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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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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식재와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 잔치에 초대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지니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용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지적합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이사58,3). 한다면 그것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지 단식이 아닙니다.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58,6-7).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욕망을 끊을 수 있는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습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됩니다. 사실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있을 때 잘해!” ,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 종일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구엔반 투안).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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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월 12일(240212) 강론글 하단에
내일부터 17일 토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돌아와서 기쁘게 다시 만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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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비자들에게 종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후에 신앙을 버리시는 분을 종종 보게 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선택했는데, 지금의 불행을 해결할 수 없다면서 기껏 얻은 신앙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큰 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말씀하십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데 하느님 믿으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 중에서 너무 미운 사람이 있다면서, 어떻게 성당 다니면서 저럴 수 있냐고 그런 사람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듭니다.
사실 종교로 인해 세상 안에 혼란이 많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을 비롯한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중세에는 선교를 명목으로 한 식민지 지배도 있었습니다. 최근 탈레반이 저지르는 만행까지 종교인의 잘못은 셀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교 자체가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반대로 신앙생활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로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면서 행복해하시는 분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문제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를 따르는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 안에서 올바른 가치와 의미를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야 종교 잘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행복의 기준 자체를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싸워 이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의미와 가치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단식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음을 두고서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에 두 번 단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는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단식의 의미와 가치는 보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을 자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식의 의미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을 동참하는 이유로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식으로 절약한 것을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봉헌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주님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가치와 의미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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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평생 마음을 맞대면서 산다(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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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과 ‘신랑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사실, ‘단식’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단식을 앞세우던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께 따졌고,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신이 ‘신랑’(묵시 19,6-9)임을 계시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고(이사 54,5-6;62,4-5;호세 2,16-20),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요한 3,29)이라 불렀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당신을 ‘신랑’(마태 22,2)으로 비유하셨으며,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에페 5,23-32).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단식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는 ‘단식해야 할 이유’와 함께 당신의 수난 예고와 당신이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인 메시아임을 계시합니다. 곧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단식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새로운 의미의 단식으로, 결국 단식은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곧 사랑으로 행하는 단식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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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좌 신부 때입니다. 1994년이니까 어느덧 30년 전입니다. 지구 초등부 교사 모임을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오는데 현관문이 안에서 잠겨있었습니다. 벨을 누르니 본당 신부님이 문을 열어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몇 시냐?” 이 말의 텍스트는 시간을 묻는 것이지만 이 말의 콘텍스트는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가?’는 질책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의도를 잘 모르고 ‘지금 10시 30분입니다.’라고 대답하면 텍스트는 맞지만 콘텍스트는 파악하지 못한 50점 자리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나중에는 좀 더 일찍 다니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내가 ‘나 머리가 아파!’라고 말하면 남편이 ‘약 먹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텍스트는 맞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일 수 있습니다. 아이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친정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새로 구입한 청소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정말 두통이 있어서 머리가 아플 수 있습니다. 아내가 말하는 맥락의 콘텍스트를 잘 파악하는 남편은 아내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관계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듯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집단 간에도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콘텍스트를 잘 선점하고, 프레임을 잡는 곳이 대중의 관심을 더 받게 되고, 선거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으면 야당에서는 정권심판, 중간평가라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당에서는 야당의 발목 잡기가 지나쳐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면서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중간평가를 다루는 선거에서 국민들은 정권에 대한 견제를 선택하기도 하고,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수준 높은 정치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콘텍스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한 국민들은 텍스트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식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정치 테러,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텍스트를 두고도 야당과 여당의 콘텍스트는 첨예하게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규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고 우려를 발표합니다. 야당은 신상공개, 테러를 벌인 동기, 공범여부, 정당 활동에 대한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당은 경미한 사고, 우발적인 사고, 정치적인 동기는 없는 사소한 사건이라는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국민들은 이 사건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단식’에 대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단식하면 당연히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단식에도 몇 가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곤 합니다. 야당의 대표가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양심수 석방을 위해서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때에는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서 아버지가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께서는 세월호의 유족들을 만나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경건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단식의 진정한 콘텍스트는 단식의 행위와 날수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배고픈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으면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예수님께서도 단식 그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단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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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단식에 대해 항의합니다. 자신들은 하는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왜 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단식을 왜 하는 것입니까? 살 빼기 위해서요? 물론 요즘의 사람들은 그런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의 단식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이고,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시간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니는 사람에게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한다는 것을 성경은 구약의 여러 곳을 통해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하느님께서 내 생명의 주인인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리사이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기도를 했고, 법을 만들고, 그렇게 사람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더욱 큰 고통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단식은 하나의 장식품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단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몸의 단식이 있고 영혼의 단식이 있습니다. 몸의 단식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먹지 않는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영혼의 단식은 내 영혼을 말끔히 비우고 하느님으로 가득 채우는 행위입니다.
