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물건의 질이 아주 좋거나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진귀한 물건 또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물건들은 구매자를 굳이 찾지 않아도 줄을 선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높은 가격을 쳐 주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줄 수 밖에 없어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오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최고의 상품 가치로 밀려들어오는 외국 자본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는 외국 자본을 반대하던 열혈 축구팬들도 슈퍼 스타 선수를 가뿐히 사 주는 새 구단주가 그저 좋을 따름이다. 이제는 더 이상 외국인 구단주라는 차별이 없이 돈을 잔뜩 쥔 주인이 나타나면 완전 ‘대환영’이다.
‘EPL이 절반이 외국인 구단주’
지난 2003년 러시아의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첼시를 인수했다.
해외 자본의 유입을 본격화 시킨 장본인인 셈. 그는 인수 직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며 단숨에 첼시를 강팀으로 탈바꿈 시킨다.
선수 영입뿐 아니라 2003-2004 시즌 포르투갈 FC포르투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컵을 거머쥔 조제 무리뉴 감독을 사령탑에 앉히며 챔피언 사냥에 나섰다. 결국 첼시는 지난 2004-2005시즌을 시작으로 2회 연속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하며 당당히 잉글랜드 빅 4의 하나로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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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데려오겠다던 아브라모비치의 행보는 결국 다른 구단들과의 선수 영입 경쟁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됐다. 멍하니 외국 자본에 넋을 놓고 바라보던 다른 구단들도 서서히 외국 자본에 구단을 넘기기 시작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 애스턴 빌라는 미국인 사업가들 손에 넘어갔고 포츠머스는 2007년 초 러시아의 갑부에게 팔리며 상위권 팀으로 발돋움했다.
풀럼, 맨체스터 시티, 웨스트햄 등도 이미 외국인들로 구단주가 바뀌며 현재 프리미어리그 절반에 가까운 구단이 외국인 손에 있다.
‘더 이상 외국 자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프리미어리그의 인기가 전세계적으로 불자 세계 최고의 갑부들은 명예의 상징으로 프리미어리그에 구단주가 되고 싶은 눈치다. 가격만 맞는다면 앞뒤 잴 것 없이 구매한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팬들의 반응도 이제는 확실히 달라졌다.
첼시와 맨유가 외국인 손에 넘어갈 때만 해도 잉글랜드 축구가 빛을 잃었다며 반대하던 사람들도, 그런 분위기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 여름 전 태국의 탁신 총리가 꽁꽁 묶여버린 비자금으로 인해 맨체스터 시티의 완전 인수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이미 여러 차례 프리미어리그를 두드렸던 중동의 자금이 인수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지난 8월 31일(여름 이적 시장 마감 하루 전) 맨체스터 시티는 아랍에미리트(UAE) 억만장자 술라이만 알 파힘의 ‘아부다비 개발 그룹’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맨체스터 시티 인수 자금으로만 2억 1000만 파운드(약 4200억원)를 거뜬히 쓴 알 파힘 새 구단주는 구단 인수 기념으로 이적 시장 마지막 날 3250만 파운드(약 650억원)의 거액을 들여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호비뉴를 깜짝 영입했다. 슈퍼스타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며 새 구단주를 환영했다.
지난 2007-2008시즌 리버풀의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이 시즌 초반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사임 압박설이 나돌았다. 미국인 구단주 톰 힉스와 조지 질레트는 베니테즈를 자르기 위해 새 감독을 이미 물색했다는 소문까지 나왔다.
불안한 성적과 함께 베니테즈의 앞날도 캄캄하기만 했다. 하지만 흔들리던 베니테즈를 위기에서 건진 것은 다름 아닌 팬들, 팬들은 미국인 구단주들에게 강하게 맞대응 했다. 베니테즈 감독을 절대 경질하지 말 것을 강조하며 경기 때마다 가두 행진을 펼쳤다.
