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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카페 게시글
^^---산행 사진---^^ 스크랩 아름다운 경관에 명품 먹거리까지 추가되는 해파랑길 13코스(‘19.1.5)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48 19.01.15 01: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파랑 13코스

 

여행일 : ‘19. 1. 5()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구룡포읍 일원

산행코스 : 양포항(2.6km)금곡교(8.0km)구평포구(1.5km)장길리 낚시공원(6.9km)구룡포항(거리 및 소요시간 : 원래는 19이나 이 가운데 대진리에서 구룡포항까지의 14.17구간을 걷는데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해파랑길 중 여섯 개의 코스가 들어있는 포항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다. 양포에서 출발해 구룡포항까지 줄곧 해안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가끔은 국도로 올라서기도 한다. 때로는 인도가 구분되지 않는 길을 걷는 모험도 감수해야만 한다. 이 구간은 특별히 기억해둘만한 유적지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기묘묘한 갯바위들이 널린 수려한 바다 풍광을 걷는 내내 감상할 수 있으며, 양포항과 구평항, 장길항 등 빼어난 경관을 지닌 항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나저나 이 구간의 가장 큰 특징은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싱싱한 회는 물론이고, 만나는 항구마다 대게와 과메기를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대진리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20가까이 되는 거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집사람을 생각해서이다. 덕분에 우린 신창마을의 명물이라는 우는 바위와 영암마을의 갓바위는 구경할 수가 없었다. 둘 모두 전설까지 갖고 있었기에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들머리는 ’GS칼텍스 대진주유소‘(포항시 남구 장기면 대진리 86-8)

울산고속도로 남포항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구룡포방면으로 달리다가 세계교차로(포항시 남구 오천읍 세계리)에서 오른편 929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양포항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13코스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난 31번 국도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기로 했다. 20에 가까운 거리가 부담스럽다는 집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금이라도 빨리 생선회를 맛보고 싶다는 친구의 희망까지 보태져버렸으니 나 혼자서 완주를 고집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31번 국도변에 있는 ’GS칼텍스 대진주유소로 오늘 트레킹의 시작점이 된다.




주유소를 오른편에 끼고 난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닷가를 향해 잠깐 걷자 대진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대진리(大津里)’의 역사는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포리에 수군의 만호진(萬戶鎭)’이 설치되면서 대초전이라 불리던 게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이후 매진마을이 합쳐지면서 대진리가 되었다. 그나저나 이 마을회관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과 이곳에서 헤어지기 때문이다. 해파랑길은 물론 오른편의 바닷가 방향이다.



마을안길을 걷다가 눈에 확 띄는 풍경을 만났다. 형형색색의 바람개비들이 상점과 그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페트병을 재활용한 것인데 조그만 바람에도 돌아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기발한 아이디어라 하겠다.



몇 걸음 더 걷자 드넓은 모래사장이 바닷가에 펼쳐진다. ‘광활하다라는 표현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대진해수욕장인데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해수욕장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활짝 열린 하늘과 탁 트인 바다, 그리고 더없이 너른 모래사장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백사장 뒤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소나무 숲(松林)은 덤이라 할 수 있겠다.



해수욕장의 건너편, 그러니까 북쪽 방향에 빨강색의 등대가 보인다. 저곳이 모포항일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국도로 되돌아 나가야할 차례이다. 해파랑길은 원래 대화천()에 놓인 다리(대진교)를 건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모래사장을 걷기로 한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그때 국도로 나가도 될 것 같아서이다. 대진리 해변과 모포 해변은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최근의 가뭄이 제법 심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비록 물(水量)이 적지만 저 하천은 대진해수욕장의 자랑거리라 할 수도 있겠다. 저 정도면 천연의 담수(淡水) 샤워장으로 안성맞춤이 아니겠는가.



