에서 동쪽으로 280㎞ 정도 가면 산웨이(汕尾)시 하이펑현이다. 하이펑현 중심에는 김산이 광저우에서 탈출해 머무르던 하이루펑 소비에트를 찾아볼 수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홍궁(红宫)과 홍장(红场)이 바로 하이루펑 소비에트 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 펑파이가 살던 집도 보존돼 있다. 그 어디에도 김산의 행적은 남아있지 않다. 단지 그를 생각하고 찾아온 여행객이 상상으로만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1. 1937년 옌안 시절의 김산(사진)은 님 웨일스를 만나 인터뷰 했다. /
2. 님 웨일스가 김산의 일생을 정리한 <아리랑> 표지.
홍궁과 홍장은 하이펑현 중심이어서 찾기 쉽다. 홍궁은 명대에 하이펑현의 학궁이었는데 1927년 11월 소비에트 대표들이 모여 하이루펑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한 곳이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소비에트 정부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노동자·농민·병사 등 소비에트 대표들이 3일간 대표자회의를 할 때 붉은 깃발이 안팎을 뒤덮었다 해서 홍궁으로 개명했다. 홍장은 홍궁의 동쪽에 이어진 광장이다. 1927년 12월 5만여 명이 운집해 하이루펑 소비에트 정부수립 기념 군중대회를 열었던 곳이자, 펑파이가 사령부를 두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홍장이란 큰 글씨를 새긴 문루가 세워져 있다.
반복되는 배신과 체포와 탈출, 그 끝은…
2016년 1월 우리 독립기념관이 광둥혁명역사 박물관과 공동으로 주관한 ‘한국독립 운동과 광둥’이라는 전시회를 알리는 홍보 간판.
홍궁과 홍장의 담장은 온통 붉은색이다. 혁명 또는 반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을까? 역사의 기념물들은 대부분 이긴 자의 기록이다. 그러나 인민이라고 하든 국민이라고 하든 백성들이 엄청나게 피를 흘린 다음에 세워진 것들이다.
1928년 하이루펑을 탈출해 상하이에서 요양하던 김산은 1930년부터 중국 공산당 간부로 화북과 만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30년 말 베이징에서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됐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 넘겨져 신의주로 끌려갔다. 여섯 차례의 물고문을 견딘 후에야 석방됐다.
1931년 봄 어머니의 간병으로 건강을 회복한 김산은 일본 경찰의 출국금지명령에도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베이징의 중국 공산당에서는 그의 석방을 의심하는 동지들이 있었다. 김산은 공개재판을 자청해 혐의를 벗었다.
1933년 배신자로 인해 또다시 중국 경찰에 체포된 김산은 조선으로 끌려가 긴 시간 고통을 당했다. 1934년 1월 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김산에게는 이 시기가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김산은 이런 고통 속에서 자신을 건져준 중국 여인과 1934년 베이징에서 결혼했다.
1935년 김산은 중국의 혁명이 아닌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하고 상하이로 가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김원봉이 주도한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참여했다. 광저우에 이어 다시 김원봉과 접점이 이루어졌다.
김산은 1936년 해방동맹의 대표로 중국 공산당이 머무르던 옌안(延安)으로 파견됐다. 김산은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1937년 님 웨일스를 만나 장시간 인터뷰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회고록이 바로 <아리랑>이다.
김산은 옌안에서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만주로 가지도 못하고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일제 간첩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그가 죽은 지 45년 지난 1983년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중국 공산당은 그의 사형에 대해 “특수한 상황 하에서 벌어진 잘못된 결정이었다”면서 복권시켰다. 복권된 다음 해에는 한국에서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 우리글로 출간됐다.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황푸국관 학교 정문.
김산은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외면받기도 한다. 그러나 김산은 1935년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이전의 활동 역시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뤄진 일들이었다.
애당초 그가 집을 떠나 압록강을 넘은 것 자체가 조국의 독립을 갈구한 때문 아니던가? 이런 그가 중국 어느 구석에서 누구와 어떤 투쟁을 벌였든 그것은 조국의 독립을 찾겠다는 몸부림이었다. 누구나 스스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각각 직선로나 우회로를 택했을 뿐이다.
