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태풍 난마돌이 빠져나가고 타이베이는 해가 떴습니다.
모처럼 밖에 나가 거래사도 만나고 영업도 좀 뛰고 그래야 겠네요.
제가 대만에서 사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데 사실 내용들을 보면 대만에 대한 소개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대만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생각이긴 한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만이란 나라에게 대하여 그리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들 중국사람, 대만사람 모두 같은 중국인이 아니냐고 그러시는데 대만 사람들은 자기를 중국사람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무지 싫어합니다. 중국사람들도 남/북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질이 틀린 것 처럼 대만과 중국은 장기간의 교육시스템의 차의 및 체재의 차의로 많은 다른 점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물론 뿌리는 같다보니 공유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특성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서로에 대한 이해라는 것은 그냥 만나서 친해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속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알아가면서 이해를 같이 하는게 제일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대만 내부에도 외성인/내성인으로 나뉘고 있으며 원주민들도 많습니다. 그들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다르고 역사속에서 서로 부딛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만나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이해하려면 어떤 사람인지부터 구별이 가능해야 합니다.
물론 비즈니스할 때에 일반적인 룰에 따라서 상담하시면 되겠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오래동안 인연을 맺어간다는 의미에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꼭 필요하지 않나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만의 역사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작은 나라라 관심도 못받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변두리화 되는 것인데 나의 좋은 파트너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많이 이해해주고 알아봐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튼 어제에 잇어 오늘도 대만에서 사업 이야기를 계속해 가겠습니다.
어제는 대만 228 사건에 대하여 기술하여 봤습니다. 이번에는 228사건의 원흉, 즉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장개석과 모택동의 국공내전에 있습니다. 대만 사람들 입장에서는 원흉이 장개석이었던 것이죠. 군수물자의 조달 때문에 극도의 강압통치가 빚어낸 비극입니다. 물론 장개석이 대만에 도망쳐 온 다음에서 그때 살인범들 포함한 담당관원들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기의 지시에 따른 부하들이기 때문이죠. 그 뿐만 아니라 장개석은 228 사건을 왜곡하고 자기의 통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228사건 피해가족들에 대하여 탄압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일제투항이후, 장개석은 모택동에게 패망하여 대만으로 도망쳐 오기 전 몇년을 행정, 입법, 사업, 군사 등 대권을 장관에게 위임하는 특수 통치를 하였습니다. 일제시대에 식민지배의 연속이었죠. 이런 통치 속에서 대만민중들에게 있어서 자유와 경제생활에 있어서 늘 억압을 받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군벌출신의 관리들이 백성들의 삶의 질에 대하여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으며 어찌하면 더 많은 재물을 착취해 낼까만 생각했죠.
그때 228 사건을 탄압하기 위하여 장개석 정부는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진압이라는 명목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한번도 스스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는 대만사람들에게 있어서 '독립된 나라'로서의 대만을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당시 군사정권이 자리잡은 마당에 '대만독립'에 대한 생각을 갖기도 상당히 힘든 부분입니다. 특히 독립을 위하여 국제적인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대부분 대만이 중국에 귀속된 나라라는데 대하여 특별한 이의가 없었고 중국에서 건너 온 내성인들이 대부분 차지하는 대만에서 대만 독립은 큰 의미도 없었습니다. 즉 '대만독립'분자를 탄압한다는 것은 명분에만 긎친 것입니다. 대만 228 사건은 장개석 정부의 강압통치 및 대륙에서 진행하는 전쟁 때문에 각종 착취, 관리들의 부패에 의한 필연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이 지속되면서 많은 대만 사람들은 외성인에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일제 시대에 식민지배를 받으면서도 안정된 생활과 선진문화를 배우며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대만에 장개석 정부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악몽의 연속이 된 것이죠. 더욱이 228 사건이 있은 이후로부터 장개석 정부는 정부에 대항하는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혹하게 합니다.
228사건 이후 대만민중은 '228사건처리위원회'를 만들어서 정치협상을 시도하였고, 동시에 무장항쟁의 노선을 걷게 됩니다.
1947년 3월 7일, '228사건 처리위원회'는 대만행정장관인 진이에게 '1. 현재 상황에 대한 처리방법, 2. 군사, 정치, 민의기구 등에 관한 요구사항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전국이 통제불능상태에 들어갔고 각지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 황신경의 포리대, 하집회, 채백훈의 중상대, 여환장의 중사대, 황금도의 경비대(독림치안대), 이병곤의 군국공예학교대 등 학교 위주로 조성된 27부대가 가장 유명했고 타이중지역에 세력이 가장 오래 유지되었습니다. 그 외에 규모가 있었던 전투은 아리산 추족 원주민이 이끈 쟈이 수상비행장 및 홍보비군수창고의 전투, 카오슝 주둔군 및 반항세력의 충돌이었습니다. 대만 서부 지역에 충돌이 집중되었으며 대만 동부는 작은 동란만 있었습니다. 당시 반항군 손에 들어간 무기가 4천여정이 넘었었고 지방정부는 통세능력을 잃었습니다. 현병대장 장모도는 진이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태평을 외친다'고 질책하였습니다.