모래사장을 빠져나오면 해안도로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멘트 난간에 그려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로고(logo)를 발견한다. 호미곶의 '상생의 손'에서 시작해 구룡포를 거쳐 장기면의 두원리에 이르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5코스)’은 해파랑길의 13·14코스와 겹친다. 그러니 탐방로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참고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호미반도의 해안을 따라 내놓은 포항판 올레길이다. 해병대 상륙훈련장이 있는 청림 해변에서 호미곶 광장까지 25구간을 4개 코스로 나눈 뒤 연오랑세오녀길(청림동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6.1), 선바우길(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흥환해수욕장, 6.5), 구룡소길(동해 발산1구만리 어항, 6.5), 호미길(호미곶면 구만리호미곶 상생의 손, 5.3) 등 코스별로 특색을 살린 이름을 부여했다. 호미곶의 '상생의 손'부턴 구룡포를 거쳐 장기 두원리까지 33.6를 잇는 해파랑길 1314코스와 연결되는데, 이 구간을 해안둘레길에 포함해 해파랑길(5코스)‘로 부르기도 한다.



오늘도 역시 바닷가는 갈매기들 세상이다. 갯바위나 모래사장을 가리지 않고 쉴만한 곳일라치면 어김없이 무리를 지어 노닐고 있다.



길을 나선지 35분 만에 모포마을에 도착했다. ‘모포(牟浦)’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봄보리가 일찍 돋아나는 포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같은 의미로 버리꾸지(包衣浦)’라 불리기도 했으며, 바위가 동해로 돌출하여 구석을 만들고 있다 해서 바우꾸지(巴衣浦)’라고도 불렀단다. 작은 어선들 몇 척이 정박되어 있는 마을 앞 항구는 방파제(동방파제 265m, 남방파제 215m)와 물양장(170m)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이 마을에는 모포줄에 대한 옛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장기 현감의 꿈에 뇌성산에서 한 장군이 용마를 타고 내려와서 우물물을 마시더니 이 곳을 만인이 밟아주면 마을이 번창하고 태평하며 재앙이 없을 것이다라고 이르고 사라지더란다. 그래서 시작된 게 줄다리기이다.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땅을 밟아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줄다리기는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 매년 음력 816일이면 골매기당에 보관하고 있는 줄을 꺼내어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며, 놀이가 끝난 뒤 줄은 다시 골매기당에 모셔진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줄다리기가 끝난 줄은 버려지거나 태워지는 게 보통인데 이곳 모포리에서는 신앙대상물로 여기기 때문에 모셔둔다는 것이다.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 마을 뒤 국도변에 위치한 현몽각(縣夢閣)에 모포줄(牟浦)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져 있다니 이미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모포항의 끄트머리쯤에서 탐방로는 왼쪽 방향의 언덕으로 오른다. 데크계단으로도 모자라다 생각했던지 들머리에다 이정표(장길리 복합 낚시공원4.95/ 모포항0.4)까지 세워놓았다. 하긴 이정표가 없다면 진행방향에 있는 축양장(畜養場)으로 잘못 들어갈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 구간은 우회구간이라고 보는 게 옳다. 300m쯤 지난 지점에서 탐방로가 다시 해안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오른편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고양이바위라 부르던 바위이다. 이밖에도 송곳바위두꺼비바위’, ‘망부석등 이런저런 다양한 이름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바라보는 각도(角度) 또는 바라보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망부석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등에 업힌 아이는 칭얼대고 배는 자꾸 불러오는데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지어낸 스토리텔링이 안성맞춤으로 다가온다.





이제부터 해파랑길은 자갈과 몽돌이 깔려있는 해안가를 따른다. 바닷물과의 간격이 너무 좁을 뿐만 아니라, 왼편에 끼고 있는 언덕은 너무 가팔라서 위급상황이 생겼을 때 몸을 의지할 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 구간이다. 바람이 일어 파도라도 높을라치면 통행이 불가능하겠다는 얘기이다.