김산의 아리랑은 피눈물이었다. 식민지 백성이라는 멍에를 메고, 일제 간첩이라는 용수를 쓰고, 사형장으로 향한 그의 일생은 처절한 아리랑이었다. 검붉은 피와 싯누런 고름이 뚝뚝 떨어지고, 증오와 원망의 눈물이 넘치는 아리랑이었다. 그는 아리랑을 부르면서 결기를 닦아 세웠다. 아리랑의 선율 속에서 좌절했지만, 좌절 속에 다시 몸을 일으켜 아리랑을 불렀다.
그는 살아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했다. 죽은 뒤에도 세상이 몇 번 상황이 바뀐 뒤에야 복권됐다. 그 후 조국에서 회고록이 출판됐다. 그제야 누군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찾아 이곳 하이펑까지 온 것이다.
홍궁과 홍장은 아침에 내린 겨울비에 촉촉이 젖어 있었으나 하늘은 파랗게 갰다. 붉은 담장 위로 맑은 햇살이 부서졌다. 그의 행적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 광장 위에 그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폴 모리아의 사랑스런 ‘아리랑’을 틀었다.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가 남긴 <아리랑>의 첫 페이지에 기록된 그의 아리랑, 피눈물로 얼룩진 아리랑을 읊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청청 하늘엔 별도 많고,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에 실린 노랫말)
황푸군관학교 구지 안의 두 조선인
군벌의 반란을 진압하다 희생된 516명의 황포군관 학교 사생들을 안치한 둥젱젠왕리 에시무위안(东征 陈亡烈士墓园). 두 명의 조선인 학생의 묘비도 있다.
하이펑에서 홍궁·홍장과 펑파이의 고거까지 둘러보고는 광저우로 돌아왔다. 다음날 황푸군관학교를 찾아갔다. 황푸군관학교는 광저우시 창저우도(長洲島)의 해군기지 안에 있다. 황푸군관학교는 역사박물관으로 개방돼 있다. 학교 본부를 1996년 중건했다는데, 총리실부터 교실·집무실·숙소·식당 등이 1920년대 풍으로 복원돼 있다.
한쪽에는 황푸군관학교의 역사와 주요 졸업생, 중국 혁명에 대한 다양한 자료도 전시돼 있다. 정문에는 개교 당시의 정식 명칭이었던 육군군관학교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문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항상 사람이 붐빈다.
이곳을 찾았던 2016년 1월 예상치 못했던 특별한 이벤트를 만났다. 우리 독립기념관이 광둥혁명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주관한 ‘한국독립운동과 광둥’이라는 특별전시회였다. 제목은 광둥이지만 실제로는 중국 전체에서 전개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이었다.
마치 나를 위한 전시회로 착각이 들 정도로 반가웠다. 전시회는 중국의 항일전선, 조선의 독립투쟁이 어떻게 연합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의 중국인들은 지금도 일본에 대항한다는 면에서 한국인들에게 상당한 공감대를 갖고 있다. 적지 않은 중국인이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는 초면의 한국인에게 “그런데 저 르번구이(日本鬼,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비하하는 말)들은 말이야~” 하면서 일본을 비난하곤 한다.
중국과 한국이 항일투쟁을 공유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일종의 정서적 연대다. 그런 면에서 황푸군관학교의 조선인 독립운동역사 전시회는 두 나라 국민의 상호 이해를 위해 상당히 훌륭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정서적 연대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과 함께 크게 위축됐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황푸군관학교 구지 안에서는 한중동맹을 이뤘던 또 다른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황포군관학교 정문에서 서쪽 700m 떨어진 강가에 둥젱젠왕리에시무위안(东征陈亡烈士墓园)이 있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 사생들이 군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두 차례 출정했을 때 희생된 516명의 시신을 안치한 곳이다. 이 가운데 조선인 두 사람의 비석이 있다. 안태(安台)와 김근제(金瑾濟)다. 안태의 비에는 1927년 11월 숨졌다고 적혀 있다.
광저우의 한국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강정애 씨가 6년 전이 묘비를 발견하고는 이를 널리 알렸다. 3년 만에 김근제의 후손이 광저우를 찾아왔다. 이곳을 참배한 후손은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김근제는 팔촌인 김은제와 함께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다. 김은제는 조선혁명당 당원이자 국민당 비행장교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됐다. 하지만 안태의 후손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사망 당시 28세였고 묘비에 ‘한국 괴산’이라고 적힌 게 유일한 단서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임시정부와 의열단을 모두 지원했다. 자금과 군사교육 등이었다.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와 임정 요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것도 장제스의 중화민국이었다. 물론 일본과 관계 악화를 우려해 비공개로 지원했다.