228 사건 이후에 사태가 급격히 각지역 군사출돌로 잇어가면서 중국공산당의 대만성공작위원회 및 원 대만공산당의 일부 당원들이 대만의 국민당정부를 대항하는 군사항쟁에 들어갔으며 다음 날부터 국민당 국민정부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BIS, 군통국)에서는 공산당 지하당원과 간첩 색출 작전에 진입했습니다. 군통국은 국민당 조직 '복흥사' 수하에 있는 '특무처'입니다. 1938년 - 1946년 사이에 건립된 중화민국 정보기관 중의 하나로 최초 수장은 유명은 대리'따이리' 입니다. 상해탄의 유명인사 두월성과도 관계가 좋았죠. 따이리는 첩보계의 천재로 스스로 군통국이라는 핵심 정보기관을 만들어 냈죠. 장개석의 최측근으로 장개석 정적 처리 등에 참여하였으며 타기관의 제약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실력파이기도 하죠.
3월 2일 - 3월 4일사이 타이베이 및 타이난 인사들이 카오슝에 진입하여 국군을 대항하는 충돌을 일으켜 카오슝시정부를 장악합니다. 일부 인사는 카유슝제1중학교에 진입하여 이부 교직원 및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군을 조직하여 학교를 점령하였습니다.
3월 5일, 카우슝요새사령관 팽맹집은 카오슝 시가지에 폭격 및 총격을 가하였고 학생군 도광명은 팽맹집과 단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단판은 결열되었고 도광명은 체포되었으며 팽팽집은 카오슝시정부, 카오슝역, 카오슝제1중학교 등을 공격하여 수복합니다. 과정에 사병과 시민이외에 여러명의 카오슝시의원들이 충돌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체포된 뒤에 처결된 사람도 있습니다.
대만행정장관이었던 진의는 표면상 228사건처리위원회에 임시계엄을 해제하는 등 양보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장개석에게 정부의 탐오사실의 진상을 숨기고 대만민중들에게 일본황민이 공산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직적반란행동'을 하고 있으며 '독립 및 국가배신'을 하고 있고 '간신배들의 폭력을 무장으로 섬멸해야 함'과 '정치적 욕망이 있는 인사가 대대만주의를 받들어 대만사람이 대만을 치리하려는 목적'이라고 보고함과 동시에 남경정부에서 대만에 급히 파병하여 진압할 것을 요청합니다.
3월 8일, 장위천 등 인사는 남경정부주석 장개석에서 실상을 설명하고 파병을 미루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장개석도 처음에는 사태의 악화를 우려하여 무력진압보다는 재건부대를 파견할 것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남경정부는 사건의 진실을 무시하고 유우청이 데리고 있던 국군21사를 대만으로 급파합니다. 3월 10일부터 진의는 전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정돈은 시작하였습니다.
파견되어 온 진압국은 기륭항 및 카오슝항 등 두 곳을 동시에 상륙하여 대만에 대하여 포위망을 형성합니다. 각 지역 반항군은 신속히 패망하게 되며 타이중을 장악한 27부대는 국군과 시가전을 벌리는 것을 막기위해 포리로 퇴각합니다. 오우란전투에서 일부 구성원은 전사하였으며 나머지는 잠적 또는 대만을 떠나게 되고 기타 인원은 자동해산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많은 본성인 의원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되게 됩니다.
3월 17일 국방부장 백충희는 대만상황 시찰을 오게 되며 보고 중에 진의에 대하여 엄중한 질책을 합니다. 백충희의 대만행에 따라 군사행동은 일단락 되었으며 정부의 평화해결 방침에 따라 간접, 공산당원, 일부 불법분자 외에 모두 풀어주게됩니다. 이로서 228사건 관련 정리가 됩니다.
대만에 파견되었던 21사단은 2년뒤 1945년 5월 25일 공산당과의 상해 전투에서 군장 왕극이가 부대를 포기하고 도망가는 바람에 공산군에 섬멸당하고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26일날 줄지어 투항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체유심조(k@bestmedi.net)
다음에는 미려도 사건 관련 적어보겠습니다.
모두들 재미있게 읽으셨는지요?
지난 글 관련 링크
대만에서 사업 이야기 10부 - 대만 의료기기 수입 관련
http://cafe.daum.net/taiwanbiz/lMrX/26
대만에서 사업 이야기 11부 - 대만의 내부 문제 1 - 대만 228 사건
http://cafe.daum.net/taiwanbiz/lMrX/31
대만시장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http://cafe.daum.net/taiwanbiz/lMrX/14
첫댓글 타이츙 ㅎㅎ 익숙한 항구 이름을 보니 반갑네요. 감사합니다.
한 번 만나뵙고 설명을 들어야겠네요~~ 글이 어려워서요^^ 대만을 전혀 모르기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