몽돌 해안길은 축양장(畜養場)으로 연결된다. 덕분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축양장이란 시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축양장이란 어업 또는 양식에 의하여 생산된 수산물을 알맞은 시설에서 얼마 동안 보관하여 기르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겨울철 횟감으로 최고라는 방어(魴魚)를 기르고 있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대방어도 눈에 띈다. 제철을 맞아 출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부터 탐방로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기기묘묘한 모양의 갯바위들이 널려있는 아름다운 바다를 오른편에 끼고 시멘트 포장도로가 꼬불꼬불 나있다. 탐방로 주변의 갯바위들에는 꽤 많은 숫자의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그만큼 입질이 좋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다가가보면 실적은 꽝이었다. 학꽁치를 낚고 있다는데 물고기를 넣는 박스마다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학꽁치라는 게 본디 낚시에 큰 재주가 없더라도 금세 잡을 수 있다고 알려졌는데 빈말이었던가 보다.




모포항을 출발한지 40분 조금 못되어 구평리(邱坪里)’에 이른다. 해안선을 따라 자로 길게 형성된 구평리는 5개의 자연부락이 1(새바우)2(邱坪, 학교마), 3(都邱亭, 황사디미)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새바우(島岩)’라 불리는 ‘1인 모양이다. 참고로 구평리(邱坪里)란 지명은 옛날 이성지라는 풍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뇌성산 줄기에서 뻗어 내린 이곳이 평평한 두들로 되어 있다고 해서 구평(邱坪)이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거북의 등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구반(龜盤)’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비록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이 마을에는 효자 하영식(河永湜)의 행적을 기리는 선효각(善孝閣)’ 지어져 있단다. 이곳 구평리에 살던 하영식이란 사람이 병환을 앓은 어머니를 위해 겨울에 꿩을 잡아 요리해 드렸는데, 그 요리를 먹은 어머니가 병이 낫고 건강을 되찾는 기적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하늘을 감동 시켰다고 해서 고종 21(1884)진주 하씨문중에서 비를 세웠단다.



마을회관을 지나자 방파제로 둘러싸인 작은 포구가 나타난다. 기괴한 형상의 바위들이 바다에 널려있는 것이 생경스럽기까지 하다.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데 새들이 날아와 쉬었다 간다고 해서 조암(島岩, 새바우)’ 또는 새금돌이라 불러오고 있단다. 마을 이름도 이 바위로부터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신생대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곳임을 입증해주는 화산암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화산암이 파도와 염분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저런 형이상학적 모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항구를 벗어나면서 탐방로는 마을 안길로 파고든다. ‘구평2’, 학교마(學校村)’라는 단위마을이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구룡포남부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949년에 설립되었는데 지금은 구룡포초등학교 구남분교장으로 격하되어 있다. 아무튼 마을을 벗어나면 31번 국도로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앞에서 말한 구남분교장을 만나게 된다. ! 초등학교 앞에 수령(樹齡)450년이나 되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구평2리 마을 주민들이 매년(음력 106) 당제를 지내오는 당목(堂木)인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국도를 따라 10분쯤 걷다보면 장길리복합낚시공원이라 적힌 간판을 만날 수 있다. 간판 뒤로 드넓은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고, ‘장길리(長吉里)마을 앞으로 갯바위와 방파제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분위기는 아늑한 편이다. 주변 지형이 마을 앞 내항을 둘러싸는 형상이어서 편안한 느낌이 감돈다. 참고로 장길리는 장구목처럼 생겼다는 장구목생길리등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길(長吉)’이라는 지명 또한 두 마을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장길리는 해양테마를 주제로 한 복합낚시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2015년 조성된 공원은 확 트인 해안데크 산책로와 조경공원, 야경이 아름다운 경관조명 등대, 부유식 낚시터, 바다에 떠있는 펜션, 카페 등 여러 부대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추어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단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단연 펜션이 아닐까 싶다. 바다에 부유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다 펜션을 배치했다. 들어가 보지 않아 내부시설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외관만큼은 액자에 넣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낚시를 좋아하는 강태공들이라면 가두리낚시터를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내가 갔을 때는 방어를 풀어놓고 있었는데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정도로 그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말이다.