김원봉은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의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거행한 조선의용대 결성식에서 100여 명의 대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뒤바뀐 혈맹, 뒤바뀐 적
두 명의 조선인 중 안태의 묘비. 출생지가 한국 괴산으로 적혀 있다.
“중국혁명이 완성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날로 심하며, 한국 민족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이 더욱 포악해졌음이 사실이다. 조선의용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국 형제들과 곧게 손잡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한 단계 더 깊었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많은 조선인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벌였다. 만주에서는 그 수가 더욱 많았다.
1930년대 조선인은 민족주의 진영이든 사회주의 진영이든 만주의 중국 공산당과 연합해 일본군·관동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들의 주축이 1940년대 초반 일본군과 만주군의 잔혹한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남은 사람들은 88여단이라는 단일부대로 편제돼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만주뿐만이 아니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조선의용대가 되었고,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1941년 황하를 건너 북상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합류했다.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합동으로 항일 전투에 참여했다. 그들은 전장에서 희생된 조선인 동지들을 일일이 묻어주고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이곳에서 화북지방의 조선인들을 받아들이면서 병력을 늘렸고 1942년에는 조선의용군으로 확대개편했다. 1944년에는 해방에 대비하기 위해 옌안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바로 연안파다. 이들 역시 독립운동에 관한 한 팔로군과는 혈맹이었다.
중국에 비하면 소련은 우리의 독립운동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일본과 갈등을 우려해 조선인 망명객들을 국경 밖으로 퇴거시키거나 무장해제하기도 했다. 1921년의 자유시 참변은 일본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자국 영토 안으로 들어간 우리 독립군을 무장해제하면서 발생한 참극이다.
1930년대에는 일본 첩자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다는 이유로 우리 동포들을 대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군의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황무지에 내던진 거대한 국가폭력이었다.
1940년대 일본군과 만주군의 토벌에 견디다 못해 연해주로 밀려온 동북항일연군에 군영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통제했고, 그 가운데서 김일성을 발탁한 것도 소련이다.
미국은 아예 조선의 즉각 독립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반대자였다.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기 위해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의 거중조정 조항이 있음에도 일본에 조선을 넘겼다. 바로 1905년의 카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한때 조선인의 희망이었으나 전승국의 사기극임이 곧 폭로됐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3년 3월 영국 외무장관에게 일본이 항복하면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 아니라 국제적 신탁통치 하에 두자고 제안했다.
그해 12월 미국·영국·소련의 정상이 만난 테헤란회담에서 미국은 조선에 대해 40년간의 신탁통치를 선제적으로 주장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20~30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스탈린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
일본이 항복한 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3상회의에서도 미국은 5년 신탁통치에 5년 연장 방안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선인들이 임시정부를 세우면 미국·영국·소련·중국이 후원하는 것으로 그치자고 주장하던 소련은 연장 없는 5년 신탁통치로 수정 제안했다.
이 3상회의의 내용이 국내에서는 정반대로 보도됐다. 미국은 독립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엄청난 오보가 우리나라를 뒤덮었다. 이로 인해 찬탁반탁 논쟁은 국내 정세의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미국은 시종일관 조선 독립의 반대자였다.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소련은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자국의 국익을 위해 김일성을 내세워 남북을 분할했다. 나아가 이들은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거나 후원했다.
분단 7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대한민국에서 ‘혈맹’이란 미국을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조선 독립을 방관했던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자 점령군으로 즉시 진입해 김일성을 내세웠다. 결국 조선의 독립투쟁에서 가장 큰 동맹이었던 중국은 빠진 채 미국과 소련의 후원 아래 남한과 북한은 동족상잔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벌이고 말았다.
중국은 미군이 국경선 가까이 북진해오자 직접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대한민국과는 적대국이 돼버렸다. 해방 후 몇 년 사이에 동족은 적으로 갈라섰고, 항일 전장에서 함께 싸운 중국마저 적국으로 급변해버렸다. 참으로 현기증 나는 우리 현대사다.
[출처] : 윤태옥 중국인문다큐멘터리 전문제작자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5)>-배신의 광풍 속에 물거품이 된 광복의 꿈 /월간중앙,201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