영혼의 단식에 비해 몸의 단식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의 단식도 해야 하지만 영혼의 단식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 시도 생각의 끊은 놓지 못하는 것이지요. 걱정과 걱정을 이어가는 생각들은 우리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준비해야 하고, 잠시도 고요히 있을 수 없는 현대의 모습은 그렇게 영혼을 단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에 단식하지 않았지만, 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에 단식하고 있었습니다. 단식은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몸의 단식도 영혼의 단식도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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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어디쯤….
겨울철 새들은 살이 빠진다고 합니다.
적정 체중에 10퍼센트 정도가 감량된다고 합니다.
당연히 못 먹어서입니다.
봄이 되고 날이 따뜻해지면
먹을 것을 충분히 먹고
살을 찌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건강과 생명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또 너무 찌우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너무 살찌우면 민첩함을 잃고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들의 몸무게는
늘 항상
생명과 죽음 그 중간 어디쯤이라고 합니다.
우리 영적인 체중도
그 어디쯤이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 둘 다 잃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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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단식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
“깊기만 하면 고립되고, 넓기만 하면 산만해지니,
어른이라면 경험의 폭과 높이를 두루 갖춰야 한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홀로와 더불어가, 관상의 깊이와 활동의 넓이가, 잘 조화되고 균형잡힌’ 올바른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단식 논쟁”이고, 제1독서 이사야서 주제는 “참된 단식”입니다. 유다인의 전통적 수행, 자선, 기도, 단식 셋중 하나에 속하는 단식이고 모든 고등종교 전통에 자리잡고 있는 단식수행입니다.
단식하니 식당이 떠오릅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음식점은 얼마나 많은지요. 흔히 “먹자고 하는 일인데...먹는 재미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 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수도공동체만봐도 먹는 일은 현실입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면 곧장 식당에서의 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동공동체의 중심은 성당과 식당이라고 합니다. 식당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야 공동체가 평화롭습니다. 좋은 주방장 수도자는 수도공동체의 큰 복이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성사聖事가 거행되고 식당에서는 식사食事가 이뤄지고 농장에서는 농사農事가 이뤄지니 말그대로 삼사三事, 성사聖事, 식사食事, 농사農事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식사와 관련된 단식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제4장은 온통 수행덕목들에 대해 74절까지 나열되어 있고, 10-13절까지는 육체의 금욕에 관한 내용들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버려라.
육체를 다스리라.
쾌락을 찾지 말라.
금식을 좋아하라.”
육체에 끌려가지 말고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금식이 바로 단식입니다. “금식을 좋아하라”라는 말씀은 영어로 하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Love fasting”(단식을 사랑하라),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말마디입니다. 모든 수행생활의 답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로 하는 수행이기보다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수도생활을, 삶을, 공부를, 기도를, 노동을, 침묵을, 겸손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바로 이것이 수행의 최고 경지입니다.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행할 때 마음의 순수요 심신의 자유로움에 건강입니다. 수도승들의 영적 아버지라 칭하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수행생활에 관한 가르침중 여덟가지 악한 생가들중 첫 자리에 나오는 것이 바로 탐식입니다. 그 발생학적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탐식에 이어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나태), 허영, 교만입니다. 가장 뿌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음식의 무절제인 탐식이요 식욕을 채운 이에게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음욕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도닦기 힘들다”는 말도 바로 탐식을 경계한 것입니다. 음식에 대한 식욕食慾, 이성에 대한 성욕性慾, 물건에 대한 물욕物慾, 인간의 기본적 세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은 선도 악도 아닌 현실이며 문제는 탐식貪食, 탐애貪愛, 탐욕貪慾에 있습니다.
이래서 모든 악덕의 뿌리인 탐식의 절제의 영적훈련이 단식이요, 수도승전통에서는 “단식을 사랑하라” 합니다. 단식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광야에서 악마에서 유혹받았을 때 주님은 40일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단식에 대한 능력도 탁월하셨지만 결코 단식을 수행의 중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권장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금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식 자체가 수행생활의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식에서 참으로 자유로웠기에 “먹보요 술꾼”이란 별명도 지니셨습니다.