마을 북편은 언덕이 동해로 뻗어 나와 작은 반도를 이루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 언덕에는 전망카페와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공연장, 그리고 소나무숲이 자리하고 있다. ()처럼 바다 쪽으로 뽈록하니 튀어나온 곳에는 바다를 향해 170m 길이의 나무다리를 놓았다. 갯바위인 보릿돌(麥岩)’을 잇는 다리다. 다리 이름 또한 보릿돌 다리라 명명했다. 2012년 조성된 이 다리는 복합낚시공원의 랜드마크(landmark). 짙은 갈색의 나무다리가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비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SF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누군가의 표현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보릿돌교를 건너면 장길리 최고의 낚시 포인트이자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보릿돌에 도착할 수 있다. 보릿돌교와 연결된 큰 갯바위가 안 보릿돌’, 조금 더 먼바다에 위치한 작은 갯바위가 바깥 보릿돌이란다. 폭이 50m나 된다는 안보릿돌갯바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고 있는 순수 관광객들이 있는가하면 낚시 삼매경에 빠진 강태공들도 보인다. 그런가 하며 저녁거리라도 마련하려는지 해초를 채취하는 알뜰 살림꾼들도 눈에 띈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보릿돌의 이름과 관련한 마을 구전도 알아보자. ‘보릿돌이란 이름은 보리()를 닮은 갯바위의 생김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보릿돌에 해산물이 워낙 많아 보릿돌에만 가면 보릿고개를 면할 수 있다고 해서 보릿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으니 마음 내키는 것으로 골라잡으면 되겠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다. 다리 주변으로 탁 틔어 있는 바다는 도시의 답답한 일상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난간 아래의 은근한 에메랄드빛 바다도 눈길을 끈다. 어찌나 물이 맑은지 바닷속 바위들이 그대로 들여다보일 정도다. 조망 또한 뛰어나다. 장길리 해안은 물론이고 저 멀리 구룡포항까지 연결되는 해안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다시 길을 나선다. 탐방로는 문화공연장이 있는 언덕 뒤편으로 나있다. 데크계단을 내려서면 길은 몽돌해안을 따라 걷도록 나있다. 해안선을 따라 어느 정도 걷다가 31번 국도로 올라가면 된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르기로 했다. 바위절벽 때문에 난감한 상황도 만났지만 징검다리를 놓아가면서 진행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까지 권할 일은 아닐 것 같다.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경관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걷다보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천초(天草)를 줍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가끔 눈에 띈다. ‘우뭇가사릿과에 속한 바닷말인데 민물에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바랜 것을 고아서 찌꺼기를 걸러내고 식히면 우무가 된다. 이 우무는 예로부터 채쳐서 콩국에 띄워 청량음료로 사용하여 왔다. 우무 자체는 영양가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변과 함께 그대로 배설된단다. 공해에 찌든 현대인들에게는 최고의 건강식이라 할 수 있겠다.



바닷가와 국도를 두어 번 오르내려봤지만 마지막은 국도로 장식된다. 이 구간은 인도가 따로 없다는 게 특징이다.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다고 해도 씽씽거리며 달려가는 자동차들 때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이 구간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국도를 따라 걷다보면 그럴듯하게 생긴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침식애(侵蝕崖)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위는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도 그럴듯해서 해안으로 다시 내려가 보았지만 위에서 본 풍경보다 못해서 사진은 올리지 않았다.



