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종루
성불사 목어
대웅전
대웅전 좌협시:관음보살상, 우협시:지장보상상. 본존불은 마애여래입상
대웅전에 봉안된 산신탱과 독성탱
독립 마애여래입상
마애16나한상
마애나한군 중앙의 석가삼존불
효동 임환경(曉東 林幻鏡1887~1983) 초명: 재수(在修), 호: 환경당(幻鏡堂).
1887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마장동에서 출생.
산령각 4분합꽃살문
귀를 양손으로 막은 동자상
합장 자세
양손으로 눈을 가린 동자상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있는 동자상
산신목탱
승료
종무소에 걸린 편액:평생을 야인화가로 살아온 成佛寺 편액:금추(錦秋) 이남호(李南浩 1908년-2001년)
태조산 성불사(成佛寺) 충남 천안시 안서동178
종무소 성불사 편액: 금추(錦秋) 이남호(李南浩 1908년-2001년)) 화백書.
산령각 山靈閣 편액: 효동 임환경(曉東 林幻鏡1887~1983) 97세로 열반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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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918∼943, 재위) 왕건(王建)때 도선국사, 목종(穆宗)(997∼1009, 재위) 때
혜선국사(惠禪國師), 조선(朝鮮) 태조(太祖)(1392∼1398, 재위) 때 혜조대사(惠照大師) 등 여러 설(說)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 사찰이 창건될 무렵 하늘에서 백학(白鶴) 한 쌍이 날아와 이곳 천연암벽(天然岩壁)에 불상(佛像)을 조성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성불사(成不寺)라고 부르다가 창건한 후에 성불사(成佛寺)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의 안에는 뒤 편 바위에 있는 부처님을 볼수 있도록 유리로 되어 있고,
좌우 협시로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뒤편에는 口꼴 바위면에 겨우 형체만 알아 볼 수 있는 마애입불 ,
우측면에는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이 각각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그 형상이 희미하지만
중심부의 삼존불중 본존불은 연꽃대좌위에 결가부좌상으로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으로 추정된다.
육계(肉계)의 구분이 없는 큰 머리에 눈과 입술이 두툼하게 표현된 둥글넓적한 형태의 얼굴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입상으로 존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문화재 10호 대웅전. 도지정 유형문화재 169호 삼존 여래불과 16아라한군상.
산령각 편액: 효동 임환경 97세로 열반적정.
효동 임환경(曉東 林幻鏡1887~1983) 초명: 재수(在修), 호: 환경당(幻鏡堂).
1887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마장동에서 출생.
16세 전후에 이미 신동(神童)으로 신필(神筆)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해인사를 최초로 총림(叢林)으로 구성하여 海印叢林)현판을 유당 정현복(惟堂 鄭鉉福(당시 국전심사위원장))에게 쓰게 하였다.
1946년 효봉스님이 방장으로 있던 해인사에 주지로 취임한 이후 일제가 파괴한 사명대사비를 새로 건립.
石齋 서병오(석재 徐丙五)선생은 환경스님의 글씨를 보면 백엽(百葉) 연꽃이 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고 극찬 하였다.
합천 해인사 <경학원>, <선불장>, <수월문>, <금선암>, <죽림선원>, 청도 용천사 <범종각>,
거창 송계사 <극락보전>, <육화문>, <덕유산송계사> 영천 만불사. 대구 대덕암 수덕전. 천안 태조산 성불사 산령각 편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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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佛寺 편액:금추(錦秋) 이남호(李南浩 1908년-2001년) 1908.12.16-2001.6.9 경북출생.
산령각 4분합 꽃살문으로서 4동자가 무릎을꿇고 연잎위에 앉았는데,
3동자는 각각 귀.입.눈을 양손으로 막고, 한 동자는 합장을 한 자세로 조각되어있다.
이 꽃살문 동자상은 들어도 못들은 척하고 보고도 못 본것처럼하고 말을 조심하라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매우 귀한 문살이다
“벙어리 3 년, 귀머거리 3 년, 장님 3 년”
옛날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신부의 아버지는 시집에서 처음 9 년간은
“벙어리 3 년, 귀머거리 3 년, 장님 3 년”을 거쳐야 시댁 사람이 된다는 지혜로운 말씀이었다.
시집을 가면 말 많은 동네 아낙네들이 있는 흉, 없는 흉을 다 말하면서 새색시를 어렵게 했다고 합니다.
양반집의 새 신랑은 고부간의 알력이나 새색시와 시누이간의 어색한 관계를 보면서도
자기의 아내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미풍양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미리 알고 있는 신부의 아버지는 시집가는 딸에게 위와 같은 충고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험한 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심한 비난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3 척(못들은 척, 못 본 척) 하면
다 결국은 시들어져 버리고 인간관계는 건전하게 되 살아 난다는 교훈이다.