무엇보다 분별의 지혜를 요하는 단식이 예수님의 관심사였습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적절할 때의 단식입니다. 자칫하면 에고를 부풀릴 수 있는 자기중심적 단식이 될 수 있을 것이요 경쟁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점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당신과 함께 있는 축제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적절한 때 단식이 있을 거란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야할 축제인생을 어리석게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단식의 관행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매주 2차례 월요일, 목요일에 단식을 했고, 세례자 요한 제자들은 자주, 그리고 예수님 제자들은 평소 자발적으로 단식하지 않았으며, 100년경에 쓰여진 디다케에 의하며 예수님 사후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 단식했다 합니다. 오늘날은 밥을 안먹는 금식禁食보다 고기를 안먹는 금육禁肉이 더 적절하다 싶습니다. 너무 많이 고기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예전 장상의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남판단하며 죄짓는 교만보다 더 낫다는 영적 핵심을 담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가는 온갖 불순한 것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 이미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나팔을 불지 않는’ 이웃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단식, 겸손한 단식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겸손한 단식, 겸손한 수행 자체가 보상이요 이에다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다합니다. 참 좋은 참된 단식은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이사야 예언자가 통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의 정체를 환히 밝힙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 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대로 하느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역시 100% 공감하셨을 내용입니다.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오늘날 우리의 무지를 환히 밝히는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혼자서 자기도취의 이기적 단식이 아니라 불쌍한 이웃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행위들이 참된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단식에 이어 이런 자발적 사랑의 실천인 참된 단식이야말로 단식의 최고봉입니다. 이런 겸손한 단식, 사랑의 단식, 참된 단식에 대한 주님의 축복 말씀이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주님의 빛같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도,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이런 참된 단식,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인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단식 자체가, 침묵 자체가 답이 아니라 사랑의 잣대가 답입니다. 배곺은 자들은 단식이 아니라 먹어야 하고, 말할 기회가 없는 홀로 있는 이들에게는 침묵이 아닌 말을 하게 해야합니다. 정작 단식해야할 이들은 많이 먹어 비만해 있는 이들이요, 침묵해야할 이들은 말 많이 하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못먹어서 병이 아니라 무절제하게 잘 많이 먹어서 병도 많습니다. 먹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압니다. 살기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위해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워해야할 것은 탐식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께 맛들여 참된 단식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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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9,14)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제지들이 단식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먹보라서가 아니라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에 관해 말씀하시며 나중을 위한 토대를 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실습하게 하심으로써 이미 그들을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직접 고난에 관한 말씀을 하셨더라면, 부담스럽고 기운 빠졌을 것입니다. 사실 단식에 관한 질문이 있은 뒤에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난에 관해 말씀하시면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이어서 제자들은 많이 침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요한이 고난을 당한 일로 자신들을 높게 생각했던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풀어 오른 자만심을 당신의 말씀으로 내리누르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말씀은 아직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꺼내신 주제, 곧 인간으로 여겨지는 당신께서 돌아가시리라는 주제는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활이라는 주제는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대야 속에 거울을 집어 넣고, 그 대야를 태양 아래 둔다고 합시다. 태양은 자신의 표면과 핵으로부터 빛을 흩뿌리지만, 줄어들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것은 태양 속에 있는 태양과 같습니다. 하지만 거울은 거울일 뿐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본성과 존재와 신성과 함께 영혼 안에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영혼이 아닙니다. 영혼에 비친 것은 하느님 안에 있는 하느님이지만, 영혼은 영혼일 뿐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십니다. 내가 신성의 핵, 토양, 물줄기, 원천 속에 있을 때는 아무도 내게,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내게 그런 물음을 던질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서 밖으로 흘러 나왔을 때,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하고 소리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엑카르트 형제여, 그대는 언제 집 밖으로 나왔는가?”라고 물었다고 합시다. 그가 그런 물음을 던진 이유는, 내가 집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 관해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신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신성 안에는 온통 일치만 있어서, 그것에 대하여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활동하시지만, 신성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신성 안에는 행위라는게 없습니다. 신성은 행위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신성의 차이는 행위와 무위의 차이입니다. 내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면, 나의 돌파 -뚫고 나감-는 나의 흘러 나옴보다 더 고귀해질 것입니다. 나만이 모든 피물들을 그들의 존재로부터 나의 이해 안으로 들여올 수 있고, 내 안에서 그들을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신성의 핵, 토양, 물줄기, 원천으로 복귀할 때는 아무도 내게, 내가 어디에서 오고 있는 중인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내가 없어진 것을 눈치 챌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하느님”조차 없어지고 맙니다.(121)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새로 세례받은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기쁨
저는 오늘 우리의 모임이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있고 하느님의 교회가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 큰 기쁨을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다정하고 사랑에 가득 찬 어머니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듯이, 영적 어머니인 교회는 자신의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큰 기쁨을 느낍니다. 교회는 마치 비옥한 경작지와도 같이 이렇게 많은 영적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풍부한 은총의 열매를 보십시오. 이 영적 어머니가 하루저녁만에 낳은 자녀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자녀들을 낳으면서도 몇 달 동안 뱃속에 잉태해 있거나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도 교회의 이 기쁨에 함께 동참합시다. 단 한 명의 죄인이 회개를 해도 하늘에 큰 기쁨이 있는데, 이렇게 많은 수가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이 기뻐하고 찬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큰 사랑과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이루신 크신 일은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어떤 지능과 지혜 그리고 어떤 생각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이신 친밀감을 모두 파악할 수 있으며, 인간에게 베푸신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신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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