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경(圓覺經)’은 선서(禪書)입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원각’ 또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장엄해서 이야기한 것이 ‘화엄경’입니다.
함허 스님은 그래서 원각경을 화엄경의 축소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각경을 읽고 나서 화엄경을 보면 그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원각경의 원각은 붓다 마음 열두보살 통해 수행 설명
수행은 깨어있음으로 귀결 미세한 무명까지 제거해야 붓다 마음인 원각에 들어
원각경은 모든 수행법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사마타 정관(靜觀), 위빠사나 환관(幻觀), 선나 적관(寂觀)입니다.
사마타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서 다른 생각을 일체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통찰입니다. 통찰은 어떤 사물을 봤을 때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선나입니다.
이 세 가지 방법을 적절하게 섞어서 방법을 늘리면 스물다섯 가지로 나누어지고, 그 스물다섯가지 수행법을 다시 섞어 나누면 더 많은 수행법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수행법은 사마타, 위빠사나, 선나로 모아집니다. 선나도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기에 그것도 줄이면 사마타와 위빠사나, 이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원각경에서 모든 수행을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분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원각경의 원제목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입니다. 화엄경도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弗華嚴經)’이라고 합니다. 사실 대방광은 원각의 의미입니다. 원각은 부처님 마음입니다.
함허 스님은 ‘대방광원각’이라는 다섯 글자를 수십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있는 자리는 부처님의 세상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공부를 통해 부처님 마음으로 돌리고 그 마음을 키워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수다라는 경(經)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은 ‘대방광원각수다라’로 끝납니다. 그런데 뒤에 ‘요의경’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요의’는 부처님의 이치를 꿰뚫어 안다는 뜻입니다.
원각경은 이런 부처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12보살을 등장시킵니다. 처음 등장하는 보살이 문수(文殊)보살입니다. 지혜를 상징합니다. 다음은 보현(普賢)보살입니다. 실천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 나오는 보살이 보안(普眼)보살입니다. 온 세상을 빠짐없이 두루 볼 수 있는 보살입니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에 지혜로 부처님의 마음을 봅니다. 마음을 그대로 보니까 원각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원각을 바로 본다는 점에서 문수보살은 공부가 끝난 상태입니다. 깨달으신 분입니다.
부처님의 행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보현행입니다. 그래서 보현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부처님의 세상으로 봅니다. 세상의 모든 경계가 사실은 무상하다는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붙잡을 수 없다는 이치를 분명히 알게 되면 그 경계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각경의 모든 가르침은 문수·보현·보안에서 끝이 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다음 그 성불한 마음자리에 들어가서 이 세상을 보니까 모든 중생이 전부 부처님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부처님 세상이 아니라 중생의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사실 원각경은 이 세 장에서 모든 이야기가 끝납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이 말을 듣고도 자꾸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 의심을 풀어줘야 합니다. 의심을 풀기보다 그 자리에서 의심을 확 꺾어주어야 합니다. 의심을 꺾어주기 위해서는 힘이 센 보살님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바로 금강장보살입니다.
금강은 다이아몬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보석입니다. 금강장 보살이 등장해서 중생들이 일으키는 의심을 타파해 줍니다. 의심이 풀어져도 중생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욕심이 많아서입니다.
중생들의 욕심 바닥에는 좋아하는 것을 취하려고 하는 애욕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중생사랑은 연인끼리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욕심의 차이입니다. 부처님의 중생사랑에는 어떤 욕심도 깃들 곳이 없지만 연인끼리의 사랑에는 욕심이 자리합니다. 욕심이 사라진 사랑이 바로 자비입니다.
이렇게 중생의 의심을 끊어주고 자비를 갖게 해도 중생들이 부처님이 되지는 못합니다.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지혜로 바꾸어줘야 합니다. 어리석음을 지혜로 바꾸는 힘을 가진 보살이 청정혜보살입니다.