장길리를 출발한지 50분 만에 하정리(河亭里)’, 정확하게는 하정1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해안선을 따라 다섯 개의 자연 부락이 1(임물), 2(하성, 태끼, 솔머리), 3(당사포)로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1임물(臨勿)’ 마을인 모양이다. 많은 인물이 배출될 지세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글쎄다. ‘인물임물은 달라도 많이 달라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마을 앞 해안은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도 꽤나 긴 편이다. 하지만 해수욕장으로 조성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파도막이용 시멘트난간에 기대어 간이 천막을 몇 곳에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작은 어선 두어 척이 매어져 있는 작은 항구는 ‘2에 만들어져 있다. 2리는 마을의 생김새가 성을 쌓아둔 것 같다는 하성(河城)’과 쇠머리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바닷가 언덕에 지어진 소나무 정자(일송정)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솔머리(松亭)’, 그리고 마을 어귀의 돌출된 지형이 토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태끼(‘토끼의 방언)‘ 등 세 개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으로는 동해의 널디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여름철보다 한층 더 짙어진 푸른 바다에서 떠밀려온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치고 부서지면서 흰 포말을 무수히 쏟아낸다. 그 풍경이 잘 그린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겨울 바다 하면 물론 동해다. 겨울의 동해는 여름 바다와는 달리 날 선 바람이 살갗을 파고들지만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렇다고 쓸쓸함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비어있는 공간에다 새해의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보자. 그래도 비어있다면 낭만 한 숫갈 추가해도 좋을 일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하정3‘, 당사포(堂士浦)‘를 지난다. 마을 뒤에서 보면 자 같고, 앞에서 보면 자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선비들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이름의 연원(淵源)을 찾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마을 뒤 언덕 위에는 경북대학교 수련원이 있다. 1리에서 3리까지는 25분이 걸렸다.



7~8분쯤 더 걷자 수산물 가공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는 병포리(柄浦里)가 나온다. 구룡포만을 끼고 구룡포리와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하며, 북쪽의 대보방면으로 통하는 도로와 남쪽의 장기방면으로 통하는 도로의 길목이기도 하다. 마을 앞 자라를 닮은 바위에서 이름을 따온 자래골(柄里)과 웃자래골(上柄), 구룡포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의미의 남포리 등 3개의 자연부락이 행정구역상 각각 1, 2, 3리로 구분되어 있다. 참고로 병포리의 ()’은 자래골을 한자로 표기할 때 자래의 뜻을 자루로 잘못 해석하면서 생겨난 글자라고 한다.



