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신라 정통론에 대한 논쟁 중에서 성씨 문제가 나와, 이에 대해서만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성씨라는 것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 것인가부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씨는 전근대에는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한참 떨어진 유럽에서도 지배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성씨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지배층임을 보여주는 지표였습니다. 예컨대 신라 같은 경우에도 전체 인구의 10%를 절대 넘지 않았을 왕실 귀족(조선시대 양반들도 10%를 넘은 적이 없음)들만이 김씨니 박씨니 하는 성씨를 가질 수 있었을 뿐, 나머지 대다수의 백성들은 성씨를 아예 갖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당연히 고구려나 백제도 마찬가집니다). 경주김씨만을 놓고 신라 정통론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이들은 신라인이 아니었는지, 혹은 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를 설명하시는 경우를 저는 못 보았습니다.
이 첫번째 문제를 충분히 염두에 두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봅시다.
그나마 삼국시대에 지배층들 사이에서 존재했던 성씨들도, 역사의 변천에 따라 큰 변동을 겪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그 나라 사람들의 상당수가 신라로 편입된 것입니다. 우선 고구려의 경우 신라가 차지한 영토가 황해도, 강원도 일대 정도였고 다수가 만주에 남아있거나, 혹은 중국으로 강제 끌려간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경우 일부가 일본열도로 건너가거나 당에 건너간 점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신라에 그대로 편입되었다는 것은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여씨나 백제 귀족들의 성씨가 이후에 보이지 않는가. 당연합니다.
위에 첫번째 문제에 적었듯이, 성씨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혈통이 백성들과 차별화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대신라(저는 통일신라 표현 대신 이걸 씁니다)의 상황에서 부여씨나 고씨를 자처할 수 있을리는 만무했을 것이고(이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귀족성씨들의 경우에도 그 후손임을 천명해서 얻는 현실적인 이익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신라 자체가 철저한 골품제 사회이고, 금관가야 왕실 후손들도 신(新)김씨라 부르며 차별하다가 결국 이들도 몇 세대 지나서 기득권에서 제외되었는데, 무슨 고구려나 백제의 귀족들이라고 대접을 해주겠습니까. 결국 이들은 대신라에서 대부분이 평민화되고 만 것입니다.
반면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실이나 귀족들의 경우는 국가적으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성씨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두고 백제의 계승권이 일본에게 있고 우리에겐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동아시아에서 족보의 원류라 하는 중국에서도 체계적인 형태를 갖춘 '족보'는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 때에 비로소 등장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혈통 중심으로 기득권을 잇지 못하고, 과거시험을 통해서 관직에 나가는 사대부 계층이 정권을 잡은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 권력을 잡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조상이 이런 유명한 위인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족보라는 말입니다. 관직 진출의 형태가 이렇지도 못했던 대신라 시대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이렇게 고구려, 백제 성씨가 사라지고 나서 대신라 시대 200여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이에 반해 신라 지배층은 고려에 그대로 편입되었고, 정치적으로 최소한 경주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자리잡습니다. 그 이후 경주김씨나, 신라 왕실에서 파생되었다는 안동김씨 광산김씨 등등 명문거족들은 조선시대까지도 양반 중의 양반가로 행세하는데, 당연히 그 후손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더군다나 신라 김씨의 후손들이 많다는 것조차도, 족보를 100% 믿었을 때의 얘깁니다. 조선 후기에 족보를 사고판다고 했을 경우에 과연 이들 명문거족들이 1차적인 대상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거죠. 이 이상은 관련 당사자 분들도 계실지 모르고, 저도 해당 족보들을 직접 본 것은 아니므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즉 성씨와 족보를 통해서 신라 정통론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요즘 족보에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뒤져보고 있는데, 미주가효님도 지적하셨다시피 우리나라에서 본관 성씨가 나타난 것은 고려시대입니다. 그 본관 성씨들 중에는 고려시대에 처음 출현한 성씨들도 많습니다.