의심을 끊어주고 자비심을 키워 주고 지혜를 길러줘도 누가 와서 옆구리 한번 찌르면 바로 화가 솟구치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렇게 화가 솟구치는 사람들은 지혜롭지 않은 사람, 애욕이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있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지켜보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지켜보는 힘이 수행입니다. 깨어있기 위해서 사마타를 해야 하고 위빠사나를 해야 하고 선나를 해야 합니다.
정적인 측면, 즉 시비분멸을 일으키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해서 들어가는 것을 사마타라고 하고, 사물들을 직시해서 사물들의 실상을 알아내는 것을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이름만 다르지 결국은 한 수행입니다. 고요한 측면을 강조하느냐, 알아차리는 것을 강조하느냐에 구분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 두 수행이 한 몸임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선나입니다.
마음이 침체 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음을 일깨우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또 사물을 보면 생각이 번잡하게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서 사마타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했는데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위덕자재보살은 부처님 마음으로 어리석음을 꺾어버려야 하고, 어리석음을 제거하면 위엄과 덕을 갖추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덕자재보살장에서 수행의 핵심은 ‘깨어있음’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부연 설명하는 장이 변음보살장입니다. 변음은 소리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소리를 분별해서 세 가지 수행법을 스물다섯 가지 수행법으로 나눕니다. 사람들은 처음 인연된 수행법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꾸 바꿉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봅니다. 이절 갔다가 저절 갔다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망상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스스로에게 맞는 수행법을 알려주는 것이 변음보살장입니다.
원각경은 이렇게 중생의 번뇌를 의심·애욕·어리석음·화·망상 다섯 가지로 봅니다. 이런 다섯 가지 번뇌를 제거하면 공부가 완성이 되고 정말 보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보살이 되어도 아직 미세한 망념이나 무명은 남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처님과 똑같은데 남아있는 미세한 망념을 업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업장을 떨쳐주는 것이 정제업장보살입니다. 12연기법을 보면 중생계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무명에서 왔습니다. 무명에서 행이 생기고 중생의 마음이 생기고 이 마음이 중생계와 결탁을 해서 우리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습이 만들어지게 되면 이 모습이 생로병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이 타파되어야 성불할 수 있습니다. 무명은 미세하기 때문에 보살도 알 수 없습니다. 무명이 없어졌다면 중생계가 없어진 것입니다. 중생계가 사라졌다는 말은 공부가 완성됐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완성이 되면 회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보각보살장입니다.
사홍서원에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사홍서원을 처음 접했을 때 모든 불법을 어떻게 다 배우나. 모든 중생을 어떻게 다 제도하나.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굉장히 답답했습니다. 마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보니까 우리가 일으키는 한 생각이 바로 모든 중생임을 알게 됐습니다. 시비분별하는 마음 하나하나가 바로 중생입니다. 그래서 무명을 없앴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시비분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보각이 완성되면 일체세상이 원각이 됩니다. 그걸 설명하고 있는 장이 원각보살장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세상에 알리는 자리에 오면 어질고 선하고 지혜로운 보살이 됩니다. 그래서 현선수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어질고 선하고 으뜸가는 보살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보살이라는 것이 마지막 장의 내용입니다.
근본을 알고 보면 모든 경전이 하나로 꿰어집니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을 제대로 알면 반야심경을 통해서 팔만사천법문을 알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할 때 경이든 어록이든 제대로 한 권을 배우십시오. 토막토막 공부를 하면 다른 경전들이 연결이 안 되고 오히려 불교 공부에 혼란만 옵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공부의 핵심은 무명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 마음자리인 원각에 들 수 있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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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은 3월6일 부산 영광도서 문화사랑방에서 진행된 ‘원순 스님 원각경 공개강좌’에서 설해진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원순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송광사·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한 스님은 조계종 교재편찬위원 역임했다. 현재 송광사 인월암에서 주석 중이다. 스님은 4월20일부터 8월20일까지 매주 월요일 오후6시30분 부산불교실업인회관 4층 묘광선원에서 ‘원각경’을 주제로 강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
첫댓글 강의나 법문을 들어 보면 많이 인용하시는 경전이 원각경 보안보살장입니다. 원각경의 개요를 쉽게 잘 설명해 놓으신 듯 합니다.
