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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 매일의 사랑 고백, 묵주 기도!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여기저기 몸도 아팠지만, 이 길을 계속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 땡땡이도 많이 치고, 제대로 신학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지라, 30년 전부터 반성하는 마음으로 매일 영성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영적 독서 책 한 권을 만나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탁월한 영성가들의 신앙과 삶, 지혜와 경험이 맞춤형으로 내 손안으로 딱 들어오니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최근에 영적 독서를 하던 중에 묵주 기도와 관련된 풀톤 쉰 대주교님의 말씀을 접하고 정말 가슴이 뛰고 설레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 기도는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인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서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해요 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치면, 그것은 “성모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묵주 기도를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 기도가 묵상 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 등 염경기도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가 막힌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문 매 신비 안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묵상합시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묵주 기도는 당연히 묵상 기도입니다.
묵상이나 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묵상 없이 그저 입으로만 줄줄 바친다면 묵주 기도가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이방인들의 빈말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께서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성모님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더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결국 묵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현존 체험, 성모님 동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니,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묵주기도 잘 바치는 법: 묵주기도는 어머니께 내미는 어린이의 손>
복음: 루카 10,25-37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이 정해진 이유는 교황 비오 5세와 교회의 묵주기도를 통한 엄청난 하늘의 개입을 온 교회가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 사건은 이렇습니다.
1571년 그리스도교 신성 동맹은 해군력이 훨씬 우월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엄청난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두 세력은 그리스 레판토 바다에서 결정적으로 맞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전투는 패배로 끝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모든 유럽이 이슬람화될 위기였습니다. 이때 교황 성 비오 5세는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큰 위험을 인식하고 신자들에게 승리를 위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며, 자신도 큰 신심으로 묵주기도를 인도했습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신성 동맹은 많은 역사가가 기적적인 해군 승리로 간주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그들의 제국이 유럽으로 확장되는 것은 중단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교황 비오 5세는 승리를 성모 마리아와 묵주기도의 덕분으로 돌렸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님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고, 나중에 이 축일을 10월 7일에 묵주기도의 성모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그의 묵주기도 장려는 이 강력한 기도에 대한 신심을 가톨릭 세계 전체에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정한 로사리오 성모 축일은 묵주기도가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꿀 힘을 지닌 기도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자랑 중의 자랑은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질 때 어머니를 통한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꺼리셨음에도 첫 기적을 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성모님의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묵주기도는 본래 시편 150편을 하루에 다 낭송하던 수도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편도 내 생각을 끊고 이미 있는 기도문에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묵주기도가 잘 바쳐지려면 기도하는 중에 나를 믿는 마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아이들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엄마!”라고 반복해서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애절한 눈만 치켜뜨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안타까움에 다른 누구보다 소화 데레사를 들어 가장 높은 곳에 앉히십니다.
묵주기도의 힘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단순하게 반복하는 말 속에 나를 파묻으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내가 하는 말과 각 신비를 묵상하며 최대한 나의 생각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엄마에게 내미는 아이의 손에 다른 생각이 들어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은 나를 믿는 행위입니다.
공동으로 묵주기도의 힘의 사례에 대해 들은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던 신부님이 자기를 비웃던 마귀 들린 사람을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쫓아냈던 일, 그리고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밤새워 기도하여 익사한 청년을 되살린 일 등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모님께 청할 때 예수님께 청하여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묵주기도는 개인적으로도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르완다 대량 학살의 생존자인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의 책 『로사리오: 내 생명을 구한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숨어있던 91일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체험한 묵주기도의 능력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 하느님의 손에 숨겨져 보호받는다는 믿음:
임마꿀레는 그녀가 숨어 있는 동안 묵주가 그녀의 방패가 되어 외부의 압도적인 두려움과 위험으로부터 그녀에게 깊은 보호감을 제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밖에서는 폭력이 만연하고 살인범들이 집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묵주를 꼭 붙잡고 자신과 벽 너머의 혼돈 사이에 거의 물리적인 장벽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녀를 둘러싼 공포로부터 그녀를 보호하시고, 겉옷으로 그녀를 덮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형태가 아니라, 성벽 밖의 악의 손길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손에 숨겨졌다.”라는 심오한 느낌이었습니다.
2. 하느님 용서의 능력을 받게 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서 경험하신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순간 중 하나는 마음의 심오한 변화였습니다. 은신 초기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동족을 살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묵주기도를 계속 바쳤고, 특히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이 그녀의 영혼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용서가 그녀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고, 원수들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에 자신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천사들의 존재를 느낌:
임마꿀레는 숨어있는 동안 천사들이 거의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녀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동안 그 방에 천사들이 있어 그녀와 다른 여성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살인범들이 위험할 정도로 그들을 발견할 뻔했지만, 항상 뭔가가 그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보였던 여러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개입하고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고 믿으며 끊임없는 묵주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겼습니다.
4. 혼돈 속에서도 신비로운 평화의 힘을 느낌:
상황의 극도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어떻게 그녀에게 신비로운 것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는지 설명합니다. 대량 학살이 밖에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화장실 안에서 그녀는 공포를 뛰어넘는 평온함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환희의 신비를 바치면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탄생을 연결했으며,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것이 희망을 가져왔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했습니다. 이는 그녀를 둘러싼 악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망과 평화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 평화를 묵주기도를 사용하여 그녀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비로운 선물로 여겼습니다.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자기 생명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는 그 두려움과 고통에 차리라 발각되어 죽기만을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5단짜리 묵주는 그녀가 용서하고,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심오한 내적 치유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손만 내밀면 잡아주실 어머니가 계심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0,25-3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 교사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분을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저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옆집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제 장난감보다 더 좋아 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의 가방, 옷차림 등에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께 대한 원망도 가졌습니다.
시기심은 평등의 원칙이 깨졌다고 생각될 때 나옵니다. 그토록 갈망했지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누군가가 살고 있을 때 불평등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을 보고 자기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도 순간의 만족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을 통해, 불공평의 결과는 나의 욕심일 뿐 불공평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욕심 가득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고, 또한 다른 이들을 향해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자기 안에서 치워나갈수록,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게 됩니다. 여유와 편안함을 갖게 되고,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사랑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율법에 나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 하십니다.
자기는 옳고 따라서 자기는 당연히 최고의 것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로써 정의를 잘한다 해도, 이웃으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즉, 율법의 세부 조항을 열심히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욕심,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한 나라의 정승이라면 모범을 보이고 백성과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정홍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루카 10,34)
말씀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기름이며 포도주라네.
거룩한 교회의 성사로
치유된 이들은
안전하게
그분의 노새에 태워져
교회에 머물게 되고
몸과 마음이
깨끗이 나을 때까지
날마다 지속적으로
신약과 구약을
공급 받게 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
그 안에 새겨진 온갖 슬픔과 고독,
분노, 죄악,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깊은 곳이 두렵고 귀찮고 불편해서
정작 그 사람의 깊은 곳은
들어가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어줄 수 없다면
살아있는 상담을 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인 경험상
사랑할 줄 아는 상담가는
먼저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담자와 라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소통을 하며 내담자를 사랑으로 돌볼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그리고 예수님께 진짜 살아있는 상담 기술을 배웁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