예컨대 저는 청안이씨(淸安李氏)로, 시조가 고려 말에 제주도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다가 돌아가신 양 자 길 자, 이양길이란 분입니다. 사후 청안군(淸安君-청안은 현재 충북 괴산군 청안면이라는 이름으로 있음)에 봉해져서 본관이 청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5대(代)째 되는 형제들이 경상도에 정착함으로써, 그 후손들이 모두 경상도 출신입니다. 즉 지금은 경상도 사람들이지만, 5대 이전에는 경상도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양길이란 분은 누구의 후손일까요? 고려 말 이상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아마 그 이전에는 평민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몰락한 귀족 가문이거나 지파일 수도 있겠지요. 심지어 이씨라는 성씨를 언제 갖게 되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조선 초에 경상도로 이주하였으니 그 이전에는 충북 지역에 살았고, 또 그 이전에는 다른데서 이주해왔을지도 모르죠. 이런 마당에, 그 조상의 혈통 중에 고구려인이나 백제인(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혈통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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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님의 댓글을 볼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제 글에 대한 지엽적인 지적들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토론시에 상황에 따라 그것이 적절한 말인지 분별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 백제인 후손을 자처하는 성씨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론의 맥락은 지금 신라계 성씨가 많은 반면, 왜 고구려 백제계 성씨는 별로 없느냐는 것에 대한 설명인데, 그런 식의 지적은 제가 모르던 정보였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라면 굳이 필요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설인귀의 사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성씨가 지배층의 전유물이라는 것이 틀린 말이라는 사례로 들기에는 너무나 작은 사례입니다. 저도 당장 예컨대 조선시대 천민 출신이었던 구봉 송익필 집안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 조상이 몰락한 명문가 사람이었거나 지파 내지 방계였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평민 출신이더라도 사성받음으로써 귀족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경주 설씨에 대해서는 미주가효님께서 지적하셨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아니 뭐 지금 본인 마음대로 타인의 이야기를 취사선택해서 이해하고 계신 겁니까? 그런 것이라면 더 이상 님의 댓글에 상대할 필요가 없겠군요.
댓글은 가급적 3개 이내로 할 것을 운영진은 권고하고 있습니다. 5개나 하실 것이라면 별도 답글로 다시는 것이 어떨까요? //
1) 성과 씨의 구별 문제 : 중국에서 성과 씨를 구별했는지가 이 글에 대한 반론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우리나라의 성씨 상황' 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드시려면 우리나라에서 고대에 성과 씨를 구분하였던 사례가 있는지, 그리고 고대에 귀족층 이외에도 일반적으로 성씨를 가졌던 사례들이 있는지를 언급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위구르계의 경주 설씨와 신라 6부가 왜 관계가 있어야 하는지?
경주 설씨는 한자에 따라 두어 유형이 있는데, 위구르계를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慶州 偰氏/卨氏 계통을 지칭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성씨는 고려 말에 귀화한 위구르계 인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서 귀화 후에 경주를 본관으로 삼은 것 뿐입니다. 고려 말에 귀화한 집안이니 신라6부와 관계가 있을 리가 없지요. ??? 언제 귀화했는지도 대략 명확한 이 성씨가 왜 과거 우리가 대륙에 있었다는 근거가 되는지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없네요.
일부 덧글들만 안 나왔으면 좀 덜 혼란스러웠을 텐데[<-- 이정도만 하겠습니다]. 비전문가로서 수년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요. (이른바 눈팅만). 이건 그전에도 나왔던 얘기 아닌가요? 신라,가야토론방 1457번,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104번,98번에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 <1910년 조사에서 양반 가구수가 1.9%>밖에 안된다는 것이 인상깊었습니다만. 앞으로도 좋은 내용 부탁드리면서, 나중에 이 덧글은 삭제하겠습니다.
예..뭐 맞는 말씀입니다만, 사실 지난 토론 때 (저의 경우로 한정하자면) 그 때 글을 미진하게 썼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어서 나름대로 더 정리해서 올려본 글입니다. 특히 족보에 대해서는 지난 토론 때에는 제가 아직 몰랐던 점들이 있어서, 본문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 사실 카페에서 어지간한 주제들은 한 차례 이상 거론된 적들이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쉽지 않기도 합니다. 신라 정통론 문제도 여러 차례 다뤄진 문제고요. 물론 여전히 참신한 주제들도 많이 있겠습니다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다루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겠죠.
대제학님. 미주가효님 말씀대로 댓글 수칙 준수해주시기 바랍니다.
카페에서 댓글 규제를 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 때문입니다.
첫째는 지나치게 긴 댓글은 그 댓글에 대한 반론, 재반론까지 고려할 경우 너무 읽기가 불편해진다는 점 때문입니다. 타 카페에서 댓글이 수십개씩 달려서 종종 한 화면에 전체 댓글이 나오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던데 이 경우에 상당수의 댓글은 말 그대로 '묻혀' 버립니다. 열심히 댓글을 썼음에도 남들이 거의 보지 않는 글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몇몇 분들의 글에 쓰는 긴 답글을 댓글로 쓰게 되면 댓글 수십개까지도 쉽게 쓸 수 있는데 그러면 제 앞에 쓴 댓글을 다 묻히게 됩니다. 아무리 최신글보기 기능이 있다 한들 물량에 묻혀 버리면 답이 안 나옵니다
둘째는 검색의 용이성 때문입니다. 별도 답글로 달 경우, 나중에라도 검색하여 보기가 편리하여 DB화되는 면이 있지만, 댓글은 검색이 잘 안 되어 찾기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