유행의 물결인 사마타, 위빠사나, 선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잘 정리해 놓으신 듯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오늘은 원각경에 대해 말씀 좀 드려야겠네요. 원각경은 능엄경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전으로 많은 학자들이 생각합니다. 또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고요. 중국불교는 원각경이 주된 경전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화엄경이지요.
다른 것에 앞서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원각경이 묘한 원각의 마음, 원각의 세계를 잘 설명했지만, 화엄의 축소판이라 하긴 그래요. 원각경은 행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의 세계, 그리고 그 마음의 세계가 어떻게 환을 따라 펼쳐지는가, 하는 쪽에 촛점을 맞추고 있어요. 따라서 원각경에 빠지면 그냥 몽롱한 환의 세계만 좇게 됩니다. 현실감이 없어져요. 그냥 고요한 세계에서 원각만 바라보고 인생이 끝나게 될 우려가 있지요. 단, 원각경은 마음의 참된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원각경을 보면 소위 <마음의 세계>, 또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조금 짐작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화엄은 원각의 세계뿐 아니라 활발한 중생의 세계가 활기차게 펼쳐져 있어요. 원각만 아니라 현실 세계가 나온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세계가 비록 원각에서 보면 환이긴 하지만 그대로가 또한 또다른 원각의 모습입니다. 이게 화엄이에요. 그러니 원각경이 화엄경을 따라 갈 수가 없지요.
그러니 깨달음을 추구하고 그냥 자기 공부에 몰입하시는 분들은 화엄경보다는 원각경을 더 선호하실 겁니다. 그냥 조용한 곳에서 원각만 바라보면 되거든요. 그러나 원각만 알아서는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환의 세계, 그 중생의 뼈아픔을 이해할 수 없어요. 원각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야 그게 참된 깨달음입니다. 그제서야 원각이라는 환에서도 깨어나게 되는 거에요. 원각도 환임을, 중생의 고통 속에서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깨달음은 중생에게 속한 겁니다. 중생이 없으면 절대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해요. 이건 100% fact입니다!
깨달음 너머, 환의 중생 세계, 고통의 중생을 보신 분들은 절대로 얼굴에 웃음이 넘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본래 자리를 떠나지 않지만, 중생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므로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가요. 그것이 참으로 깨치신 분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만면에 해탈의 미소를 띠고 법문하시는 스승님들은 아직도 모자라는 분이라 보시면 됩니다. 소위 착각도인이요, 가짜도인이시지요. 반면 참으로 깨치신 분들은 해탈의 미소가 늘 맴돌긴 하시지만 그에 못지않게 슬픔이 가득하십니다. 이런 분이 참으로 깨친 분이십니다.
연무심님 덕분에 보현선생님 법문이 더해진 원각경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원각경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원각의 환이라는 말씀이 짐작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만 치중하다보면,
현실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 비록 그것이 알고나면 공이지만, 공가운데서 분명히 벌어지는 그 일들과, 또 그에 대응해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에 당황하고 그 처리에 미숙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공부한 마음자리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문제에 부딪혀 다시 혼돈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대행 큰스님께서는 온갖 신통을 부려도 도가 아니며, 앉아서 구만리를 꿰고 있어도 도가 아니며, 목마르면 스스로 물을 먹을수 있고 또 남에게도 물을 떠줄수 있는 것이 도라고 누누히 말씀하셨는가 합니다.
원만한 공부의 중요성을 다시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무진행 !^^
무진행님이 인용하신 대행스님 말씀은 참으로 금언으로 느껴집니다...다만 대행스님이 큰스님으로 추앙받게 되기까지에는 그분의 신통력이 많이 작용을 했으니 이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불교초입에 원각경을 접했을때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전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제목의 <원>이라는 표현은 중국적인 표현이지 불교에서는 잘 안쓰는 표현으로 알고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내용도 보현님이 지적하신대로 몽환-환상적인 내용이 많아 저는 별로... 근데 근년 남회근선생의 해설로 읽어보니 또 다른 감명을 받기는 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연무심님 덕분에 원각경 공부 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