구룡포에 가까워지면서 길가는 과메기 천지가 된다. 그야말로 한 집 걸러 한 집에서 과메기를 말린다고 보면 되겠다. 그 때문인지 비릿한 생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퀴퀴한 냄새가 아닌 깨끗한 생선이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는 맛있는 냄새다. 지금은 겨울,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첫눈과 낭만적인 스키장, 그리고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식도락가들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맛있는 별미를 그 무엇보다도 기다린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과메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과메기하면 포항 구룡포가 수식어처럼 붙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 구룡포 지역을 지금 걷고 있으니 눈에 띄는 것이 모두 과메기라 해도 뭐가 이상하겠는가. 참고로 요즘은 대부분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지만 과거에는 과메기라 하면 으레 청어를 일컬었다. ‘과메기란 이름은 관목어(貫目魚)’, 즉 눈을 꿰어 말린 생선에서 나온 말이다. 청어가 흔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덕과 포항 일대에선 으레 처마 밑에 청어를 걸어 놓고 말려 먹었다고 한다. ‘맛 좋기는 청어, 많이 먹기는 명태라는 말처럼 청어는 많이 잡히기도 했거니와 맛도 좋고 영양가도 높아 옛 문헌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쉽게 영양 보충을 할 수 있는 생선이라 해서 비유어(肥儒魚)’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우리 속담 중에 죄인들을 오랏줄에 묶어 줄줄이 감옥으로 끌고 갈 때 쓰는 비웃 두름 엮듯 한다는 말에서 비웃또한 청어를 일컫는 말이다. 생선 스무 마리를 줄줄이 엮는 두름처럼 청어가 무척이나 흔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병포리 근처는 오징어덕장이 장관이다. 너른 공터는 물론이고 조그만 공간이라도 생길라치면 어김없이 오징어 건조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요즈음 구룡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데, 함께 걷고 있던 친구의 입에서 구룡표 과메기를 이젠 구룡포 오징어로 바꿔야겠다는 얘기가 스스럼없이 나올 정도였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아무튼 반건조 오징어라 불리는 피데기는 동해안의 생물 오징어를 바닷바람에 3일 정도 말린 것이다. 피데기는 30% 이상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어 마른 오징어에 비해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단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자 드디어 구룡포항이다.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구룡포는 경관이 수려하고 풍부한 어장이 있는 곳이다. 그래선지 일제강점기 때 가가와현과 오카야마현에서 일본인 어부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순식간에 침탈의 현장으로 변해버렸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큰 배로 대량 어획을 해서 부를 축적했고 어업과 선박업, 통조림 가공공장 등을 하며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 그 흔적은 지금 관광지로 변해 있다. 참고로 구룡포라는 이름은 전설로부터 얻어졌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을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나는데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가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치더란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용두산 아래에 깊은 소() 있었는데 이 소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동해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구룡포 읍내로 들어서면 또 다른 풍경이 눈길을 끈다. 거리를 빼꼭히 매우고 있는 음식점의 간판들이 하나 같이 대게를 대표 음식으로 내걸고 있는 것이다. ‘구룡포 과메기는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는 듯이 말이다. 광장에 과메기 상설시장천막까지 없었더라면 오해하기 딱 좋겠다. 하긴 그 오해가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수심 200~400m 청정심해에서 포획하는 이곳 구룡포 대게가 전국 수협 위판량의 약 50%를 차지한다니 말이다. 특히 유통단계가 다른 지역에 비해 2, 3단계 정도 생략됨에 따라 신선하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편이란다. 그나저나 구룡포의 또 다른 명물인 대게빵은 맛을 보지 못했다. 아라광장의 건너편에 있으니 먼 거리도 아니련만 찾아볼 겨를도 없었다. 싱싱한 회가 그저 최고라는 친구의 눈에 다른 먹거리들이 들어올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대게는 아예 언감생심(焉敢生心)이 되어 버렸다.



날머리는 아라광장(구룡포읍 구룡포리 954-34)

부둣가를 따라 반대편으로 가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Park Guell)을 벤치마킹한 듯 그림 타일로 장식된 테라스풍의 의자가 눈길을 끈다. ‘아라광장인데 과메기 특화사업을 추진하면서 만든 두 개의 광장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아라는 바다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다른 하나는 구룡포(九龍浦)의 이름 중 용()을 뜻하는 미르광장이란다. 그건 그렇고 아라광장은 아라장터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문화행사나 축제 외에도 과메기 특판등의 행사를 가끔 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 날에도 과메기 상설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날머리에 도착해서 핸드폰의 앱을 살펴보니 오늘 걸은 거리가 14.17로 표기되어 있다. 시간은 3시간 30분이 걸렸단다. 알맞은 거리를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양포항에서 대진해변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길에 금곡교에서 버스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 오리가 물가에 납작 엎드려 있는 듯한 형상의 바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일출암이라는 명품바위로 장기천을 따라 내려온 민물이 동해의 바닷물과 만나는 곳에 터를 잡고 있다. 두 물이 만나는 자리에서 생수가 솟아난다고 해서 옛날에는 이곳이 날물치라 불리기도 했단다.


일출암은 우뚝 솟은 바위 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이 일품인데 육당 최남선은 이곳을 조선 십경(朝鮮 十景)’ 가운데 한 곳으로 꼽기도 했단다. 바위와 소나무 틈새로 그림같이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백두산 천지와 금강산 단풍 등에 비견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일출암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졌다지만 내 눈에 비친 바위는 분명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문득 조선 개국 초기 승려인 무학대사의 명품 문장인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 떠오른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인데 아무래도 내 수준으로는 최남선이 느꼈던 감흥을 따라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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