또한 경기장 곳곳에는 플랜카드를 걸어 구단주들에게 그들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게다가 리버풀 팬들은 ‘미국인 구단주는 떠나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리버풀 구매 의사를 줄곧 밝히던 중동의 갑부를 새 구단주로 받아들이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 처음 미국 자본이 구단을 인수할 때만 해도 절대 반대를 외치던 그들이 어느새 또다른 외국 자본의 영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무너지는 웨스트햄, 새 주인은 누구?’
어느 정도 채워진 듯한 외국 자본이지만 여전히 프리미어리그에는 또다른 부자들을 원하는 구단들이 있다.
지난 2006년 12월 아이슬란드의 에거트 마그누손 구단주가 웨스트햄의 새 구단주가 됐다. 빚더미에 올라 있던 웨스트햄은 새 구단주로 인해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마그누손은 이듬해 아이슬란드의 랜즈뱅키 은행을 소유한 은행가 브요르골프 구드문손에게 구단 운영 권리 등을 넘기며 공동 구단주 체제로 구단을 운영했다.
공동 구단주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모든 권리는 구드문손에게 넘어간 상태. 빚을 지고 있던 웨스트햄을 너무 고가에 구입해 버린 마그누손이 사실상 운영권을 구드문손에게 넘기면서 자금을 지원 받은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웨스트햄의 돈줄은 불어나지 않았다.
결국 이번 여름 웨스트햄은 안톤 퍼디낸드와 조지 맥카트니, 보비 자모라, 존 판트실, 놀베르토 솔라노,리차드 라이트 등 주전급 선수들을 내다 팔았다. 값어치 있는 선수들을 모두 다른 팀에 넘기자 알란 커비슬리 감독은 서운한 감정에 구단과 결국 결별을 선언했다.
감독을 잃었다는 심란한 상황 속을 막 헤쳐나자 기다렸다는 듯 구드문손 구단주 소유의 랜즈뱅키 은행이 아이슬란드 정부의 국유화가 되고 말았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당하면서 은행이 지급 불능 상태가 됐다. 구단주의 돈줄이 막힌 셈.
게다가 2년전 카를로스 테베스(현 맨유 소속)로 프리미어리그에 살아남은 웨스트햄은 쉐필드 유나이티드에게 소송이 걸렸고 최근 법원은 웨스트햄에게 3000만 파운드(약 650억원)를 쉐필드 유나이티드에게 배상하라는 판결까지 받았다.
영국 언론들은 웨스트햄이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지만 이미 구단을 팔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 매매 작업에 참가했던 에이전트가 또다른 구매자를 찾고 있다고 내부 소식통을 통해 밝히고 있다. 웨스트햄은 모든 빚을 청산하고 맨체스터 시티처럼 단숨에 구단을 부자 구단으로 만들어 줄 세계 최고의 갑부를 찾고 있다.
‘커져가는 거품, 끝없는 인기’
지난 달 중순,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마이크 애슐리 구단주는 공개적으로 구단 매각 의사를 밝혔다. 사정이 어떻게 됐든 그는 뉴캐슬을 떠날 예정이다. 다만 그가 원하는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2007년 7월 1억 3400만 파운드(약 2700억원)에 구단을 인수했던 그는 현재 판매가로 3억 파운드(약 6000억원)로 책정했다. 두바이, 나이지리아, 중국의 갑부들이 물밑 접촉을 벌였지만 엄청난 금액 차이에 아직까지 협상 폭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의 가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품처럼 치솟고 있는 가운데 외국 자본들이 프리미어리그 승격 가능성이 있는 2부 리그의 팀들에게까지 구매의 손길을 뻗고 있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 최하위를 달렸던 더비는 미국 자본에, 런던의 퀸즈파크 래인저스(QPR)는 F1의 터줏대감 베르니에 엑클레스토네와 르노 F1팀 경영 매니저인 플라비오 브리아토레에 전격 인수됐고 다음 시즌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찰턴에 두바이 투자사가 인수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프리미어리그에 자금이 쏟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인 관심은 TV중계권은 물론 각종 프리미어리그 산물들의 값어치를 무한정 올렸다. 선수들도 프리미어리그로 몰려 들기 시작했고 돈이 부족한 구단들은 자연스레 외국 자본에 서서히 넘어갔을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돈은 구단의 필수 조건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